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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부사공(諱 漢寔)공에 대하여
울산부사공에 대한 자료를 찿아 보았습니다. 자료를 더 찿아 추가로 게재하겠습니다 만 그 내용은
울산부사공( 諱 漢寔)은 영조 37년, 신사년(1761년)에 생하시고 임오년(1822, 61세)에 졸하셨으며 안성시 보개면 신안리 출신으로 울산부사는 가경21년 병자년(1816년) 3월 29일에 도임하시고 정축년(1817년) 2월 27일 상주목사로 승차되었고 거주지는 서울이며 신미보의 기록에 의하면 황주목사를 역임하신 분이고 현 묘소는 안성시 보개면 신안리 산 31번지 신곡마을 선영에 3함폄으로 뫼셔져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묘소의 사진은 경모2집 942쪽에 게재된 자료로 확인 할 수 있고 표소 앞에 묘표가 있는데 신미보의 기록과 같이 김숙인(金淑人) 지명(誌銘)인지는 음기를 볼 수 없어 확인할 수 없습니다.
대종회의 유사체계목록을 열람하면 다음과 같이 제32대 유사를 역임하셨음을 문중발전에도 유공한 선조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계유씨 대종중 유사체제 연혁(杞溪兪氏 大宗中 有司體制 沿革)
(종사전장기(宗事傳掌記: 253년간 역대 종사일을 맡아 주관해 오신 선조들)
세대 |
재임 년도 |
유사(有司) |
재임 기간 |
제 1 대 |
영조 10년(1734년) |
유광기(兪廣基), 유언통(兪彦通) |
1년 |
제 2 대 |
영조 11년(1735년) |
유두기(兪斗基), 유언복(兪彦福) |
2년 |
제 3 대 |
영조 13년(1737년) |
유하기(兪廈基), 유언벽(兪彦璧) |
2년 |
제 4 대 |
영조 15년(1739년) |
유업기(兪業基), 유언택(兪彦鐸) |
1년 |
제 5 대 |
영조 16년(1740년) |
유우기(兪宇基), 유언일(兪彦鎰) |
1년 |
제 6 대 |
영조 18년(1742년) |
유적기(兪迪基), 유언항(兪彦恒) |
1년 |
제 7 대 |
영조 19년(1743년) |
유숙기(兪肅基), 유언태(兪彦泰) |
1년 |
제 8 대 |
영조 20년(1744년) |
유언상(兪彦鋿), 유언급(兪彦伋) |
1년 |
제 9 대 |
영조 21년(1745년) |
유최기(兪最基), 유언유(兪彦儒) |
2년 |
제 10 대 |
영조 29년(1753년) |
유직기(兪直基), 유언민(兪彦民) |
1년 |
제 11 대 |
영조 30년(1754년) |
유언집(兪彦鏶), 유한길(兪漢吉) |
1년 |
제 12 대 |
영조 31년(1755년) |
유언현(兪彦鉉), 유한규(兪漢圭 ) |
1년 |
제 13 대 |
영조 32년(1756년) |
유언수(兪彦鏽), 유한소(兪漢蕭) |
2년 |
제 14 대 |
영조 34년(1758년) |
유언준(兪彦준), 유한태(兪漢泰) |
1년 |
제 15 대 |
영조 35년(1759년) |
유언재(兪彦銻), 유한갈(兪漢葛) |
4년 |
제 16 대 |
영조 39년(1763년) |
유언신(兪彦莘), 유한근(兪漢謹) |
4년 |
제 17 대 |
영조 40년(1764년) |
유언호(兪彦鎬), 유한준(兪漢雋) |
3년 |
제 18 대 |
영조 43년(1767년) |
유언부(兪彦傅), 유한장(兪漢蔣) |
3년 |
제 19 대 |
영조 46년(1770년) |
유언사(兪彦師), 유한경(兪漢敬) |
4년 |
제 20 대 |
영조 50년(1774년) |
유언육(兪彦錥), 유한녕(兪漢寧) |
16년 |
제 21 대 |
정조 14년(1790년) |
유한구(兪漢九), 유정주(兪靖柱) |
1년 |
제 22 대 |
정조 15년(1791년) |
유한재(兪漢宰), 유직주(兪稷柱) |
1년 |
제 23 대 |
정조 16년(1792년) |
유한상(兪漢相), 유준주(兪駿柱) |
1년 |
제 24 대 |
정조 17년(1793년) |
유한순(兪漢純), 유풍주(兪豊柱) |
1년 |
제 25 대 |
정조 18년(1794년) |
유한민(兪漢敏), 유문주(兪文柱) |
2년 |
제 26 대 |
정조 20년(1796년) |
유한석(兪漢石), 유태주(兪台柱) |
1년 |
제 27 대 |
정조 21년(1797년) |
유한부(兪漢扶), 유담주(兪聃柱) |
2년 |
제 28 대 |
정조 23년(1799년) |
유한지(兪漢芝), 유민주(兪民柱) |
1년 |
제 29 대 |
정조 24년(1800년) |
유한명(兪漢明), 유성주(兪星柱) |
2년 |
제 30 대 |
순조 2년(1802년) |
유한광(兪漢光), 유춘주(兪春柱) |
1년 |
제 31 대 |
순조 3년(1803년) |
유한건(兪漢建), 유평주(兪平柱) |
1년 |
제 32 대 |
순조 4년(1804년) |
유한식(兪漢寔), 유용주(兪龍柱) |
1년 |
제 33 대 |
순조 5년(1805년) |
유한교(兪漢敎), 유찬주(兪瓚柱) |
2년 |
제 34 대 |
순조 7년(1807년) |
유한현(兪漢玄), 유필주(兪弼柱) |
3년 |
제 35 대 |
순조 10년(1810년) |
유한준(兪漢俊), 유기주(兪杞柱) |
3년 |
제 36 대 |
순조 13년(1813년) |
유창주(兪昌柱), 유신환(兪莘煥) |
5년 |
제 37 대 |
순조 18년(1818년) |
유봉주(兪鳳柱), 유승환(兪承煥) |
4년 |
제 38 대 |
순조 22년(1822년) |
유희주(兪羲柱), 유리환(兪理煥) |
3년 |
제 39 대 |
순조 25년(1825년) |
유석주(兪碩柱) |
2년 |
제 40 대 |
순조 27년(1827년) |
유병주(兪秉柱), 유경환(兪庚煥) |
9년 |
제 41 대 |
헌종 2년(1836년) |
유청주(兪淸柱), 유인환(兪寅煥) |
3년 |
제 42 대 |
헌종 5년(1839년) |
유장주(兪長柱), 유성환(兪星煥) |
2년 |
제 43 대 |
헌종 7년(1841년) |
유화주(兪華柱), 유정환(兪廷煥) |
2년 |
제 44 대 |
헌종 9년(1843년) |
유용주(兪龍柱), 유장환(兪章煥) |
2년 |
제 45 대 |
헌종 11년(1845년) |
유신환(兪莘煥), 유석환(兪錫煥) |
1년 |
제 46 대 |
헌종 12년(1846년) |
유경환(兪敬煥), 유치선(兪致善) |
29년 |
제 47 대 |
고종 12년(1875년) |
유초환(兪初煥), 유치희(兪致喜) |
21년 |
제 48 대 |
고종 33년(1896년) |
유치희(兪致喜), 유진만(兪鎭萬) |
6년 |
제 49 대 |
고종 39년(1902년) |
유진찬(兪鎭贊) |
5년 |
제 50 대 |
순종 1년(1907년) |
유길준(兪吉濬) |
8년 |
제 51 대 |
일제 (1915년) |
유치형(兪致衡) |
2년 |
제 52 대 |
일제(1917년) |
유진철(兪鎭哲), 유성준(兪星濬) |
15년 |
제 53 대 |
일제(1932년) |
유만겸(兪萬兼), 유하준(兪夏濬), 유만준(兪萬濬) |
16년 |
제 54 대 |
한국 3년(1948년~1987년) |
유치웅(兪致雄), 유진오(兪鎭午) |
39년 |
출처: 부운보 제5호 1987년 7월 10일
선조의 문헌목록에 운파안배고(雲坡按排稿) 8권[유한식(兪漢寔)-유최기(兪最基)의 손(孫)]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미족보에도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하고 신미보 제6편 자산공파 393페이지를 보면 신안리 신안마을에 직손이 거주하고 있음으로 귀중한 문헌이 국역화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신미족보의 기록을 간기하면
신보족보 제6편 자산공파 31페이지를 보면 나주목사공(휘 명건)공의 증손으로
자는 사범, 영조 신사행 무자 진사 관 황주목사, 임오 5월 2일 졸, 배 광산김씨, 부 두칠, 임술 3월 6일 졸, 생 1남, 배 창원 황씨, 부 인약, 을미 6월 10일 졸, 묘재 신곡 선영(현 안성군 보개면 신안리 신곡마을)곤향 3함폄, 공찬 김숙인 지명, 운파안배고 8권 장간가 로 되어 있음으로 울산부사, 상주목사, 황주목사를 최종으로 역임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종 관역으로 추정되는 황주목사 역임에서 황주(黃州)는 어디인가를 찿아보니
“황주(黃州)는 황해도 중앙 북단에 위치하는 황주군 일대의 지명이다. 고구려 때는 동홀(冬忽) 또는 동어홀(冬於忽)이라 불렸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취성군(取城郡)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전 태봉 무렵에 황주(黃州)로 바꾸었고 983년(성종 2) 황주목이 되었고, 993년(성종 12)에는 절도사(節度使)를 두었으며 천덕군(天德郡)이라 부르며 관내도(關內道) 관할로 두었다. 1012년(현종 3) 안무사(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목으로 개편하여 서해도(西海道)에 예속하였고 1217년(고종 4)에 지고령군(知固寧郡)으로 강등되었다. 1269년(원종 10)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에 속하였고, 1290년(충렬왕 6) 서북면으로 관을 옮겼으며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황주목(黃州牧)으로 환원되면서 서해도에 이관되었다. 조선 세조 때에 진(鎭)을 두어 2도호부, 6군, 5현 등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평양부 황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황해도 황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7년 황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라고 하며
진사시 합격이력을 보면
[진사시] 정조(正祖) 16년(1792) 임자(壬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20위(25/100)으로서
인물정보 요약은
자 자범(子範)
생년 신사(辛巳) 1761년(영조 37)
합격연령 32세
본관 기계(杞溪)
거주지 안성(安城) -- 안성에 거주하실 때
이력사항은
선발인원 100명
전력 : 유학(幼學)
과목 : 일시(一詩)
부모구존 : 구경하(具慶下)
<편집자 주> 구경하(具慶下)라는 용어의 뜻은?
