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4월 15일 월요일(음력 3월 6일 辛亥)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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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04/15 |
경회루 낙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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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4/15 |
주시경, <국어문법>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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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04/15 |
천주교 전주.광주교구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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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04/15 |
제1회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 경성에서 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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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04/15 |
해병대 창설 / 지방자치법 국회통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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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04/15 |
제2차 한-일회담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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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04/15 |
제4차 대한민국-일본 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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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04/15 |
학기제 변경, 학년초를 4월 1일에서 3월1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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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04/15 |
납북되었다 귀환하던 제2 선승호 침몰 11명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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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04/15 |
주월한국군 위한 퀴논 방송국 개국. 주파수 1,400KHZ, 출력 50W로 외국 땅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 방송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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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4/15 |
중앙선관위, 6대 대선 팜플렛 회수, 소각 지시.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계몽용 만화 팜플렛 250만장을 제작,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이 만화 속에 작게 그려진 태극기의 네 괘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기호인 III번과 비슷하여 결과적으로 그를 선전하는 인상이 풍긴다며 부산 선관위에서 이의를 제기. 중앙선관위에서는 4월 15일 192만원의 제작비가 든 팜플렛을 회수하여 태워버리도록 전국 산하 기관에 지시하였다. 그러자 대통령 후보 기호가 결정되기 3일전에 만화를 그렸던 안의섭씨는 4월 18일자 <조선일보>에 군인들의 군모에 부착된 계급장인 작대기(二)는 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느냐는 반박 만화를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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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04/15 |
한국여성연합회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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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04/15 |
공화당, 양순직등 항명의원 5병 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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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04/15 |
호남고속도로 기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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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04/15 |
북한, 김일성 탄생 60주년 기념행사-민족적 대명절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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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04/15 |
성수대교 착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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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04/15 |
상공부, 대폭 수입자유화 조치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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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04/15 |
북한, 주체사상탑 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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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04/15 |
평화방송(PBC) 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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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4/15 |
대한항공 화물기 상하이서 폭발. | |
4월 15일 오늘의 역사
1412 경회루 낙성
1437 (조선 세종 9) 일성정시의 완성
1849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885 영국 극동함대, 거문도를 불법 점령 1910 주시경, <국어문법> 간행 1912 북한 김일성 출생
1916 신학자, 감리교 목사 박대선 朴大善 출생 1919 일본군,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주민 집단 학살
1925 우리 나라 최초의 전조선 기자대회 (15일~17일)
1931 신학자 서광선 徐洸善 출생 1938 제1회 전국도시대항축구대회 경성에서 열림 1949 해병대 창설 1951 전국에 전염병 만연
1953 제2차 한일회담 개최
1958 제4차 한일회담 개최
1959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인 부산 문화방송(HLKU) 개국
1959 세계탁구대회 소녀부서 조경자 우승
1961 한국-포르투갈 국교수립 1961 학기제 변경, 학년초를 4월 1일에서 3월1일로 1966 주월한국군 위한 퀴논 방송국 개국 주파수 1,400KHZ, 출력 50W로 외국 땅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 방송 시작 1966 한국 은행. 적립시 정기예금제 실시 1967 중앙선관위, 6대 대선 팜플렛 회수, 소각 지시 1967 YMCA(대한기독교 청년회 연맹) 회관 완공
1969 공화당 양순직 등 항명의원 5명 제명 1969 미국 정보기 EC 121기, 동해의 북한 영공에 들어가 대공포에 피격 추락 31명 사상 격추당함 1970 호남 고속도로 기공 1972 북한, 김일성 탄생 60주년 기념행사-민족적 대명절로 지정
1977 금수산 의사당(주석궁) 준공 1977 성수대교 착공 1978 상공부 대폭 수입자유화 조치 발표
1979 전(前)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1982 교회산업선교회.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성명 발표 1982 북한, 주체사상탑 완공 1987 서울 지검, 이철 의원 국가모독죄로 전격 기소 1990 평화방송(PBC) 개국 1991 기초의회 개원 지방자치제 30년 만에 부활
1991 한국-투르크메니스탄 통상경제협력협정 체결
1991 도서상품권제도 시작
1992 수혈로 AIDS감염된 20대 자살 1995 민자당 정책연구기관 여의도 연구소 개소
1998 ‘사진의 날’ 제정 선포식
1999 프로야구 LG 김용수 선수 국내 최초 100승-200세이브 달성
1999 대한항공 화물기 중국 상해 홍차오공항 인근에서 추락
2000 산불로 강원도 고성군 -삼척시 -강릉시-동해시와 경북 -울진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
2002 중국 여객기 김해서 추락
2003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 범죄자 일본에 첫 신병인도
2004 제17대 총선 16년 만에 여대야소 등장
2005 노무현 대통령 수교후 터키 첫 방문
2006 일본이 한국측 EEZ를 침범하려고 함.
2007 ‘반FTA’ 분신 허세욱씨 끝내 숨져
2008 이명박 대통령 미-일 순방길(15~21일)
2009 '따로 또 같이' 출신 이주원씨 별세
2010 해군 링스 헬기 추락
2010 서울산업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해 외 1452 이탈리아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태어남 1707 스위스 수학자 오일러(1707-1783) 태어남 '오일러의 공식'을 구한 오일러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1764 폼파르두 부인 세상 떠남. 루이 15세의 연인이며 사치로 국고를 낭비하여 국민의 원성을 샀다.
1800 영국 해군 장교 로스(Ross, Sir James Clark) 출생
1843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Henry James) 출생 1865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 세상 떠남
1943 미국에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연구소 개소 (소장 오펜하이머)
1954 일본 -필리핀 배상에비협정 조인
1962 유럽 공동시장 설치
1964 그리스 -터키 키프러스섬에서 총격전
1966 북유럽 일대 폭설
1977 1920년대 제작 민항기 고별 비행
1980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사망
1981 워싱턴포스트지,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미의 세계’ 기사가 허위기사라고 보도해 파문
1983 도쿄 디즈니랜드 개원
1985 남아프리카공화국 잡혼금지법 철폐 1986 미국, 리비아 폭격 1989 영국 힐스버러 축구경기장 참사 사고 발생 94명 사망 2백여 명 부상 1989 호요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망 1990 스웨덴 태생의 미국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세상 떠남 1997 메카순례자 캠프서 대형 화재 발생 1998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지도자 폴 포트(73세) 심장마비로 세상 떠남
2002 동티모르 첫 대통령에 구스마오
2003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아부 압바스 체포
2004 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데루 별세
2010 - 서울산업대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서울산업대학교(서울産業大學校, Seoul National University of Technology, SeoulTech)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소재한 두개의 국립 종합대학 중 하나이다. 공과대학, 자연생명과학대학, 조형대학, 인문사회대학의 4개 단과대학과 산업대학원, 주택대학원, IT디자인대학원의 3개 특수대학원, 철도전문대학원, IT정책전문대학원, 에너지환경대학원의 3개 전문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립 종합대학교이다.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산업대는 2010년 4월 15일에 개교 100주년을 맞아, 일반대학 전환 예정과 교명변경(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선포식을 하였다. 2010년 9월부터 서울과학기술대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변경되며, 2011년 3월에는 일반대학으로 전환할 예정이다. /위키백과
2009 - '따로 또 같이' 출신 이주원씨 별세
‘네 꿈을 펼쳐라’ 작곡 이주원씨 별세
포크그룹 ‘따로 또 같이’ 출신 싱어송라이터 이주원(사진)씨가 15일 오후 6시45분 별세했다. 향년 61.
유족들은 고인이 4~5년 전부터 전립선 관련 질병과 우울증 등을 앓아오다 이날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16일 밝혔다.
서울대 체육학과 출신인 고인은 양희은의 ‘네 꿈을 펼쳐라’, ‘한 사람’, ‘내 님의 사랑은’, ‘들길 따라서’ 등의 포크 발라드를 작사·작곡했으며 1979년 전인권·강인원·나동민과 함께 ‘따로 또 같이’를 만들어 활동했다. 90년대 초반부터 강화도 인근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유족으로는 샹송 가수인 부인 전마리씨와 아들 준희씨가 있다. 빈소는 부평세림병원, 발인은 17일 오전 8시다. (032)508-1347.
한겨레 2009-04-16 오후 10:37:18
2008 - 이명박 대통령 미-일 순방길(15~21일)
이 대통령, 오늘 취임 후 첫 해외 순방
<앵커 멘트>
이명박 대통령이 오늘부터 취임후 첫 해외 순방길에 오릅니다.
이 대통령은 이번 순방기간 한미,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전통적 동맹 관계를 복원하면서 경제 외교에 시동을 걸 예정입니다.
이석호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이명박 대통령이 오늘부터 7일간의 일정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합니다.
이 대통령은 먼저 뉴욕에 도착해 뉴욕증권 거래소를 방문하고, 투자설명회를 갖는 등 경제 외교에 주력합니다.
이어 워싱턴으로 옮겨 정계 지도자들과 연쇄 회동을 갖고, 오는 19일엔 우리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어 오는 20일에 일본에 도착한 뒤 다음날인 21일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현안을 논의한 뒤 귀국합니다.
<녹취> 이명박 : "전통적 우방국들과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고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변영을 위한 방안에 대해 깊이있는 의견을 나눌 것입니다"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북핵 공조 강화와 한미 FTA 비준, 미래동맹 비전 마련, 비자 면제 프로그램 가입 등입니다.
그러나 미국측은 쇠고기 전면개방과 주한미군 분담금 증액 아프간 파병, PSI, MD 참여 등 다양한 요구를 내놓을 것으로 알려져 절충 과정이 주목됩니다.
한일정상회담에선 북핵 사태 공조 방안과 정상간 셔틀외교 복원 등이 논의될 예정입니다.
이 대통령은 이번 순방기간 동안 40여 개의 공식일정을 소화한 뒤 오는 21일 귀국합니다.
KBS 뉴스 이석호입니다.
이석호 기자 /KBS 뉴스 2008.04.15 (05:52)
2007 - ‘반FTA’ 분신 허세욱씨 끝내 숨져
1일 분신한 민주택시노조연맹 소속 택시기사 허세욱씨가 지난달 30일 청와대 앞에서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참여연대 제공 /한겨레
택시노동자로 활발한 사회참여…장례절차 논의중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막바지 협상이 진행되던 지난 1일 협상장 근처에서 분신을 시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온 허세욱(54)씨가 15일 오전 11시23분께 숨졌다.
`한미FTA 무효 민중민주 노동열사 허세욱 동지 장례대책위원회'는 이날 "유족이 대책위에 알리지 않고 허씨의 시신을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에서 경기 안성 성요셉병원으로 옮겼다"며 "현재 허씨의 장례절차 등 대책을 논의 중이다"고 밝혔다.
허씨의 수술과 치료를 담당했던 한강성심병원은 "오늘 오전 허씨가 갑자기 호흡 곤란을 일으켜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끝내 숨졌다"며 "직접적인 사인은 패혈증"이라고 말했다.
