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은 1964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전기 문신 이언적(李彦迪)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잠시 기거할 때 지은 별장 건물로 이언적을 봉사(奉祀)하고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 건너편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이언적의 종가인 1964년 보물로 지정된 경주 양동 무첨당과 함께 유서깊은 건물로 손꼽힌다.
독락당은 막돌 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그 기둥위에 주두를 얹고 쇠서를 하나 내어 지은 조선시대 초기 초익공 형식의 공포로 되어 있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단층팔작집이다. 서쪽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고 그 동쪽의 정면 3칸, 측면 2칸에는 전부 우물마루를 깔아 사랑대청으로 하였다. 온돌방에는 띠살창호를 달았으나, 대청에는 정면 3칸을 창호없이 모두 개방하였고, 뒷면과 측면에는 띠살창호를 달았고, 대청의 마루 가운데에는 온돌방의 중앙기둥처럼 네모진 기둥이 서 있고 주선(柱楥)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이곳도 서쪽의 온돌방처럼 벽체를 만들고 방으로 꾸몄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부는 오량으로 전후의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에 다시 양봉형(梁奉形) 대공에 소로를 짜넣어서 종보를 지지하고 있다. 종보 위에는 다시 양봉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도리를 지지하고 있는데, 측면의 벽체 위에는 단순한 동자기둥으로 대공을 만들어 종도리를 지지하고 있으며, 직선재로 된 소슬합장(八자활개목)이 있어 아산 맹씨행단과 유사하다. 지붕형태는 동쪽은 팔작지붕이지만, 안채와 책방에 의해서 연결되어 있는 서쪽은 맞배지붕이기 때문에 비대칭적인 형태로 되어 있다.
계정은 'ᆨ'자 평면으로 동쪽이 계정이고 북쪽은 창고와 방이 2개인데 서측방은 양진암(養,眞菴) 동측방은 인지헌(仁智軒)이다. 마당의 서쪽에는 어서각이 있고, 북쪽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과 어서각은 각각 3칸이며, 사당은 남향, 어서각은 동향으로 마당을 중심으로배치되어 있다.
독락당을 출입할 때 남쪽 첫대문을 통과하여 5m 정도 걸어 들어가 오른쪽 측면 북쪽문을 열면 독락당 앞뜰이다. 또 안채인 역락재에서 동쪽 대문과의 사이가 3m 정도로 짧은 거리, 작은 공간이지만 동, 서, 남, 북 대문을 통해 독락당에 들어가는 방문객과 안채로 오는 방문객이서로 갈라질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구조상으로 볼 때 서쪽 안채 역락재와 동쪽 사랑채와구분이 확실하여 유가(儒家)적인 전통 생활상을 엿볼 수가 있다.
독락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안채와 닿아 있고, 그 출입대문은 숨방채 대문에서 보면 정면 담장만 보이고 대문은 동-서 방향으로 나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독락당 담장과 공수간 담장사이에 난 약 1.5m의 통로를 통해 계곡으로 연결된다. 독락당과 안채의 벽면사이는 약 2m가량으로 1629년에 책방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담장은 폭 0.6m, 높이 약 1.5m가량의 와편담장을 쌓았으며, 계곡에 면한 담장 사이에는 살창을 설치하였다. 독락당을 구획한 담장의 남-북 거리는 25m로 독락당 동측기단에서 담장사이는 1.6m정도로 계정과 어서각, 사당으로 통하는 통로이다. 독락당 뒷마당에는 잠계공이 1553년 강계에 있던 중국산 약쑥을 옮겨와 심었던 밭이 있다.
독락당 일곽의 배치는 안채와 계정을 시작으로 이후 독락당이 건립됨으로써 체계적인 배치를 가지게 되었다. 즉, 안채와 안채에 추가하여 지은 독락당 일곽의 배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자계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는 계정 일곽의 배치가 있는데, 이와 같은 배치는 모두 자계의 흐름과 관련있지만, 바라보는 대상의 차이에 의해 서로 각도가 틀어져 있다. 독락당이 지어지기 이전에 안채의 남동측에 사랑방이 있었다고 보면 사랑방과 안방은 모두 옥산등의 골짜기가 끝나는 지점의 무학산을 안대로 삼고 있고, 안채에 의해 설정된 축에는 안채와 독락당, 숨방채(행랑채)가 속해 있다.