관계수촌수寸數 |
내가부를 때칭호稱號 |
내가남에게 말할 때기지친속己之親屬 |
내가나를 말할 때친속자칭親屬自稱 |
칭호의이유연유緣由 |
남의가족을 말할 때인지친속人之親屬 |
1촌 |
아버지 |
부친, 가친, 엄친父親, 家親, 嚴親 |
아버지父 |
나를 낳아 주신 어른 |
존대인尊大人 |
1촌 |
어머니 |
모친, 자친母親, 慈親 |
어머니母 |
나를 낳아 주신 어른 |
자당, 훤당慈堂, 萱堂 |
▪ 부모양친(父母兩親, 부모 모두)이 생존(生存)하면 구경하(具慶下)
• 모친(母親, 어머니)만 별세(別世, 돌아가심)하면 엄시하(嚴侍下)
• 부친(父親, 아버지)만 별세(別世, 돌아가심)하면 자시하(慈侍下)
• 양친(兩親, 부모)이 다 별세(別世)하면 영감하(永感下)라 합니다.
• 나의부친 별세 후(父親別世後) 아버지를 선친(先親), 선인(先人) 또는 선고(先考)라 합니다.
• 나의모친 별세 후(母親別世後)는 선비라 합니다.
• 남의부친 별세 후(父親別世後)는 선부군(先府君), 선대인(先大人)이라합니다.
• 남의모친 별세 후(母親別世後)는 선부인(先夫人), 선자당(先慈堂)이라합니다.
진사시 즉 사마시를 응시할 때 부모님이 생존에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족사항 내용은
[부]
성명 : 유언육(兪彦錥)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대구진관병마절제도위(大丘鎭管兵馬節制都尉)
[안항:제]
성명 : 유한수(兪漢守)
성명 : 유한택(兪漢宅)
자료의 출전은
『숭정3임자식년사마방목(崇禎三壬子式年司馬榜目)』(장서각[B13LB-12])
입니다
황주목사공의 활동하던 시기의 일가분들의 조정에서 활동한 사항을 홍재전서(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의 문집)의 자료에서 엿 볼 수 있으며 당내(8촌이내의 부계혈족)만 보더라도 명문거족이었음을 알 수있습니다.
홍재전서 제6권 시(詩)15. 韓 漢 古詩
187, 부용정(芙蓉亭)에서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놀이에 대하여
지난번의 시운을 거듭하여 짓다 소서를 아울러 쓰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는 것을 해마다 정과(定課)로 삼아 왔는데, 올해의 모임에는 자리에 참예한 사람이 특별히 많았으니, 이는 경사로운 해를 기억하고 상서로운 현상을 훌륭하게 꾸미기 위한 것이다. 내가 영화당(暎花堂)에 임어하여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였으니, 좌규(左揆) 유언호(兪彦鎬), 우규(右揆) 채제공(蔡濟恭) - 모두 원임 제학임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희(金憙),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 모두 원임 직제학임 -, 심환지(沈煥之) - 제학임 -, 서유방(徐有防) - 검교직제학임 -, 서용보(徐龍輔), 정대용(鄭大容) - 모두 원임 직제학임 -, 이만수(李晩秀) - 검교직각임 -, 김면주(金勉柱), 윤행임(尹行恁) - 모두 원임 직각임 -, 남공철(南公轍) - 검교직각임 -, 서유구(徐有榘) -검교대교임 - 는 각신(閣臣)이고, 서유린(徐有鄰) - 서유방의 형으로 홍문관 제학임 -, 심이지(沈頤之) - 심환지의 재종제(再從弟)로 수어사임 -, 이시수(李時秀) - 고 제학 이복원(李福源)의 아들로 호조 판서임 -, 채홍원(蔡弘遠) - 채제공의 아들로 승지임 -, 이유경(李儒慶) - 채제공의 생질로 전 승지임 -, 정상우(鄭尙愚) - 원임 제학 정민시의 조카로 응교임 -, 서유문(徐有聞) - 원임 직제학 서정수의 종질(從姪)로 전 교리임 -, 김근순(金近淳) - 원임 직각 김조순의 족제(族弟)로 전 교리임 -, 서준보(徐俊輔) - 서유방의 아들로 부사정임 -, 이전수(李田秀) - 이복원의 조카임 -, 유한관(兪漢寬), 유한택(兪漢宅) - 모두 유언호의 조카임 -, 유한식(兪漢寔), 유한수(兪漢守) - 모두 이언호의 종질임 -, 채희공(蔡希恭), 채윤공(蔡倫恭) - 모두 채제공의 재종제임 -, 채홍정(蔡弘定) - 채제공의 종질임 -, 채홍진(蔡弘進) - 채제공의 재종질임 -, 이유상(李儒尙) - 채제공의 생질임 -, 조진구(趙鎭球) - 고 제학 조경(趙璥)의 아들임 -, 김재명(金在明), 김재신(金在新), 김재선(金在善) - 모두 김희의 아들임 -, 이노익(李魯翼), 이노임(李魯任) - 모두 이병모의 아들임 -, 정성우(鄭性愚) - 정민시의 아들임 -, 정치우(鄭致愚), 정최우(鄭最愚), - 모두 정민시의 조카임 -, 심계지(沈繼之) - 심환지의 종제임 -, 심능성(沈能性), 심능우(沈能愚) - 모두 심환지의 조카임 -, 서유본(徐有本), 서유락(徐有樂), 서유비(徐有棐) - 모두 원임 직제학 서호수의 아들임 -, 정동안(鄭東晏) - 고 직제학 정지검의 아들임 -, 서임보(徐任輔) - 서유방의 아들임 -, 서유성(徐有聲), 서유민(徐有民) - 모두 서정수의 종질임 -, 김재완(金載琬) - 검교직제학 김재찬의 아우임 -, 서응보(徐應輔), 서봉보(徐鳳輔) - 모두 서용보의 아우임 -, 정기익(鄭基翼) - 정대용의 아들임 -, 정기식(鄭基植) - 정대용의 조카임 -, 김노현(金魯賢), 김노흥(金魯興) - 모두 김면주의 조카임 -, 윤응현(尹應鉉) - 윤행임의 조카임 -, 민장현(閔章顯) - 윤행임의 생질임 -, 남성구(南星耉) - 남공철의 종질임 -, 심응규(沈應奎), 심승규(沈承奎) - 모두 원임 대교 심상규의 아들임 - 는 모두 각신의 형이요, 아우요, 아들이요, 조카이다.대체로 옛날에는 친형, 친아우, 아들, 친조카에까지만 미쳤으나, 지금은 종제, 종질, 재종제, 재종질에까지 추급(推及)하고도 나는 오히려 적게 여기는 바이다. 