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한 조건
이시무레 미찌코는, 자신의 고향 미나미타에서 1956년 벌어진, 신일본질소공장에서 배출된 오염수로, 고향 사람 2000 명 이상이 사망하고 장애인이된 환경병 미나미타 병에 대해 수십년간 르뽀 형식의 소설 ‘슬픈 미나미타’를 발표한다.
그녀는 16 세까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야학에서 겨우 일본어를 배웠다.
겨우 일본어를 깨우친 평범한 주부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난, 소설을 몇 번이고 정독을 했다. 확실히 문장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은 누구도 갖지 못하는 비범함이 있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었던 피해자들을 한 명씩 빠짐없이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들었다. 병과는 상관없는 가족들만의 사소한 이야기 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애틋함과 가여움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그들과 같이 공감하고 교감하고, 심지어 그들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하나가 되었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울었고, 심지어는 사망자의 영혼 속으로 쫒아갈 정도였다.
가와바따 야스나리의 설국에서는, 설국 니가타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의 문장력으로 한껏 돋보였다. 설국은, 니가타의 하얀 눈과 그 속에서 글을 쓰는 가와바따 자신을 의미하는 주인공 시마무라와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와 그녀의 친구 요코와의 삼각관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마을에 불이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난다.
이 소설로 가와바따 야스나리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73세에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본다면, 가와바따의 소설이 이시무레의 소설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난, 이시무레의 소설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시무레의 소설의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공감과 교감, 그리고 내면으로까지 들어가 하나가 되는 진정한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가와바따의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노벨문학상은 단순히 문장의 아름다움 만으로만 주는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정신 즉, 그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념 사상 등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와바따의 소설은 허무주의로 가득 차 있다.
어릴 때 부모의 사망으로 외롭게 자라서라는 것을 알기에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정신이 스며있는 설국은 도무지 이해가 안간다. 기생과의 삼각관계를 다룬 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만약 가와바따처럼 유능한 글쟁이가 아니었다면, 그 이야기는 천박한 아침 드라마에 불과했을 것이다.
문학은 지식과는 다르다. 무식해도 문학을 할 수 있다. 문자를 몰라도 문학을 할 수 있다.
사피엔스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말을 한다는 것이, 발전해서 두가지를 만들었다. 문자와 노래. 둘은 사피엔스의 혓바닥에서 출발한 쌍둥이다.
무식해서 글을 못쓰면 노래가 된다. 우리나라 판소리와 창가가 대표적이다. 역시 문학이다.
가와바따는 동경대를 나왔고, 이시무레는 일본어를 야학에서 겨우 깨우쳤다.
글을 쓰기 위한 조건은, 글을 쓰기 위한 대상 (사람,환경,사건,역사 등 그 외 모든 것)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그것을 통한 공감과 교감 그리고 내면으로 까지 침투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이다.
맞춤법이 틀려도 된다. 문장이 형편 없어도 된다. 문법이 틀려도 된다.
그러나, 글을 쓰는 대상에 대한 관찰과 공감과 교감 내면의 힘이 없으면 안된다.
작가는, 글을 쓰는 대상의 객관적 의미를 자기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즉, 객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간혹, 지방에서 문학한다고 모여서 돌아다니고, 시낭송을 하며 감상에 빠지고, 그래서 스스로 엘리트 지식인으로 착각하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문학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베란다에 겨울부터 주워 와서 영양제 주고 살려낸 화분들이 너무 잘 자라 주었다. 벌레들도 생겨나고 벌레를 먹기 위해 거미들이 거미줄을 치고.
나는 녀석들의 노는 모습들이 너무 귀엽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 약간 취해서 녀석들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하다.
내 곁에 없는 딸들 보다 좋다.
미나미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