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This article considers the way in which the wave has been constructed as a negative means by which to understand feminism, making a case for reconceptualising the wave as an ‘affective temporality’. Focusing on both feeling and historically specific forms of activism, the article suggests that the wave should not be considered as divisive, but as a narrative of continuity that allows for particular surges in action and public feeling to be identified. Considering the concept of the ‘contemporary’, the article not only makes a case for feminist timekeeping, but turns to the possibilities of a current fourth-wave 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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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주디스 버틀러
진귀한 학식과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에게 다양한 관점의 이론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몸의 지위에 대한 페미니즘적 대화를 위한 높고 중요한 기준을 설정할 것이다.
알폰소 링기스
이 저작은 향후 페미니즘의 사고에 획기적 사건이 될 것이다.
책 속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는 두 가지 양극화된 용어들을 반드시 서열화하고 등급을 매김으로써 하나가 특권적인 용어가 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억압되고 종속적이며 부정적인 등가물이 되도록 만든다. 종속적인 용어는 우월한 용어의 부인 혹은 부정이거나, 부재 혹은 박탈이거나 은총의 타락한 형태에 불과하다. (…) 마음/몸의 이항 대립이 남성과 여성 사이의 대립으로 상호 연결되고 연상되는 것인데, 이때 남성과 마음이 제휴하고 여성과 몸이 결합하게 된다. (…) 학문으로서 철학은 여성성과 궁극적으로는 여성 자체를 암묵적으로 몸과 연관되어 있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코드화함으로써 철학적인 실천으로부터 여성과 몸을 배제해왔다. 30~32쪽 / 1장 「몸들을 재형상화하기」 중에서
가부장제가 정신적으로 산출해낸 조건은 여성의 몸을 결핍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만약 여성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전혀 결핍된 존재가 아니라면(라캉이 말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실재계에서 전혀 결핍되지 않았다면), 남성들도 뭔가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가 결핍으로서 사회적으로 산출되기를 요구한다. 157쪽 / 2장 「정신분석학과 정신위상학」 중에서
몸 이미지는 생물학적 몸을 정신사회적 영역으로 지도화하는 것이 아니며, 물질적인 것을 개념적인 것으로 바꾸어주는 일종의 번역 작업도 아니다. 오히려 몸 이미지는 타자와 주체가 각자 필연적으로 서로를 구성하며, 정신적 요소로부터 생물학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며, 정신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이 상호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적 특수성(생물학적 성차)과 정신적 정체성의 문제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210~211쪽 / 3장 「몸 이미지: 신경생리학과 육체의 지도화」 중에서
성적 특수성은 식별 불가능하고 포착 불가능한 성차가 이미 있을 때라야만 가능해진다. 정체성 그 자체는 이런 잠재적이고 불안하며 불안정한 차이를 응결시키고 견고하게 만든 것이다. 타자의 성이 갖고 있는 포착 불가능한 차이를 인정할 때라야만 비로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변형하는 간격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271~272쪽 / 4장 「체험된 몸: 현상학과 육신」 중에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 이면에는 거대한 통치자이자 미지의 현자가 군림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자아다. 우리의 몸 안에 자아가 거주한다. 그 자아가 바로 우리의 몸이다. 302쪽 / 5장 「니체와 지식의 안무」 중에서
푸코의 작업은 기록될 수 있었던 다양한 몸의 역사에 관한 여성의 설명과 여성의 재현을 포함할 공간을 남겨두지 않았다. 이것은 육체적인 표면에 새긴 사회적인 각인이라는 은유를 페미니스트들이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이들 텍스트에 어떤 전략적인 가치나 통찰이 남아 있다면 가부장제가 여성을 삭제하는 데 공모해온 이들 은유의 역사를 분명히 밝히고 재형상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371~372쪽 / 6장 「각인되는 표면으로서의 몸」 중에서
