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조소관 정원(朝倉彫塑館 庭園)
아사쿠라조소관(朝倉彫塑館)은 도쿄도 다이토구(台東区) 야나카나나쵸메(谷中七丁目)에 있는 메이지(明治) - 쇼와(昭和) 연간 조각가였던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1883-1964)의 아틀리에 겸 주택을 개장한 미술관이다. 1986년 다이토쿠(台東区)로 이관되어, 현재는 공익재단법인 다이토쿠(台東区) 예술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아사쿠라의 사후 유언에 따라 3년에 걸쳐 개수하여 1967년 일반공개되었고, 1986년에는 다이토구에 이관되어 구립 박물관이 되었으며, 2001년에는 아사쿠라조조관 건물 4동이 국가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고, 2008년 '구 아사쿠라 후미오 정원'으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는 호가 코우소(紅塐), 동양의 로댕으로 불렸으며, 1964년 쇼우산미(正三位)에 추서되었던 일본 조각계의 거장으로, 장녀는 무대미술가이자 화가인 아사쿠라 세츠(朝倉摂, 1922-2014), 차녀는 조각가인 아사쿠라 쇼우코(朝倉響子, 1925-2016)이다. 예전 중앙청 건물에 있었다고 하는 데라우치, 사이토 총독 동상도 제작했었고, 윤승욱(1914-?), 김종영(1915-1982) 등 우리나라 근대 조각가가 도쿄미술학교 조각가에 유학했을 때 스승이기도 했다.
1883년, 오오이타현(大分県) 오오노군(大野郡) 가미이다무라(上井田村, 현재의 분고 오오노시(豊後大野市) 아사지마치(朝地町) 촌장이었던 와타나베 요우조우(渡辺要蔵) 슬하의 11형제 중 다섯번째 아들이었던 후미오(文夫)는 1893년 10살 때 중의원의원 아사쿠라 치카타메(朝倉親為, 1843-1901)의 동생, 아사쿠라 다네히코(朝倉種彦)의 양자가 되지만, 입학했던 오오이타(大分) 진죠우 중학교(尋常中学校) 다케다분교(竹田分校)를 세번 낙제하여, 낙담한 모친 키미(キミ)에 의해 1902년 당시 이미 도쿄에서 신진 조각가로 활양하고 있었던 9살 연상의 형 와타나베 죠우난(渡辺長男,1874-1952)에게 보내지게 되었고, 처음에는 하이쿠(俳句)에 뜻을 두고 하이쿠의 대가 마사호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를 사사하고자 했지만, 하필 상경하던 그 날 시키(子規)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형의 곁에서 머물다 조소에 매료된 아사쿠라(朝倉)는 필사적으로 공부한 끝에 이듬해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현재의 도쿄예술대학(東京芸術大学) 조각선과(彫刻選科)에 입학하여, 조소 작품 활동에 몰두하였다. 모델을 쓸 돈이 없어 우에노동물원(上野動物園)을 다니며 동물 스케치를 하던 중, 우연히 교수에게서 소개받은 무역상으로부터 주문받은 동물 조각상을 제작하며 돈을 벌었고, 졸업할 때까지 하루 한 개씩 만들어, 그 갯수가 총 1,200 개 달했다고 한다. 이 무렵, 당시의 해군성(海軍省)의 삼해장(三海将) 동상 공모에 니레 카게노리(仁礼景範, 1831-1900) 중장상(中将像)으로 응모 1등을 차지하면서 주목받았다.