대책위는 장례 문제 등으로 허씨의 유족과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으나 유족이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책위는 "허씨는 자기 몸을 버리면서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코자 한 사람"이라며 "예우를 갖춰 열사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문제, 빈소를 한강성심병원에 마련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대책위는 "허씨의 죽음은 전적으로 노무현 정권 탓이고 한미FTA 무효화와 노 정권 퇴진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칠 것"이라며 이날 오후 7시부터 한강성심병원 정문 앞에서 `한미FTA 무효 허세욱 동지 촛불 추모제'를 열기로 했다.
서울 H운수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해 온 허씨는 민주노총 조합원과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으며 경기 안성이 고향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일 서울 한남동 하얏트 호텔 정문 앞에서 인화성 물질을 붓고 불을 붙여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은 허씨는 4일 가족의 동의 아래 한강성심병원에서 피부 이식수술 등 치료를 받았으나 숨졌다.
임은진 기자 engine@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4-15 오후 01:31:48
2006 - 일본이 한국측 EEZ를 침범하려고 함.
배타적 경제 수역(排他的經濟水域, exclusive economic zone, EEZ)은 유엔 해양법 조약에 근거해서 설정되는 경제적인 주권이 미치는 수역을 가리킨다. 연안국은 유엔 해양법 조약에 근거한 국내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자국의 연안으로부터 200해리(약 370km)의 범위 내의 수산자원 및 광물자원 등의 비생물자원의 탐사와 개발에 관한 권리를 얻을 수 있는 대신 자원의 관리나 해양 오염 방지의 의무를 진다. 하지만 영해와 달리 영유권이 인정되지 않아 선박 항해의 경우, 경제 활동의 목적이 없어야 가능하다. 통신 및 수송을 위한 케이블이나 파이프의 설치도 가능하다.
한•중•일 삼국의 분쟁권 마찰
대한민국과 일본, 중국은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작은 섬들이 많고 독도와 같은 영유권 분쟁이 있는 까닭에 배타적 경제수역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위키백과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수교후 터키 첫 방문 2005년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1957년 수교 후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터키를 공식 방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제르 대통령, 에르도안 총리와 잇따라 회담을 갖고 경제교류와 투자증진, 정보기술, 방위산업분야 등 양국간 실질 협력관계 강화 방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협의했다. 또 터키와 가까운 이라크 내 자이툰 부대의 원활한 활동과 안전을 위한 협력체제 구축도 논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히 한국전에 참전한 오랜 혈맹국인 터키와 유대를 더욱 강화하면서 이슬람권에 우리나라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YTN
2004년] 제17대 총선, 16년 만에 여대야소 등장 대한민국 17대 총선은 대한민국 제17대 국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이다. 2004년 4월 15일에 실시하였고 총 299명(지역구에서 243명, 비례대표인 전국구에서 56명)을 선출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새천년 민주당 당적 이탈과 열린 우리당 창당, 한나라당의 불법 대선 자금 수수, 그리고 헌정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건들이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이 치러졌다. 이번 총선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과거 지역구 투표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정하던 방식을 탈피하여 지역구 투표와 비례대표 투표를 분리한 1인 2표제를 최초로 도입했다는 점이었다. 총선 결과 전국 선거인수 35,596,497명 중 21,581,550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60.6%를 기록하였으며 이는 지난 16대 총선의 투표율 57.2%와 비교하면 높고, 2002년 대선의 70.8%에 비교하면 낮은 수치이다. 지역구 선거결과 한나라당 100석, 민주당 5석, 열린우리당 129석, 자민련 4석, 국민통합21 1석, 민주노동당 2석, 무소속 2석 획득 비례대표 선거결과 한나라당 21석, 민주당 4석, 열린우리당 23석, 민주노동당 8석 획득 총합계 열린우리당 152석으로 당시 원내 제1당, 한나라당 121석으로 제2당, 민주노동당 10석으로 제3당.
2004 - ‘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 별세
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씨. /조선
‘요술공주 새리’ 작가 요코야마 미쓰테루 별세
1970년대 우리나라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소개돼 큰 인기를 모았던 ‘철인 28호’ ‘요술공주 새리’ ‘바벨2세’ 등의 원작만화가 요코야마 미쓰테루(橫山光輝)가 2004년 4월 15일 자택에서 일어난 화재로 숨졌다.
요코야마씨는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최고의 대중만화가’로 평가받으며 일세를 풍미한 유명만화작가다. 동시대에 활동하며 인간의 모습을 고찰했던 ‘아톰’의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 등에 비해 작품성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만화적 흥미면에서는 탁월한 작품을 연달아 발표하며 큰 인기를 모았다.
1956년에 발표한 ‘철인 28호’는 소년만화의 한 장르를 이루는 ‘대형 로봇물’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1970년대 중반 국내에 ‘요술공주 새리’란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된 ‘마법사 사리’는 역시 만화의 한 장르인 ‘마법소녀물’의 효시 격이 됐다. 그의 작품 ‘바빌 2세’는 같은 70년대 한국 소년잡지에 ‘바벨2세’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며 한국에 숱한 아류작을 만들어내는 등 한국 만화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의 만화들은 최근 일본에서 1950년대 복고바람이 불면서 활발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조선
2003 -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아부 압바스 체포
팔' 게릴라지도자 아부 압바스 바그다드서 체포
지난 85년 이탈리아 유람선 아킬레 라우로 납치사건을 주도했던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아부 압바스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체포됐다고 미국 관리들이 15일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관리는 "그는 바그다드에서 연합군에 의해 체포됐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집행위원이며 급진단체 팔레스타인해방전선(PLF) 지도자인 압바스는 아킬레 라우로호 납치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이탈리아 법정에서 5차례나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워싱턴 AFP.AP=연합뉴스) /기호일보 2003년 04월 16일 (수) 13:32:17
2002 - 동티모르 첫 대통령에 구스마오
- 동티모르 첫 대통령에 구스마오
다음달 20일 21세기 첫 독립국가로 탄생하는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에 독립영웅 사나나 구스마오(56·사진)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구스마오는 15일 시작된 대통령 선거 개표에서 80% 이상의 압도적 지지로 사비에르 도 아마라(65) 티모르사회민주연합 총재를 누르고 당선될 것이라고 외신들이 이날 전했다. 전날 치러진 투표에는 유권자 43만9천명 가운데 86.3%인 37만9천명이 참가했으며, 282개 투표소에는 2천여명의 외국인 및 현지 감시단이 투표상황을 감시했다. 구스마오는 9개 정당의 연합후보로 출마했다.
구스마오는 애초 사제를 꿈꿨으나 1975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한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 강제 편입되자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어 86년 독립운동 최고기구인 동티모르 민족해방군 사령관에 오른 그는 92년 인도네시아 정부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동티모르인들이 그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며 사진을 간직하고 다닐 만큼 확고한 지도자가 됐다. 그는 99년 9월 석방됐으며 그해 10월 인도네시아군이 동티모르에서 철수한 뒤 해방 동티모르 건설에 앞장섰다.
그는 2000년 5·18기념재단이 선정한 `광주인권상'의 첫 수상자로 11월 광주를 방문한 바 있다. 5·18 당시 광주와 비슷한 정치적 상황에서 민병대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유혈사태를 최소화했으며, 동티모르 독립에 반대하는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저지른 만행의 상흔을 청산했다는 게 수상 이유였다.
정재권 기자jjk@hani.co.kr /한겨레 2002.04.15(월) 20:17
2002년] 중국 여객기 김해서 추락 ← 사고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항공기 잔해를 뒤지며 생존자를 찾고 있다.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22분쯤 에어 차이나(AIR CHINA·중국국제항공공사) 소속 CA-129편 보잉 767-200 여객기가 김해국제공항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경남 김해시 지내동 동원아파트 뒤편 신어산 기슭의 돗대산 정상 부근에 추락했다. 사고 항공기엔 한국인 136명과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19명 등 승객 155명과 승무원 11명 등 모두 166명이 타고 있었으나, 이들 중 119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됐으며 38명이 생존한 것으로 집계됐다. 생존자 38명은 전체 탑승객의 23.5%로 항공사고 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편이다. 이날의 사고는 조종사인 우신루 기장의 조종미숙으로 밝혀졌다. 기장 우신루는 사고 직전 김해공항 상공에서 처음 ‘서클링’(circling·방향선회)을 해본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우신루 기장은 통상 1.7마일(3.14km)에서 서클링을 해야 함에도 더 먼거리에서 방향을 선회하다 돗대산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충돌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선
중국여객기 경남 김해서 추락 승객과 승무원 166명을 태우고 2002년 4월 15일 중국 베이징을 출발해 김해공항에 착륙하려던 중국 여객기가 악천후 속에서 공한 인근 돗대산에 추락해 120여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사고기는 이날 오전 9시37분 베이징을 출발해 오전 11시35분경 김해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사고 항공기 추락직후 기체가 폭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는 조종사에게 낮선 김해의 지형과 기상문제(폭우, 돌풍)가 얽힌 가운데 조종사가 순간 판단 실수로 선회지점을 지나쳐 동체가 산 정상에 부딪히며 추락한 것이 원인이었다.
2000 - 산불로 강원도 고성군-삼척시-강릉시-동해시와 경북 울진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
강원도 고성군에서 발행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급속히 번지고 있다. /조선
산불로 강원도 고성군-삼척시-강릉시-동해시와 경북 울진군,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
강원도 고성-강릉-삼척 등 영동지방에서 2000년 4월7일 처음 발생한 산불이 진화와 재발이 반복되면서 대형 산불로 이어져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정부는 2000년 4월 15일 이들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특별재난지역 선포는 1995년 7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이후 처음이었다.
동해시와 경북 울진군까지 확산돼 원전 2호기가 일시 중단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한 산불은 15일 강원도 일원에 내린 비로 완전 진화됐다. 9일간 계속된 게릴라성 산불로 2명이 숨졌고 16명이 부상했다. 또 산림 1만4272ha(고성 2439, 강릉 1108, 삼척 8375, 동해 2350ha)가 불에 타고 주택 368채 등 건물 614동이 파괴됐으며 이재민 846명이 발생했다. 한편 기상청의 위성사진 분석결과 북한에서도 남한 산불과 비슷한 규모의 산불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1999년 : 프로야구 LG 김용수 선수 국내 최초 100승-200세이브 달성 1999년 4월 15일 LG 트윈스 김용수 선수가 국내 최초로 100승과 200세이브를 동시에 달성하는 위업을 이뤄냈다. 세계 프로야구 사상 다섯 번째다. 김용수는 1999년 4월 15일 인천구장에서 열린 현대와의 원정경기에서 8대 5로 앞선 9회말 등판, 세 타자를 범타로 처리하고 1985년 입단 후 15시즌 만에 200세이브 고지를 밟았다.