남성주의 체제들은 타자를 동일자의 (보다 열등한) 이본으로 변형한다. 성차가 그 나름의 폭력의 형태(구별의 폭력)를 수반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동일성, 정체성, 등가성, 형식화된 교환을 고집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 즉 차이가 지워져버린 집단에게(지금의 경우에는 여성에게) 발생하는 폭력을 행사한다. 전자는 구성적이고 형성적이며 제거 불가능한 폭력, 즉 존재와 되기의 폭력이다. 반면 후자는 무자비하고 불필요한 폭력이며,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변형을 겪게 되는 폭력이며, 저항이라는 대항적 폭력을 통해 변형되고 다시 쓰이고 심지어 전복될 수도 있는 폭력이다. 이 책은 차이 그 자체가 작동하는 구성적인 폭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대항적 폭력을 촉진하려는 시도였다. 477쪽 / 8장 「성차화된 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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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서양철학이 지워버린 여성 그리고 여성의 몸
: 부재 또는 결핍의 대상
플라톤부터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전통적으로 몸-육체와 마음-정신의 이원론이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고수해왔다. 여기서 몸-육체는 마음-정신에 비해 불확실하고 열등한 것이 된다. 마음이 인식과 존재의 확고한 주체이며 몸은 그저 마음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여성을 대입하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여성에게는 마음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마음이 ‘부재’한다. 또는 ‘결핍’되어 있다. 이렇게 남성에 비하여 여성은 부재 또는 결핍으로서 정의된다. 이유나 논리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애초에 여성은 철학의 대상으로서 ‘인간’이 아니며, 인간-남성에 종속된 부차적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의 유구한 이분법적 패러다임은 스피노자를 위시한 일원론 패러다임에 의해 균열이 생긴다. 마음을 몸으로 환원하는 일원론 패러다임에서 마음은 더 이상 예전의 권위를 누리지 못한다. 몸은 이제 단순한 그릇이 아닌 인식과 존재의 적극적인 주체로 부상한다.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그러면 이 일원론 패러다임을 통해 드디어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철학 내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제 여성은 남성의 몸에 비해 ‘부재’하고 ‘결핍’된 몸으로서 정의된다. 따라서 여전히 불확실하고 열등하다. 그러므로 고차원적인 철학이 다룰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 책에서 논의되는 남성 이론가들 중 어느 누구도 성적인 특수성의 문제에 관해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거나 제대로 조명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철학자들은 몸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지만 그것이 남성의 몸을 바탕으로 한 연구였음을 인정할 것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 여성의 몸이 지닌 특수성은 전혀 설명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서문과 감사의 글」 중에서
아주 단순하고 거칠게 정리했지만 이것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본 주류 서양철학의 현실이다. 불과 최근까지도 철학에서 여성은 지워져 있었다.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이 책 『몸 페미니즘을 향해: 무한히 변화하는 몸』의 각 장을 통해 우선 이런 현실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지적한다. 기성 체계에 대한 주도면밀한 비판이 새로운 페미니즘적 대안의 도출을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로스는 그 대안의 중심에 다시 ‘몸’을 위치시킨다. 그리고 그 ‘몸’을 부재나 결핍이 아닌 ‘성차’로써 정의한다. 다시 말해 기존의 남근중심적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 개념으로서 ‘성차화된 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로스는 플라톤, 데카르트, 스피노자, 니체, 프로이트, 메를로퐁티, 라캉, 푸코, 링기스, 들뢰즈와 가타리 등 철학 및 정신분석학 텍스트는 물론 생물학, 의학, 신경생리학, 정신생리학의 연구까지 방대한 자료를 세밀하게 독해하고 분석하여 논거로 삼는다.
몸은 마음을 설명하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상 페미니스트들이 몸에 초점을 맞추려고 할 때, 구체적 특수성을 지닌 몸들은 마음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너스까지 추가해서 성차의 문제를 어김없이 제기한다. 성적 특수성, 즉 어떤 종류의 몸에 관한 것이며, 이런 몸들 사이의 차이란 무엇이며, 이런 몸들의 산물이나 결과물은 무엇이 될 것인지 등을 질문함으로써 여성이 남성에게 사회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상황을 보다 쉽게 입증하고 문제화하고 변형할 수 있는 방식이 직접적으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 성차는 페미니즘과 현대 유럽 철학이 교차하는 협상 지점이며, 이 협상 과정에서 몸을 중심적인 어휘로 자리 잡도록 만들어주는 핵심 용어다. (…) 이 책은 몸의 재형상화를 통해 몸을 분석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이를 통해 몸을 주체성의 ‘원료’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한다.