계정을 주축으로 하는 건물과 건축요소는 계정과 사당, 계정에서 출발하여 자계와 나란한 담장과 그 담장에 부가된 문과 외측간이 있다. 그리고 어서각은 성격상 왕의 친필을 보관하는 기념적인 건물로 그 앞의 담장은 계정마당의 배치 틀을 따르고 있고, 어서각 자체는 안채와 계정의 배치 틀 사이에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 11월 25일 ~ 1553년 11월 23일)은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조선국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본관은 여주(驪州)(혹은 여강(驪江)), 자(字)는 복고(復古), 호(號)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와 조선왕조 최고 정치가의 영예인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한 명이다.(이들 6현은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 김집이다.)
일찍이 김종직의 문하생인 외삼촌 손중돈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외삼촌 손중돈은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김종직의 학문은 이색, 정몽주, 길재의 학통이었다. 외삼촌이자 스승인 손중돈을 통해 김종직의 학문을 사사하게 된다. 이언적은 김종직 학파의 학통을 사사했지만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안에는 반대하였다. 오히려 조광조 등의 개혁이 실패할 것이라 예상하고 조광조 일파의 천거나 정책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하였다.
1513년(중종 7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경주 주학교관(州學敎官)이 되었다. 1517년 27세 때에 선배 학자 조한보(曺漢輔) 등을 만나 여러 차례에 걸쳐 논쟁한 무극(無極)· 태극설(太極說)은 조선 초유(初有)의 대논쟁으로 유명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6])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가 기보다 우선적이라는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기 논쟁에서의 이의 우위를 주장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 이 일로 그는 일약 젊은 성리학자로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조광조 등이 그를 요직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학문 연구와 독서에 치중하였다.
'무극태극논변無極太極論辯'에 관한 논쟁은 조선 성리학 철학사에 첫머리를 장식하는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은 후일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논쟁', 이이와 성혼의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는 호를 회재(晦齋)라 하여 주자의 뜻을 계승하고 그대로 따를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주자의 입장을 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주자의 견해나 사서육경의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독창적으로 해석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학문적 능력은 중종의 귀에도 들어가 중종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된다.
1517년(중종 12) 7월 부정자를 거쳐 10월 정자가 되었다. 1518년(중종 13) 답망기당서(答忘機堂書) 4편을 썼다. 이후 성균관전적이 되고 이조정랑이 되었다가 그 뒤 조광조, 김식 등이 등용되자 사헌부지평이 되고 이후 이조정랑,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1518년 12월 할아버지 이수회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하였다. 그러나 1519년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다수가 희생되었으므로 그는 여러 번 사양하거나 외직을 자청하였다.
1521년(중종 16) 4월 3년상을 마쳤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경주에 내려가 삼성암(三聖庵)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그해 8월 중종이 그를 홍문관박사 겸 경연사경(弘文館博士兼經筵司經),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중종이 거듭 불러서 상경하였다. 이때 왕명으로 이름을 언적(彦迪)으로 개명하였다. 1522년 2월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고, 1524년(중종 19)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그해 인동현감에 임명되었다. 1524년 6월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돌아왔다.
