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장(第四十五章). 예감(豫感).
다소 음울한 인상의 집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귀선(鬼仙)이 약간
기괴(奇怪)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흐흐흐,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구려. 금공자는 어째서 내게 그 일을 물어보지 않으시오? 정
말로 내가 여의공자(如意公子)라는 애숭이를 어찌했다고 생각하시
오?"
금몽추는 그를 잠시 주시하다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럼 귀선은 그 일이 자신의 짓이 아니라는 말이오?"
귀선은 음산(陰散)한 표정을 지으며 다소 화가 난 사람처럼 격앙
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물론 금공자는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오. 당연히 그 삼선(三
仙)의 말을 더욱 신뢰할 수 있을 테니까. 흐흐흐......, 그렇소!
나는 바로 그와 같은 짓을 했소. 자, 이제 어쩌시겠소?"
금몽추는 이에 다시 안색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가볍게 웃어 보
이며 말했다.
"나는 당연히 그대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소. 아마도 거기에는 약간의 오해(誤解)가 있었던 모양이오. 나
는 그대들 팔선(八仙)이 모두가 잘 화합(和合)하여 살아 가기를 바
라고 있소."
사선이 눈빛을 기이하게 굴리면서 듣고 있다가 나서서 웃으며 끼
어 들었다.
"귀선은 이번에 그 일로 상당한 곤욕을 치루어야 했소이다. 솔직
히 의선(醫仙)이 워낙 깐깐하여 말을 해도 믿으려고 들지 않고, 또
한 고집불통이 아니오? 게다가 우리들이 보기에는 그 천선(天仙)도
역시 그다지 좋은 사람이 아니오. 어쨌든 그들은 금공자의 수하(手
下)나 다름이 없으니, 이번의 일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명이나 보
상이 있어야만 할 것이오."
금몽추는 다소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사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질문했다.
"천로(天老)가 좋지 못하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오? 거
기에 무슨 근거라도 있다는 말이오?"
사선은 어색한 듯 웃어 보이다가, 일순 주위 사람들을 둘러 보며
비아냥거리듯이 대꾸했다.
"솔직히 금공자도 우둔하지 않다면 이번의 일이 어떻게 된 영문
인지 알 수 있을 것이오. 본래 천선은 우리들이 단합되어 잘 살아
가고 있는 것이 몹시 배가 아팠던 모양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
게 말도 되지 않는 일로 모함을 했었겠소?"
"나는...... 천로를 그렇게 나쁘게만 보고 싶지가 않소. 게다가
그것은 당신들도 마찬가지요. 사실 그대들 팔선은 모두 다 과거 나
의 선사(先師)와 인연이 깊은 사이가 아니었소?"
하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선(魔仙)이 음흉(陰凶)한 눈빛으로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이번의 일은 그렇게 말로 얼버무려서 쉽게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오. 게다가 이번의 사건은 혹시 당금의 무림정세(武林情勢)와
도 깊은 연관이 있는 지도 모르는 일이지. 과거 당신의 사부(師父)
는 그와 같이 일을 흐리멍텅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었소. 이제 당신
은 어떻게 할 참이오?"
금몽추는 그들의 추궁에 곤혹스러운 듯하면서도 계속 담담한 표
정을 지어 보이다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오늘 당신들을 만나보게 되어 반가운 기분이오. 아마 그것
은 당신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고 싶소. 오늘과 같은 날은 술
이라도 나누면서 즐거워해야 할 날이겠지만, 그러나 당금(當今)의
상황이 좋지 못하니 그렇게는 할 수가 없을 것 같소. 지금 내가 당
신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다른 것이 아니오. 그대들도 이
미 나의 선사(先師)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이오. 무릇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그 대가가 결국에는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법이
오. 당신들도 항상 그 점을 명심하면서 세상(世上)을 위해 일해주
기 바라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行動)을 했다
고 하더라도 그것을 뉘우치고 바르게 돌아 온다면, 오히려 칭찬을
할 것이지 비난하는 사람은 아니오."
우람한 체구의 하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도선(刀仙)이 잠자코 있
다가 이윽고 가장 늦게 입을 열어 말했다.
"듣자니 금공자는 우리를 의심(疑心)하고 있고, 또한 천선에게
말을 전하라고 했다고 하던데 그 것이 사실이오? 만약 결정적인 증
거를 잡게 되면 우리 모두를 완전히 없애버린다고 하고, 또한 개과
천선(改過遷善)을 하라고 말했다고 하던데, 그렇게 한다면......
