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허경옥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꼭 일어날 듯 나를 위협할 때가 있다.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내다가도 ‘만약에’가 뱀 같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고 일어나면 평온했던 시간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걱정과 근심, 가장 나쁜 방향으로만 스르륵 끌고 가는 뱀의 몸뚱어리다.
새로 사업체를 시작해 놓고, 조금만 가게가 한가하면 ‘만약에’가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이렇게 한가하다, 또 망하면 이 나이에 어떻게 할 것인가? 한동안 뱀의 차가운 몸뚱어리가 내장을 쓸고 지나가는 듯 한기가 느껴져 몸서리를 치곤 하였다. 다행히 방문한 손님마다 음식 맛도, 서비스도 그리고 식당 분위기도 모두 최고라고 입을 모아 칭찬을 해주니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다. 다시 평정심을 회복하고 잘 지내고 있는 하루에 이번에는 외손자의 일에 ‘만약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실내 놀이터에서 놀던 외손자가 넘어지면서 의자에 부딪혀 귀가 조금 찢기는 사고가 났다. 피가 많이 나서 너무 놀랐다는 큰 애는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 지혈해 놓고도 내게 계속 문자를 보냈다. 자기도 놀랬는지 안 자던 낮잠을 자는 아이의 몸에 열이 난다는 것이었다. 응급실로 가야 하나 어쩌나 내게 물어왔다. 서울에서 부산의 네 배 거리에 떨어져 있어 들여다볼 수 없는 나로서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큰 애가 나로 인해 더 놀랄까 봐 짐짓 태연한 척하였지만, 내 심장은 이미 곧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치고 있었다.
큰애는 그날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의사진료실을 찾았다. 해열제를 먹이면 가라앉았던 열이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오르곤 하였다. 몇 가지 질문을 한 의사는 다친 귀로 인한 열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코비드 혹은 다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며칠 기다려 보자고 했단다. 의사가 분명한 원인을 규명해 주지 않자, 내 머릿속에서 이미 고개를 들고 있던 ‘만약에’는 더 큰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만약에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참 무슨 방정맞은 상상인가? 걱정하는 딸아이에게는 그런 나를 감추고 ‘귀를 다치면서 몸이 놀라서 경기했나 봐’ 라고 근거 없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가져다 댔다. 이미 와르르 무너져 내린 내 가슴은 조금도 쓸어 담지 못할 허수아비 같은 이유였다.
안절부절못하며 마음을 놓지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큰애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밝아 일단 안심이 되었다. ‘엄마, 아이재야 중이염이래.’ 큰애도 안심이 되었는지 말끝에 웃음이 담겼다. 귀를 다친 후에 손자가 자꾸 귀가 아프다고 징징댔다는데, 다친 귀는 오른쪽인데 왼쪽 귀가 아프다고 했단다. 세 살짜리 아이의 말이라 다친 오른쪽 귀가 아픈 것을 잘못 말한 줄 알았단다. 열에 들떠 있는 아들을 안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왼쪽 귀에서 흘러나온 누런 물기에 흐물흐물 풀어졌다. 그래도 확인하느라 의사에게 달려갔다. 의사는 아이들에게 흔한 중이염인데 세 살이 되도록 한 번도 걸린 적이 없냐고 오히려 묻더란다. 처음이라고 하니 “슈퍼 헬씨 베이비!”라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단다.
남편이나 나나 건강한 체질이라 우리 아이들도 별로 병치레하지 않고 자랐다. 중이염은 큰애나 작은애나 걸린 적이 없다. 중이염으로 항생제를 처방받았다고 시아버지께 알렸더니, 시아버지께서 하산(우리 사위)은 그 나이 때 항생제를 우유보다 더 많이 먹었다고 하며 웃으셨단다. 오래 기다려 어렵게 얻은 아들에게 처음 항생제를 먹여야 하는 며느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시어른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그동안 ‘만약에’에 한없이 끌려다니며 정신 줄을 놓고 있었던 나 자신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일어나지 않은 일, 거짓된 속임수에 왜 자꾸 넘어가는 것일까? 눈을 똑바로 뜨고 정신 줄을 단단히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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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점을 방문한 손님마다 “음식 맛도, 서비스도 그리고 식당 분위기도 모두 최고라고 입을 모아 칭찬을 해”준다니 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그렇게 인식이 되기 시작하면 금방 소문이 나게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성공해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만약에’라는 상상은 발붙일 구석이 없겠지요. 축하합니다.