「서문과 감사의 글」 중에서
성차와 ‘뫼비우스 띠’
: 이원론과 일원론, 그 모든 한계를 넘어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남근중심주의의 극복을 위해 여성 또는 남성의 몸의 근본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 즉 성차화된 몸의 특수성을 고려한 몸 이론을 추구한다. 그에 의하면 몸은 문화-외부와 무관한 유전적-생물학적인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문화-외부의 각인 또는 코드화의 결과로 성차화된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몸은 각인에 영향을 주는 특수성을 가진 재료이며, 문화는 그런 특수성을 가진, 성차화된 몸에 각인되는 텍스트이다. 따라서 그동안 남근중심주의 이론이 전제한 남성의 위치, 성차를 초월한 위치는 남성의 환상이자 교만이며 사치일 따름이다. 결국 그로스의 주장은 여성 또는 남성의 몸의 특수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의 관점’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다시 말해 성차화된 몸을 탐구하는 것이야말로 남성중심주의, 남근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물론 그로스 스스로가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그것이 “페미니즘적인 이론틀을 대표한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무엇보다도 몸들의 환원 불가능한 특수성 가운데서 남성의 몸과 여성의 몸에 관해 질문하도록 해주는 이론틀을 제공하고 싶다. (…)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밖의 어떤 성이든 간에, 하나의 성은 오직 성적으로 특수한 몸의 문화적 의미화 작용에 따라서(그리고 바라건대 그것을 넘어서서) 경험하고 살아갈 뿐이다. 성차의 문제틀은 어느 정도 성별 사이의 간극을, 간격을 메우려는 지식의 실패를 수반한다. 각 성에게는 다른 성에 관해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 외부적이고 예측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남아 있다. 최선의 상황일 경우 이 환원 불가능한 차이는 경외감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보다 덜 우호적인 상황일 경우 그것은 공포, 두려움, 투쟁, 저항을 표출한다. 이 차이를 존중할 때, 그것은 거리, 분리, 간격을 암시한다. 그것은 각 성이 삼켜지거나 압도되지 않고 다른 성과 관계 맺는 것을 포함한다. (…) 이 치유할 수 없는 거리는 기를 쓰고 차이를 부정하고 동일성과 정체성을 고집하는 남성주의 체제에서는 여전히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남성주의 체제들은 타자를 동일자의 (보다 열등한) 이본으로 변형한다.
8장 「성차화된 몸들」 중에서
그리고 그로스는 성차화된 몸을 이해하기 위해 ‘뫼비우스 띠’ 모델을 제시한다. 뫼비우스 띠는 “마음이 몸으로 굴절하고 몸이 마음으로 굴절하는 것과 같이 꼬임이나 역전을 통해 한 면이 다른 면으로 서로 바뀌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모델은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꼬이는 것과 내부가 외부로, 외부가 내부로 흘러드는 통제할 수 없는 통로와 벡터를 보여줌으로써” 이원론과 이원론이 자의적으로 상정한 마음/몸, 남성/여성 사이의 위계를 해체한다. 동시에 일원론과 환원주의 역시 거부한다.
