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춘천낭만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8. 0:59
국내 시장백과 - 춘천낭만시장
2023.11.07. 06:08조회 12
춘천낭만시장
요약 춘천낭만시장은 조선시대 춘천 읍내장을 계승한 전통시장으로 오랫동안 춘천중앙시장으로 불리다가 시장 현대화와 함께 춘천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근에는 외지인이 많이 찾는 닭갈비 골목이 있다.
1. 춘천낭만시장 개요
춘천은 북한강과 인접해 있어 예부터 주변의 물산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강원도 여러 지역에서 모여든 물건들을 보관했다가 봄날 강이 풀리면 북한강을 통해 수도인 한양으로 향했다. 오늘날에는 1939년 개설된 경춘선 열차와 2009년에 완공된 서울춘천고속도로까지 더해지면서 물자와 사람이 모여드는 동북부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춘천의 시장은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심지에 있는 읍내장과 강 건너의 샘밭장이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개설된 지 400여 년 된 샘밭장이 춘천 지역의 상권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1936년 강을 연결하는 다리가 생기고 해방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내에 위치한 춘천낭만시장이 중심적인 전통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춘천낭만시장은 시장의 주요 통로에 아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현대적 시설을 갖추었으며 의류와 생활 잡화, 제수용품, 곡물과 채소, 나물, 과일 등의 식재료를 파는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또한 춘천의 명물인 닭갈비 골목과 인접해 있으며 시장 안에도 곳곳에 식당이 자리하고 있다.
춘천낭만시장 입구
2. 춘천낭만시장의 어원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은 봄이 오는 시내, 또는 봄이 흐르는 시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산과 강을 많이 끼고 있는 춘천은 봄이 오는 모습을 빨리 느낄 수 있다고 해서 봄내, 즉 춘천이라고 불리었다. 춘천의 중앙시장은 이러한 지역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2010년 경춘선 복선전철 개통 시기에 맞추어 춘천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낭만’이라는 주제로 시장의 특색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상인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춘천 지역에서 오랜 전통을 이어온 5일장인 샘밭장은 장이 열리는 곳의 지명과 관련이 있다. 춘천의 신북면에는 강원도에서 보기 힘든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 샘이 많아서 붙여진 ‘천전(泉田)’, 우리말로 ‘샘밭’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들판은 과거 이 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인 맥(貊)이 자리했던 옛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역사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춘천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 ‘우두의 처녀들은 삼베 장사로 떠나고 샘밭장 처녀는 막걸리 장사로 나가네’라는 노래를 처절하게 불렀다고 한다. 여기서 소머리를 뜻하는 우두는 샘밭 너머에 있는 우두산을 가리킨다.
3. 춘천낭만시장의 탄생 및 발달 · 변천 과정
1) 조선시대 춘천의 대표 시장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 《동국문헌비고》(1770)를 보면 관동 지방 68개 시장 가운데 현재의 춘천에 해당되는 지역에 두 개의 시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당시의 지명으로 방리부내면에 있던 춘천 읍내장(2, 7일)이고, 다른 하나는 북중면에 위치한 율대리(1, 6일)에 개설되어 있었다. 이 북중면에 섰던 장이 바로 옛 각설이타령의 첫 대목에 나오는 ‘춘천이라 샘밭장 신발이 질어 못 보고’라는 가사에 나오는 그 유명한 샘밭장이다.
샘밭장은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조선 중기인 17세기에 천전리에 개설되었다가 위치와 교통이 좋지 않아 신북면 율대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샘밭장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개설된 유서 깊은 시장인 셈이다.
샘밭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북한강변에 자리 잡은 춘천 지역이 조선시대에 강원도에서 생산된 곡물이나 특산물을 운반하는 조운 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지역에 모여든 곡물과 특산물을 보관하는 조창(漕倉)을 설치했고, 조창에 모인 물품들은 겨울이 지나고 얼음이 녹는 봄, 즉 다음해 2월부터 4~5월 사이에 배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송했다.
일반적으로 조창에는 쌀을 200석 정도 실을 수 있는 배가 20여 척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조창이 전국에 9군데 있었는데, 강원도에는 춘천과 원주에 각각 소양강창과 흥원창이 있었다. 덕분에 소양강창에는 인근의 홍천과 인제, 양구 등에서 세금으로 내는 곡식과 특산물이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상업 활동이 활발했다.
이렇게 18세기까지 춘천 지역은 수로 교통의 편의성을 토대로 춘천 읍내장과 샘밭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교통로를 따라 분석해보면 한양에서 들어온 여러 물건들이 배에 실려 춘천에 도착하면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상행위를 하던 보부상들이 그 물건을 받아 1, 6일에 율대리 샘밭장에서 물건을 팔고 다음 날 장이 서는 읍내장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다만 율대리의 샘밭장과 춘천 읍내장을 연결하는 다리가 없어 나룻배로 왕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시장 왕래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둘을 잇는 다리가 생긴 것은 1936년이었다.