원보(元輔) 홍낙성(洪樂性)은 연치와 관작이 높은 까닭에 해마다 자리에 참예하므로, 그의 아들 홍의영(洪義榮) - 승지임 -, 홍대영(洪大榮), 조카 홍세영(洪世榮), 손자 홍석주(洪奭周)가 모두 따라왔다. 그리고 직부(直赴) 이시원(李始源)은 문학(文學) 때문에 특별히 불리었는데, 그의 아비 이민보(李敏輔) - 판돈녕부사임 -, 아우 이조원(李肇源) - 승지임 -, 아들 이봉수(李鳳秀)ㆍ이학수(李鶴秀), 조카 이용수(李龍秀)도 모두 참예하였다. 내가 자궁(慈宮)의 거가(車駕)를 모시고 장락궁(長樂宮)의 축수하던 자리로부터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지시하여 부서(簿書)를 정리해서 먼 후세에 전할 만한 한 부(部)의 책을 편집하도록 하였으니, 이 일에 참예한 사람으로 말하면, 민종현(閔鍾顯) - 예조 판서임 -, 이가환(李家煥) - 공조 판서임 -, 이익운(李益運) - 전 참판임 -, 홍인호(洪仁浩) - 행 부사직임 -, 홍의호(洪義浩), 이상황(李相璜), 김희조(金煕朝), 정약용(丁若鏞) - 모두 전 승지임 -, 이석하(李錫夏) - 전 교리임 -, 홍수만(洪秀晩) - 병조 정랑임 -, 엄기(嚴耆) - 수찬임 -, 안정선(安廷善) - 병조 좌랑임 -, 권준(權晙) - 부사과임 -, 조석중(曺錫中), 이면승(李勉昇), 유원명(柳遠鳴), 강준흠(姜浚欽), 황기천(黃基天), 이동만(李東萬) - 모두 부사직임 -
이 내각(內閣)에서 이 책을 함께 편교(編校)하였으므로, 그들 또한 모두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 모임은 각신이 주관하기 때문에 각신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별항(別行)으로 반열을 정했으나, 오직 이시원만은 특별히 각신의 아랫자리에 반열을 정하게 해서 각별한 뜻을 보였다. 그리고 사관(史官) 오태증(吳泰曾), 내각의 속관(屬官) 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ㆍ이집기(李集箕)ㆍ성해응(成海應)ㆍ이욱수(李旭秀)까지 합해서 무릇 연회에 참예한 98인에게 모두 내구마(內廐馬)를 타고 따르게 하여, 청양문(靑陽門) 앞에서부터 동쪽, 서쪽으로 구불구불 돌아가면서 망춘정(望春亭)과 존덕정(尊德亭)에서 꽃구경을 하게 하고, 태청문(太淸門) 안에서 떡을 내렸는데, 사람이 많아서 이르는 곳마다 장소가 비좁았다. 또 춘당대(春塘臺)에서 활쏘기를 마치고, 부용정(芙蓉亭) 앞 못에서 고기를 낚는데, 못가로 낚싯줄을 드리운 사람이 못의 동서남북에 꽉 둘러찼으니, 많기도 해라, 이것이 이른바 뭇사람과 더불어 즐긴다는 것인가 보다. 마침내 세심대의 대(臺) 자 운을 사용하여 시 한 편을 지으니, 연회에 참예한 사람들이 모두 따라 지었다. 그래서 시축(詩軸)이 가득 차자 다시 권단(卷端)에 그 이름들을 열서(列書)하여, 뒤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해에 이 놀이를 한 뜻이 바로 경사를 기억하고 상서를 꾸며 빛내자는 데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수많은 조신들이 춘당대에 모이어라 / 葳蕤簪珮簇春臺
술기운 꽃 향기 속에 비단 돛을 펼쳤네 / 酒氣花香錦帆開
여러 신하의 자제들에게 말 이르노니 / 寄語諸臣家子弟
평생에 이 연회의 술잔을 잊을 수 있으랴 / 平生能忘此筵杯
188, 밤에 부용정(芙蓉亭)의 소루(小樓)에 올라서
다시 갑인년에 시를 짓던 규정을 되풀이하여 배 안[舟中]과 섬 안[嶼中]의 사람들과 더불어 운자를 나누어서 시를 짓다.
머물러 제군과 함께 마시다 보니 / 留與諸君飮
어느덧 달이 한 장대쯤 떠올랐네 / 居然月上竿
가장 좋은 것은 오늘 밤에 좋이 / 莫如今夜好
이 태평의 즐거움을 같이함이로다 / 同此太平歡
꽃은 천 겹의 나무에 빛을 발하고 / 花暈千重樹
등은 아홉 굽이 난간에 걸리었네 / 燈張九曲欄
금오는 덩달아 통금을 개방하니 / 金吾仍放夜
화기가 장안 안에 두루 퍼지누나 / 和氣遍長安
189, 읍청루(挹淸樓)에서 판상(板上)의 운을 따라 짓다 2수(二首)
남쪽으로 청루에 오르니 가슴이 탁 트여라 / 南出淸樓意豁然
살구꽃 봄 술이 큰 강 앞에 그득하구나 / 杏花春酒大江前
웃으며 보노니 나루 잃은 많은 나그네들은 / 笑看多少迷津客
온종일 강 한쪽에서 방황을 하네그려 / 盡日徊徨水一邊
이상은 고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운이다.
상아 돛대 비단 돛으로 그림 같은 속에서 / 牙檣錦帆畫圖間
중류에 퉁소 북 울리며 자유로이 왕래하네 / 簫鼓中流任往還
소자는 천추에 내 마음을 먼저 얻었으니 / 蘇子千秋先獲我
만난 곳에 맛을 붙임이 한가함을 탐이로세 / 相逢有味是偸閒
이상은 고 대제학 송상기(宋相琦)의 운이다.
190,영흥(永興)의 본궁(本宮)에 올려 향사하는 날에 연구(聯句)를 짓다 소서를 아울러 쓰다.
환조대왕(桓祖大王)과 의혜왕후(懿惠王后)를 영흥의 본궁에 올려 향사하면서 대신(大臣)과 종백(宗伯)을 보내어 예를 거행하게 하였다. 이해 을묘년 4월 18일 자시(子時)에 궁전 내부를 수리한다는 고유제(告由祭)를 먼저 거행하고 제2실로 옮겨 봉안했다가, 21일 자시에 다시 그 자리에 안치하고, 묘시(卯時)에 제1실의 위판(位版)을 만들어서 26일 축시(丑時)에 위판을 봉안한 다음 대제(大祭)를 거행하였는데, 제삿날 밤에는 각기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봉안하던 날에 배종(陪從)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구를 지어서 경사스럽게 여기는 정성을 펴는 바이다.