1998 - ‘사진의 날’ 제정 선포식
‘98사진영상의 해 조직위원회(위원장林應植·임응식)는 15일 오전 10시 서울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사진의 날’제정 선포식과 기념행사를 가졌다. 林위원장은 선포식에서 “앞으로 매년 4월15일 모든 사진인과 사진을 사랑하는 국민이 함께 모여 사진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고, 21세기 문화예술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도약할 사진의 미래상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사진의 날 선포문’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趙炳華(조병화)예술원 회장, 韓光玉(한광옥)국민회의부총재,李明福(이명복)예총회장,鄭寬鉉(정관현)사진박물관 건립후원회장 등을 비롯해 각 사진단체 회원 1천여명이 참석했다. 부대행사로는 사진작가 50명이 참여한 실업기금 마련 사진전,스포츠사진전, 사진을 주제로 한 놀이마당, 시진촬영대회 등이 열렸다.
<吳愛里기자> /문화일보 1998-04-15 '사진의 날' 기념대회 '98 사진영상의 해
1997년 말에 결성된 `‘98 사진영상의 해 조직위원회’는 1998년 1월 14일 오전11시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송태호 문화체육부 장관 및 임응식 조직위원장, 사진계, 예술계를 총망라하여 1,0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사진의 기반조성과 한국사진사 120년의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며 한국적 사진영상의 독창성을 모색하고, 21세기 한국 사진문화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사진영상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변화의 전기를 마련하며 제3영상 시대에 대비하고 온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의 한마당을 펼치는 데 있다고 강조하며 개막 선포식이 열렸다.
조직위원은 임응식, 이봉하, 이명동, 이경모, 홍순태, 한정식, 이철규, 이봉섭, 양세민, 유경선, 조유성, 주명덕, 강봉규, 박현기, 최민, 임동일, 하진규, 김용문, 집행위원은 구성조, 김영수, 김종호, 박성복, 박재건, 박주석, 백현기, 심동주, 오강석, 오형근, 이병훈, 이성우, 이원곤, 정인숙, 조의헌, 조태병, 최인진, 최재영, 홍계인이다.
사업개요는 「’98 사진영상의 해 선포식」이 1월 14일에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대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사진의 날 기념대회」가 4월 15일에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조병화 예술원장, 하진규 문화관광부 예술진흥국장, 임응식 조직위원장, 조직위원, 집행위원, 사진인 등 1,000여 명이 참석, 「’98 사진영상 축전」은 5월 28일∼8월 7일 테크노마트 종합홍보전시장 및 드림랜드 야외마당에서 한국 사진가 1,000명이 참석, 외국 사진가전이 있었고, 사진영상 모델 선발대회, 보디 페인팅 촬영대회, 추억의 웨딩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진전」은 7월 2일부터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정부수립 50년간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275점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남북 산하 사진전」은 9월 7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전시실에서 개최되었으며 남한 사진가의 작품 130점, 북한 사진가의 작품 110점이 전시되었고 지방 순회전도 가졌다.
「21세기 사진영상 학술대회」는 9월 25일부터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으며 주관은 ‘한국사진학회’, 발표자, 토론자 포함하여 150여 명이 참석, 일반인은 900명이 참석했다. 전국민 사진 찾기 운동은 묻혀 있는 중요한 사진사적 자료를 수집하고자 발간하고 사진 문화재를 데이터베이스화할 예정이다. 「한국 사진역사전」은 11월 20일부터 12월 19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으며 무려 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사진의 시각적 확장전」은 12월 22일부터 99년 1월 24일까지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새로운 장르의 수용에 의미가 있었다. 전국민 사진축제로는 사진 공모전, 지방 지원행사가 있었다.
筆者 : 홍순태 (사진작가)
1998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지도자 폴 포트(73세) 심장마비로 세상 떠남
킬링필드 폴포트 사망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주역이었던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가 1998년 오늘 폴 포트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둡니다. 1975년부터 4년동안 집권하면서 이상적 공산주의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양민 2백만명을 죽음으로 내몬 폴포트는 베트남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쫓겨난뒤 밀림에서 반정부 전투를 벌여왔었습니다. 폴포트가 숨지자 크메르 루즈 병사 대부분이 캄보디아 정부군과 반정부군에 투항하고 11개월뒤엔 마지막 지도자 타목마저 정부군에 체포되면서 한때 위세를 떨쳤던 크메르 루즈는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폴 포트의 시신은 사망 다음날 크메르 루즈의 거점이던 북부 안롱 벵의 정글에서 가족과 측근 몇명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화장됩니다.
~ 75-79년 집권 당시 200여만 명 주민 학살한 킬링 필드의 주역인 폴 포트는 밀림의 한 오두막에서 가족과 측근 몇 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폴 포트와 함께 크메르를 이끌었던 키우 삼판, 누온 체아 등이 훈 센 정부에 투항하면서 크메르 루즈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200여만 명 학살의 핏자욱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이다~.
1997 - 메카 순례자 캠프서 대형 화재 발생
`하지`에 참석한 순례자들로 붐비고 있는 메카. /조선
- 메카 순례자 캠프서 대형 화재 발생
회교 성지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방문한 순례자들 캠프에 1997년 4월 15일 큰 화재가 발생했다. 전세계 회교도들의 연례 순례행사인 `하지`에 참석한 순례자들을 위해 메카 인근 미나에 마련된 캠프에서 발생한 이 화재로 2백50여명의 사망자와 2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순례 의식 도중 발생하는 대형 사고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94년 5월에는 압사사고가 일어나 주로 인도네시아 출신 이슬람교도 2백70명이 사망했고 1990년 7월에는 순례용 보행자 터널에 신도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말레이시아인, 파키스탄인 등 1천4백26명이 뒤엉켜 숨을 거뒀다. 희생자 수가 많은 것은 무엇보다 제한된 지역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으로 알려진 이슬람의 기본의식과 실천의무들 중 5번째 의무로 마호메트가 탄생한 성도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이 순례의식은 이슬람력의 마지막 달인 `순례의 달` 7일부터 엿새 간 진행된다. /조선
1990 -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설립한 평화방송(PBC) 개국
평화방송(平和放送)은 천주교회에서 경영하는 대한민국의 위성방송 및 FM 라디오 방송국이다. 1990년 서울특별시에서 방송국으로 설립되었으며, 대주주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이다. 현재 광주광역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에 방송국을 설치했으며, 울산광역시, 포항시, 안동시, 여수시에 중계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위성 TV 방송도 설립해 운영·방송 하고 있다. 주로 성서고고학, 가톨릭 뉴스등의 종교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초기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인 강완숙, 김대건 신부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연혁 /위키백과
1990년] 스웨덴 출생의 미국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Garbo, Greta) 사망 ←〈카미유〉(1936)에서 가르보 [Garbo, Greta, 1905.9.18~1990.4.15] 본명은 그레타 루이자 구스타프손(Greta Louisa Gustafsson). 스웨덴 스톡홀름 출생. 1922년 백화점 점원이었다가 영화계에 데뷔, 1923년 《예스타 베를링의 전설 The Story of Gosta Berling》의 주연으로 뽑혔다. 1925년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 MGM의 인기스타로 오랫동안 은막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우수(憂愁)를 머금은 듯한 미모와 어딘지 불행한 면모가 엿보이는 쓸쓸한 분위기는 그녀 자신까지도 폐쇄적인 성격으로 만들었으며, 1928년 연인인 감독 모리츠 스틸레르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36세 때 연예계에서 은퇴, 뉴욕에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무성영화시대의 대표작으로 《육체와 악마 Flesh and the Devil》(1927) 《안나 크리스티 Anna Christie》(1930) 등이 있으며, 유성영화시대 이후의 대표 주연작으로 《마타하리 Mata Hari》(1931) 《그랜드 호텔 Grand Hotel》(1932) 《크리스티나 여왕 Queen Christina》(1933)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935) 《춘희(椿姬) Camille》(1936) 《니노치카 Ninotchka》(1939) 등이 있다.
1989년] 호요방(胡耀邦 후야오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사망 ← 후야오방
1915. 11. 중국 후난 성[湖南省] 류양[瀏陽] ~ 1989. 4. 15 베이징[北京].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후야오방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14세 때 집을 떠나 공산당원들과 어울렸고, 1933년 공산당 일원이 되었다. 후에 마오쩌둥(毛澤東)과 주더(朱德)가 이끄는 홍군에 가담하여 초급장교로 복무하였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마오와 주더를 대신하여 당권을 장악한 친소련성향의 지도부("28인의 볼셰비키")는 마오에 충성하던 그의 성향을 불신하여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다른 지도자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그후에도 성향을 의심당해 대장정에도 처음에 참가를 거부당했으나, 작전중 부상당해 친구의 도움으로 부상자로서 후송되게 되었다. 이후 장궈타오(張國燾)의 부대의 일원으로서 대장정에 참가하였지만, 그의 부대가 국민당에 충성하는 회족 마부팡 군벌군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다. 이후 마부팡의 영지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다른 포로와 함께 탈주해서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으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당에 연결된 정치장교로 홍군에서 복무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지방의 당과 행정기관을 오가며 일하다 1975년 중국과학원 부원장을 맡으며 중앙에 진출하였다. 1977년에는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의 요직을 맡으며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원를 받아 중국 최고지도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고, 1981년에는 중국공산당 주석을 맡았다. 이후 주석직이 폐지되고 총서기제가 도입되어 그는 계속 총서기를 맡았다. 그는 급진개혁파로서 자유화를 시도하였으나, 보수적인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1987년 사임을 강요당해 자리에서 물러나고 후임 총서기는 자오쯔양(趙紫陽)이 맡았다. 1989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고, 그를 추모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5.4운동 70주년을 맞아 베이징에서 집회를 열어 전면적인 자유화를 요구하였으나, 원로그룹의 결단으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집회를 방문하여 이들에게 동정적 발언을 한 자오쯔양도 실각하였다.