흐흐! 이건 우리에게 너무나도 심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오?"
마선이 일순 그 말을 받아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잿빛의 번갯불
과도 같은 광채(光彩)를 내뿜으며 소리쳤다.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소. 금공자! 당신 이거 좋은
사부를 두었다고 사람들을 너무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오? 혹시 무
슨 수작을 꾸며서 우리 모두를 제거(除去)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
르는 일이지. 으흐흐흐......! 만일 그런 식이라면 이건 정말로 곤
란하지!"
금몽추는 안색(顔色)이 약간 변한 상태에서 마선을 바라보다가,
다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건 당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에 한 말이었소. 하지
만 마선 당신이 지금 나에게 그런 일로 결투(決鬪)를 신청하겠다면
나는 거절하지 않겠소."
마선은 일순 전신(全身)에서 막대한 기세(氣勢)를 일으키며 더욱
흥분한 듯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좋아! 좋아!...... 이건 차라리 잘 된 일이야! 저 자는 지금 우
리 모두에게 말을 하고 있으니, 바로 다들 합공(合攻)하여 저 자를
제거(除去)해 버리는 것이 어떤가?"
삽시간에 마선의 주위에 회색(灰色)빛의 음산한 기운이 가공(可
恐)스럽게 일어나 오 장 이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는데, 그 엄청
난 위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사선도 즉시 전신의
기운을 일으키며 흡사 홍보석(紅寶石)처럼 붉은 광채가 번쩍이는
시선(視線)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건 맞는 말이야! 만일 저 자가 우리에게 어떤 음모(陰謀)를
꾸미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로서는 당연히 먼저 선수를 치는 수밖
에 없는 일이 아닌가? 어쩐지 천선 등도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것
같더라니까...... 흐흐, 금공자! 어떻소?...... 해명해 보시겠소?"
금몽추는 안색이 더욱 굳어진 상태에서 계속 그들을 지켜보고 있
다가, 이윽고 다소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해명하지 않겠소. 사실 당신들도 당금의 상황에 대
해서 전혀 혐의가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어 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오. 다만 지
금 당신들이 나와 일전(一戰)을 겨루겠다면 나도 사양하지는 않겠
소. 이것이 어떤 식의 결말이 나든 간에 당신들도 후회를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검선도 아까처럼 다시 신검(神劍)을 일으켰고, 또한 도선도 거대
한 자색(紫色)의 신도(神刀)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거기
에 마선과 사선의 기운이 합쳐지게 되자, 일순 장내(場內)는 무시
무시한 압력이 파동치기 시작하고 아직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는데
도 벌써부터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주위의 전각(殿閣)들이 통
째로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상황은 말 그대로 혼돈(混沌)의
암흑천지로 화한 듯하여, 설사 그 무서운 살기(殺氣)와 엄청난 긴
장감 등을 빼더라도 그 가공(可恐)스러움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등에 금몽추를 태우고 있는 궁구가조차 놀라 커다
란 두 눈이 휘둥그래질 지경이었고, 아마도 일반인들이라면 이런
무시무시한 광경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금몽추는 무거운 표정을 한 상태에서 여전히 그대로 있을 뿐이었
는데, 이 순간 잠자코 있는 그는 오선(五仙) 중의 하나만 덮쳐 들
어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이 무력(無力)해 보이기도 했다. 문득
아직 기운을 일으키지 않고 바라보고 있던 귀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그만 합시다! 모두가 오해(誤解)에서 비롯된 일이고, 또한 마선
의 성격이 다소 급한 편이라 그러는 것이니 금공자도 이해해 주시
오. 솔직히 더러운 누명(陋名)을 뒤집어 쓰고 있는 나조차도 지금
이렇게 가만히 있지 않소?"
귀선의 말이 떨어지자 검선과 도선이 즉시 기세(氣勢)를 거두기
시작했고 사선 또한 그러했으며, 마선도 다소 멈칫하는 느낌이었기
에 압력이 훨씬 줄어들어 궁구가는 그제서야 다소나마 숨을 쉴 수
가 있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오? 그렇다면 이대로 그냥 싱겁게 끝내자는 말이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귀선은 마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다소 의미심장(意味深長)하
게 웃어 보였다.
"대개 사내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고, 또한 만나면 이렇게 우선
싸우고 보는 것이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에서 멈춰야만 서로
의 위신이 서지 않겠소?"