1526년 7월 다시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외직을 자청하여 외직인 밀양부사로 나갔다. 1527년(중종 22) 7월 중앙으로 복귀, 세자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이 되어 인종을 가르쳤고, 그해 8월 사헌부 장령을 겸하였다. 이후 계속 세자시강원에서 왕세자를 가르치며 겸임으로 1528년(중종 23) 2월에는 봉상시 첨정, 내자시부정에 임명되었다. 1528년(중종 23) 6월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8월 경상도암행어사로 나갔다가 3개월만에 돌아왔다. 그는 모친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했고, 1528년(중종 23) 11월 밀양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었다. 밀양부사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고 백성들은 그가 이임해갈 때 가지 말라고 만류하기도 했다. 인동현감과 밀양부사로 있을 때 그는 근무시간 후 퇴청 이후에는 서실을 열고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는데 이는 그의 사조 김종직의 퇴청 후 서실을 열고 문인을 가르치던 것을 본받은 것이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중종 25)에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되었다.
1530년(중종 25) 11월 사간원 사간이 되었고, 1531년 사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김안로와 갈등을 빚었고, 김안로의 아들이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결혼하여 외척으로 실권을 잡으면서 그의 사주를 받은 심언광(沈彦光) 등의 공격을 받아 삭출되어 쫓겨났다. 1531년(중종 26) 1월 김안로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성균관사예로 좌천되었다. 1531년(중종 26) 김안로 일파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세자의 사부라서 유배되지 않고, 파직만 당하였다. 파직된 이후 한양을 떠나 고향인 경주에 낙향하였으나, 자신의 행보가 가족은 물론 가문 전체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종가인 양동마을 무첨당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자옥산(紫玉山)에 올라 1532년 자옥산에 별채 서실인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집중하였다.
그는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 나온 독락 장에서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서재를 독락당이라 하였다. 맹자는 '진심장구 상'에서,
孟子曰:「古之賢王好善而忘勢,古之賢士何獨不然?樂其道而忘人之勢。
맹자 이르되, 예전 현명한 왕은 선을 좋아하고 권세를 잊었으니, 예전 현명한 선비라 하여 어찌 홀로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 그 도를 즐겨 하고 세간의 권세를 잊었다.
故王公不致敬盡禮,則不得亟見之。見且猶不得亟,而況得而臣之乎?」
고로 지극히 공경하고 예를 다하지 않으면 어진 선비를 만나볼 수 없었으니, 만나는 것조차 못하는데, 어찌 신하를 삼을 수 있겠는가 ?
라 하였으니, 그는 이를 신조로 삼아 학문에 전념하였다.
자옥산의 독락당에서 학문을 연구하던 그는 엄격한 주자의 해석과 주해에 얽매이지 않고,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이언적은 독락당에 있을 무렵 주자가 역점을 두었던 대학장구(大學章句)를 '경일장과 전십장(經一章 伝十章)'으로 주석을 붙였던 내용에 대신해서,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례를 바꾸어 '경일장 전구장 (經一章 伝九章)'으로 다시 고쳐 썼다. 이때 비판을 우려하는 주위의 시각에 대해 그는 "비록 주자가 다시 일어나더라도 나의 해석을 따를 것이다" 라고 말하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언적은 주자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의 학문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그 견해를 그대로 본받고 무조건 무오의 진리로 따르지는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주자의 한 마디의 말과 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던 조선 중기, 후기 성리학자들의 학문태도에 비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자세였다.
또한, 그는 맹자의 진심탐구를 탐독했는데, 맹자는, 진심탐구 상에서,
古之人, 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脩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옛 사람은 뜻을 얻으면 백성에게까지 혜택이 더해졌으며, 뜻을 얻지 못하면 수신에 매진하여 세상에 드러났다. 곤궁할 때는 홀로 그 몸을 선하게 했고, 현달하였을 때는 그에 더하여 천하를 선하게 했다.
라고 하였다. 이후 5년간 좌절하지 않고 산과 물을 벗삼아 학문을 하고 제자 양성과 독서에 전념하였다. 1537년(중종 32) 장예원첨정(掌樂院僉正),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고 그해 홍문관 교리ㆍ응교가 되었다.