오랜 시간 사용해온 손때 묻은 되
2) 샘밭장의 소멸과 재탄생
이러한 상황은 20세기에 들어 교통수단이 변화하며 달라졌다. 육로가 신설되고 확장되면서 물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샘밭장은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기존의 역로였던 홍천에서 인제를 거쳐 고성으로 가던 길이 서울에서 가평을 거쳐 춘천, 양구, 인제를 거쳐 고성에 이르는 길로 변했다.
이러한 교통의 변화는 춘천의 정기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기시장 상인들이 기존의 불편한 물길 대신에 새롭게 확장된 육로를 선택하면서 수로를 이용해 장이 섰던 샘밭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41년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춘천 지역에는 6개의 장이 있었다. 눈에 띄는 점은 사창리에 서던 읍내장이 둘로 분리되어 춘천 운교동의 가축시장과 중앙로에 위치한 상설시장인 제1공설시장이 개설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교통의 변화에 따라 상인들의 이동 경로가 달라지면서 춘천읍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의 개편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거래금액도 가축시장(27만 9,840엔)이 가장 많고 그 뒤로 샘밭장(17만 4,100엔), 제1공설시장(15만 4,724엔), 신포장, 내평장, 광판장의 순서였다. 이렇게 조선시대부터 춘천 지역의 경제를 이끌었던 샘밭장은 교통의 변화에 따라 약화되고 행정 중심지가 있던 춘천군이 상권의 중심지로 부각되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샘밭장이 소멸한 것이다. 샘밭장은 과거 보부상들이 집결하는 곳으로, 양구와 화천에서 발원해 흘러드는 북한강의 북쪽 지류와 인제에서 발원해 흘러드는 북한강의 남쪽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샘밭장에는 한양으로 가는 물품과 한양에서 흘러드는 물품들이 모여들었다. 반면 춘천 읍내장으로 가려면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1936년 춘천 읍내와 샘밭장이 있는 신북면을 잇는 소양제1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읍내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샘밭장이 있는 신북면은 양구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에, 다시 말해 북한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므로 전란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컸고 시장은 소멸되었다. 그 이후 1970년대에 잠시 우시장으로 변모해 장이 서기도 했지만 북부 지역에 거래할 가축이 적었기 때문에 샘밭장은 경쟁력이 약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사라졌던 샘밭장이 2004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길어도 샘밭장 거리만 하겠는가?’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규모가 컸던 샘밭장이 반세기만에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농촌 노인들의 소일거리와 농민들의 소득 증대를 위해 1억 3,000만 원을 들여 판매대와 공중화장실 등을 마련해 과거처럼 4, 9일에 장이 섰다.
2014년에는 신북읍 율문리에 4만 6,000m2에 이르는 ‘샘밭장터’가 조성되었다. 130여 개의 판매대를 설치한 샘밭장터는 행사와 공연이 가능한 공간과 주차장까지 갖춘 5일장으로 재탄생했다.
샘밭장이 서는 장터 입구
3) 상설시장과 풍물시장
한편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의 활성화와 함께 춘천에는 상설시장이 속속 등장했다. 1963년의 기록에 따르면 춘천에는 3개의 상설시장과 1개의 정기시장이 있었다. 1954년에 생겨난 중앙시장, 1956년 요선시장, 1957년 서부시장, 여기에 춘성군 동산면에 있었던 정기시장인 동산장(5, 10일장)이 포함된다.
1970년대에는 여기에 남면의 광판장(2, 7일장)과 우시장으로 변모한 샘밭장(1, 6일장)이 더해졌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정기시장인 동산장이 사라졌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동산면 주민들이 춘천시에 있는 상설시장을 이용하게 되면서 장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한편 홍천군과의 경계에 있어 춘천 시내와 멀리 있다는 점에 기대어 꿋꿋하게 버티던 광판장도 1991년에 사라지면서 춘천 지역에는 전통적인 정기시장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1980년대에 춘천 시내에는 6개의 상설시장이 존재했는데, 그 가운데 춘천중앙시장은 춘천시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이용객이 가장 많았다. 그런데 과거 정기시장의 흔적이 남아 시장 입구는 물론 시장 안 골목까지 들어와 노점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상설시장 상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때마침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거리 정화라는 명목으로 전국의 노점상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노점 상인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고 결사적으로 노점 철거에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타협점을 찾은 것이 바로 풍물시장이다. 춘천에서도 중앙시장을 비롯해 명동 등 도심에 자리를 잡고 있던 노점상들을 약사천을 복개한 땅으로 이주시켰다. 이른바 ‘약사천 풍물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교각 아래 줄지어 자리 잡은 노점상들
그러나 지역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행정적 편의에 따라 형성된 시장이 잘될 까닭이 없었다. 급기야 춘천시는 상인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공무원들에게 풍물시장을 이용하게 했다. 이와 더불어 교통이 발달하고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약사천 풍물시장은 차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춘천시가 서울의 청계천 복원 사업을 본떠 약사천 복원 사업을 벌이면서 2010년 약사천 풍물시장은 다시 이주를 해야 했다. 이런저런 협상 끝에 결국 온의동에 있는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전철 교각 아래에 143개의 작은 점포로 구성된 장터가 형성되었다. 또한 초기의 우려와는 달리 인근의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지리적 이점과 남춘천역과 가까운 이점이 부각되면서 찾아오는 상인과 손님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약사천 풍물시장은 2, 7일에 서는 5일장과 주말 장터가 개설되면서 정기시장이 지닌 특유의 활기 넘치는 시장으로 자리를 굳혔다.