뫼비우스 띠 모델은 두 가지 ‘것’─마음과 몸─사이에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뫼비우스 띠 모델은 그 둘 사이의 동일성도, 철저한 분리도 가정하지 않는 모델이며, 서로 연관된 이질적인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하나를 꼬아 다른 하나로 합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마음/몸의 관계가 환원주의, 편협한 인과관계의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이분법적인 분리에 정체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모델은 주체성을 정신적인 깊이와 육체적인 피상성의 결합으로서가 아니라 삼차원 공간에서 그 각인과 회전이 깊이의 모든 효과를 산출하는 표면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모델은 주체성을 충분히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이런 물질성으로 인해 주체성이 확장되고 언어, 욕망, 의미화의 작용을 포함하고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8장 「성차화된 몸들」 중에서
그로스는 이것이 최종적인 모델이라고 결론짓지 않는다. 오히려 몸의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맥락에 필요한 많은 모델을 탐구하고 실험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단언한다. 분명한 것은 이 책 『몸 페미니즘을 향해: 무한히 변화하는 몸』이 (성차화된) 몸에 대한 페미니즘적 논의의 출발점이자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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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 책은 근본적으로 서로의 바깥에 존재하는 두 개의 학문 분야 ㅡ건축과 철학 ㅡ가 그 안에서 서로 위계감 없이 상호작용하는 제3의 공간, 즉 서로를 바깥에 두는 공간, 그러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요구하는 방식들을 설명하고 있다. 건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건축 디자인과 구성 및 이론들을 철학적 담론의 요구와 급박성, 철학적 논쟁의 엄격성, 그리고 철학적 성찰의 추상성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것일지 모른다. 또한 철학을 건축학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건축적 목적을 위해 그 자체의 이론적 문맥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변형되거나 혹은 훼손된 철학적 개념들이나 명제들을 사용할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한쪽의 원리가 나머지 한쪽의 원리를 그 내적인 필요와 구속에 굴복시켜 결국은 그것의 종속된 타자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것들이 서로서로 나란히 동등하고도 상호연관된 담론과 실행으로 탐구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두 원리 모두를 제3의 원리, 즉 두 원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입장 혹은 위치에 종속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16쪽)
사유는 하나의 원인과 그의 습관적 결과 사이, 한 존재와 다른 존재 사이에 오는 무엇이다. 사유는 지층들로부터 어떤 것이 도망가고 분기하게 하는 지층 사이의 틈이다. 사유는 그들을 무질서와 무조직이 아니라 재조직으로 대체하기 위해 기대ㆍ질서ㆍ조직을 흔들어 놓고, 아마도 어지럽힌다. 순수한 긍정성을 취하기보다는, 방해하는 효과를 갖는 사유는 (새로운 사유, 새로운 사물이나 배치를) 단지 능동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여 예상되는 것 안에 주저 또는 휴지, 말 더듬기를 끼워 넣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 사유는 계열들, 주체 또는 객체 안에 이미 있는 무언가를 있게 허용함으로써 습관과 예상을 소극적으로 방해하도록 적극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107쪽)
디지털 기술은 모든 종류의 정보를 이진법의 형태로 바꾸고, 물질을 실리콘과 액정의 흔적(칩과 스크린)으로 환원시키면서 정보의 축적, 순환, 검색을 변형시켜 왔다. 아마도 이러한 기술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가장 놀라운 변화는 물질성, 공간, 정보에 대한 우리들의 지각의 변화이며, 이 변화는 건축, 거주 및 주거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 방식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침이 틀림없다. 이러한 변화들은 오늘날 사이버공간이나 가상현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재현과 정보의 시뮬레이션, 축적, 순환의 복잡한 시스템의 발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이버공간은 우리 자신의 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세계로 간주되는데, 이 세계는 공유된 가상공간을 통해 전혀 다른 물질 공간들이나 개인들을 연결시키는 전 지구적 소통망과 컴퓨터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가상공간과 그것의 다양한 내용들의 윤곽은 내가 살아가는, 일상공간이라고 묘사할,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는 공간(들)에서 들어 보지 못한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되며, 그리고 어느 정도 조절되고 있다. (118쪽)
철학과 건축이 서로 생산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관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자신을 확인받고 외부의 승인을 얻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방에 비해 자신의 우월성이나 우선성을 가정하지 않고, 또 서로 간의 관계가 직접적인 효용이나 번역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르게 되기를 통해 서로 상대방에 이용될 수 있을까? 단 하나의 매우 가는 가닥이 이 두 전문 분야를 묶어 준다. 그것은 새로움 또는 잠재성ㆍ잠복성(latency) 또는 되기라는 생각이다. 이는 서로 간의 도움과 겹침과 차이로부터 두 전문 분야 모두 안에서 주목을 받고 생산적으로 발전한 생각이다. 이 잠재적인 것이란 생각은 건축과 철학 둘 다에 대해 (결과는 다르지만) 그 둘이 공간과 시간과 운동과 미래성과 되기에 관해 세웠던 매우 근본적인 가정들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일련의 질문들을 불러일으킨다.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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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공간이 가진 ‘잠재성’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책이다. 육체 페미니즘을 개척한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는 이 책에서 (철학에서의 ‘몸’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건축에서의 ‘공간’ 개념을 다각도로 탐구함으로써 공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뤼스 이리가레 등의 철학적 개념들을 빌려와 건축이라는 고정된 실체에 철학이라는 ‘바깥’을 도입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고자 하는 독특하고도 의미 있는 기획이다. 철학과 건축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각각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책.