1537년(중종 32)에 김안로가 사사되고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그해 11월 요직에 복귀하였으며, 바로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에 전임되었다가, 홍문관교리, 응교 등을 역임했다. 1538년(중종 33) 2월 의정부검상이 된 뒤 그해 3월 청백리(淸白吏)로 녹선되면서, 특별 가자되어 의정부좌사인(左舍人)이 되고 얼마 후 군기시정(軍器寺正)이 되었다. 그 뒤 그해 5월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고 외직을 자청하여 그해 10월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부임하였다. 전주부윤 재직 중 경내(境內)를 평안케 하였으며, 부임 초에 조정에 수천언(數千言)의 글인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를 올려 국가대본(國家大本)과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전주부윤 재직 당시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일강십목소 一綱十目疏〉의 내용에 감격한 왕의 찬탄을 받고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제수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가 뒤이어 자헌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성균관대사성, 사헌부대사헌, 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했다. 1539년(중종 34) 10월 세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왕세자를 가르쳤다. 1539년(중종 34) 12월 병조참판이 되고, 1540년 예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그해 1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541년(중종 36) 3월 홍문관 부제학, 8월에 김해 부사, 9월에 한성부 판윤, 다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1542년(중종 37) 1월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4월 지중추부사가 되고, 1542년 이조판서, 예조, 형조의 판서에 임명되었다. 1542년 8월, 사헌부 대사헌, 9월,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그해 11월 의정부좌참찬, 12월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다. 홍문관제학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1543년(중종 38) 1월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고, 7월 검토관 김인후(金麟厚)가 주강(晝講)에 나아가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며, 그들이 숭상하던 ≪소학≫· ≪향약≫의 폐기의 부당성을 건의하자, 그도 특진관으로 기묘명현들이 숭상하던 ≪소학≫을 강독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키는데 유념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해 7월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사림파에 속한 주자학자로 당시는 대지주였던 훈구세력과 중소지주 출신의 독서인이었던 사림이 대항하던 시기였는데, 그는 사림의 입장에서 중세적 이념체계인 주자학을 이론적으로 정교화하여 봉건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완성을 꾀하는 한편 훈구세력을 배척하기 위한 주자학적 명분론을 철학적으로 강화하였다. 그는 이와 기를 논하고 이는 인간의 이성과 덕성을 말하고, 기는 인간의 행동과 희노애락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며 당연히 이와 덕으로 희노애락의 감정을 통제하고 부단히 내면의 수양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배 학자인 조한보(曺漢輔)와 주고 받은 서신을 통한 철학적 토론에서 주리적(主理的)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인간 내면을 해석하고, 봉건도덕의 절대성ㆍ선천성을 우주론적 차원까지 높이는 관념론 체계를 수립하였다.
1542년(중종 37년) 그는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하거나 지방관의 외직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안동부사로 나갔다. 그 뒤 다시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에 복귀했으나 외직을 자청하여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경상도관찰사 재직 시 이황, 이해, 조식 등 영남 선비들을 초빙하였으나 이때 조식만이 그의 부름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1544년(인종 1년) 봄, 송인수(宋麟壽)와 백양사(白場寺)에서 만났다. 그해 병이 생겨 거듭되는 관직 임명을 사양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종 즉위 후, 그는 다시 조광조의 사면 복권을 청하였는데 인종이 동의하여 성사시켰다. 그는 서경덕, 조식 등의 학문적 명성을 전해듣고 이들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병으로 관직을 물러나려 했지만 인종은 세자시절 사부인 이언적을 지극히 신뢰하였고, 다시 한성부우윤으로 불러들인 뒤 지중추부사로 임명하였다.
1545년(인종 2년)에 1월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으로 특진하고, 의정부 우찬성겸 판의금부사를 거쳐 의정부 좌찬성이 되었다. 1545년 여름, 병이 나아지자 비로소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겸하며 올바른 인재를 널리 등용할 것과 임금이 먼저 모범을 보여 군덕을 펼칠 것을 진언하였다. 그는 다시 송도 화담의 서경덕을 찾아가 협력하고 도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사양하였다. 오히려 서경덕은 그를 보고 인종이 덕망높은 성군의 재질을 지녔지만 수명이 길지 못할 것이라면서 크게 통곡하였다 한다. 그 해 인종이 죽자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정국 수습에 필요하다는 신왕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의정부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의 한사람이 되어 국사를 수습하고 정무를 관장했고, 그해 8월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그는〈정부서계 10조 政府書啓十條〉를 올렸다. 이후 원상으로 국사를 수습하는 한편 수렴(垂簾)의 의론을 정하였으며, 정국의 안정을 꾀하는 등의 공로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녹공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작되었다.