마선은 다소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윽고 마지못한 듯이 기세를
거두며 싸늘하게 말을 내뱉았다.
"나는 솔직히 이번이 첫대면이고, 또한 금공자 당신이 나이가 어
리기 때문에 참는 것이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렇게 나올 경우에
는 나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마선이 기세를 거두자 다른 사람들의 기세도 모두 사라져서 장내
(場內)는 다시 처음처럼 조용해 지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팽팽한
긴장감만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금몽추는 잠시 입을 다
물고 있다가, 이윽고 길게 탄식을 하며 말했다.
"당신들은 아직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소. 나는 실로 당신들
이 생각하는 바와 같지 않소. 만일 그런 것을 안다면 이렇게 무례
하게 나올 수도 없을 것이오. 어쨌든 나는 지금 곤륜노인(崑崙老
人)의 제자로써 당신들에게 권고하는 것이오. 당신들의 이와 같은
성취(成就)는 실로 드문 일이오. 그러니 한 때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그러한 그 모든 노력(努力)을 수포로 돌리지 않게 되기를 바
랄 뿐이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으니...... 당신들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명심하기 바라오."
마선이 다시 크게 화를 내며 기세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그는 이
내 귀선의 눈짓을 받고 그저 나직하게 흥! 하고 코웃음만 치고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귀선이 이어 음산(陰散)한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쨌든 오늘의 이 회합(會合)은 제법 의미가 있었던 것 같소이
다. 우리는 서로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 다음에 다시 만
날 때는 근사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이만 돌아
가려고 하는데, 금공자는 혹시 다른 질문이라도 있소?"
금몽추는 무거운 시선으로 그들을 천천히 둘러 보다가 길게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다시는 기회가 없을 테니, 당신들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행동해 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들 오선은 나타날 때와는 달리 거의 흔적도 없이 순식간에 사
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그들이 인간(人間)의 경지를 거
의 초월(超越)한 능력자(能力者)들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주
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궁구가는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몸이 긴장감으로 얼어 붙어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금몽추는 어느새 담담한 심사가 되었는지 짐짓 가볍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우리도...... 이만 돌아 가기로 하자."
사흘이라는 시간이 실로 물 흐르듯 빠르게 지나갔다. 그간 무림
맹(武林盟)과 세외팔세(世外八勢)가 장생각(長生閣)을 맞이하여 곳
곳에서 국지전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왔고, 심
지어 그들은 성 안에서 혹은 금몽추가 머물고 있는 객점의 부근에
서도 치열한 격전(激戰)을 벌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문을 닫는 점
포들도 늘어나고, 이 객점의 주인 역시 몇 번이고 문을 닫을까 망
설인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장생각의 술책(術策)에 휘말려 처음에
는 다소 휘청거리던 해외팔세(海外八勢)도 방향을 바꾸어 무림맹과
잠시 힘을 합쳤기 때문에, 장생각이 인원의 숫자면에서 점차로 밀
리기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이(奇異)하게도 객점(客店)에 계속 머물고 있는 금몽추
에게는 그간 거의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를
찾아 와 주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그것은 그의 당금의 위치나
최근의 상황 등을 보더라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고, 또한
그래서 더욱 뭔가 이상한 조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이것은 그야말로 최후(最後)의 거대한 태풍(颱風)이 휘몰아치려는
어떤 준비나 그 직전의 고요함이 아닐까?
금몽추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그러한 이상해진 주변의 일에 신
경을 쓰는 것 같지 같았고, 외부에도 거의 멀리 나가지 않는 것이
마치 오히려 그 한가(閑暇)로운 한 때를 편안하게 즐기려는 사람과
도 같았다. 그는 아침에 느긋하게 잠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의 주루
(酒樓)에 내려와서 식사를 했으며, 이어 궁구가를 타고 근처의 시
장으로 나가 잠시 점포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돌아 다
녔고, 오후 늦게나 되어서야 돌아와 주루에서 식사를 한 다음에 술
을 마셨다.