어렸을 적에 들었던 유행가 중에서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 가사를 생각해 내려고 해도 정확하지 않은데 금반지 보석반지도 사고 비행기도 산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만원이 일억이 되더니 지금은 억이라고 해도 전혀 놀라지도 않습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염려는 반드시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이번 대학입학 수능고사에서 전국 일등을 한다면”, “만약에 내가 복권 1등에 당첨이 된다면”, “만약에 내가 이번 선거에 당선만 된다면” 등, 좋은 일에 대한 꿈과 기대를 ‘만약에’를 미리 넣어서 상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상상하는 동안에는 마치 그것이 이루어진 듯이 기쁘고 행복할 것입니다. 얼굴 표정도 밝아질 것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꿈이 이루어진 듯이 행복한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나쁜 일을 상정하는 ‘만약에’는 참으로 위험하고도 무섭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만약에'를 계속 상상하는 동안은 어느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위험과 위험 사이를 헤엄쳐 모험하듯이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만약에’를 너무 자꾸 생각하여 미리 걱정하면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예방하는 태도가 되어 미리 조심하고 주의하게 될 것입니다. 전혀 ‘만약에’라는 숨겨진 덫을 고려하지지 않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될 것으로만 짐작하고 말하고 행동해도 문제는 따릅니다. 세상에는 좋은 만약에도 있고 나쁜 만약에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50대 50입니다.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 굿을 하기도 하고 점을 치어 방어하기도 하고 열심히 마음을 닦으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중이염을 많이 앓는다고 하지만, 아이는 앓는 동안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중이염을 대수롭게 생각해도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적절하게 대처하게 되어서 잘했습니다. 중이염을 방치하여 청력이 떨어지면 어휘력이 떨어지고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다고 하는데 일찍 병원에 갔으니 날로 달라질 것입니다.
한 생명을 낳아서 길러서 가르쳐서 버젓하게 설 수 있는 인격체로 세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만약에’의 강을 건너서 오늘의 언덕에 이른 것인가? 5%의 행운, 아니 1%의 과녁을 향해서 전력으로 뛰는 선수처럼 달려왔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건져올리심이 있었습니다. 나도 이번 사고에서 만약에 머리 윗부분이나 뒷머리를 다쳐서 뇌진탕이 되었다면, 안구가 손상되었다면, 상악골이 깨어졌다면, 혈압이 진정되지 않고 계속되었다면. 하는 생각을 무수히 하면서 일주일을 살았습니다. 모두 축하한다고만 했습니다. 다쳤는데 축하하다니...
눈에 보이는 푸른 멍보다 부어오른 이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의 손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건방 떨지 말고 열심히 마음을 모아 기도해야겠습니다. 다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전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이번 전시회에서 적절한 그림을 골라서 교회에 드렸습니다. 제목은 <환희>. 어제 부목사님 오셔서 가져가셨습니다. 나는 식당에 걸어달라고 했는데 담임 목사님께서 좋아하시면서 식당이 아닌 목회자 실에 걸었다고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왔기에 다음에는 더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만약에 내가 <제10회 서양화 개인전>을 개회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만약에'를 생각하면서 밝게 살아갑니다.
여기서 얻은 힌트로 11월 공동 주제는 <만약에>로 하겠습니다.
위에서 ‘안절부절못하며’는 하나의 단어입니다. ‘안절부절한다’는 말은 없고, ‘안절부절못하다’라는 말밖에 없어요. 붙여서 씁니다. ‘머릿속’은 머리와 속 사이에 사이시옷을 붙이지만, 어둠 속은 어둠의 ‘ㅁ’이 유성음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소리가 나니까 사이시옷을 붙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걱정하면서 읽었는데 모두 기쁜 소식입니다.
첫댓글 네. 선생님. 여러 사건사고가 있어 경황이 없는 중에 무엇에 대해 쓸까 고민하다 '만약에'가 생각나 적어 보았습니다. 네째주에는 다른 방향의 만약에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선생님 정말 그만하시길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함께 하셨습니다.
어려운 문법 세세하니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