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현대와 기아의 시즌 16차전이 벌어진 광주구장. 9회초
현대 6번 타자 전근표가 쳐낸 공이 기아 2루수 김종국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기아 선발 다니엘 리오스는 마침내 웃었다. 선두 현대를 상대로 9이닝 4안타 1실점으로 경기를 매조지하며, 지난 해 10월 11일 수원 경기부터 이어오던 현대전 4연패의
사슬을 끊은 것이었다. 개인 통산 3번째 완투승이자, 시즌 9승(10패)째의 쾌거였다. 리오스는 올 시즌 종종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내년 시즌 재계약에 어두운 전선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최근 5경기에서 4번의 QS(퀄리티스타트, 6이닝이상 · 3자책점이하) 피칭을 선보이며 3승 1패 방어율 3.12를 기록, 부활의 날개짓을 펼치며 내년 시즌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어느 덧 한국 생활 2년째를 맞은 '쿠바특급' 리오스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본다.
▲ 기아행은 운명(運命) ?
지난 2001년 8월 기아는 외국인 타자 루이스 산토스가 타격 부진에 시달리자,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서 투수 영입을 꾀했다. 그리고 그때 데리고 오려 했던 선수가 다름아닌 지금 기아에서 뛰고 있는 '2001년
멕시칸리그 다승왕(18승) 출신' 리오스다. 하지만 리오스는 에이전트와
연봉 문제, 그리고 몸 상태(팔 삼두박근 통증) 문제가 불거지면서 기아와의 계약이 결렬, 한국행에 실패했다.
그리고 석 달후, 11월 리오스는 다시
한국을 찾았다. 하지만 장소는 광주가 아닌 대구였다. 그렇다. 리오스는
삼성에 입단테스트를 받으러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리오스는 삼성에게
퇴짜를 맞았고, 한달 후 결국 그는 기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아에 입단한 리오스. 과연 2001년 말 그의 기아행은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 한국명 '이오수'
지난 해 입단한 리오스는 전반기 구원투수로 나서며, 연일 '불쇼'로 팀을 곤란케 했다. 그리고 후반기 참다 못한 기아 코칭스탭은 그를 선발로 전환했고, 본업으로 돌아온 리오스는 '물 만난 고기'처럼 맹활약했다. 그리고 팬들은 이런 리오스에게 '이오수'라는 한국식 이름을 선사했다. 리오스도 이에 부응하듯 12연승 행진을 벌이며 '한국인 대접'에 보답했다. '애물단지'에서 '황태자'로의 탈바꿈이었다. 한글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고 하는 리오스는 이제 '광주(光州) 이씨'의 시조(始祖)인 셈이다.
▲ 선발 딱이야 !
지난 2001년 멕시칸리그에서 18승 5패 방어율 2.98을 기록하며
다승왕을 차지했던 리오스는 당시 26경기 선발 등판 가운데 19차례를 완투했을만큼 전형적인 '이닝이터'다. 하지만 선발 체질인
그가 한국 무대에서는 불펜투수로 데뷔했다. 그것도 가장 힘들다는 마무리 투수. 역시나 무리였을까. 리오스는 지난 해 구원투수로 등판한 41경기에서 6승 3패 13세이브 방어율 3.71을 기록, 특히 마무리 투수로써 낙제점인 블론세이브가 8차례, 세이브성공률도 0.619에 불과했다. 8차례나 선발 투수의 승리를 날려버린 셈이다. 그래서 얻은 별명도 'PM 9시의 공포'였다.
그러나 8월 본격적으로 선발로 전환한 리오스는 선발 8연승 포함
12연승을 구가하며 팀의 '뉴에이스'로 거듭났다. 선발로 나선 13경기 성적은 8승 2패 방어율 2.78. 호성적은 올 시즌 재계약으로
이어졌다. 기대와 함께 시작한 올 시즌, 하지만 리오스는 지난 해
후반기와는 다른 모습이다. 26일 현재 23경기 등판하여 9승 10패
방어율 3.72를 기록 중. 기록상 보여지는 성적은 분명 좋지 않다.