궁구가는 그가 마치 갑자기 무림(武林)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
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며, 이제는 일반사람들의 평범(平凡)한
생활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모습을 감상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금몽추는 늦은 밤중까지 혼자 주루에 앉아서 술
을 마신 뒤에 객실로 올라와서 목욕을 한 다음 조용히 수면에 들었
다. 이제까지 거의 밥을 먹을 새도 없이 바쁘던 그의 일상에 비교
하면 이것은 거의 파격적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
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성대한 잔치도 끝날 때가 있는 것처럼, 그의 그러
한 한가롭게 보이는 시간(時間)도 이제는 달라질 때가 왔다. 그날
아침, 금몽추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세수
를 하고 느긋하게 주루에 내려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가 즐겨 앉아
서 식사를 하던 자리 옆에 몹시 눈에 익은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
데, 그 사람은 아침부터 많이 취한 듯 행색이 초라해 보이고 몸놀
림도 흐트러져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요? 혹시 당신은 남궁낭자(南宮娘子)가 아
니시오?"
그녀와 헤어진 지 이제 불과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금몽추가
사람을 잘못 알아볼 리는 없는 것이었다. 남궁가기는 아직도 저번
에 금몽추가 사 준 그 옷들을 걸치고 있었는데, 눈빛이 흐릿해져서
그런지 화려하던 의복(衣服)들도 다소 색이 바랜 듯한 느낌을 주었
다. 그녀는 마악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고개를 돌리더
니 싱거운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당신은 혹시 그 유명하다는 곤륜삼성 금공자가 아닌가요?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뜻밖이예요."
금몽추는 그녀의 초라해진 행색을 보고는 요 며칠간 그녀가 적지
않은 심리적인 방황(彷徨)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의 인연(因緣)은 정말로 질긴 모양이오. 만나지 않으려고
하면 오히려 만나게 되고, 또한 피하려고 하면 어느새 이렇게 또
다시 얼굴을 보게 되니 말이오. 이것이야말로 실로 쇠심줄과도 같
은 인연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그것은 바로 당화가 했던 말이다. 남궁가기는 그가 앞자리에 앉
는 것을 보고 얼른 술잔을 비운 다음에, 다시 술병을 입에 대고 남
은 술을 단숨에 다 마셔버리고 나서 딸꾹질을 하며 상기된 안색(顔
色)으로 말했다.
"세상에 이렇게 공교로운 우연이 있을까요? 나는 이미 당신이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설마하니 다시
만나게 될 줄을 모르고 왔을 리가 있겠어요? 호호......! 나 우습
지 않나요? 그래도 한 때는 강호(江湖)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자들
중의 하나였단 말이예요."
금몽추는 담담한 표정 가운데 한 가닥의 고뇌(苦惱)의 빛을 떠올
리며 다소 무겁게 말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소?"
남궁가기는 시선을 외면하고 다시 술병 하나를 손으로 잡으며 대
꾸했다.
"이것은 다 당신이 나를 치료(治療)해 주었기 때문에 생기는 일
들이예요. 만일 내가 그날 죽었다면 결코 이런 상황은 생기지 않았
겠죠. 호호!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금몽추는 가볍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고 술병의 마개를
따려는 것을 제지하며 말했다.
"세상사는 복잡한 편이기 때문에 더러 그런 문제가 다른 상황들
과 겹쳐져서 나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오. 낭자는 이제 그
만 마시는 것이 좋겠소."
남궁가기는 술병을 내려놓더니, 대신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빤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나를 책임져요. 날 부인으로 맞이하라구요. 왜 나
를 멀리하는 거죠? 당신도...... 내가 이 모양이 되어서 싫은가요?
호호......, 하지만 나는 아직 깨끗해요. 남자라면 당신이 그날 나
를 만져본 것이 처음이었어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금몽추는 그러한 말을 듣자 금새 안색이 시뻘겋게 변해서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리며 다소
어두운 어조로 말했다.
"낭자도 알겠지만, 나는 어떠한 여자(女子)도 책임질 수 없는 입
장이오. 게다가 이미 말했듯이 나는 앞으로 오래 살 지 못하게 될
가능성(可能性)이 더욱 많소. 그러니 내가 어떻게 당신과 혼인할
수가 있겠소?"
남궁가기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눈빛이 점차로
맑아지고 차분한 광채(光彩)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오늘 죽을 결심을 하고 이 곳으로 왔어요. 당신이 나
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만 말해주세요."
금몽추는 일단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이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가 없어서, 여전히 시선을 돌린 채로 말했다.
"낭자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니 고맙소. 나는 낭자를 잊지 못
할 것이오...... 만일 지금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남궁가기는 그 말에 문득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지금 즉시 나와 함께 가 줘요. 당신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
요."