1989 - 영국 힐스보로 축구장서 관중 96명 사망
[어제의 오늘]1989년 영국 힐스보로 축구장서 관중 96명 사망
ㆍ‘구름 관중’ FA컵 준결승전 참사
쾌청하고 햇볕 가득했던 1989년 4월15일 오후 2시30분, 영국 셰필드의 힐스보로 경기장. 사람들은 30분 후 시작될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을 보기 위해 속속 입장했다. 힐스보로는 두 팀의 연고지가 아닌 제3지역 경기장으로 양팀은 그 전 해에 이어 같은 장소에서 준결승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니 만사 제쳐두고 가야 할 ‘빅매치’였던 거다. 리버풀에서 온 팬들도 정오부터 관중석(철제 울타리로 둘러쳐져 ‘우리’라 불린다)을 메우기 시작했다. 울타리는 그라운드로 뛰어드는 ‘훌리건’들을 막기 위해 70~80년대 많은 축구클럽들이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경기 시작을 앞두고 경기장 한 쪽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리버풀측 관중석에서였다. 으레 있는 소란이겠거니 판단한 주심은 3시 정각 휘슬을 불었다. 경기는 5분도 지속되지 못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리버풀 팬 때문에 맨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울타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고, 이내 울타리가 무너지며 사람들이 쏟아져내린 것이다. 경찰이 그라운드에 뛰어들어 주심에게 경기 중단을 요구했다. 우왕좌왕 하는 와중에 구급차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 순식간에 96명이 숨졌다. 대부분 리버풀 팬들이었다. 사고 직후 리버풀 팬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술에 취한 채 늦게 몰려든” 리버풀 팬들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경찰 발표가 나오면서다. 언론들도 리버풀 팬의 촌스러운 행동과 의식이 사고를 자초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두번 죽임을 당한 느낌이었다. 단체버스로 도착한 리버풀 팬들은 주차장을 찾느라 늦어서 경기 시작 후에도 계속 들어왔고, 경기장 구조에 익숙지 않아 우왕좌왕했던 것. 16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한 ‘우리’에 3000명이 들어간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질서 유지를 맡은 경찰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상자 구호를 제 때 못한 구급요원들도 잘못이 있었다. 경기장 시설과 리그 일정 등의 개선점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고, 이를 토대로 199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탄생했다. 어린 아들 딸을 잃은 유족들은 여전히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낀다. 유족회는 당시 치안 책임자인 경찰서장을 과실치사 혐의로 고소하고, 유럽 인권재판소에 진정도 해둔 상태이다. 참사 20주기를 맞은 작년 노동당 정부는 진상 재조사를 위해 독립 조사위원단을 꾸렸다. 매년 4월15일 영국 내 축구경기는 묵념과 함께 시작한다. 진상은 아직도 규명 중이다.
손제민 기자 /경향신문 2010-04-14 17:47:07
[어제의 오늘]1989년 힐스보로 참사ㆍ‘무서운 응원’의 비극
1989년 4월15일은 세계 축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슬픈 날이다. 이날 영국 셰필드의 힐스보로 경기장에서 일어난 사고로 축구팬 96명이 사망했다.
이날 오후 3시 중립지역인 셰필드의 힐스보로 경기장에서는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열릴 예정이었다. 열광적이기로 소문난 리버풀의 팬들은 경기장으로 몰려들었으나 1명씩 통과해야 하는 철제문 때문에 입장이 원활치 않았다. 경기장 입구에는 병목 현상이 생겼고, 관중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경기 시간이 다가와 경기장 안쪽에서 응원 소리가 높아지자 스타디움 바깥의 팬들은 경기 시작을 놓칠까봐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경기는 시작한 지 6분 만에 중단됐다. 그러나 몰려든 팬으로 철제 펜스가 무너졌고, 이 과정에서 수백명의 사람이 깔려 96명이 사망했다. 현재 리버풀의 핵심 선수인 스티븐 제라드도 이때 사촌을 잃었다. 리버풀 팀과 관련한 사망 사건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8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39명이 사망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최정상의 팀이었던 리버풀은 헤이젤·힐스보로 참사 이후 한동안 내리막길을 걸었다. 힐스보로 참사는 ‘예고된 인재’였다. 엄청난 군중 앞에 경찰은 통제력을 잃었다. 훌리건의 경기장 난입을 막기 위해 설치됐던 철제 펜스는 관중을 깔아죽인 흉기로 돌변했다. ‘테라스’라 불리는 입석 문화도 문제였다. 하층 계급 젊은이가 중심이 된 과열된 축구 응원문화도 참사의 한 요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잉글랜드의 축구장은 테라스를 없애고 좌석을 놓았다. 축구 문화도 조금씩 바뀌어, 요즘의 축구장에는 성인 남성뿐 아니라 여성, 어린이 팬도 적지 않다. 힐스보로 참사는 엉뚱하게 ‘언론과의 전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영국의 타블로이드지 ‘선’은 참사 다음날 “일부 팬이 희생자의 지갑을 훔쳤다”, “일부 팬이 경찰에게 오줌을 누었다”는 등의 미확인 사실을 보도했다. 분노한 리버풀 주민들은 선의 구독을 취소했고, 심지어 선을 판매하는 상점을 보이콧했다. 선지는 매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지금까지 힐스보로 이전의 판매부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4-14 17:55:07
1986 - 미국, 리비아에 테러보복 폭격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리비아기./조선
- 미국, 리비아에 테러보복 폭격
1986년 4월 15일 오전 2시 1백50여대의 미공군기들이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공격했다. 단일 폭격으로는 제2차대전 이후 최대규모였다. 폭격으로 카다피의 양녀를 비롯, 1백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사망했다. 미군기의 리비아 공습은 리비아를 국제테러의 배후로 단정, 여기에 대한 응징이었다. 미국의 리비아 공습 후 한동안 카다피가 모습을 감춰, 카다피의 건강악화 내지 실각설이 나돌았었다.
미국의 리비아 공습은 정당성을 두고 국제 사회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한때나마 국제정세를 크게 냉각시켜 제2차 미-소 정상회담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리비아 폭격에도 테러는 계속돼 폭격 수일후 레바논에서 인질로 잡혀있던 미국인 1명과 영국인 3명이 보복 살해됐고, 런던과 파리, 빈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1985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잡혼금지법 철폐 ← 1985년 6월 17일 남아공 최초 법적으로 결혼이 인정된 흑백인종 커플이 탄생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1985년 4월 15일 인종차별정책으로 악명높은 흑백인종간의 결혼을 금하는 잡혼금지법과 연애, 섹스를 금하는 배덕법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1984년 7월 의회 특별조사위원회가 양법의 폐지권고를 정부가 받아들인 결과였다. 남아공 정부는 인종간의 교류금지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해왔지만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이 점증하고 무기금수, 경제제재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서 고립됐기 때문에 이같은 결정을 내리게 됐다. 이 융화책은 남아공으로서는 획기적인 정책이었지만, 흑인의 참정권 권력이양은 여전히 인정되지 않았다. 이에 흑인의 반대시위가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됐고, 10월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흑인폭동이 발생했다. /조선
1983 - 도쿄 디즈니랜드 개원
도쿄 디즈니랜드 /조선
- 도쿄 디즈니랜드 개원
총면적이 동경돔의 18배나 되는 일본 최대의 레저시설 동경디즈니랜드가 1983년 4월 15일 개원됐다. 개원식이 끝난 후 밤새 기다린 입장객약3천여명을 포함, 이날 하루동안 입장객수만해도 2만5천여명에 달했다.
미국 월트디즈니와 제휴한 동경디즈니랜드는 미쓰이부동산과 경성전철이 공동출자한 1천8백억엔을 투입, 2년에 걸쳐 완성했다. 개원당시 연간 입장객수를 1천만명으로 추산했으나 이 숫자는 다음해 4월 달성해 버릴 정도로 일본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선
1981] 워싱턴포스트지, 퓰리처상을 수상한 ‘지미의 세계’ 기사가 허위기사라고 보도해 파문 ← 워싱턴포스트 편집국 전경.
1980년 7월 28일자 워싱턴포스트지 1면과 간지를 크게 장식했던 자네트 쿠크 기자의 특집기사 ‘지미의 세계’가 허위기사라고 워싱턴포스트지가 1981년 4월 15일 보도함으로써 미국 전역에 파문을 던졌다. ‘지미의 세계’는 전날인 4월 14일 그해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복잡한 가정에서 자라 부모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한 지미가 자기 어머니 남자친구의 강요로 헤로인 주사를 상습적으로 투약해 나중에는 완전히 중독자가 돼버렸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워터게이트 사건보도로 닉슨 대통령을 물러나게 해 명성을 얻은 워싱턴포스트지와 65회의 전통을 갖고 있던 퓰리처상도 이 사건으로 권위에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
1980년]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사망 ←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80년 4월 15일 사망했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시시콜콜 간섭하고 참여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행동하는 양심의 전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저지른 1956년의 헝가리, 1968년의 체코 침공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할 정도로 자립적 지성의 면모를 보였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범죄 심사를 위해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창안한 국제 법정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도 마오이스트계열의 기관지인 ‘인민의 기치’를 손에 들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사르트르였다. 1905년 6월 21일 파리에서 해군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사르트르는 2살 때 아버지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다. 아프리카에서 인도주의적 의료활동을 펼친 오르간 연주자 슈바이처가 그의 외당숙이 된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3부터 4년간 독일에 유학했다. 유학기간 중 접한 후설의 현상학을 독자적으로 수용해 펴낸 책이 '존재와 무'이다. 1964년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지만 '부르조아들의 상'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고,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 결혼’ 역시, ‘부르조아적 결혼’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르트르와 평생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 보부아르는 이날 2만5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장례식에서 세상을 떠난 사르트르에게 장미 한송이를 건넸다. 두 사람은 현재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묻혀있다./조선
1979 - 전(前) 수도여고 교사(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수도여고생들이 고상문씨 납북사건을 규탄하고 있다. /조선
전(前) 수도여고 교사(고상문씨) 노르웨이에서 납북
교사로 재직 중 1978년 네덜란드 유학길에 올라 지리학을 공부하던 전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가 1979년 4월 15일 북한 요원에 의해 납북됐다.
국제앰네스티 보고서 등에 의하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연수 중 여권분실을 신고하러 한국대사관을 찾던 중 택시기사의 착오로 북한대사관에 들어갔다가 북한 공관원에 의하여 강제 납북되었다고 한다. 고씨는 납북 당일 서울의 집에 마지막 편지를 보낸 뒤 실종됐으며 실종 다음날인 16일 밤 9시쯤 오슬로 시내버스에서 여권, 카메라, 소형 라디오, 의류, 부인 앞으로 보내는 편지 등 소지품이 발견됐다.
북한은 고씨가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를 거쳐 자진 월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제사면위원회는 1994년 7월 고씨가 북한 승호리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있다고 발표. 고씨의 부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결국 고씨의 부인은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1996년 아파트 11층에서 투신자살 해 목숨을 끊었다.
그 후 2000년 9월 북한 평양방송은 `공화국은 영원한 내 삶의 보금자리`란 고씨의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고씨가 북한 과학연구기관에서 연구사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
1977 - 금수산 의사당(주석궁) 준공
1977년 완공된 금수산기념궁전 전경. /조선
- 금수산 의사당(주석궁) 준공
북한 김일성의 관저로 사용되어 흔히 `주석궁`이라 불리우는 북한의 `금수산 의사당`이 1977년 4월 15일 김일성의 65회 생일을 맞아 준공됐다. 유럽식 궁전을 본딴 4-5층 건물로, 지하 200m 깊이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평양지하철과 연결된 전용 지하철이 건설되어 있다.
총 부지 면적은 350만입방미터. 김일성 사후에는 "김일성 수령을 금수산의사당 내에 영생의 모습으로 모셔야 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금수산 기념궁전`으로 개칭하고 김일성 1주기인 1995년 개관식을 가졌다.