하지만 과정을 살펴보면 다르다. 리오스는 올 시즌 23번의 선발
등판 경기에서 무려 15차례를 QS피칭으로 막아줬다. 승운만 따라줬다면 15승 이상도 가능했다는 얘기다. 내년 전망을 밝게 해주는 대목이다.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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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SON Dec ERA oppBA IP/G HR WHIP 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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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R 6승 3패 13S 3.71 0.261 1.48 5 1.37 0
2002 S 8승 2패 2.78 0.222 7.46 9 1.04 9
2003 S 9승 10패 3.72 0.258 6.30 17 1.2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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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시즌 성적은 26일 현재, ⅓이닝 = 0.33이닝
* ERA = 방어율 WHIP = 이닝당 볼넷 · 안타 허용률
* IP/G = 평균이닝 oppBA = 피안타율, R = 구원 S = 선발
▲ " 니가 투수냐 ? "
외국인 투수 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선발 투수감으로 평가받던 그가 '부진의 늪'으로부터 결정타를 맞은 사건이 있다. 이른바,
'5.27사태'. 지난 5월 27일 수원 현대전에서 10-1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10-12의 대역전패의 수모를 당했던 것을 두고, 기아팬들은 이렇게 부른다. 당시 선발 투수였던 리오스는 9점차의 리드에 흥분했는지, 1회부터 4회까지 매이닝 홈런을 허용, 마운드에
올라 4이닝도 못 채우고 4홈런 7자책점으로 그로기(groggy) 상태에 빠져 강판, 대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했다. 한국 무대 데뷔 이래
최악의 경기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경기'였던 셈. 9점차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하자 김성한 기아 감독은 "그 상황에서 홈런 4방을 맞는 선수가 투수냐!"며 리오스를 비난했다고.
▲ 역시 충격요법이 최고지 !
지난 7월 말 기아는 포스트시즌을 위해 리오스를 롯데 페레즈와
트레이드할려고 했었다. 이 사실을 안 리오스는 유니폼에 반창고로 'L'(롯데)과 'T'(트레이드)자를 써붙이고 운동장을 활보하며 트레이드 항명을 했다. 자신을 트레이드하려 했다는 데 대한 섭섭함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기아 구단이나 리오스
자신에게 득(得)이 되었다. 그 때까지 18경기에서 6승 9패 방어율
3.92를 기록하며, 궁지에 몰려 있던 리오스는 이 일로 자신도 트레이드될 수 있다는 생각에 운동화 끈을 다시금 곧추 세우게 됐다. 리오스는 이후 5경기에서 4차례 QS피칭과 함께 3승(1패) 방어율 3.12를 구가하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롯데 트레이드설'은 부진에 빠져 있던 리오스에게 가해진 '충격요법'이었던 셈.
▲ 사구, 정말 싫어 !!
한 시즌 최다 사구 허용 투수는 누구일까? '사이드암 투수나 언더핸드 투수 중 한 명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면 절반은 맞춘 셈. 정답은 리오스와 삼성 임창용이다. 지난 해 이들은 24개의 사구를
허용하며 대기록(?)을 세웠다. 리오스는 올 시즌도 이미 21개의
사구를 허용하고 있다. 지난 해에 이어 2년 연속 20개를 돌파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셈. 지난 해 공동 신기록 작성의 주인공이었던 삼성 임창용이 겨우(?) 13개로 2위를 달리고 있어 리오스의 신기록 달성은 기정사실에 가깝다. 올 시즌 리오스는 유난히
사구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지난 6월 14일 LG전, 19일 SK전에서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두 경기 연속 퇴장 수모를 당한 것이다.
빈볼에 대한 제재가 엄격해진 올 해부터는 머리를 맞히면 심판으로부터 '무조건 퇴장'의 철퇴가 날아든다. 퇴장 수모를 두 번씩이나 당한 리오스가 '사구 노이로제(neurosis)'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 2004시즌 o.k ? K.O ?
26일 현재 9승 10패 방어율 3.72를 기록 중인 리오스는 올 시즌
현대의 쉐인 바워스(11승)에 이어 외국인 선수 다승 부문 2위다.
23차례 등판 가운데 15차례를 QS피칭으로 막았지만, 승운이 따라주지 않아 겨우 9승에 머물러있을 뿐 지난 해와 비교해 크게 떨어지는 성적은 아니다. 5회 이전에 강판된 경기도 사구로 중도 퇴장당한 경기를 포함해서 6차례다. 물론 내년을 위해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올 시즌 현대와 SK를 상대로 거둔 성적은 형편없다. 현대전 6경기에서 1승 3패 방어율 5.35, SK전 4경기에서
승리없이 3패 방어율 4.29를 기록 중이다. 재계약을 원한다면 이들 팀에 강한 모습을 구단에게 어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년
재계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가기 위해 야구를 하는 마이너리그보다는, 우승을 위해 야구를 하는 한국 리그에서 뛰는 게 더 좋다"고 말해왔던 리오스가 과연 내년에도 그 '소박한 소망'을 이뤄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용현 명예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