한편 그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사림파와 달리 명종이 아직 미성년이라는 점과 현명한 신하들이 올바르게 보필하면 된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을 비난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 뒤 명종 집권 초반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일파가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推官)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재판 당시 사림파들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윤원형과 이기 등이 이를 문제삼아 그도 관직에서 곧 물러났다. 한때 그는 이기를 구원하였는데, 김종직의 문인이자 생육신 성담수의 외조카인 이기는 장인 김진(金震)이 탐관오리라 하여 청요직에 앉지 못했으나, 그가 적극 추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 이기는 윤임, 유관, 유인숙 일파를 적극 공격하였으나 그를 비난하고 죄주는 것만큼은 회피하거나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가 판의금부사로 있으면서 을사사화 관련자들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하여 후대의 사림파 중 그를 비난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후에 이이(李珥)는 그가 을사사화 당시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를 비판하던 이이는 이기의 재종손이었다. 그는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12월 병으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을사사화의 추관으로 있었던 것에 반발하고 속으로 불만을 품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1546년(명종 1) 7월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을사사화 당시 사림파 인사들의 처벌, 공초에 소극적이었던 일로 윤원형 일파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 또한 윤임(尹任) 일파의 처벌에 소극적이고 미온적이었다는 이유로 윤원형, 이기 일파의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 뒤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돼서 평안북도 강계(江界)로 귀양갔다. 유배 때에도 학문 연구에 전심했고 문하생들을 길러냈으며,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저서로는 회재집(晦齋集),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 속혹문(續或問), 《구인록(求仁錄)》(1550), 《봉선잡의(奉先雜儀)》(1550),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 구경연의(九經衍義) 등이 있다. 그는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생활에 좌절하지 않고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술들을 여럿 남겼다. 후일 이퇴계가 이언적을 학문의 정통이라고 한 데에는 그의 저서들과 경전에 대한 다양한 주해와 자료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후에 이황은 그를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와 함께 동방 4현(東方四賢)으로 추모하였다. 이황은 그를 도통의 정통으로 평가하였고 생애 후반과 만년에는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저서와 저술들을 정리, 간행하는 일을 주관하기도 했다. 이황은 그를 추모하는 글 중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봤는데도 더 많이 묻지 못했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언적의 철학사상은 정통 주자학의 이론을 받아들였는데 태극론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 주자학자였다. 그러나 대학장구 등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과 개정으로, 후대에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 이언적의 문인들은 후일 이황, 조식, 서경덕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을 형성하였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의 제자들과 계승자들은 남인의 당원이 되었으며, 일부는 북인으로도 건너갔다.