금수산 기념궁전은 정면 벽에 김일성 초상화를 배치하고 1층 홀에 입상을 마련해 놓았으며 지상에 김일성 시신을 안치했다. 또 궁전앞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하는 폭 415m, 길이 216m의 광장을 조성, 경비만에도 500여명의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 /조선
1977 - 1920년대 제작 민항기 고별 비행 1977년 오늘, 미국에서 1926년에 취항한 민간 항공기!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날아간다. 마지막 비행에 나선 이 소형 항공기는 미국의 비행기제작업체 더글러스사가 만든 것이다. 1920년대 로스엔젤레스와 솔트레이크시티 사이를 오갈 당시의 속도는 시속 160km정도! 이 비행기는 미국 민간항공 50주년의 상징물로 선정됐다. /YTN
1970년 : 호남고속도로 기공 1970년 4월 15일 정부의 간선도로망 구축계획에 따라 호남고속도로 대전-전주 간 공사가 기공식을 갖고 시작됐다. 호남고속도로는 1, 2차로 나눠 건설됐다. 1차인 대전∼전주 간 79.5㎞ 구간은 1970년 4월 15일에 공사를 시작해 같은 해 12월 30일에 완공·개통했고 2차 구간인 전주-순천 간 172.3㎞ 구간은 1972년 1월에 착공해 1973년 11월 14일 전 구간이 완공·개통됐다. 호남고속도로는 개통 초기에는 중앙분리대가 없는 너비 10.7∼13.2m인 왕복2차선으로 건설됐으나 현재는 왕복 4차선을 확대됐다.
1969: 미국 정보기 EC-121 동해 상공에서 북한 대공포에 피격 추락 1969년 4월 15일 북한 청진 남동쪽 상공에서 북한을 정찰 중이던 미 해군 EC-121정찰기 1대가 북한 미그기에 격추돼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탑승 승무원 31명 전원이 숨졌다. 당시 EC 121기는 통상적인 정찰 활동을 수행하며 북한 영해에서 90마일 떨어진 공해를 날고 있었다. 하지만 그간 미국의 정찰 비행을 못마땅해 여긴 북한은 미그 전투기로 기습공격 감행해 가해 EC 121기를 격추시켰다. 당시 호위 비행 중이던 F-4 팬텀기가 손을 쓸 수 없었을 정도였다. EC 121 정찰기 승무원은 31명 모두 숨졌거나 실종됐고, 이중 소련 함대가 발견한 시체 2구만 미국에 송환됐다. 당시 미 닉슨 대통령은 강경대응을 천명했지만 미국의 보복공격은 나오지 않았다.
1967 중앙선관위, 6대 대선 팜플렛 회수, 소각 지시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계몽용 만화 팜플렛 250만장을 제작,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러나 이 만화 속에 작게 그려진 태극기의 네 괘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기호인 III번과 비슷하여 결과적으로
그를 선전하는 인상이 풍긴다며 부산 선관위에서 이의를 제기 중앙선관위에서는 4월 15일 192만원의 제작비가 든 팜플렛을
회수하여 태워버리도록 전국 산하 기관에 지시하였다. 그러자 대통령 후보 기호가 결정되기 3일전에 만화를 그렸던 안의섭씨는 4월 18일자 <조선일보>에 군인들의 군모에
부 착된 계급장인 작대기(二)는 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느냐는 반박 만화를 실었다.
1961년 한국-포르투갈 국교 수립 포르투갈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의 하나이다. 한국과는 1961년 4월, 북한과는 1975년 2월 국교를 맺었다. 1973년 6월에 한국의 주(駐)포르투갈 대사관이 개설된 데 이어 1977년 12월에 무역협정이 체결되었고, 사증면제협정(1979), 경제·산업 및 기술협력 협정(1985), 문화협정(1990), 투자보장협정(1996), 이중과세방지협정(1997), 항공협정 가서명(2000)이 체결되었다. 1993년 10월 대통령 소아레스가 방한하여 최초의 양국 정상회담을 가졌다. 2000년에는 총리 안토니오 구테레스가 방한하였다. 한국에서는 1987년 국무총리 노신영, 1999년 국무총리 김종필이 포르투갈을 방문하였다.
1959 -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인 부산 문화방송(HLKU) 개국
부산에서 최초의 민간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MBC)이 하루 7시간의 방송을 실시
(호출부호 HLKV, 주파수1035㎑, 출력 1㎾)
라디오 방송의 활성화와 아나운서의 인기 1950년대 후반의 실정으론 TV는 일반 대중이 감히 넘보기 어려운 사치였던 반면, 라디오는 친숙하게 다가서기 시작한 매체였다. 1957년과 1958년 삼양전기와 금성사가 라디오 수신기 제작에 들어가면서 1959년과 1960년에 우리나라 라디오 수신기 보급은 10만대 이상 늘어 1960년에는 42만대에 이르렀다. 또 정부는 1957년 이후 유선방송 지원책을 펴 5, 16 쿠데타 이전까지 전국에 약 400여 곳의 앰프촌을 설치해 농어민 40여만 명이 무료로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하였다. 1959년 12월 정부는 정부 보유 달러로 우리나라에선 처음인 ‘전지식 트랜지스터 라디오’ 2천 5백대를 긴급 수입해 전기 없는 농어촌에 무상 배포한 일이 있었다. 그 수입 지시는 경무대로부터 하달되어 이는 1960년 3월 15일에 시행될 정, 부통령 선거를 겨냥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 1959년 4월 15일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상업 라디오 방송인 부산 문화방송(HLKU)이 개국되었다. 오늘날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문화방송의 모태는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먼저 탄생한 부산 문화방송인 것이다. 라디오 방송이 활성화되면서 아나운서의 인기도 치솟았다. 특히 남성 아나운서는 당시 사회에서 최대의 스타로서 적잖은 '오빠 군단'을 거느렸다. 1950년대 말 아나운서의 인기에 대해 원로 방송인 노정팔은 이렇게 말한다. "인기 있는 아나운서가 숙직하는 날이면 볼 만한 광경이 자주 벌어지곤 하였다. 맛있는 밤참을 준비해 가지고 오는 아가씨들이 줄을 잇는가 하면 면회하러 온 여인들끼리 서로 독차지하겠다고 싸움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밤늦게 전화를 걸어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며 놀러 오라고 유혹까지 한다." 노정팔은 사일구 당시 아나운서의 인기와 더불어 ‘위력’을 말해 주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서울 시내에서 데모가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방송국 직원들은 친여적인 서울신문사가 이미 불에 탄 사건이 일어났는지라 데모대의 습격을 받을까봐 우울한 심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러고 있을 때 누군가가 여기로 데모대가 올라오고 있다고 소리쳤다. 이제 방송국도 꼼짝없이 당하는구나 했지만 무슨 대책은 있을 수 없었다. 정작 방송국을 찾아온 데모대는 양정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임택근 나오라 임택근 나오라’고 외쳤다. 처음에는 임택근 아나운서에게 무슨 위해라도 가하려고 하는가 했는데 만나보니 그게 아니고 임택근 아나운서가 나와서 이 시위 광경을 있는 그대로 중계 방송하라는 것이었다." 원로 방송인 정순일이 그의 저서 「한국 방송의 어제와 오늘」에서 소개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당시 아나운서의 인기가 어떠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당시 「방송」지의 청취자 조사에 나타난 인기 제1위는 임택근, 2위 장기범, 3위 강영숙, 4위 최계환의 순서였으나 아나운서실의 화목을 깬다는 이유로 그 후 그런 조사는 중지되었고, 「주간희망」이 ‘독자의 아나운서 인기 투표’를 계획하여 공고까지 했다가 정부로부터 ‘국가공무원을 인기 투표에 붙이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는 공문서가 날아들어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그렇다. 국가공무원, (기독교방송은 그렇지 않았지만) KBS 아나운서들 모두가 공무원이었다. 아나운서 뿐만 아니라 기자들까지도 주사, 서기와 같은 공무원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 계급이 주사급 밖에 안 되는 기자가 당연히(?) 당당하게 장관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서기급 밖에 안되는 아나운서가 거물급 정치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내고 천연스럽게 일문일답을 하면 한 구석에서는 역시 서기급인 엔지니어가 열심히 녹음기를 조정하던 그런 시절. 만화 같은 얘기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국영 방송이다. (60년대 초, 고위증과의 회견을 마치고 그 고위층이 내민 담배를 받아 문 데다가 댕겨주는 라이터 불까지 받아 핀 것이 화가 되어 기자 생활을 그만 두어야 했던 용사도 있었다.)“ 당시 라디오 방송 보도 프로그램의 취재엔 휴대용 녹음기가 사용되었는데 그 무게가 자그마치 20키로그램이 넘었다. 기자와 PD들은 그 무거운 녹음기를 어깨에 매고 전국의 뉴스 현장을 휩쓸고 다녔다. 이에 대해 「TV 저널」 김훈 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목젖을 울렸던 군것질은 아이스케키였다. 남루한 옷차림의 소년 행상들이 아시스케키 궤짝을 메고 여름날에 비지땀을 흘려가며 거리에서 ‘아이스케키’를 외쳤다. 이 휴대용 녹음기가 행상 소년들의 아이스케키 궤짝과 꼭 닮아서 기자와 PD들은 이 녹음기를 ‘아이스케키 통’이라고 불렀다. 1950년대를 지나면서 이 ‘아이스케키 통’은 방송에 활력과 기동성을 불러넣었고, 음향 자료 축적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손으로 돌리는 태엽이 풀어지면 녹음 도중 회전 속도가 떨어지고 녹음 내용이 늘어져 버려 PD들은 곤욕을 치렀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 인천상륙작전중인 한미연합 해병대원들
1949년 4월 15일 대한민국 해병대가 경상남도 진해의 덕산비행장에서 해군 출신 장병 380명(장교 26명, 하사관 54명, 사병 300명)을 기간으로 창설되었다. 해병대는 소규모의 독립부대로 출범했지만, 6·25전쟁 이전의 공비토벌작전과 6·25전쟁 중의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해병대는 휴전 직후인 1954년 2월 1일 병력수 1만 9,800명인 여단으로, 그 이듬해인 1955년 1월에는 상륙사단으로 증편되었다. 해병대는 1973년 10월 해병대 개편계획에 따라 사령부가 해체되고 해군의 상륙전부대로 예속되었다가 1987년 해병대사령부가 다시 창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브리태니커
[역사 속의 인물] 해병대 창설의 주역 신현준
2004년 89세의 노병(老兵)이 해병대사령부에 1억원을 내놓았다. 그 돈은 전 재산이었다. 미국에서 자식과 함께 살고 있어 돈이 필요없고 해병대 발전만 바란다고 했다. 그 노병은 초대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1915~2007`예비역 중장)이었다.
김천 출생인 그는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었다.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해군 중령이던 1949년 오늘, 초대 해병대 사령관이 됐다. 명색이 사령관이었지, 380명의 소수 인원에 변변한 무기도 없는 '허섭한' 군대였다. 일본군이 남겨놓은 99식 소총과 철모뿐이었지만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했다. 해병대는 현재도 그렇지만, 출발 당시부터 '저비용 고효율' 군대의 전형이었다. 허름한 군복을 입었을망정, 눈빛만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6`25와 월남전, 연평도사태 등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무적해병'의 신화가 탄생했다. 신 사령관의 지휘로 인해 일본군의 거친 군기와 미해병대의 선진적 편제가 혼합된 부대가 됐다고 평가한다. 오늘이 되면 해병대 관계자들은 부대 창설일이 김일성 주석 생일과 같기에 북한이 제일 두려워하는 군대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한다.