금몽추는 남궁가기와 함께 객점을 나와 길을 가면서 내심 커다란
고민속으로 빠져들었다. 지금 남궁가기는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정
한 것 같았으며, 그것이 자신과 관련된 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었기 때문이었다. 남궁가기는 앞장서서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걸
었고, 금몽추는 궁구가의 등에 탄 채 은근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
보고 속으로 그와 같은 고민을 하며 뒤따라 갔다. 이 번화하던 성
시(城市)도 이번의 거듭되는 격전(激戰)으로 인해 곳곳이 많이 손
상되었고, 더러는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황폐해 보
이기도 했다. 자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이 줄어 들었
고 또한 그들의 표정도 이전처럼 생기발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궁가기가 데려간 곳은 이전의 그 객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곳은 아주 조용하여 모두 어디로 갔는지 사람들이 전혀 없는 것 같
았다. 심지어 객점의 점원이나 주인도 보이지 않았고, 다른 손님들
도 전혀 없어서 너무나도 조용한 나머지 귀신이 나오는 흉가(凶家)
와도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남궁가기는 곧장 걸어서 자신이 사용했
던 그 방으로 금몽추를 인도했는데, 뜻밖에도 그 곳에는 두 개의
침상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고 또한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그 두
사람은 금몽추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는데, 놀랍게도
당금의 무림맹주(武林盟主)인 창궁검협(蒼穹劍俠) 남궁백천(南宮百
川)과 그의 장손인 섬전룡(閃電龍) 남궁장천(南宮長天)이었다.
금몽추는 처음에는 그들의 몸이 하나같이 시체처럼 뻣뻣하고 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죽은 줄로 알았으나, 이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들은 비록 호흡을 하지 않고
있었으나 아직 호심진기(護心眞氣)가 남아 있었고 심맥(心脈)도 미
약하나마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남궁백천의 몸은 겉보기에는 무
슨 상처를 입거나 중독(中毒)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저 시체처럼
변해서 차갑게 굳어져 있었고, 반면에 남궁장천은 금몽추가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적(致命的)인 내상(內傷)을 입어 거의 빈사지경에 이
르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사이(邪異)한 분위기가 풍겨나와, 흡사 금방이라도 그들이 귀
신으로 변해서 벌떡 몸을 일으킬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는 사실
이었다. 강호상에 자연 많은 환자(患者)들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실
로 이와 같이 기이(奇異)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보기가 드물 것
이다. 남궁가기는 그럼에도 의외로 차분한 신색(神色)으로 금몽추
를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당신은 그 분들을 치료할 수 있나요? 만일 당신이 그 분들을 치
료해 준다면 나는 당신에게 시집가겠어요. 그리고, 치료할 수 없다
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금몽추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
며 말했다.
"이런 일을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나는 어쩌면
간신히 이들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없
는 점이 있소."
남궁가기는 이제까지 태연해 보였지만 그 말에 일순 다소 안심한
듯이 눈빛을 가볍게 빛내며 물었다.
"알 수 없는 점이라고요? 이 분들이 이렇게 된 것은 바로 어제
아침무렵의 일이라고 해요. 나는 그간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뒤늦게야 이 분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금몽추는 다소 우수(憂愁)에 젖은 듯한 그녀의 맑고 아름답게 빛
나는 두 눈을 자신도 모르게 망연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들이 지금 이 지경이 된 원인들 중에서 가장 주된 것은 바로
아주 강력한 심령금제(心靈禁制)에 당했기 때문이오. 그것은 이제
까지 나타났던 것들보다 훨씬 더 위력이 막강하고 악독한 것으로,
나도 사실 처음 대하는 대단한 것이오. 그런데 대체 남궁대협이 어
떻게 이 심령금제를 거부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오."
남궁가기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기울이
며 갸웃거렸다.
"심령금제를 거부했다고요? 그럼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
인가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금몽추는 그녀의 그윽해 보이는 눈길 아래 길고 고른 치아가 하
얗게 드러나는 것을 눈부신 듯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현실(現
實)을 상기한 듯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리며 다시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남궁대협은 갑자기 심령금제에 걸리게 되어 그야
말로 죽을 힘을 다해서 저항하다가, 부근에 그대의 오라버니가 역
시 심령금제에 제압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위해서 장력(掌力)을
날려 빈사상태로 만든 것 같소. 기실 그것은 평범한 장력이 아니라
서 그대의 오라버니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오."