‘공간성’에 갇힌 ‘공간’을 해방시켜라!
철학과 건축의 만남,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다!!
프랑스 왕정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부터 21세기 부와 호화로움의 표상이 된 두바이의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까지, 건축이 구성해 낸 공간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주어진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복무하는 하나의 ‘대상’ 혹은 ‘고정된 실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게이들의 보호구역 역할을 했던 뒷골목의 게토들이 이성애자들에게 성적 자극을 제공하는 매혹의 공간이 되고 전 세계 금융자본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가 항의와 점거의 아이콘이 된 것처럼, 건축 혹은 공간은 항상 처음의 목적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운동해 간다.
『건축, 그 바깥에서』는 이러한 ‘공간의 잠재성’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책이다. 몸에 관한 페미니즘의 입장 중에서도 ‘성차’(性差)에 주목하여 육체 페미니즘(Corporeal Feminism)이라는 이론적 영역을 개척한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는 이 책에서 (철학에서의 ‘몸’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건축에서의 ‘공간’ 개념을 다각도로 탐구함으로써 공간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스스로 “건축 분야에는 문외한”이라고 말하는 이 철학자는 앙리 베르그송, 질 들뢰즈, 뤼스 이리가레 등의 철학적 개념들을 빌려와 공간의 잠재성을 자유롭게 탐사한다. 이는 건축이라는 고정된 실체에 철학이라는 ‘바깥’을 도입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그리고 그 공간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고자 하는 독특하고도 의미 있는 기획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건축에 대한 글 모음인 만큼 바깥을 사유하는 것에 대한 글 모음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로스는 시간, 변화, 발생과 같이 전통적으로 공간과는 다른 축에 위치한다고 여겨지던 철학적 관념들을 건축에 결합함으로써 공간 자체가 지닌 생명력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건축은 ‘가능성’(possibility)과는 구별되는 ‘잠재성’(virtuality)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되기’(becoming)를 할 수 있는 존재,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스스로 호흡을 바꿀 수 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철학과 건축 사이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각각의 의미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탈경계 인문학’의 완벽한 표본이다. 이는 ‘사이 시리즈’(그린비출판사, 2012년 3월 1차분 3권 발간) 등을 통해 탈경계 인문학의 길을 모색해 온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공간팀’이 이 책을 번역한 이유, 그리고 독자들이 이 책에 주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건축, 그 경계의 ‘바깥’에서 발견한 특별한 시선!
기술과학인 건축과 인문학인 철학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분야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구한 전통을 가진 학문으로서의 건축 역시 스스로의 철학적 관점을 끊임없이 계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대한 건축가들 혹은 도시계획가들은 어김없이 위대한 사상가였고,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물 혹은 도시를 구축해 냈다. 그렇지만 그러한 ‘건축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건축의 ‘내부’에서만 합리성을 갖고 통용되는, ‘내재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반면 이 책 『건축, 그 바깥에서』는 건축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건축이라는 학문의 ‘바깥’에서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독특한 차별점을 갖는다. 단순한 물리적 외부가 아닌 “안쪽의 자기 일관성에 속박되거나 구속되는 것을 거부하는”, “우리가 완전히 혹은 완벽하게 차지할 수 없는 장소”(15쪽)로서의 바깥을 도입함으로써 공간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이다.