박병선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4월 15일
1931년]신학자 서광선 徐洸善 출생 1931. 4. 15 평북 강계~. 1978년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냈고, 1981년 현대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1983년 기독교학회장, 1990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5공화국 당시 신학의 사회참여를 주장하여 한때 해직교수가 되기도 했다. 저서에 〈지성·세속·신앙〉·〈현대사회와 종교〉·〈사랑의 하나님〉·〈한국기독교의 새인식〉·〈종교와 인간〉 등이 있다.
1925 - 우리 나라 최초의 전조선 기자대회 (15일~17일)
(참고 자료) 무명회와 철필구락부 일제 치하의 언론인들은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언론 단체를 결성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언론 단체인 무명회는 1921년 11월 27일에 결성되었는데, 회원 자격을 '조선인 기자'라고 폭넓게 규정하여 발행인이나 편집인, 기자가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무명회의 목적은 문화 보급의 촉진, 언론 자유의 신장, 여론의 선도, 회원의 명예와 권리의 옹호, 그리고 회원 상호간 친목 도모 등이었다. 그러나 무명회는 창립 다음 해인 1922년 까지만 몇 차례 모임을 가졌을 뿐 1923년부터는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4년 친일 단체인 각파유지연맹 간부들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취체역 김성수를 폭행한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일어난 '언론 집회 압박 탄핵대회'라는 민중대회의 성격을 띤 항일 언론 투쟁시에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24년 8월 17일 언론인 30여 명은 모임을 갖고 무명회를 부활시키고 회원의 가입 자격을 '민주의 정신과 배치되지 아니하는 신문기자'로 한정한다고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했던 '매일신보' 기자 2명을 그 자리에서 퇴장시켜 버렸다. 1924년 11월 19일엔 사회부 기자 20여 명이 모여 철필구락부라고 하는 새로운 언론 단체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회원 가입의 자격을 사회부 기자로 제한했으며, 신문 강연회 등과 같은 사업을 벌였다. 철필구락부의 주장에 따르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강연회는 철필구락부가 1925년 2월 5일 YMCA에서 입장료 10전을 받고 개최한 강연회이다. 또 철필구락부는 1925년 5월경 회원 총회를 열고 사회부 기자의 급료를 최저 80원으로 인상 지급하도록 요구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로 기자 단체에 의한 급료인상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명회와 철필구락부가 공동으로 벌인 가장 큰 행사로는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에 걸쳐 열린 우리 나라 최초의 전조선 기자대회일 것이다. 이 대회에는 지방 주재 기자까지 참여하여 참가자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이 대회는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찍질하자!"는 구호를 내걸었으며 그 '취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언론은 권위가 그의 생명이다. 현하 우리의 언론은 과연 어떤 언론인가? 우리는 힘껏 그 권위를 북돋우고, 그 생명의 발약함을 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한 번도 원만히 모여 보지 못했다. 원만히 모이면 반드시 그만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본 대회의 권위가 여기에 있다. 만천하 언론계의 동직자들이여! 모이자! 그리하여 '언론의 권위를 신장'하고 동직자의 친목을 도하자." 전조선 기자대회와 신간회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한국 신문사화'의 저자 김을한은 전조선 기자대회가 그렇게 겉으로 알려진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전조선 기자대회가 개최되기까지에는 일간신문 각 사의 사회부 기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철필구락부와 조선일보 영업국장 홍증식 이하 화요회 계통의 이른바 적파 기자들이 주동이 되었던 만큼 일반의 방청을 금지하고 회원들끼리만 의사를 진행하였는데, 개회 벽두부터 벌써 좌, 우 양파기자가 대립하여 파란과 분규가 그치지를 않았다. 그러나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던 이상재 선생의 넓은 도량과 응훈한 기백으로 결렬까지에는 이르지 않고 가까스로 의장에 이상재, 부의장에 안재홍씨를 선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 이 대회는 화요회가 주동이 된 만큼 '기자대회'란 표면상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상인즉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회주의자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하기 위한 말하자면 공산당 조직의 예비 회의와 같은 것이어서, 속담에 '재주는 곰이 피우고 재미는 되놈이 본다'는 말과 같이 '기자대회'도 화요회의 간부인 홍증식이 영업국장으로 있었던 만큼 돈은 조선일보사에서 쓰고 실속은 공산주의자들이 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일보의 지국장과 지방기자들은 대부분이 적색분자였으니 이 때문에 조선일보는 커다란 영향과 손해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은 최준의 '한국 신문사'나 1975년에 나온 '동아일보사사'의 시각과 상통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언론사학자 최민지는 반론을 제기한다. "이 전조선 기자대회는 조선일보 사원이 전 출석자의 약 반수를 점하였고 그 의장, 부의장이 조선일보의 사장과 이사인 이상재, 안재홍이 됨으로써, 조선일보사가 주축이 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 발의 자체가 '동아일보' 정치부장인 최원순의 발의였으며 사장 송진우와 간부 기자들 중에서도 김동진, 한기악, 한위건, 설의식 등이 준비위원으로서 기자대회의 준비 과정을 맡기도 한 전언론계의 성사로서, 당시 '동아일보'도 ‘전조선 기자대회’ 제목의 사설로 시의에 적합한 대회로서 기대와 그 의의가 큼을 강조하였다. ... 필자의 견해로는 기자대회의 준비과정과 그 경과를 살펴볼 때 비록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했다 할지라도 기자대회는 공산당 결성을 촉성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자대회의 의장 부의장이던 이상재와 안재홍, 그리고 반수 이상이던 조선일보 기자들에게 일제와의 타협적인 자치 운동으로 나아가던 '동아일보'의 오도된 영향력을 견제하여, 비타협적인 민족 협동 단일 전선인 신간회 조직을 촉진하였던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찌 됐건 무명회와 철필구락부는 신문의 정간 처분이나 경찰의 기자구속, 폭행등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항의하여 일정 정도 성과는 얻었으나 그 정도의 활동이나마 1927년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언론 단체들과는 달리 일본인 기자들까지 포함된 기자단이 1922년부터 결성되었다는 것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경제부 기자들이 결성한 경제기자단(1922년 3월 31일), 체신국 출입 기자와 체신국 관리들이 공동으로 구성한 광화구락부(1923년 12월 18일), 이왕직 출입기자들이 만든 이화구락부(1924년 5월 16일), 스포츠 기자들이 만든 운동기자구락부(1927년 8월 27일), 연예부 기자들이 만든 찬영회(1929년 12월 6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거론된 바와 같이, 1927년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민족 단일 조직으로서의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일보의 사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부사장 신석우, 주필 안재홍 이하 사원의 거의 전부가 신간회의 주요 간부가 되어 '조선일보'는 신간회의 기관지처럼 되었다. 신간회는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로 표면적인 활동이 늘 억제를 당하였으나, 전국에 많은 지회가 설립돼 회원은 3만에 이르렀다.
(카멜레온과 하이에나 / 강준만) /이정환닷컴 2001/12/26(수)
1919년] 제암리학살사건 발생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났던 제암리 3·1운동순국유적지,
1919년 4월 15일 일본의 육군 중위 아리타 다케오[有田俊夫]를 중심으로 한 일본헌병들이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은 뒤 교회에 불을 지르고 무차별 사격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학살의 직접적인 원인은 3·1운동 여파로 제암리교회 청년들과 천도교 김상렬 등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벌인 만세시위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숨진 사람은 안종후를 비롯해 남자 21명, 여자 2명이며 인근 마을 팔탄면 고주리에서 김성렬 등 남자 6명이 학살당했다. 1982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는 경기도 주관으로 합동장례식을 치르고 희생자들을 순국열사로 추서했으며 이 지역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했다./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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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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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제암리 주민들이 일제에 의해 학살되어 매장된 유해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에 일본 헌병 30여 명이 들이닥쳤다. 발안장터 만세 사건때 시위대를 심하게 다룬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왔다고 밝히 이들은 마을의 15세 이상 남자들을 모두 제암리 교회에 소집했다. 발안장터 만세사건은 3.1운동의 기운이 이곳에까지 퍼져 3월 31일과 4월 5일 발안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발안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본 경찰이 이를 가혹하게 진압한 사건이다. 교회에 모인 21명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한 일본군은 곧 밖으로 나가 문을 폐쇄하고 지붕에 석유룰 뿌리고 불을 질렀다. 불을 피해 빠져나온 사람들은 일본군의 총탄세례를 받아야했고 남편을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부녀자 2명이 현장에서 살해당했다. 일본군은 민가 32가구를 불태워 초토화시킨 뒤 인근 고주리 주민 6명까지 무참히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 만행으로 사람, 가축, 곡식 등이 타는 냄새가 사방 10km까지 펴져나갔다고 한다. 당시의 한 선교사 일기에는 제암리 학살 이외에도 화성군 일대에서만 16개 마을이 전멸되다시피 했고, 5개 교회에서 비슷한 만행이 자행돼 326채의 집이 불타고 1,6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39명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
1916년] 신학자, 감리교 목사 박대선 朴大善 출생 1916. 4. 15 경북 의성~. 1940년에 일본 간사이학원대학[關西學院大學] 영문과를 거쳐 1942년 동 신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1955년에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74년에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명예인문박사, 1981년에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84년에 일본 간사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등을 받았다. 1945~50년 평양 성화신학교 교수, 1951년에 육군본부 군목(軍牧), 1955~64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 1964~75년 연세대학교 총장, 1965년에 기독교연합회 회장, 1970년에 기독학생회 이사장, 1971~74년 서울 YMCA 이사장, 1972년에 대한유도연맹회장, 1973년 대한태권도연맹 회장 등을 지냈다. 1991년 현재 신애교회 목사 및 한국선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구약성서개론〉·〈대학과 국가발전〉 등이 있다.
1912년] 북한의 최고권력자 김일성 金日成 출생 1912. 4. 15 평남 대동~1994. 7. 8 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이고, 김철주(金哲柱) ·김영주(金英柱)는 친동생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 지린성[吉林省] 푸쑹[撫松]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 지린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 중퇴하였다. 그 뒤 소련에서 특무공작요원 훈련을 받고 1945년 소련군 소좌가 되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군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는데,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가 평양 시민들 앞에서 ‘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둔갑시켜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9년부터는 동북항일연합군과의 관계를 내세우지 않고, 만주사변 후부터 독자적인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여 일제와 싸운 것처럼 날조된 정치적 선전을 하였다. 그는 소련군의 힘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 책임비서,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내각수상, 인민군 최고사령관을 맡고, 원수 칭호까지 썼다. 중앙인민위원회 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 최고위직을 지냈다. 남조선노동당 등의 국내파와 소련파 중 반대파인 옌안파[延安派] 등을 숙청하여 권력체제를 구축하였다. 1994년 7월 8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하였다.