남궁장천은 어째서 하필 그 상황에서 자신의 조부(祖父)의 곁에
있었던 것일까? 혹시 그는 뭔가 긴히 말할 것이 있어서 계속 조부
의 부근에 맴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남궁가기는 잠시 물기어린
시선(視線)으로 얼마 전의 일들을 회상해 보는 듯하다가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그럼 저의 할아버지는 그런 와중(渦中)에 결국 저렇게 되어 버
리고 만 것인가요?"
"그 심령대법(心靈大法)은 사람이 저항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
상황에서 다른 곳에 정신(精神)을 분산시켰으니 당연히 좋을 리가
없소. 헌데 놀랍게도 남궁대협은 그럼에도 여전히 심령금제의 포로
가 되지 않고 저렇게 될 수가 있었던 것이오. 이것은 실로 쉽게 이
해하기 어려운 것이오."
"저의 할아버지에 관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저의 할아버지는 비
교적 관대하신 분이었는데...... 최근 몇 년간은 말수가 적어지고,
간혹 오랫동안 집을 비우시곤 했죠......."
금몽추는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문득 가볍게 눈빛을 빛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이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소. 그러
니까 남궁대협은 당금의 천하(天下)에 어떤 좋지 않은 조짐이 있다
고 생각하고, 무림맹주로서 심령대법 등에 저항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 온 것 같소. 천축의 뇌정신문(雷霆神門)이나 소뇌음사(小雷
音寺) 등에 그와 같은 항마지기(降魔之氣)의 힘을 증폭시키는 무공
(武功)이나 물건들이 있을 수가 있소. 남궁대협은 이번의 심령대법
이 아주 심상치 않다고 판단되어 그 최후(最後)의 수단을 사용한
것 같소.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라고 해도 사실은 사용자의 강한 정
신력(精神力)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 대단한 의지가 없었다면 남
궁대협은 실패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오. 실상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이 정신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고 다른 것들은 오히려 그 수
단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오."
"그럼...... 아무리 위력적(威力的)인 심령금제가 있다고 해도,
그저 정신(精神)을 하나로 모아서 저항한다면 능히 물리칠 수가 있
다는 말인가요?"
"이런 심령금제에는 무학(武學)의 공력(功力)이 깃들어 있는 것
이기 때문에 저항을 하기가 더욱 쉽지 않고, 만일 반발한다면 지금
과 같은 일종의 주화입마(走火入魔) 비슷한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
오. 게다가 남궁대협처럼 정신력이 강인한 사람도 그리 흔하지는
않소. 하지만 만일 그대와 같이 곡선적무학(曲線的武學)을 연마(練
磨)한 사람이라면 예외적으로 저항하기가 수월한 편이오. 그것은
이 곡선적무학이라는 것은 먼저 마음의 장애(障碍)를 제거한 다음
에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오."
남궁가기는 그 말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는 수긍이 가는 것 같아서 다소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말을 받
았다.
"저는 요 이삼일간 주위를 떠돌면서 당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어요. 당신은 바라볼 수록 더욱 기이(奇異)하고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도 당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
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은 혹시 속으로는 아직도 나를 죽이고 이득을 보려고 생각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남궁가기는 일순 다소 화가 난 듯 안색을 붉히더니 손을 들어 그
의 가슴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당신이 계속 그런 말을 한다면 이제는 가만두지 않겠어요! 당시
당신이 저를 열심히 치료(治療)하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이미 당
신을 해치지 않기로 작정했던 거죠. 그리고 이후로 저는 당신에게
조금도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금몽추가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른 의원(醫員)들이 하는 것
과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한 그는 다른 의원들이 치료할 수 없는
환자들을 치료한다. 사실 이 심령금제에 관한 부분은 비록 항마지
기가 강한 공력(功力)이 있다고 해도 워낙에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
에, 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금몽추는 우
선 남궁백천의 심마(心魔)에 걸려서 굳어진 전신기혈(全身氣血)을
풀어 주고 내상(內傷)을 치료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심령금제에 관
한 부분을 치료했다. 그 방법에 대해 알기 어려운 것 뿐이지, 실상
이들을 치료하는 과정은 중독(中毒)된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도
절차가 적고 또한 수월한 편이었다.