- 시를 이어 지은 여러 신하는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좌의정 유언호(兪彦鎬), 우의정 채제공(蔡濟恭), 영중추부사 김희(金憙), 제학 심환지(沈煥之), 검교직제학 서유방(徐有防), 원임 직제학 서용보(徐龍輔), 검교직각 이만수(李晩秀)ㆍ김면주(金勉柱), 원임 직각 윤행임(尹行恁), 검교직각 남공철(南公轍), 직각 이시원(李始源), 검교대교 서유구(徐有榘), 승지 홍의영(洪義榮)ㆍ임희존(任希存)ㆍ유한녕(兪漢寧)ㆍ이조원(李肇源)ㆍ채홍원(蔡弘遠), 사관 조태영(趙台榮)ㆍ정문시(鄭文始)ㆍ구득로(具得魯)ㆍ오태증(吳泰曾), 홍문관 제학 서유린(徐有鄰), 지사 이민보(李敏輔), 별운검 심이지(沈頤之)ㆍ윤시동(尹蓍東)ㆍ이시수(李時秀)ㆍ정호인(鄭好仁), 예문관 제학 이병정(李秉鼎), 병조 참판 조진관(趙鎭寬), 총관 정존중(鄭存中)ㆍ유강(柳焵)ㆍ신광리(申光履)ㆍ권회(權恢), 판돈녕부사 김지묵(金持默), 병조 참의 최수로(崔守魯), 참지 심갱(沈鏗), 좌랑 신서(申潊)ㆍ정최성(鄭㝡成), 옥당 이우제(李遇濟)ㆍ장지현(張至顯),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 부사직 이익운(李益運)ㆍ홍인호(洪仁浩)ㆍ홍의호(洪義浩)ㆍ김희조(金煕朝)ㆍ이상황(李相璜)ㆍ정약용(丁若鏞), 초계문신 김근순(金近淳)ㆍ안정선(安廷善)ㆍ엄기(嚴耆)ㆍ강준흠(姜浚欽)ㆍ이면승(李勉昇)ㆍ이동만(李東萬)ㆍ조석중(曺錫中)ㆍ황기천(黃基天)ㆍ최광태(崔光泰)ㆍ서준보(徐俊輔)ㆍ권준(權晙)ㆍ신봉조(申鳳朝)ㆍ신현(申絢)ㆍ홍낙준(洪樂浚)ㆍ홍석주(洪奭周)ㆍ홍명주(洪命周)ㆍ송면재(宋冕載)ㆍ윤치영(尹致永)ㆍ유원명(柳遠鳴)ㆍ김처암(金處巖)ㆍ김희락(金煕樂)ㆍ유태좌(柳台佐), 경모궁 영(景慕宮令) 홍낙수(洪樂綏)ㆍ김재명(金在明)ㆍ조진선(趙鎭宣),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 도승지 이조원(李祖源), 향관(香官) 조만원(趙萬元)이다. 함경 감사 조종현(趙宗鉉)에게는 역말을 달려 운자를 전해서 추후로 지어 올리게 하였고, 생원 김이영(金履永)은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하던 날 응제(應製)하여 수석으로 급제한 것 때문에 특명으로 맨 끝에 이어 짓도록 하였다.
여덟 횟수 갑자는 황하가 맑아질 기간이요 / 八回寶甲河淸期
세 심지의 심향은 누수를 거두는 때로다 / 三炷心香漏徹時
이상은 어제(御製)이다.
원묘라 좋은 때엔 경사로운 예를 밝히고 / 原廟吉辰昭慶禮
종묘의 재계한 밤엔 정성이 신에 감통하네 / 閟宮齋夜格誠祇
이상은 신 홍낙성이 읊은 것이다.
옥 제기는 선공을 제사하기에 꼭 알맞고 / 琮璜允叶先公祀
의폐는 모두 성상께서 손수 싸 보냈도다 / 衣幣皆從御手齎
이상은 신 유언호가 읊은 것이다.
천 리라 선공 영혼은 좌우에 계신 듯하고 / 千里仙輧如左右
사흘 밤 궁전 촛불은 공경한 모습 비추누나 / 三宵宮燭照恭寅
이상은 신 채제공이 읊은 것이다.
중춘에 성상의 운자는 역말을 달려 보냈고 / 中春御韻曾馳驛
오늘의 어제시는 또 책상에 놓여 있구나 / 今日宸章又在丌
이상은 신 김희가 읊은 것이다.
직무 맡은 각 재관은 공경히 부복을 하고 / 聽位齋官欽降俯
성상을 뵙는 사로들은 널찍이 줄을 이었네 / 瞻光社老布邐迤
이상은 신 이병모가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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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낀 옛 자취 찾아 궁전 나무 부여잡아라 / 塵埃舊蹟攀宮樹
우로 같은 남긴 은택은 들풀에도 미치었네 / 雨露遺恩及野萑
이상은 신 이조원(李祖源)이 읊은 것이다.
금척으로 경계 고루어 벼 기장은 풍년 들고 / 金尺界均登黍稌
잔잔한 물결 적지엔 방어 숭어가 즐기누나 / 赤池波晏樂魴鯔
이상은 신 민종현이 읊은 것이다.
조촐한 희생 맑은 술은 향기가 물씬 풍기고 / 潔牲淸酒香紛郁
좋은 햇살 상서 구름은 그림자도 성대해라 / 瑞日祥雲影旖旎
이상은 신 조만원이 읊은 것이다.
해마다 긴 모래톱엔 야고 소리 진동하는데 / 每歲連洲殷夜鼓
몇 번이나 돌아간 골엔 봄 향초가 자랐는고 / 幾回歸洞長春蘪
이상은 신 조종현이 읊은 것이다.
기산의 떨기나무는 가송으로 부르거니와 / 岐山棫樸徵歌頌
한읍의 풍운은 피리를 부는 데서 일어났네 / 漢邑風雲起籥龡
이상은 신 심환지가 읊은 것이다.
상설의 땅은 존엄해라 고향을 공경하고 / 象設地嚴儀敬梓
포로의 정사는 빨라서 기나무를 능가하네 / 蒲蘆政敏勝栽榿
이상은 신 서유방이 읊은 것이다.
예조에선 새벽에 생폐를 공경히 올리고 / 秩宗是曉虔牲幣
아침 내내 반가운 비엔 물새들이 모이누나 / 喜雨崇朝集鷺鷥
이상은 신 서용보가 읊은 것이다.
예는 함궁과 함께해라 신리에 부합되고 / 禮竝咸宮神理叶
의리는 완묘를 따라라 성모의 남김일세 / 義遵完廟聖謨貽
이상은 신 이만수가 읊은 것이다.
우리 임금 효성은 바야흐로 경복을 받고 / 吾王孝思方膺慶
태평성대 예법은 절로 스승을 얻었도다 / 昭代彝章自得師
이상은 신 김면주가 읊은 것이다.
노묘엔 한창 삼수의 축원 소리 드날리고 / 魯廟方騰三壽祝
빈 땅엔 아직도 석양에 김맨 걸 생각하네 / 邠居猶想夕陽耛
이상은 신 윤행임이 읊은 것이다.
삼왕을 상제께 짝함은 공계에 근원했고 / 三王上配源公季
칠성은 서로 전하여 정주에 이르렀도다 / 七聖相傳曁哲伊
이상은 신 남공철이 읊은 것이다.
천명은 멀리 제비로부터 크게 드리워졌고 / 天籙誕垂郊鳦緬
사당엔 칠수의 고기를 나란히 올리도다 / 邦庥昭薦漆魚比
이상은 신 이시원이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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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의 예 거행하니 새로운 복이 거듭되고 / 抃鼇禮擧新休荐
말 달리던 터 남기어라 고사를 추술하네 / 走馬基留故事追
이상은 신 서유구가 읊은 것이다.
넓고 통달한 큰 계획은 간책에 빛나고 / 宏達洪圖光簡策
탄탄평평한 왕도는 큰길처럼 안정되도다 / 坦平王道奠康逵
이상은 신 홍의영이 읊은 것이다.
화려한 자리에 잔치의 술잔을 올리자마자 / 華筵纔獻需雲酌
온 천하가 해바라기 정성 똑같이 기울이네 / 薄海同傾向日葵
이상은 신 임희존이 읊은 것이다.
선왕 음덕이 밝게 도우심은 삼가 알거니와 / 恭識先庥昭啓佑
더구나 이 봄의 풍물은 참으로 성대하구려 / 矧玆春物正葳蕤
이상은 신 유한녕이 읊은 것이다.
떠오른 해 빛난 상서는 우곡을 바라보고 / 升曦耀瑞瞻嵎谷
깨끗한 마름풀의 향기는 간비에서 왔도다 / 潔藻登馨自㵎阰
이상은 신 이조원(李肇源)이 읊은 것이다.
옛 진휼청에선 백성들에게 흰 쌀을 내리고 / 舊社惠民捐粲白
예조에선 선비 맞아라 검은 옷 좋기도 하네 / 禮圍延士好衣緇
이상은 신 채홍원이 읊은 것이다.
주 나라의 협사 의식은 삼례에 융숭하고 / 儀隆周祫寅三禮
요임금의 악장 연주는 일기가 이루었네 / 樂奏堯章作一夔
이상은 신 조태영이 읊은 것이다.
계책은 승화전에 열려 국운을 연장시키고 / 謨啓承華緜寶籙
기쁨은 장락궁에 더해라 금술잔 받드누나 / 歡增長樂奉金巵
이상은 신 정문시가 읊은 것이다.
경사는 기다림이 있는 듯 천명이 거듭되고 / 慶如有待申天命
예는 정에 인연한 것이라 성상을 우러르네 / 禮本緣情仰聖爲
이상은 신 구득로가 읊은 것이다.
아동들이 가곡을 익힘은 풍패와 비슷하고 / 習曲兒童比豐沛
문왕 무왕껜 전이에서 붉은 소를 바치도다 / 薦騂文武尙瀍洢
이상은 신 오태증이 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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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제기에는 삼가 말린 고기를 올리고 / 歲虔籩豆登腒鱐
달마다 출유하는 의관엔 향기가 엄습하네 / 月出衣冠襲茝蒔
이상은 신 서유린이 읊은 것이다.