1910년] 주시경, <국어문법>(박문서관) 간행 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나라가 식민지로 떨어지기 전에 국어문법을 확립하여 보급해야 함을 절감하고 국어국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연구결과를 저서로 발간하였다. 1906년에 『대한국어문법』을 발간하고,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을 발간하였다. 1907년 1월에 지석영(池錫永)이 의학교 안에 국어연구회를 설립할 때 이준(李儁)의 추천으로 그 연구위원이 되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또한 주시경이 정부에 제출한 상소가 채택되어 1907년 7월 8일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자 그 연구위원이 되어 가장 뛰어난 연구보고서 『국문연구안(國文硏究案)』을 제출하였다. 1909년에는 전국민에게 국문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로 『국문초학』을 간행하였고, 1910년 4월에는 『국어문법(國語文法)』을 간행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그해 10월 우리나라 고전을 간행 보급하기 위하여 광문회(光文會)에 가입해서 『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의 고전을 교정하여 『훈몽자회재간례(訓蒙字會再刊例)』를 간행하고, 이와 함께 『국어사전(國語辭典:말모이)』의 편찬작업에 최초로 착수하였다. 1914년에는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각적 국어국문 연구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언어와 한글이 재발견되어 애국계몽운동기에 과학적 국어문법이 처음으로 확립되게 되었다.
1885년] 영국, 러시아 남진 저지 위해 거문도 불법 점령 19세기 초반부터 남쪽 바다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은 세계 도처에서 대립·충돌했다. 지중해를 거쳐 대서양으로 진출하려던 시도가 크리미아전쟁으로 좌절되자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눈을 돌렸다. 1860년 청나라와 베이징조약을 맺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고 연해주를 합법적으로 영유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었다. 러시아로서는 자연히 좋은 항만조건을 가진 조선에 관심이 쏠렸다. 1884년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 진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연해주까지 조선과 접해있는 터에 영국·청나라·일본은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마침내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설이 나돌자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 러시아와의 전선을 조선으로까지 확대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1885년 4월 15일 영국은 세 척의 동양함대를 동원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뒤 영국기를 꽂았다. 그러나 조선과 러시아가 강력히 항의하고 영국과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도 끝이 나자 영국은 러시아가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3개조의 약속을 받아낸 후 1887년 2월 27일 거문도로부터 철수했다. 제국주의 각축의 시대, 남해안의 조그만 섬 거문도가 국제적 이해다툼의 초점으로 떠올랐던 사건이었다. /조선
4월부터 약 2년간 영국의 동양함대가 전남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 당시 세계적인 규모로 러시아의 남하세력에 대항해온 영국은 극동에서도 러시아의 남진책에 예민한 반응을 나타냈다. 러시아는 일찍이 1860년 한반도 동해(東海)에 임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점하였는데, 이 항구는 겨울에 얼어 해만(海灣)으로서 활용가치가 적었으므로 부동항(不凍港)을 물색하였다. 그 대상지는 영흥만(永興灣) 제주도 쓰시마섬[對馬島] 등이었고, 이 중에서도 함남 영흥만이 가장 유력한 점령 대상지였다고 한다. 한편 영국은 82년 한영수호(韓英修好)의 교섭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이미 거문도의 조차(租借)를 제의함으로써 거문도에 대한 관심을 표시해왔다. 또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한국의 조정이 급속히 제정(帝政)러시아에 접근하여 한.러밀약[韓露密約]을 체결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국외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사태가 급박해졌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영국은 러시아의 선점(先占)을 예방하고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선박 1척이 러시아가 점령 대상지로 삼았다는 영흥만 일대를 탐사한 후, 4월 15일 군함 6척 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점령하고 그 달 하순경 영국기를 게양하였다. 한국 정부는 영국 부영사(副領事)와 청(淸)나라 주재 영국 대리공사(代理公使)에게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 미국 독일 일본에게 조정을 요청하는 한편,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교섭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청나라에 사건의 중재를 요청하였는데,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위기가 고비를 넘기고 9월 10일 아프가니스탄 협상이 조인됨에 따라,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이 때가 거문도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보고,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그 결과 이홍장은 청나라 주재 러시아공사로부터 러시아는 한국의 영토를 어느 지점도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영국에 통보함으로써 드디어 1887년 2월 27일 영국 함대가 철수하였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Lincoln, Abraham) 미국 대통령 피살 ← 1860년 2월 27일, 링컨의 유명한 쿠퍼 유니온 연설을 한 날, 뉴욕시에서 촬영한 사진
1865년 4월 14일 밤, 링컨 대통령이 워싱턴 DC에 있는 포드극장 2층에서 연극 ‘우리 미국 사촌’을 관람하고 있을 때 한 사내가 2층 대통령 박스석에 들어섰다. 링컨은 5일 전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에 따라 남북전쟁이 사실상 끝났다고 판단, 연극을 보며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사내는 수개월 전부터 링컨을 납치하려 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살해 쪽으로 방향을 바꾼 남군 출신의 미남배우 존 윌크스 부스였다. 부스가 슬며시 링컨의 뒤로 다가가 데린저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링컨은 곧 고꾸라졌지만 총소리도, 부인 메리의 비명소리도 연극에 몰입한 관객들의 폭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밤 10시13분경이었다. 같은 시각 수어드 국무장관도 집에서 부스의 공범에 의해 피격됐다. 부스는 근처에 있었던 레스본 소령에게까지 칼을 휘두른 뒤 1층으로 뛰어내려 “시크 셈퍼 티러니스!(Sic semper tyrannis!)”를 외쳤다. 남군의 주 무대인 버지니아주의 구호 “독재자의 것은 독재자에게로!”라는 뜻의 라틴어였다. 현장을 벗어난 부스는 남쪽으로 도주하던 중 4월 26일 발각돼 살해됐고, 링컨은 밤새 치료를 받았으나 이튿날인 4월 15일 오전 7시20분경 숨을 거뒀다. 시신은 4년 전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를 태우고 고향을 떠나 워싱턴으로 달려왔던 기차에 실려 다시 그의 고향 스프링필드로 돌아갔다. 56세였다.
1849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분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앙을 증거한 관점에서 볼 때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는 전형적인 피의 증거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활동은 모범적인 땀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43년]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Henry James) 출생 ← 제임스
1843년 4월 15일 태어남 / 1916년 2월 28일 죽음
"생명을 부여하고, 관심을 일깨우며,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다름아닌 예술이다. 예술이 지닌 힘과 아름다움을 대신할 만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 헨리 제임스
제임스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예리한 관찰을 토대로 독자적인 시점의 문학을 개척한 미국의 소설가이다. 처음부터 산문소설의 대가였던 그는 소설의 형식을 확대하고 매우 개성적인 방법과 문체를 뚜렷이 아로새긴 창의력 넘치는 혁신가였다. 그러나 난해한 문장과 애매모호한 주제가 많아 일반 독자로부터는 외면받는 등 그의 명성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으로 한정되기도 했다. 1943년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 더욱 폭넓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영국과 미국 비평계가 동시에 인정하는 최고수준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는 51년 동안의 작가 생활에서 총 150편이 넘는 장·단편소설과 비평, 기행문 등을 남겼다./브리태니커
1800년] 영국 해군 장교 로스(Ross, Sir James Clark) 출생 1800. 4. 15 영국 런던~1862. 4. 3 영국 버킹엄셔 에일즈베리 . 북극과 남극의 자기(磁氣)를 조사하는 일을 했고 남극의 로스 해와 빅토리아랜드를 발견했다. 로스는 1819~27년 윌리엄 E. 패리 경의 북극탐험에 참여했다. 아저씨뻘인 존 로스 경을 따라 2번째 북극탐험을 떠난 그는 1831년 6월 1일 자기 북극에 도착했다. 1839~43년에는 자기를 관찰하고 자기 남극에 도달하기 위해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을 탐험했다. 그는 '에러버스호'와 '테러호'를 지휘하며 1841년 로스 해를 발견했고, 자극 지점으로 항해하는 도중에 빅토리아랜드를 발견했다. 그는 태즈매이니아 섬의 호버트에서 겨울을 보낸 뒤 1841년 11월 다시 남극대륙으로 향했다. 그는 그레이엄랜드 해안 부분의 해도(海圖)를 만들었고 웨들 해의 빙산 주위를 돌아 항해했다. 1843년 영국으로 돌아와 기사작위를 받았고 〈남반구와 남극지역에서의 발견과 연구를 위한 항해 A Voyage of Discovery and Research in the Southern and Antarctic Regions〉(1847)를 출판했다./브리태니커
1452년]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출생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조각가(1452~1519).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새벽 3시에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에서 유명한 가문의 공증인인 삐에로 다 빈치(Ser Piero da Vinci)와 가난한 농부의 딸인 카타리나(Catarina)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466년 14세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토스카나의 수도였던 피렌체로 이주한다. 15세부터 20대 초반까지 당시 유명했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밑에서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다 빈치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다 빈치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 인정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그의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다. 화가, 군사 토목 고문 등의 경력을 쌓은 후, 프랑스 왕조에 6년간 초빙되었다. 예술 활동에서는 회화에 <암굴의 성모>, <성모자>,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을 그렸고, 자연 과학에서는 해부학·새의 비행 따위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외에 천문학, 물리학, 지리학, 토목학, 조병학, 생물학 따위에서도 독창적인 연구 및 발명을 하였고 음악에도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예술과 과학에 대한 수기·기록 따위를 남겼으며,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519년 4월 23일 유언을 남기고 5월 2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67세였고,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레오나르도가 프랑소와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다. 1570년 프랑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나왔다. 이탈리아 조각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출생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인 레오나르도다빈치가 1452년 오늘 태어납니다. 피렌체 근교의 빈치 출생으로, 어릴 때부터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 음악에 재주가 뛰어났으며, 유달리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였고, 1466년 피렌체로 가서 부친의 친구인 베로키오에게서 도제수업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인체의 해부학을 비롯하여 자연현상의 예리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를 습득하여, 당시 사실주의의 교양과 기교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습니다.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으며,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 ·회화론 ·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으며, 르네상스의 가장 휼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대표작품으로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동굴의 성모> <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있습니다.
1412 경회루 낙성 경회루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있을 때마다 축하연을 베풀던 곳이다. 공포에 출목(出木)이 없는 이익공계로 팔작지붕에 2층으로, 규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 인공방지(方池)에 정면 7칸, 측면 5찬으로 총 35칸이다. 연못 속에는 4개의 장방형의 인공 섬들이 있다. 방지의 물은 지하에서 샘이 솟아나고 있으며, 북쪽 향원지(香遠池)에서 흐르는 물이 배수로를 타고 동쪽 지안(池岸)에 설치된 용두의 입을 통하여 폭포로 떨어진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하며,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을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초창기에는 태조가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다락집이었으며, 1412년에 태종이 연못을 넓히고 다락도 크게 짓도록 하명하여 지금의 경회루의 모습이 되었다.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867년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현재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어 있다.