이후, 1907년, 졸업작품으로 진화(進化)를 출품하였고, 야나카(谷中) 텐노지쵸(天王寺町)에 아틀리에를 열고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문부성이 주최한 2회 문전(文展)에 '어둠(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2등을 차지하였고, 다음해에도 '산에서 온 남자(山から来た男)'로 3등을 차지했으나, 연속 2등에게만 유럽 유학 비용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1910년 최고걸작으로 꼽히는 하카모리(墓守)를 발표한 후, 친구인 오기와라 로쿠잔(荻原碌山, 1879-1910)의 죽음, 와병중이었던 동생 간병에 여념이 없었고, 그 와중에 돌연 싱가폴, 보르네오 등지를 둘러보러 떠나게 된다. 훗날 술회하길, 당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1836-1915)의 소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노우에의 의뢰로 비밀리에 '왜인이 찾아와 백인을 쫓아내 준다'는 예언이 퍼지고 있던 말레이로 급파되었던 것이었고, 당시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왕족들도 믿고있다는 소문을 이노우에게 전하면서 이를 확인해달라고 하면서 시찰 의뢰받았던 것이라고 하였다. 아사쿠라(朝倉)는 말레이, 싱가포르, 보르네오, 브루나이 등지에 8개월 동안 머무르다 귀국하여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때의 경험이 훗날 작품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8회 문전(文展)까지 연속해서 상위에 입선하였고, 10회에 이르러서는 34살의 나이에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발탁되기까지 했다.
1921년에는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교수로 취임하여, 당시 라이벌 타카무라 코우타로우(高村光太郎, 1883-1956)과 나란히 일본 미술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에는 칸토대지진으로 400여점의 파편으로 부셔진 도쿄미술학교 소장의 로댕작 '청동시대'의 복원작업을 맡았는데, 이 일로 이후 동양의 로댕으로 불렸다. 1924년에는 제국미술원(帝国美術院) 회원이 되었지만, 1928년 제전제도(帝展制度) 개혁을 건의한 후 사임하였고, 같은 해 제전(帝展)에 아사쿠라 문하의 작가들이 단체로 출품을 거부하는 바람에 조각관 전시에 차질을 빚었고, 이 일로 아사쿠라가 양성하고 있던 학원의 제자들이, 그의 행동이 비예술가적이라 비난하며 성명을 내고 탈퇴하였다.
아사쿠라는 1907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현재의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学)을 졸업하면서 현재 지역에 터를 잡았다. 1910년 무렵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건물로는 구 아틀리에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1928년 현재의 아사쿠라 조소관(朝倉彫塑館)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34년에는 아틀리에를 개축하여 아사쿠라 조소학원(朝倉彫塑塾), 훗날 아사쿠라조소관(朝倉彫塑館)을 지었는데, 특히 건물 가운데 중정(中庭)인 고텐노스이테이(五典の水庭)에는 야나카(谷中)의 지하수를 이용하여, 사시사철 흰 꽃이 쉴새없이 피고 있으며, 유교의 덕목, 仁・義・礼・智・信을 조형한 5개의 거석이 배치된 독특한 양식이다.
당시 아사쿠라는 직접 설계를 맡아 독창적으로 짓고자 자기 마음대로 선을 방안지에 그어가며 설계 및 감독을 하였고, 대공(大工) 고바야시 우메고로우(小林梅五郎), 조원가, 기와전문가 등 당대의 고수들과 의기투합하여 8차례에 걸쳐 증개축을 거듭하였다. 당시로는 모험적인 절충형으로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구 아틀리에의 서양풍 건축물과 통나무와 대나무를 모티브로 만든 구 주거부분의 일본식 스기야(数寄屋) 양식 건축물이 위화감없이 융합되었고, 거기에 중정과의 일체감까지 고려한 독특한 공간의장과 조형미가 돋보이는 건축물을 완성하였다.