황령이 오르내리매 제좌는 환히 빛나고 / 陟降皇靈昭帝座
성대한 상서 기운은 궁전 처마에 가득하네 / 葱蘢佳氣滿宮㮰
이상은 신 이민보가 읊은 것이다.
올려 제사함은 헌원씨의 체제에 부합되고 / 躋禋遠叶軒皇禘
발상의 자취는 한 고조의 기현과 똑같구나 / 肇跡還同漢祖蘄
이상은 신 심이지가 읊은 것이다.
멀리 전한 예폐엔 상아 잔을 곁들이었고 / 禮幣遙傳仍象斝
옮겨 재숙한 재의엔 용이 굼틀거리도다 / 齋衣移宿儼龍跜
이상은 신 윤시동이 읊은 것이다.
깊고 온화한 정성은 난가에 가득 어리고 / 精誠穆穆凝鑾駕
광대한 복록은 말린 희생을 올리는도다 / 茀祿洋洋薦楅犧
이상은 신 이시수가 읊은 것이다.
사당엔 옥을 바치어라 전례가 갖추어지고 / 侐廟圭璋彝典備
조정의 관원들은 하례 의식 서로 따르네 / 明廷簪紱賀儀隨
이상은 신 정호인이 읊은 것이다.
도어는 그 옛날 뇌택에 은거할 때의 일이요 / 陶漁舊是潛雷澤
문명인들은 지금도 민치로 다 모여드누나 / 冠帶今猶湊澠淄
이상은 신 이병정이 읊은 것이다.
황하가 맑아지매 하늘은 성인을 내리었고 / 河水報淸天降聖
기산에 향사드릴 제 길은 평탄하기도 해라 / 岐山用享路云
이상은 신 조진관이 읊은 것이다.
조상께 효성 진지해라 의식엔 결함이 없고 / 遵先孝摯儀無觖
소본의 예절 이루어라 터전을 크게 열었네 / 溯本禮成基啓丕
이상은 신 정존중이 읊은 것이다.
조용한 주 나라 계책은 누대를 추존하고 / 宥密周謨追奕業
일신된 은 나라 전례는 변방까지 빛나도다 / 煥新殷典耀邊陲
이상은 신 권회가 읊은 것이다.
주공의 뜻 이룸은 추존의 효성에 기인했고 / 姬公成志由追孝
문덕이 후손에 내림은 지자에 근본하였네 / 文德垂昆本止慈
이상은 신 유강이 읊은 것이다.
성상의 꿈은 정성 어리어 해가 한창 밝고 / 宸夢凝誠方日曒
근신들은 명 받들어 성화같이 달리도다 / 近臣將命載星馳
이상은 신 신광리가 읊은 것이다.
의도를 환연히 갖춤은 가법을 준행하였고 / 儀圖煥備遵家法
경사들의 의견 일치로 적당한 예 마련하네 / 卿士詢同酌禮宜
이상은 신 김지묵이 읊은 것이다.
종묘는 천년토록 태산 반석처럼 안정되고 / 宗祏千年奠磐泰
푸른 산야 팔역은 모두 장수를 누리누나 / 林葱八域摠期頤
이상은 신 최수로가 읊은 것이다.
혼령 봉안의 예식엔 음악 소리 울려 퍼지고 / 妥靈盛擧鏘鏘樂
제사 돕는 신하들은 수많은 갓끈 드리웠네 / 助祭羣工濟濟緌이상은 신 심갱이 읊은 것이다.
제사 전례는 국가에 가장 으뜸가는 일이요 / 祀典邦家斯最首
침묘의 봄 제사엔 굳이 비장을 먼저 바치네 / 春嘗寢廟必先脾
이상은 신 신서가 읊은 것이다.
어가는 구불구불 돌아 재악으로 옮겨 오고 / 逶迤鳳蹕移齋幄
계인은 푸드덕 닭 우는 새벽 시간 알리도다 / 腷膊雞人報曉塒
이상은 신 정최성이 읊은 것이다.
강신제 지낼 땐 고기를 도마에 올려 바치고 / 祼席駿奔登梡嶡
기로의 잔치엔 어조와 동의의 시를 읊누나 / 耆筵魚藻詠桐椅
이상은 신 이우제가 읊은 것이다.
구중궁궐 오늘 밤에 삼가 목욕재계하여라 / 九重是夜恭齋沐
천억년 한량없이 이 봄의 제사를 올리네 / 千億斯春奉禴祠
이상은 신 장지현이 읊은 것이다.
공적을 찬양함엔 승가와 하관을 겸하였고 / 揚烈升歌兼下管
발상지는 동이와 가까운 바로 실직이었네 / 發祥悉直近東暆
이상은 신 이가환이 읊은 것이다.
누상의 상서 기운은 봄에 일산이 나오고 / 樓桑瑞氣春生葆
이락의 정결한 제사는 꿈이 시초에 맞았네 / 伊洛明禋夢協蓍
이상은 신 이익운이 읊은 것이다.
길게 이은 천명은 흙집의 들로부터 나왔고 / 緜籙源從陶復野
장수의 산가지는 점책을 넉넉히 취했도다 / 靈籌剩取洛書棊
이상은 신 홍인호가 읊은 것이다.
정성은 철령을 통하여 우체로 전해지고 / 誠通鐵嶺傳郵遞
은혜는 풍루에서 여러 노인에 미치었네 / 惠養豐樓及庶耆
이상은 신 홍의호가 읊은 것이다.
신농씨께 제사 지내라 우리 수확 다 마쳤고 / 田祖祭成同我稼
생민의 시를 읊어라 검은 기장 심는구나 / 生民詩詠種維秠
이상은 신 김희조가 읊은 것이다.
한묘의 정결한 제사엔 국과 떡을 진설하고 / 精禋漢廟陳糝酏
주가의 크나큰 복은 갈류를 점치리로다 / 遐福周家筮葛虆
이상은 신 이상황이 읊은 것이다.
공인은 청조의 술 그릇과 옷감을 싸 가고 / 工賷淸朝罍與襨
사자는 울창주에 붉은 기장 겸하여 가네 / 伻來是日鬯兼
이상은 신 정약용이 읊은 것이다.
성긴 구멍 붉은 비파줄로 황의를 노래하고 / 朱絃疏越歌皇矣
옥 술잔의 울창주로 우지를 송축하도다 / 玉瓚黃流頌右之
이상은 신 김근순이 읊은 것이다.
예가 처음부터 성대함은 보본에 기인했고 / 邦禮肇稱由報本
하늘이 큰 복 내림엔 청비를 증험하리로다 / 天休滋降驗聽卑
이상은 신 안정선이 읊은 것이다.
풍년 내린 경사 모여라 먼저 보리가 여물고 / 降康慶湊先登麥
복 두터이 한 정성은 삼가 제수를 올리도다 / 篤祐誠深祇薦粢
이상은 신 엄기가 읊은 것이다.
구름이 능침을 호위하니 하늘과 멀지 않고 / 雲護仙鄕天不遠
달이 재전에 조림하니 밤은 하마 어느 땐고 / 月臨齋殿夜何其
이상은 신 강준흠이 읊은 것이다.
축첩 받들어 전해라 총총걸음이 영화롭고 / 擎傳祝帖榮趨走
어제시를 삼가 외워라 우러러 기뻐하네 / 莊誦雲章仰悅怡
이상은 신 이면승이 읊은 것이다.
경산에 오르니 상침의 소나무는 꼿꼿하고 / 商寢丸松方陟景
기수를 바라보니 위원의 대는 아름답도다 / 衛園猗竹怳瞻淇
이상은 신 이동만이 읊은 것이다.
재계에 전념하는 새벽엔 북두를 바라보고 / 凝情齋曉瞻星斗
예 거행하는 사관들은 신 끈이 뒤섞이었네 / 率禮祠官錯履綦
이상은 신 조석중이 읊은 것이다.
밝은 덕은 향기로운 기장을 계승하였고 / 明德繼承馨黍稷
바른 음악은 훈지를 연주함과 통하누나 / 雅音孚格奏塤竾
이상은 신 황기천이 읊은 것이다.
전후로 하해에는 교제 체제를 겸해 지내고 / 先河後海郊兼禘
고금의 예 참작하여 고기를 썰고 또 삶도다 / 酌古通今胾又胹
이상은 신 최광태가 읊은 것이다.