1412년] 경회루 낙성 ← 경회루와 연못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石橋)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경회루는 중루(重樓), 팔작지붕의 2익공(二翼工) 집으로, 누마루를 받는 48개의 높직한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외진주(外陣柱)는 방형석주(方形石柱)이고 내진주(內陣柱)는 원형석주(圓形石柱)이다. 기둥 둘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졌는데 그 체감률이 경쾌하여 조화적이다. 이 석주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중루를 만들었는데, 마루 밑은 우물천장을 하여 단청을 하였고, 위쪽 마루는 외곽 퇴간부분이 가장 낮고, 그 다음 고주(高柱)와 내고주(內高柱) 사이가 1단 높으며, 내고주 안의 깊은 오간(奧間)이 또 1단 높게 만들어졌다. 이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연회를 베풀 때 품계(品階)대로 앉는 자리 구분이다. 고주와 내고주 사이에 하방을 돌리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서 문을 내리면 방이 되게 되어 있다. 마루 끝 바깥 기둥에 낙양각이 장식되고 기둥 밖으로 계자난간(鷄子欄干)이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고, 이 난간은 시각적(視覺的)으로 높은 기둥을 짧게 보이도록 끊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지붕이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가 설치되었고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이 설치되었다. 용마루를 높여 웅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지붕의 물매가 급하고, 측면 지붕에는 큰 합각의 삼각형이 생겼는데 건물 평면이 커서 시각적으로 조화되어 있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가 화려한 단청의 집 그림자를 연못 속에 드리우면 그 영상이 아름답다. 또한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이다. /naver
1910 주시경, <국어문법> 간행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 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선생의 저작 [국어문전음학(1908)]중에서- | |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국어 연구, 어문 민족주의의 중심에 서다
1876년 개항 이후 우리 나라의 역사적 과제는 반(反)외세 자주화와 반(反)봉건 근대화의 문제였다.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대항하여 민족 자주권을 사수하면서, 사회적 개혁을 단행하여 근대 민족국가로 거듭나려는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왕실은 왕실 나름대로의 근대화 조치를 강구하였다. 또 보수적 양반유생들은 위정척사사상으로 무장하여 그들 나름대로 조국을 수호하여 갔다. 선각적 양반과 신진 관료, 그리고 새롭게 성장한 시민층은 개화와 개혁사상에 입각하여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민중들 또한 사회 경제적 변혁을 요구하며 밑으로부터 혁명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따라서 극소수의 부류를 제외하고는 조국 근대화와 자주화의 노력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 나아가 근대화와 자주화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 혹은 어디에 초점을 둘 것인가에 대한 차이는 있었다. 이 같은 경중완급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개항 이후의 시기는 가히 전방위적 근대화 운동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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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
선생은 개항되던 해인 1876년에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천산리 무릉골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학원(鶴苑), 모친은 연안 이씨로 선생은 이들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상주(尙州), 아명은 상호, 호는 한힌샘, 한흰메, 백천(白泉), 태백산(太白山) 등이 있다. 선생은 조선 중기 풍기군수로서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의 13대손이었다. 부친 또한 학문이 있어 구암집을 내기도 한 시골 선비였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선생이 어렸을 적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산나물과 도라지를 캐어다가 죽을 쑤어 형제들의 나이 차례로 나누어 먹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갈" 정도였다. 이 같은 생활에서 벗어나 선생이 본격적으로 학문을 익히게 된 것은 중부(仲父) 학만(鶴萬)씨의 양자가 되어 1887년 상경하면서부터이다. 물론 향리에서도 부친과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익히게 된 것이다.
선생은 남대문 시장에서 객주업으로 재산을 모은 양부 후원으로 이회종 진사 서당에서 약 4년간 한학을 배우며 인격을 도야하였다. 이때 한학을 배우면서 선생은 한문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당에서 한문글을 배울 때 선생이 한문을 한문음대로 한 번 읽어 주는데, 이때 아이들은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해서 멍하니 그대로 앉아 있다가 다음에 선생이 우리말로 새겨주어야 비로소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이같이 우리말로 하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을 왜 하필 어려운 한문음을, 그것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을 왜 헛되이 되풀이하는가 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고, 또 우리글이 있는데 왜 이토록 어려운 한문만을 배워야 하며, 우리말을 쉽게 적을 있는 우리글은 왜 쓰지 않나 하고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 선생이 한글을 연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선생은 한문을 배우면서 역설적으로 우리말과 글에 대한 관심을 가졌고, 나아가 한글 연구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893년 6월 배재학당의 교사인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가 야학으로 신학문을 지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자국어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때부터 선생은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면서 국어문법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
서재필과 함께 한글 연구 운동의 초석을 세워
선생은 1894년 배재학당에 정식으로 입학하였고, 이듬해 7월에는 관립 이운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선생은 마산항지사장으로 임명됐지만, 곧 이어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갑오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사퇴하게 되었다. 사퇴 후 선생은 그 해 4월 배재학당의 만국지지역사특별과에 재입학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은 서재필을 만나게 된다. 1895년 12월 26일 갑오내각의 주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은 이때 <독립신문>의 창간을 준비하면서 배재학당의 만국지지학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다. 때문에 둘의 만남은 필연적이자 운명적이었다. 그것은 서재필이 새로 창간할 독립신문을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국문전용으로 발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선생은 서재필의 귀국 이전부터 국문법을 연구하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전용론자였기 때문이었다. | |
1914년 신문관(新文館)에서 간행된 선생의 저서
[말의 소리] 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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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서재필은 갑신정변 시기의 혁명적 개혁론자가 아니라 점진적 계몽운동가로 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국어 연구와 보급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중을 계몽하려던 선생의 어문(語文) 민족주의적 관점과도 닿아 있었다. 따라서 선생과 서재필은 상호 필요성으로, 그리고 근대 민족운동의 관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녀 동지적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선생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회계 사무 겸 교보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독립신문사 총무 겸 교보원으로, 국문담당 조필(助筆)로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하여 갔다. 그리하여 서재필과 선생의 국민 계몽적 논설은 일반 민중과 부녀자층에도 광범위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특히 서재필의 근대 인권과 민권 사상, 그리고 남녀평등 사상 등은 일반 민중의 의식과 사상을 변혁시켜 이들이 이후 근대 민족운동의 주력으로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선생은 그 해 5월 ‘국문동식회’를 <독립신문>사내에 조직하여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열었다. 이 회는 독립신문을 제작에 있어 맞춤법을 정리 통일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선생의 한글 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 중심의 국문연구회, 역시 그 해 7월 학부 안에 설치된 국문연구소, 그리고 1908년 8월 선생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나아가 이 전통은 일제시기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와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면서 한글 연구․정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 |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끈 실천 지식인
선생의 국민계몽운동은 독립신문의 발행과 한글 연구에만 그치지 않았다. 1896년 11월 서재필의 지도로 양홍묵, 신흥우, 이승만 등과 함께 배재학당의 학생과 교직원들을 중심으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였다. 이 회에서 선생은 처음 전적(典籍) 겸 <협성회회보> 저술위원으로, 후에는 제의라는 간부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협성회 주최의 토론회와 회보 발행을 통해 봉건적 악습과 적폐를 타파하고 일반 민중을 계몽하여 근대적 사회 개혁을 이루어 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로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선생은 여기에도 동참하여 활동하였다. 그것은 이 회를 결성하고 실제적으로 주도한 서재필과 선생이 관계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는데, 이듬해 12월에는 약관의 나이로 일약 독립협회 지도부의 일원인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8년 5월 서재필이 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수구파 정권의 탄압으로 재차 도미하고, 11월에는 이상재, 정교,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이 ‘헌의 6조’의 실행을 요구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반 민중들과 독립협회 회원들은 종로 네거리에서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반정부, 반침략 투쟁을 펼쳤다. 이들은 피검된 독립협회 간부의 석방과 ‘헌의 6조’의 조속한 시행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외세의 침략과 수구파 정권의 실정을 규탄한 것이다. 이 때 선생은 독립협회의 청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운동을 이끌어 갔다. 그러다가 그 해 12월 수구파 정부의 기습적인 무력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이 강제 해산되고, 그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가 시작됨에 따라 선생은 부득이 향리로 피신하여 은신하게 되었다.
향리에 은신하면서도 선생은 한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때 그간 5년 동안의 연구를 정리한 [국어문법]을 완성하였다. 이듬해 다시 상경한 선생은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기까지 5년여 동안 한글의 연구와 교육, 그리고 국문 연구의 과학화를 위한 개인 학습에 온 힘을 쏟았다. 정동에 와 있던 미국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윌리엄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으로부터는 영어와 자연과학의 이치를 배웠고, 수진동의 흥화학교에 입학해서는 측량술과 도해법을 익혔다. 그리고 한성외국어 학교에서 일어청국어 등을 청강하고, 습득한 지식을 응용하면서 한글 연구를 심화시켜 갔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 들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한일의정서’가 강제되었다. 일제는 일련의 침략 조약을 강제하여 한국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화 정책을 감행하여 갔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을 준(準)식민지 상태로 만들어 갔다. 이 같은 국망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은 각기 역량에 따라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한편에서는 즉각적인 항일 무장투쟁인 의병전쟁으로 맞섰고, 다른 한편으로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인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국권회복을 지향하여 갔다. 선생 또한 국망의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의 역량을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집중하였다. | |
큰 보자기에 책을 넣고 강의 위해 동분서주하여 생긴 별명, ‘주보따리’
여러 학교에서 늘 책 보따리를 들고 강의를 위해 동분서주한 선생. 그 때문에 선생은 ‘주보따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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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계몽운동 단체 참여와 언론을 통한 대중 계몽운동이다. 선생은 1906년부터 약 1년간 <가뎡잡지>의 편집인으로 활약하면서 논설을 통해 여성 계몽 활동을 벌였다. 선생을 활동 범위는 계몽운동 단체로도 이어져 서우학회와 대한협회의 활동에도 미쳤다. 그리하여 서우학회의 협찬원과 대한협회의 교육위원으로서 이들 단체의 기관지 발행과 학교 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서우>, <대한협회월보>를 비롯한 계몽 잡지에 각종의 논설을 발표하면서 대중의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갔다. 특히 선생은 이 시기 종교까지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선생을 비롯한 계몽운동가들의 노력과 전민족적인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1910년 8월 일제의 완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일제는 영구한 식민지 지배를 획책하며 민족말살정책을 자행하였는데, 그 표적은 국어와 국사였다. 따라서 제도적인 국사 교육은 봉쇄되고 국어 교육은 제한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일본역사와 일본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1911년부터 박동의 보성중학교에 조선어강습원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학교에 출강하면서 국어 교육을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갔다. 이때의 상황을 제자 가운데 한 분인 최현배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 |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함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한 선생은 더욱더 한글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함으로써 독립 쟁취의 기초를 닦아 갔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고, 또 1914년에 [말의 소리]를 간행하여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한 것 등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몸도 돌보지 않는 한글 연구와 강의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선생은 1914년 7월 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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