또한 아틀리에 바닥에서 지하 7.3미터 간에 전동 승각 제작대가 설치되어 조소 작품 활동에 용이하도록 고안되어 있는데, 3층까지 틔여 있고 8.5 미터 높이의 내부는 북쪽으로부터의 안정된 자연채광으로, 천장, 벽면은 곡면이 강조되어 조소 작품 감상시 불필요한 세로선이 배경에 드러나지 않게 배려하였다. 아사쿠라 후미오는 삼십 년 가까이 지냈던 야나카 텐노지쵸의 주거를 개축하면서 자신의 문집 「조소여적(彫塑余滴)」에 ‘나의 아틀리에(私のアトリエ)’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아틀리에를 목조로 짓자니 보와 기둥을 좀처럼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스스로 고안할 조각을 만들기 위해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작품을 위아래로 운반하는 기계 장치도 필요하여, 철근 콘크리트로 짓기로 하였다. 이 건축은 모두 일본적인 것으로, 외국의 흉내를 일절 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의 방식으로 할 생각으로, 기술이라든지 재료는 적극적으로 도입하되 형식은 완전히 마음 가는 대로 선을 모눈종이 위에 그려서 완성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을 찾은 문화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외국의 사람들을 기꺼이 아틀리에로 맞이하거나, 일본이 국제적인 어떤 일로 미술가의 아틀리에 등을 이용할 경우가 있으면, 이를 위해 개방하고 제공할 경우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 문화계에서 조각가가 이러한 아틀리에도 갖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자부심이 된다면, 일본문화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으로 크고, 또 손이 많이 가는 세공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1932년 와세다 대학교(早稲田大学校) 교빈으로서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1838-1922) 10주기를 기념하여 오오쿠마상(大隈重信像)을 만들었다. 1935년 제국미술원(帝国美術院) 개혁에 따라 다시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37년에는 그 후신인 제국예술원(帝国芸術院) 회원이 되었다. 1944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学校) 교수를 사임하고 제실기예원(帝室技芸員, 쇼우산미(従三位), 훈4등 서보장(勲四等瑞宝章)을 수상하였다. 2차대전으로 인해, 400여점에 달하는 그의 작품은 전시 공출을 당해 사라져 버렸고, 원형 300점만 남았지만, 다행히 아틀리에만은 전화를 피했다.
종전 후에도 아사쿠라는 열정적으로 자연주의적 사실 묘사에 몰두하였고, 1948년에는 문화훈장, 1949년 일전운영회(日展運営会) 상무이사, 1952년 문화공로자(文化功労者), 1954년 일전이사(日展理事), 1956-1959년까지 일본예술원(日本芸術院) 제일부장(第一部長), 1958년에는 일전고문(日展顧問)에 취임하는 등, 일본 조각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특히 다작으로 전국각지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64년 급성백혈병으로 81세의 나이에 타계했으며, 쇼산미(正三位)에 추서되었다.
조소관 내 서재에는 4미터 높이의 서가가 있어 천정까지 양서, 의학서를 포함 3만권 이상의 방대한 장서가 압도적이고, 생전 2명의 딸과 서재에서 학교 대신 직접 교육을 했었다고 전해진다. 아사쿠라(朝倉)는 동물 특히 고양이를 특히 좋아했고, 많을 때는 15-16마리를 기를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날렵한 몸놀림,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 등에 매력을 느껴, 매달린 고양이(吊るされた猫), 잘잡았다(よく獲たり) 등 몇 작품을 남기기도 했으며, 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맞춰 고양이 주제의 작품 100 점을 만들어 전시회를 열고자 했으나,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동양란 재배, 분재에도 조예가 깊어 '동양란 키우는 법(東洋蘭の作り方)'를 쓰기도 했으며, 분재가(盆栽家) 고바야시 도시오(小林憲雄,1889-1972)과 같이 당시까지 취미에 지나지 않았던 분재의 예술적 가치를 발견하고 현재까지도 개최되고 있는 국풍분재전(国風盆栽展)의 개최에 힘썼다. 또한 자신이 지도하는 조소학원에도 원예를 필수 과목으로 두었고, 지금도 남아 있는 아사쿠라조소관(朝倉彫塑館)의 옥상텃밭에는 토마토, 무우를 기르는 등 자연과의 접촉을 예술의 기본개념으로 여겼으며, 조소 작품의 야외 전시에도 적극적이었다.
1936년 신문전(新文展) 초대전 회장에서 일본화(日本画)에 대한 감상을 질문받았을 때, '병풍은 누더기를 감추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도코노마(床の間)야말로 일본화(日本画)를 감상하는 최적의 형태이다. 그래서 일본화는 병풍보다 축(軸)에 그려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시실은 조소 작품을 전시하는 구 아틀리에 부분을 중심으로 유품과 장서를 담은 서재, 소장품을 담은 응접실 등이 있으며, 이외 족자, 도자기 등 아사쿠라 후미오의 수집품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동양란의 온실이었던 선룸(サンルーム)는 고양이의 방(猫の間)으로 불리며 아사쿠라가 사랑했던 고양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