맑은 술에 운사의 벼로 조촐히 밥 짓고 / 淸酤載蠲雲社稻
많은 고기에 석왕의 배를 함께 올리도다 / 多魚同薦釋王梨
이상은 신 서준보가 읊은 것이다.
향사 의식 아룀엔 기어이 밤에 말을 달리고 / 享成奏必馳宵馹
정성 도타운 재계는 늘 새벽까지 이르네 / 誠篤齋常到曉鸝
이상은 신 권준이 읊은 것이다.
예절은 사당에 흡족해라 강신주를 받들고 / 禮洽旅楹承祼鬯
경사는 높은 산에 흘러라 즐거이 농사짓네 / 慶流崇巘樂耘耔
이상은 신 신봉조가 읊은 것이다.
엄숙한 첫 제사는 일천 관원이 경하를 하고 / 肇禋肅穆千官慶
재계하고 성대히 차린 옷엔 오색이 화려하네 / 盛服齊明五采施
이상은 신 신현이 읊은 것이다.
노인들은 연회에 참여해 혜택을 흠뻑 입고 / 黃髮登筵霑惠澤
유생들은 문물 구경에 임금 은혜 자랑하네 / 靑衿觀國詫恩私
이상은 신 홍낙준이 읊은 것이다.
예절 융숭한 청묘엔 쑥과 기장을 불사르고 / 禮隆淸廟升蕭稷
철을 만난 명당엔 보리와 기러기를 올리네 / 時値明堂薦麥鶀
이상은 신 홍석주가 읊은 것이다.
성조의 발상지엔 아직 뽕나무가 있거니와 / 聖祖肇基猶有柘
문인은 하청송 지어라 왜 자지가를 부르랴 / 詞人撰頌豈歌芝
이상은 신 홍명주가 읊은 것이다.
초자송이 전파해라 벼의 노적을 기뻐하고 / 楚茨頌播欣禾積
경선의 노래 이루어라 애들은 죽마를 타네 / 慶善歌成緬竹騎
이상은 신 송면재가 읊은 것이다.
조짐은 당종과 같아라 때가 갑에 이르렀고 / 兆驗唐宗時屆甲
축수는 한제에 깊어라 낮에 숟가락 더했네 / 祝深漢帝晝添匙
이상은 신 윤치영이 읊은 것이다.
재계 의식엔 매양 면류관을 우러러보고 / 齋儀每仰凝珠冕
성대한 예엔 멀리 제기 받듦을 바라보네 / 盛禮遙瞻奉玉齍
이상은 신 유원명이 읊은 것이다.
상서 천양하는 의리는 한의 말을 노래하고 / 義大闡休歌漢馬
축수 올리는 정성은 당에 사자를 바치도다 / 誠存祈壽貢唐獅
이상은 신 김처암이 읊은 것이다.
만세 소리 진동해라 모두들 기뻐하고 / 三呼雷動歡加額
봄기운 같은 용안엔 희색이 감도누나 / 八彩春融喜動眉
이상은 신 김희락이 읊은 것이다.
조상의 덕 살피어 지금은 옛 공적 추술하고 / 觀德如今追舊烈
당상의 음악엔 예부터 좋은 경계 노래했네 / 登歌自古頌良䂓
이상은 신 유태좌가 읊은 것이다.
해는 성갑이 돌아와서 예전보다 더 빛나고 / 歲回星甲光于古
하늘은 경사 거듭 내려라 덕을 공경히 닦네 / 慶自天申德祇台
이상은 신 홍낙수가 읊은 것이다.
종우의 시 이루어라 천세의 축수를 올리고 / 螽羽詩成千歲祝나
이 차례로 자리 베푸니 만인이 기뻐하네 / 燕毛筵設萬人嬉
이상은 신 김재명이 읊은 것이다.
고향의 옛 마을엔 음식 향기가 구수할 게고 / 枌楡舊社香凝飶
기름진 주원엔 씀바귀도 엿같이 달리로다 / 菫荼膴原味似飴
이상은 신 조진선이 읊은 것이다.
잡란한 글로 감히 성대한 창화에 참예하여 / 蕪句敢叨賡載盛
한림원에 이름 적히니 성은이 그지없어라 / 金閨新籍聖恩滋
이상은 신 김이영이 읊은 것이다.
[주D-001]기산(岐山)의 …… 부르거니와 : 《시경(詩經)》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더부룩한 떨기나무를 베어다가 불을 때도다. 아름다운 문왕의 덕을 사방이 우러러 받들도다.[芃芃棫樸 薪之槱之 濟濟辟王 左右趣之]”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한읍(漢邑)의 풍운(風雲)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고향인 패현(沛縣)에 돌아가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스스로 대풍가(大風歌)를 부르기를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리었도다. 위엄이 천하에 미쳐서 고향에 돌아왔네. 어떻게 하면 용사들을 모아서 사방을 지킬꼬.[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상설(象設) : 원래는 불상(佛像)을 이르는 말인데, 흔히 유상(遺象)의 뜻으로 쓰인다.
[주D-004]포로(蒲蘆)의 …… 능가하네 : 포로는 부들과 갈대를 이르는데, 이들은 본디 잘 나고 잘 자라므로, 정사(政事)를 하기 쉬움에 비유한다. 노 애공(魯哀公)이 정사를 물었을 때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인도는 정사에 빠르고 지도는 나무에 빠른데, 대체로 정사란 나무보다 더 잘 자라는 포로와 같은 것입니다.[人道敏政 地道敏樹 夫政也者 蒲蘆也]” 한 데서 온 말로 훌륭한 임금이 정사를 하면 그만큼 정사가 빨리 행해짐을 의미한 말이다. 《中庸章句 第20章》 기나무[榿]는 아주 잘 자라서 3년 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된다고 한다.
[주D-005]삼왕(三王)을 …… 근원했고 : 삼왕은 우(禹)와 탕(湯)과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을 가리키고, 공제(公季)는 문왕의 아버지인 계력(季歷)을 이른 말로, 즉 문왕ㆍ무왕이 계력으로부터 나와서 우, 탕과 함께 상제(上帝)에 배향(配享)되었음을 의미한다.
[주D-006]칠성(七聖)은 …… 이르렀도다 : 칠성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을 가리키는데, 이 칠성의 도통(道統)이 정자(程子)ㆍ주자(朱子)에 이르렀으므로 한 말이다.
[주D-007]천명은 …… 드리워졌고 : 상고 시대 제곡(帝嚳)의 비(妃)가 제비의 알을 먹고 임신하여 상(商) 나라의 시조(始祖)인 설(契)을 낳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8]사당엔 …… 올리도다 : 《시경(詩經)》 주송(周頌) 잠(潛)에 “아, 칠수와 저수에는, 많은 고기 들어 있네. …… 이 고기 잡아다 제사 지내어, 큰 복을 한없이 늘이도다.[猗與漆沮 潛有多魚 …… 以亨以祀 以介景福]”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곧 물고기를 잡아다가 주(周) 나라 사당에 제사 지내던 일을 노래한 것이다.
[주D-009]말 달리던 …… 추술하네 :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緜)에 “고공단보께서 오랑캐 피해, 아침 일찍 말을 달려서,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 아래로 옮기시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0]우곡(嵎谷) : 동쪽 바닷가 해 뜨는 곳, 즉 우이 양곡(嵎夷暘谷)의 약칭이다.
[주D-011]깨끗한 …… 왔도다 : 《시경(詩經)》 소남(召南) 채빈(采蘋)에 “마름풀을 캐어라, 남쪽 시냇가에서. 마름풀을 캐어라, 저 길가의 흐르는 물에서.[于以采蘋 南澗之濱 于以采藻 于彼行潦]”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대부(大夫)의 부인(夫人)이 마름풀을 캐어서 제사를 정결하게 지내는 것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 간비(澗阰)의 간은 시내이고, 비는 비산(阰山)을 가리키는데, 비산에는 향초(香草)가 많기로 유명하다.
[주D-012]검은 옷 좋기도 하네 :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緇衣)에 “대감님 검은 옷이 좋아라, 해지면 내 또다시 지어 올리리다. 대감님 조정에 가시네, 돌아오시면 내가 좋은 밥 지어 올리리다.[緇衣之好兮 敝予又改造兮 適子之館兮 還予授子之粲兮]”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정(鄭) 나라 환공(桓公)과 무공(武公)이 주(周) 나라의 인재 양성을 관장하는 사도(司徒) 벼슬에 있으면서 직무를 충실히 잘 수행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찬양하여 부른 노래이다.