1548년(명종 3) 6월 배소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많은 저술과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는 하늘(天道·天心)과 백성 (人心)에 순응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養心·敬心)에 힘쓸 것을 중요시하는 도학적 수양론을 경세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조선조 도학의 학문과 실천에 앞장섰으며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 확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중용구경연의를 집필하던 중 1553년(명종 8년) 11월 30일 평안북도 강계군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3세였다. 1554년(명종 9) 11월 경상북도 흥해군(興海郡) 도음산(禱陰山) 로 운구되어 매장되었다. 1556년(명종 12) 8월 이전인(李全仁)이 진수팔규를 올리고, 이어 복작(復爵)되었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인정하던 훈구파 세력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강계군까지 찾아가서 문상하였고, 이전인이 진수팔규와 함께 이언적이 배소에서 쓴 책을 바치자 이를 탐독하였다. 사후 그의 신원을 청하는 상소가 계속되었고, 1556년에는 명종이 그의 복직과 작위를 복작시킬 때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1556년(명종 21) 10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그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퇴계 이황은 말년에 자신의 저서와 학문 연구 외에도 이언적의 자료와 저술을 정리, 재간행하였다. 경전에 대한 원전 외에도 주해와 다양한 해석, 자신의 견해 등을 적은 책들을 읽고 퇴계 이황이 감동하였다 한다. 1567년 11월 왕이 유문을 수습하도록 명했고, 내탕금이 하사되어 국비로 그의 문집과 저서들이 간행되었다. 손자 이의활과 이의잠 등이 그의 문집 간행에 적극 힘을 쏟았고, 묘지(墓誌)를 이항복에게 받기 위해 노력하여 이루어냈다. 광해군 시대 이언적의 출처관이 의심을 받자 류성룡을 움직여 적극 해명하도록 도왔다. 1567년(선조 즉위년) 그의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져 1568년(선조 1) 2월 증직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종묘의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선조 즉위 초 도덕박문왈문 주의행덕왈원(道德博聞曰文 主義行德曰元)이라 하여 문원(文元)의 시호를 받았다. 1573년 경주 자옥산에 건립된 경주 옥산서원 등에 주향되고, 1610년(광해군 2)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퇴계 이황은 그를 현인이라 불렀다. 이황은 이언적을 정신적 스승으로 여겼고 그의 학통을 계승했다. 이황 이후의 영남 사림들도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을 김종직-손중돈-이언적-이황으로 연결하여 김종직과 이언적으로 자신들의 학문적, 사상적인 뿌리, 연원으로 삼기도 했다. 그럼으로써 이언적은 영남학파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언적 선생은 자옥산 아래 독락당에 은거하던 1535년 임거십오영을 읊었는데, 주자(朱子)가 서재에 머물면서 철학, 윤리, 역사 등을 노래한 <재거감흥(齋居感興)>을 변용하되, 숲속에서 은자와 학자, 충신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 산림에 물러나 사는 학자의 삶을 노래하는 전형을 만들었다. 이후 많은 선비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7년이 지난 1560년 이황(李滉)은 이 시에 차운한 작품을 남겼는데, 이언적의 맑은 삶을 대체로 긍정하면서도, 은자나 충신보다 학자의 이미지에 집중하였다. 특히 ‘임거’에서 수양의 공부를 하는 방식, 임금에 대한 태도 등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면서 이언적의 지향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5년 후 다시 <산거사시음(山居四時吟)>을 지어 도산(陶山)에서 살아가는 학자의 노래를 새로 제작하였다.
이 후에도, 신지제(申之悌), 권필(權韠), 이희조(李喜朝), 채팽윤(蔡彭胤), 박태무(朴泰茂), 조의양(趙宜陽), 정충필(鄭忠弼), 이야순(李野淳), 이재영(李在永) 등이 이언적의 작품에 직접 차운하기도 하고 이 작품에 차운한 이황의 시에 차운하기도 하였으며 운자를 따르지 않고 제목만 취한 작품도 나타났다. 권필이 <임거십오영>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형상화하였고 신지제가 이를 차운하여 비슷한 내용을 담았다. 이언적이 붙인 소제목을 따르면서도 운자는 같은 것을 쓰지 않았는데, 한편으로 이언적의 삶을, 다른 한편으로 이황의 삶을 지향하면서도 시인으로서의 맑고 고운 흥취를 담아내어 ‘임거’를 담은 시의 수준을 높였다. 그 후 이희조, 채팽윤, 박태무, 이야순 등은 이황의 시에 차운하면서 이황이 보여준 ‘임거’의 뜻을 추종하였다. 이에 비해 정충필과 이재영, 그리고 근대의 문인들은 이언적의 시에 직접 차운하면서 수양에 힘쓰는 이언적의 삶을 중심으로 하되 이황의 뜻을 절충하였다.