남궁백천의 심령금제를 풀어주는 데에는 제법 많은 공력(功力)이
소모되었고, 또한 그 가운데 쇠약해져 흩어진 심기(心氣)를 모아
증강시켜 주는 것을 병행했다. 그것은 마지막 단계에 가서 강화시
킨 심기(心氣)로써 약화시켜 놓은 심령금제와 싸워 승리(勝利)하게
유도하는 방법이었고, 이윽고 그 과정이 마무리가 되자 수혈을 짚
어 잠시 잠이 들게 했다. 남궁장천의 경우는 오히려 그다지 복잡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소 수월한 편으로, 금몽추는 그의 심령
금제와 그 습기(濕氣)를 제거해 주고 마음을 바르게 잡아준 다음에
빈사상태로 몰고 간 내상(內傷)을 치료해 주었다.
이들을 치료하는 광경은 겉으로 보기에도 그다지 요란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금몽추는 역시 많은 공력을 소모하여 그 일을 마치자
잠시 한쪽에 앉아서 운공조식(運功調息)으로 소모된 공력을 보충해
야 했다. 남궁백천과 남궁장천의 안색(顔色)은 이미 완전히 평소처
럼 되돌아 왔고 또한 기운이 왕성한 채로 고른 호흡을 하고 있었는
데, 남궁백천이 먼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자네는?...... 금공자(金公子)로군. 흐음, 그대가 우리들
을 치료해 준 것인가?"
남궁백천은 남궁가기가 눈앞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그저
한 번 바라보기만 했을 뿐 거의 상관하지 않았다. 금몽추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두 분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 될 것이오. 거의 완전히 치료
가 되었다는 것을 제가 보장하겠소이다."
남궁백천은 깊고도 다소 무거워 보이는 시선으로 잠시 금몽추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탄식을 하며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자네는 나를 두 번이나 치료해준 셈이로군. 어쨌든 보
답을 해야 하겠지.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두 눈에 정기(正氣)가 가득하고 이전의 강인했던 기도(氣度)가
되살아나기 시작하는 남궁백천을 바라보며, 금몽추는 담담한 웃음
을 지어 보이며 대꾸했다.
"나는 저 남궁소협과 친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 남
궁낭자와도 거의 친구처럼 되어 버렸소이다. 맹주(盟主)를 치료해
드린 것은 그러한 의미에서이지, 무슨 보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
요. 어쨌든 이렇게 무사하시게 되었으니 나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
소이다."
남궁백천은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남궁가기를 한 번 돌아 본 다
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마도 우리 중원무림(中原武林)은 자네에게 잘못하고 있는 지
도 모를 일이지.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세."
금몽추가 객실의 밖으로 나오자, 이내 남궁가기가 따라 나와서
잠시 그의 얼굴을 애정(愛情)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가
들어 오래도록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나중에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겠어요. 그 때는 저를 멀리하시면
절대 안 되요. 저는,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금몽추는 느닷없이 그녀와 입맞춤을 하고 사랑고백을 듣게 되자
전신(全身)이 불길같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몽롱해 져서 망연히 서
있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그...... 그럽시다.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합시다."
왕산산(王珊珊)은 간밤의 꿈자리가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
늘 아침의 기분도 역시 매우 좋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선명
하게 다가오는 예감(豫感) 같은 것으로, 본래 그녀에게는 그런 것
을 감지(感知)하는 일종의 능력(能力)이 있었는데 최근 마음이 혼
란하여 사라진 듯했다가, 그것이 금몽추와 다시 만나게 됨으로써
되살아 났다. 그녀는 아침에 거의 식사도 거르고 정좌(正坐)를 하
고 앉아 생각에 몰두했으며, 이윽고 그것이 바로 금몽추와 관련된
좋지 않은 예감이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서둘러 준비하여 집을 나서
게 되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아! 어째서 갑자기 이런 나쁜 예감이 드는
것일까? 더군다나 그 분에게......? 빨리 만나봐야 하겠어!......'
과거 그녀를 짝사랑하던 젊은 호위무사(護衛武士)가 하나 있었는
데, 어느날 왕산산이 그와 같은 예감을 느끼고 난 뒤에 그는 별안
간 사건에 휘말려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그
런 일 뿐만이 아니어서 왕산산의 이러한 예감이 적중하는 것은 주
변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터였고, 또한 그녀 자신이 상
당히 정확(正確)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그녀가 강
호(江湖)에 나서게 되면 금몽추에게 어떤 짐이 될 지도 모르는 일
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일단 그런 예감이 느껴진 이상 그대로 집
안에만 있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