[주D-013]삼례(三禮) : 고례(古禮)를 기록한 세 가지 책, 즉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를 가리킨다.
[주D-014]일기(一夔) : 순(舜)임금의 신하로 악관(樂官)에 임명된 기(夔)를 가리키는데, 일기라 한 것은 곧 노 애공(魯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기가 발이 하나였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기는 사람인데 왜 발이 하나이겠습니까. 그는 다른 재능은 없고 다만 음악에 정통했으므로, 요(堯)임금이 이르기를 ‘기는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하다.[夔一而足矣]’ 하고, 그를 악정(樂正)으로 삼았기 때문에 군자(君子)들이 ‘기는 한 가지로 만족했다.[夔有一足]’고 말한 것이요, 발이 하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5]아동들이 …… 비슷하고 : 한 고조(漢高祖)가 일찍이 고향인 풍패(豐沛)에 가서 부로(父老)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그 고을 아동 120인에게 노래를 교습시킨 다음, 자신이 직접 축(筑)을 두드리며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17]한 고조의 기현(蘄縣) : 기현은 한 고조의 고향인 패군(沛郡)의 속현(屬縣)일뿐, 한 고조와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주D-018]도어(陶漁)는 …… 일이요 : 순(舜)임금이 미천했을 적에 일찍이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짓고, 하수(河水) 가에서 질그릇을 굽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았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19]문명인들은 …… 모여드누나 : 민치(澠淄)는 제(齊) 나라의 임치현(臨淄縣)에 있는 두 물 이름인데, 임치현은 제 나라의 수도(首都)로서 예로부터 인물이 번성하고 물산이 풍부하기로 유명하였다. 전하여 여기서는 한성(漢城)을 비유하여 이른 말이다.
[주D-020]주공(周公)의 …… 기인했고 : 주 무왕(周武王)이 말년에 천명(天命)을 받고 나자, 주공이 문왕(文王)ㆍ무왕의 뜻을 미루어 태왕(太王)ㆍ왕계(王季)를 왕으로 추존하고 위로 선공(先公)들을 천자(天子)의 예로 제사 지낸 데서 온 말이다.
[주D-021]문덕(文德)이 …… 근본하였네 : 문덕은 곧 문왕의 덕을 가리키고, 지자(止慈)는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3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깊고 원대하신 문왕이여, 아, 광명하고 공경하여 그치시다.’ 하였으니, 문왕께서는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그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그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인자함에 그치고, 나라 사람들과 사귈 때는 신에 그치었다.[詩云穆穆文王 於緝煕敬止 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2]봄 제사엔 …… 바치네 : 비장(脾臟)은 목(木)에 속하므로, 봄 제사에는 반드시 비장을 먼저 올린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禮記 月令》
[주D-023]어조(魚藻)와 동의(桐椅) : 어조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이다. 어조 시에는 “마름풀 속의 물고기는 넓적한 머리가 크기도 하네. 호경에 계신 임금님은 마냥 즐거이 잔 드시누나.[魚在在藻 有頒其首 王在在鎬 豈樂飮酒]” 하였는데, 이 시는 주(周) 나라 임금이 제후들과 잔치를 베풀 적에 제후들이 임금의 높은 덕을 찬양하여 부른 노래이다. 동의는 《시경》 소아 담로(湛露)의 “오동나무 가래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도다. 즐겁고 편한 군자들은 술 마셔도 위의를 잃지 않네.[其桐其椅 其實離離 豈弟君子 莫不令儀]”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 역시 주 나라 임금이 제후들에게 향연을 베풀 때에 연주한 악가이다.
[주D-024]공적을 …… 겸하였고 : 승가(升歌)는 연례(燕禮) 때에 당상(堂上)에서 노래하는 것을 말하고, 하관(下管)은 당하(堂下)에서 연주하는 취주악(吹奏樂)을 가리킨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당상에서는 녹명(鹿鳴)의 시를 노래하고, 당하에서는 일시(逸詩)인 신궁(新宮)의 시를 연주한다고 하였다.
[주D-025]발상지는 …… 실직(悉直) : 동이(東暆)는 경성(京城) 부근의 고을 이름으로, 전하여 경성을 뜻한 말이고, 실직은 바로 이 태조(李太祖)의 고조(高祖)가 되는 목조(穆祖)의 외가(外家) 고을인 삼척(三陟)의 옛 이름이다.
[주D-026]누상(樓桑)의 …… 나오고 : 촉한(蜀漢)이 소열제(昭烈帝)가 소싯적에 그 집 동남쪽에 있던 5장(丈)쯤 된 뽕나무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수레의 깃일산처럼 보였으므로, 그 나무 밑에서 장난 말로 “내가 후일에 반드시 이 깃일산 수레를 탈 것이다.” 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뒤에 그 마을을 누상리(樓桑里)라 명명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제왕의 고향을 의미한다.
[주D-027]이락(伊洛)의 …… 맞았네 : 주 성왕(周成王) 때에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점쳐서 길조(吉兆)를 얻어 주(周) 나라 도읍을 낙읍으로 옮겼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28]길게 …… 나왔고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일찍이 빈(豳)에서 살 적에 집도 없이 토실(土室)에서 생활했던 데서 온 말이다. 《詩經 大雅 緜》
[주D-029]장수의 …… 취했도다 : 점책(占策)은 곧 점칠 때 쓰는 50개의 산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장수(長壽)를 축원하는 말이다. 즉 옛날 해상에 세 노인이 있어 그들을 만나서 나이를 물어보니, 그중 한 노인이 대답하기를 “해수(海水)가 상전(桑田)으로 바뀔 때마다 내가 산가지 하나씩을 내려놓았는데, 지금 산가지 열 개가 딱 찼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30]생민(生民)의 …… 심는구나 :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에 “좋은 종자 백성에게 내리니, 검은 기장이며, 붉은 차조 흰 차조로다.[誕降嘉種 維秬維秠 維穈維芑]”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1]주가(周家)의 …… 점치리로다 : 갈류(葛虆)는 칡덩굴로, 《시경(詩經)》 주남(周南) 규목(樛木)에 “남산 아래로 굽어 늘어진 나뭇가지 있으니, 칡덩굴이 얽히었네. 즐거우신 군자는 복록에 편안하도다.[南有樛木 葛虆纍之 樂只君子 福履綏之]” 하였는바, 후궁(後宮)을 비유한 말이다. 즉 후비가 질투심이 없고 덕이 많아서 은혜가 미천한 후궁들에까지 고루 미침으로 인해, 후비의 덕에 감복하여 후궁들이 이 노래를 불렀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32]성긴 …… 노래하고 : 성긴 구멍에 붉은 줄의 비파는 문왕(文王)을 제사할 때에 쓰는 악기(樂器)이고, 황의(皇矣)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인데, 이 시는 곧 문왕의 선대(先代)의 덕을 찬양한 노래이다.
[주D-033]옥 술잔의 …… 송축하도다 : 우지(右之)는 《시경(詩經)》 주송(周頌) 아장(我將)에 “내 받들어 향사함이 양과 소로써 하니, 하늘이 내려와 그 오른쪽에 계실까. 문왕의 법을 본받아 날로 사방을 편케 하면, 복을 주시는 문왕이 오른쪽에서 흠향하시리.[我將我享 維羊維牛 維天其右之 儀式刑文王之典 日靖四方 伊嘏文王 旣右享之]”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문왕을 상제(上帝)께 배향(配享)하여 제사 지낼 때에 부른 노래이다.
[주D-034]청비(聽卑) : 하늘은 비록 높으나, 세간(世間)의 말들을 다 듣고 선악(善惡)을 잘 살핀다는 뜻이다.