그 중, 이언적 선생이 읊은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 중 계정과 독락당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溪亭 계정에서
善聞幽鳥傍林啼 新舊茅詹壓小溪
숲속에서의 그윽한 새 소리 듣기에 즐겁고 새로 지은 집 한 채 시내를 굽어보네
酌獨只邀明月伴 一間聊共白雲棲
밝은 달을 벗삼아 술잔을 기울이니 한 칸 집은 애오라지 흰 구름과 함께 하네
獨樂 홀로 있어도 즐거워하다.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벗들이 떠났으니 누구와 함께 읊으리 바위의 새와 시내의 고기가 내얼굴을 반기네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이중에서 빼어난 곳을 찾고자 하면 두견새 소리속에 밝은 달 솟아오네
1619년 당대의 가객 박인로 선생이 회재의 독락당을 들러 다음과 같이 읊었다.
獨樂堂
독락당
紫玉山 名勝地예 獨樂堂이 蕭灑함을 들런디 오래로되
이몸이 武夫로서 海邊事ㅣ孔棘거늘 一片丹心에 奮義를못내하야
金鎗鐵馬로 餘暇업시 奔走터가 中心景仰이 白首에 더옥 깁허
竹杖芒鞋로 오날사 차자오니 峯巒은 秀麗하야 武夷山이 되여잇고
流水는 盤回하야 後伊川이 되엿나다 이러한 名區에 임자 어이 업도던고
一千年 新羅와 五百載 高麗에 賢人君子들이 만히도 지낸마는
天慳地秘하야 我先生깨 기치도다 物各有主ㅣ어든 다토리 이실소냐
靑蘿를 헤혀 드러 獨樂堂을 여러내니 幽閑 景致난 견홀 대뇌야 업내
千竿脩竹은 碧溪조차 둘너 잇고 萬卷 書冊은 四壁의 사혀시니
顏曾이 在左하고 游夏난 在右한 닷 尙友千古하며 吟詠을 일을 삼아
閒中靜裏예 潛思自得하야 혼자 즐겨 하시덧다 獨樂이 일홈 稱情한 줄 긔 뉘 알리
司馬溫公 獨樂園이 아무려 조타한달 其間眞樂이야 이 獨樂애 더로손가
尋眞을 못내 한야 養眞菴의 도라 드러 臨風靜看하니 내 뜻도 瑩然하다
退溪先生 手筆이 眞得인줄 알리로다 觀魚臺 나려오니 깔온 덧한 盤石의 杖屨痕이 보이난닷
手栽長松은 녯 빗찰 띄여시니 依然物色이 긔 더옥 반가올샤
神淸氣爽하야 芝蘭室에 든 덧하다 多少 古跡을 보며 문득 생각하니
層巖絶壁은 雲母屛이 졀로 되야 龍眠妙手로 그린 덧시 버러잇고
百尺澄潭애 天光雲影이 얼희여 잠겨시니 光風霽月이 부난닷 바새난닷
鳶飛魚躍을 말업슨 벗을 삼아 沈潛翫索하야 聖賢事業하시덧다
淸溪를 빗기 건너 釣磯도 宛然할샤 문노라 白𩿨들아 녜 닐을 아나산다
嚴子陵이 어내 해예 漢室로 가단 말고 苔深磯上애 暮煙만 잠겨셔라
春服을 새로 입고 詠歸臺에 올라오니 麗景은 古今업서 淸興이 졀로 하니
風乎詠而歸를 오날 다시 본닷하다 臺下蓮塘의 細雨 잠깐 지내가니
碧玉갓한 너분 닙헤 흐채나니 明珠로다 이러한 淸景을 보암즉도 하다마난
濂溪 가신 後에 몃몃 해를 디낸게오 依舊 淸香이 다만 혼자 남아고야