건축의 ‘외부자’로서 엘리자베스 그로스는 시간성과 젠더라는, 건축의 바깥에 있는 개념(이자 철학의 안쪽에 있는 개념)이 건축과 공간에 생산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읽어 내며 베르그송, 들뢰즈, 이리가레 등의 철학자들이 공간을 사유한 방식에 대해 분석한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을 이끌며 주요하게 사용했던 잠재성과 시간성은 그로스의 사유에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가능성’이 현실의 범위 안에서 예측 가능한 기대를 표시하는 용어인 데 반해, ‘잠재성’은 내재되어 있되 발현의 양상과 시기를 예측할 수 없는 완벽한 개방성을 의미한다. 그로스는 이러한 베르그송의 개념을 도입하여, 단순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현되지 않은 과거의 잠재성에 온전히 열려 있는 건축/공간에 주목한다. 한편 들뢰즈는 건축과 건축 내부에 유동성이 존재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로스는 들뢰즈의 생각이 단순히 건축의 고정된 목적을 재고하기 위해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구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물음을 던지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건축은 고정되는 독립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움직이고 변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가레가 주장한 ‘차이’의 문제도 건축의 성차를 설명하는 데 영감을 제공한다. 이리가레는 그동안 여성이 일종의 용기 혹은 덮개로서, 자신의 공간을 갖지 못하고 남성의 정체성을 담는 공간으로서만 기능해 왔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여성성이 공간화되어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로스는 건축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해 왔음을 비판하며, 건축을 일종의 ‘그릇’으로 여기는 인식에 반기를 든다. 건축은 도시계획자나 건축가의 필요와 욕망에 의해 구성되고 조직되는 단계까지만 수동적인 존재여야 한다. 그 이후의 건축은 “다양한 신체들이 살아가는 터이자 실천에 의해 뒤틀리고 변형되는 살아있는 실체”여야만 하며, 무엇인가로부터 부여되는 가능성을 뛰어넘어 잠재성에 기초하여 평가 혹은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도래하지 않은 공간, 그러나 곧 도래할 공간
『건축, 그 바깥에서』는 물리적으로 우리가 발을 디딜 수 있는 건축물만을 공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력이 닿는 곳, 현실에는 없지만 있고자 하는 곳까지 공간으로 생각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이버공간이다. ‘가상’의 공간이면서도 현대인의 삶에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사이버공간은 (역설적이게도) 현실 세계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을 육체성의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으며 자유로운 공상의 실현이 가능한 공간, 욕망이 통제되는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사람들은 성별과 외모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만든 아바타를 자아와 동일시하여 대리만족을 느끼는 한편, 자신의 숨겨진 욕망을 웹상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에 투영시키기도 한다. 물론 사이버공간이 물질과 육체, 사회와 공동체의 관계를 변형시킨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지만, 컴퓨터 기술 애호가들은 사이버공간이 궁극적으로 건축에 있어 비(非)물질적인 관념을 실현하고 감각과 물질을 강화하거나 증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가능성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시뮬레이션의 장이자 정보 교환의 네트워크가 되는 사이버공간은 예정된 결과를 학습해 온 관습적인 건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막연히 공간 혹은 장소로 생각해 왔지만, 실질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유토피아의 경우가 그러하다. 유토피아는 환상적인 ‘곳’,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이 실현되는 ‘곳’, 즉 그러한 ‘공간’ 혹은 ‘장소’로 이해된다. 그러나 『건축, 그 바깥에서』는 유토피아가 공간이나 장소만으로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없는, 그것을 넘어서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토머스 모어 등 ‘고전적인’ 유토피아의 논의들을 검토한 후, 그로스는 “이상적이라는 것은 전혀 위상학적으로 고려될 수 없는 문제이며, 유토피아는 공간성의 논리를 확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대신에 그녀는 유토피아를 ‘잠재성을 가진 현재’, ‘미래를 가지지 않은 미래’로 평가한다. 즉 유토피아란 현재의 이상이 포함된, 맞이하고자 하는 미래라고 이야기하며, 공간적 차원이 아닌 시간적 차원으로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도래할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며 그로스는 궁핍한 자, 노숙인, 동성애자, 여성 등의 소수자들도 건축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동체는 내부를 공고화하기 위해 소수자들을 일부러 더 타인에게 노출시킨다. 하지만 건축은 섞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존재들을 부각시키며 내부를 공고히 하는 공동체보다, 공동체 안으로 흡수될 수 없는 타자성으로만 기능하는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그로스는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공간은 하나의 정체성과 하나의 구조로 이루어지지 않은 진정으로 열려 있는 공간, 부여된 목적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본의 논리, 강자의 논리로 공간이 가진 모든 잠재성을 질식시켜 가는 한국사회의 빈약한 공간 담론 속에서 이 책을 읽는 우리가 끊임없이 곱씹어야 할 메시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