[주D-035]경산(景山)에 …… 꼿꼿하고 : 상침(商寢)은 상 나라의 사당을 이른다. 《시경(詩經)》 상송(商頌) 은무(殷武)에 “저 경산에 오르니, 소나무 잣나무 꼿꼿한데, 큰 나무 베어 옮겨다가, 바르게 깎고 끊었네. 기다란 소나무 서까래에 많은 기둥이 번듯하니, 상당 집이 편안히 앉았도다.[陟彼景山 松柏丸丸 是斷是遷 方斲是虔 松桷有梴 旅楹有閑 寢成孔安]”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6]기수(淇水)를 …… 아름답도다 : 위원(衛園)은 위 나라의 동산을 이른다. 위 무공(衛武公)의 높은 덕을 노래한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奧)에 “저 기수의 모퉁이를 바라보니, 푸른 대가 아름답고 무성하네.[瞻彼淇澳 綠竹猗猗]”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7]밝은 …… 계승하였고 : 성왕(成王)이 군진(君陣)을 훈계한 말에 이르기를 “지극한 다스림은 향내가 풍기는 것과 같아서 신명(神明)을 감동시키는 것이라, 기장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이 향기로운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곧 밝은 덕이 있으면 절로 신명이 기장도 향기롭게 여겨 흠향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書經 君陳》
[주D-038]운사의 벼[雲社稻] : 운사는 어디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39]석왕의 배[釋王梨] :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토산품 가운데 석왕사(釋王寺)에서 배가 나므로, 이를 ‘석왕 배’라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0]쑥과 기장을 불사르고 : 종묘(宗廟)의 제사 때에 쑥과 기장을 합해 불살라서 그 연기가 장옥(牆屋)을 둘러싸도록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郊特牲》
[주D-041]보리와 기러기를 올리네 :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쇠고깃국에는 쌀밥이 좋고, …… 개고깃국에는 찰기장밥이 좋고, 기러기고깃국에는 보리밥이 좋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2]문인은 …… 부르랴 : 당 나라 두보(杜甫)의 세병마행(洗兵馬行)에 “은사들은 자지곡을 노래하지 않고요, 문인들은 하청송을 지을 줄 알게 되었네.[隱士休歌紫芝曲 詞人解撰河淸頌]” 한 데서 온 말인데, 즉 세상이 태평해져서 일찍이 상산(商山)에 은거한 사호(四皓)가 불렀던 자지곡은 노래하지 않게 되고, 태평을 구가하는 하청송을 모두 짓게 되었다는 뜻이다. 하청송은 본디 남조 송(南朝宋)의 시인 포조(鮑照)가 지었는데, 내용은 곧 황하가 천 년 만에 맑아지고 성왕(聖王)이 나서 천하가 태평했음을 찬양한 것이다.
[주D-043]초자송(楚茨頌) : 《시경(詩經)》 소아(小雅) 초자(楚茨)의 시를 가리키는데, 이 시는 곧 전록(田祿)을 가진 공경(公卿)들이 농사에 힘써 이 곡식으로 종묘(宗廟)의 제사를 잘 받드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주D-044]경선(慶善)의 …… 타네 : 경선은 당 태종(唐太宗)이 태어난 고택(故宅)인 경선궁(慶善宮)을 이르는데, 당 태종이 일찍이 경선궁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시(詩)를 지어 관현(管絃)에 올려서 이를 ‘공성경선악(功成慶善樂)’이라 명명하고, 동자(童子) 팔일(八佾)로 구공무(九功舞)를 추게 했던 고사에서 온 말인 듯하다. 《通鑑綱目 唐紀》
[주D-045]조짐은 …… 더했네 : 여기 당종(唐宗)과 한제(漢帝)의 두 가지 고사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주D-046]한(漢)의 말을 노래하고 : 한 무제(漢武帝)가 악와(渥洼)의 신마(神馬)를 얻고 천마가(天馬歌)를 지어 불렀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47]당(唐)에 사자를 바치도다 : 당 태종(唐太宗) 때에 서역(西域)에서 사자(獅子)를 바쳐 오자, 태종이 우세남(虞世南)에게 명하여 사자부(獅子賦)를 짓게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48]종우(螽羽)의 시(詩) :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螽斯)를 가리키는데, 이 시는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궁녀(宮女)들과 서로 화목하여 자손이 많았으므로, 한 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는 메뚜기[螽]에 비유하여 자손의 번성함을 노래한 것이다.
[주D-049]기름진 …… 달리로다 : 주원(周原)은 기산(岐山) 남쪽에 있는 지명인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緜)에 “주원 땅이 기름지니, 씀바귀도 엿같이 달도다.[周原膴膴 菫荼如飴]” 한 데서 온 말이다.
[출처]홍재전서 제6권 시(詩)15. |작성자이즈래
<편집자 주(註)>
윤시동은 울산부산공의 당숙[7촌, 동고조(대사헌(諱 㯙)]되시는 문익공(諱 拓基)의 사위입니다.(신미보 41P 참조)
윤시동(尹蓍東, 1729-1797)
조선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때의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윤득민(尹得敏)의 아들이며, 유척기(兪拓基)의 사위. 소신이 뚜렷하여 당론(黨論)을 논하다가 수차례 유배되었으며, 내직과 외직을 여러 번 거친 후 우의정 등을 지냄
대사간공(諱 漢寧)은 문익공(諱 拓基)의 손자로서 벼슬이 생원에 급제하여 창녕현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에 이른 분으로 묘소는 철원 지혜동에 뫼셔져 있으며, 당대 문장가인 저암(著菴)공 휘 한준(諱 漢雋), 명필 기원(綺園)공, 휘 한지(諱 漢芝)와 소요헌(逍遙軒)공[휘 한갈(諱 漢葛)]과는 생가(生家)로 재종(6촌 형제)간이 되십니다.
홍제전서의 기록을 보면 각 문중에 대하여 정조임금이 내원(內苑)의 행사 때 마다 초청하셨을 것으로서 초청을 받은 당시 각 가문에서는 쟁쟁한 실력이 있는 일가를 행사장으로 보냈을 것으로서 우리 기계유문의 경우 당내 친족들 중 행사장 참예자를 뽑아 보내면서 현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문학의 경지에 있어서 즉문즉답할 정도의 인테리겐차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어려운 자리에 참예를 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음으로 충분히 타 문중과 겨루어 지지는 아니할 것이라는 문중의 자신감[즉지헌공(諱 彦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유한녕(兪漢寧)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의 내용>
UCI G002+AKS-KHF_13C720D55CB155B1743X0
자 자안(子安)
생년 : 1743(영조 19)
졸년 : 을유 7월
시대 : 조선 후기
본관 : 기계(杞溪)
활동분야 : 문신
[관련정보]
[문과] 정조(正祖) 7년(1783) 계묘(癸卯)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18위(28/38)
[생원시] 영조(英祖) 50년(177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9위(59/100)
[상세내용]
유한녕(兪漢寧)에 대하여
1743년(영조 19)~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자안(子安)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증조는 유명악(兪命岳)이고, 조부는 영조대의 유명한 재상이자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이다. 부친은 통덕랑(通德郞) 유언진(兪彦鉁)이며, 생부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유언상(兪彦鋿)이다.
1774년(영조 50) 생원진사시에서 생원 3등 29위로 입격하였으며, 1783년(정조 7)에는 병과 18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779년(정조 3)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재직 중 영남 암행어사 황승원(黃昇源)에 의해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한 죄로 논핵 당하였다. 1783년(정조 7)에는 문과에 급제한 후 고(故) 정승 유척기(兪拓基)의 손자라 하여 특별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이후 1793년(정조 17)에는 경사가 겹치는 와중에 하늘의 명을 이어가는 방도로 막힌 자들을 소통하고 침체한 이들을 진작시키기 위해 이조와 병조에 하명하여 수십 명의 인원을 추천하게하여 서용하였는데, 이때 유한녕(兪漢寧)도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며,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용되었다. 그러나 승지에 임용된 후 근밀한 자리에 있으면서 정조의 고심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파직되었으나, 서정수(徐鼎修)의 신구(伸救)로 구원되었다. 1795년(정조 19)에는 혐의를 피하려는 계사(啓辭)를 받아들인 죄목으로 경기 연해로 유배에 처해졌다. 1799년(정조 23)에는 면죄되어 다시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다. 1800년(정조 24)에는 언로를 여는 것이 급선무임을 상소하였다. 1800년(순조 즉위년)에는 대사간으로서 역의(逆醫) 강명길(康命吉)을 붙잡아 국문할 것을 합계(合啓)하였으며, 1801년(순조 1)에는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체제공(蔡濟恭)을 추탈(追奪)하는 법을 결단성 있게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집필자]
나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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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것을 알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자료 발췌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맨 아래에 게재하신 대사간공(휘 유한녕)은 자교당공(휘 명뢰)의 증손으로 우리가(家)로 양자로 입적하셨기 나의 7대조부가 되십니다. 자료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번 귀양도 가셨습니다만, 원래가 우리 성씨의 대쪽같은 성격으로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으셨다고합니다. 아쉬운 것은 문익공께서 자손들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하신 유언에 따라 비석들이 없어 공의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으나, 짐작이 가는곳이 있어 지난해 부터 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종손인 웅(휘 熊)이 형과 내가 건강이 안 좋아 확인을 하지 못하였으나 더 건강이 나빠지기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확인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