紫煙이 빗긴 아래 瀑布를 멀리 보니 丹崖 노푼 긋해 긴 내히 걸려난 닷
香爐峯 긔 어대오 廬山이 예롯던가 澄心臺 구어보니 鄙吝텃 胸襟이 새로 온 닷 하다마난
寂莫空臺예 외로이 안자시니 風淸鏡面의 山影만 잠겨 잇고 綠樹陰中에 왼갓 새 슬피운다
徘徊思憶하며 眞跡을 다 차자니 濯纓臺 淵泉은 古今업시 말다마난
末路紅塵에 사람마다 紛競커든 이리 조한 淸潭애 濯纓할줄 긔 뉘 알리
獅子巖 노피 올라 道德山을 바라보니 玉蘊含輝난 어제론 덧 하다마난
鳳去山空하니 杜鵑만 나죄 운다 桃花洞 나린 물리 不舍晝夜하야
落花조차 흘러오니 天台인가 武陵인가 이 따히 어댄게오
仙蹤이 아득하니 아모댄 줄 모라로다 仁者도 아닌 몸이 므삼 理를 알리마난
樂山忘歸하야 奇巖을 다시 비겨 川原 遠近에 景致를 살펴보니
萬紫千紅은 비단빗치 되여 잇고 衆卉群芳은 谷風에 날려 오고
山寺鍾聲은 구람 밧긔 들리나다 이러한 形勝을 范希文의 文筆인들 다 서내기 쉬울넌가
滿眼 風景이 客興을 도오난 닷 任意逍遙하며 짐즉 더듸 도라오니 擧目西岑의 夕陽이 거의로다
獨樂堂 고쳐 올나 左右를 살펴보니 先生 風彩을 親히 만나 뵈압난 닷
羹墻의 儼然하야 俯仰歎息하며 當時 하시던 닐 다시곰 思想하니
明牕靜几예 世慮을 이즈시고 聖賢書의 着意하야 功效를 일워 내여
繼往開來하야 吾道를 발키시니 吾東方樂只君子난 다만 인가 너기로라
하믈며 孝悌를 本을 삼고 忠誠을 벱허 내여 聖朝의 나아 들러 稷契의 몸이 되야
唐虞盛時를 일월가 바라더가 時運이 不幸하야 忠賢을 遠斥하니
듯나니 보나니 深山窮谷앤들 뉘 아니 悲感하리 七年長沙애 不見天日하고 閉門深省하샤
道德만 닷그시니 邪不勝正이라 公論이 졀로 이러 尊崇道德을 사람마다 할 줄 아라
江界난 謫所로대 遺化를 못내 이져 窮巷絶域의 祠宇좃차 서워시니 士林趨仰이야 더옥 닐러 무엇하리
紫玉泉石 우희 書院을 디어 두고 濟濟靑襟이 絃誦聲을 이어시니
濂洛群賢이 이 따희 뫼왓난닷 求仁堂 도라올라
體仁廟도 嚴肅할샤 千秋血食이 偶然 아닌 일이로다
追崇尊敬을 할소록 못내 하야 文廟 從享이 긔 더옥 盛事로다
吾東方 文憲이 漢唐宋애 비긔로쇠 紫陽 雲谷도 어즈버 여긔로다
洗心臺 나린 물에 德澤이 이어 흘러 龍湫 감흔 곳애 神物조차 잠겨시니
天工造化ㅣ 긔 더옥 奇異코야 無邊眞景을 다 찻기 어려올새
樂而忘返하야 旬月을 淹留하며 固陋한 이 몸애 誠敬을 넙이 하야
先生 文集을 仔細히 살펴 보니 千言萬語 다 聖賢의 말삼이라
道脈工程이 日月갓치 발가시니 어드운 밤길해 明燭잡고 옌 덧하다
진실로 이 遺訓을 腔子裏예 가닥 담아 誠意正心하야 修誠을 넙게 하면
言忠行篤하야 사람마다 어질로다 先生 遺化 至極홈이 엇더하뇨
嗟哉 後生들아 趨仰을 더옥 놉혀 萬世千秋에 山斗갓치 바래사라
天高地厚도 有時盡하려니와 獨樂堂 淸風은 가업실가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