근래에 들어 이 풍물시장은 외지에서도 많이 찾아오면서 약사천이라는 지명보다 기억하기 쉬운 ‘춘천풍물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춘천풍물시장 입구
춘천풍물시장에서 마늘을 사고파는 모습
4) 춘천중앙시장과 양키시장
조선시대 샘밭장과 함께 춘천의 대표적인 정기시장이었던 읍내장의 명맥을 이은 춘천중앙시장은 1952년 미군들에 의해 595개의 작은 점포들이 세워지면서 상설시장으로 거듭났다. 1960년에는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상인들이 땅을 구입해서 (주)춘천중앙시장을 발족시켰고 1,336평의 땅에 335개의 점포를 갖춘 시장으로 성장했다.
당시 춘천중앙시장은 군수 물품과 잡화를 파는 시장이었다. 시장과 가까운 근화동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면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상권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다가 1966년대에 큰 화재를 겪고 난 뒤 기존에 함석으로 지은 건물 대신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개축했다. 282개의 점포를 갖춘 지상 3층 건물이었다. 1970년대에 춘천이 강원도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면서 춘천중앙시장은 춘천의 명동거리와 함께 춘천뿐만 아니라 인근의 춘성, 화천, 양구의 주민까지 찾아오는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그때에도 춘천중앙시장에서는 한국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양키시장의 역사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 부대가 춘천 인근에 주둔하면서 미국 군인들이 쓰는 물건들이 시장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 워낙 좋든 나쁘든 물자 수급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미국에서 들어온 제품은 디자인은 물론 품질도 좋았다. 초기에는 미군들이 사용하는 군복이나 군화 같은 의류와 그들이 즐겨 먹던 껌과 초콜릿, 설탕, 커피, 잼 등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점차 전자제품 등을 포함한 다양한 제품들이 판매되었다.
양키시장은 노점 형태로 시작되었다가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중앙시장의 한구석에 상설시장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기 이전, 양키시장은 소위 ‘미제’라 불리는 질 좋고 튼튼한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 오는 사람의 발길로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경제 발전과 더불어 국산 제품들도 품질이 탁월해지면서 미국 제품에 대한 선망이 퇴색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양키시장은 규모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현재는 시장의 북쪽 한구석에서 작업복을 주로 판매하는 곳으로 변해 과거의 빛바랜 추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춘천낭만시장의 한구석에 간간히 보이는 수입 제품들
5) 중앙시장에서 낭만시장으로
춘천중앙시장의 위기는 1980년대에 슈퍼마켓이 등장하고 인근의 제1공설시장이 제일백화점으로 탈바꿈하던 때에 찾아왔다. 제일백화점은 오늘날의 백화점과는 거리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백화점의 약진은 시장의 쇠락과 직결되어 춘천중앙시장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일백화점 또한 이제는 현대식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출현으로 생기를 잃은 채 제일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춘천중앙시장과 등을 맞대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시장에 가장 큰 타격을 가져온 것은 역시 IMF의 한파가 밀어닥쳤을 때다. 춘천중앙시장의 경우 10여 곳 이상이 문을 닫고 매출액이 50% 이하로 떨어질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춘천남부시장은 당시 120여 개 점포 가운데 90개가 문을 닫았고, 하루 한 명의 고객도 찾아오지 않는 점포가 있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으로 몰렸다.
이렇게 쇠락을 거듭하던 중앙시장이지만 2000년대에 들어 시장 현대화 사업을 통해 부흥을 꾀하기 시작했다. 2002~2006년 사이, 시장의 주요 통로에 아케이드를 설치했고 2010년에는 춘천중앙시장에서 ‘춘천낭만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배경에는 2009년 서울~춘천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2010년 서울~춘천 간 전철이 개통되는 교통의 변화도 한몫했다. 수도권에서 접근하기가 훨씬 편리해지므로 춘천의 구봉산전망대, 공지천, 의암호, 소양댐과 청평사, 중도유원지 등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 시장도 함께 도약의 계기를 맞으며 활성화되기를 바란 것이다.
현대적 설비를 갖춘 춘천낭만시장의 내부
춘천낭만시장 건물의 바깥에서 보이는 점포들
4. 춘천의 지리 · 지역적인 특징 및 생산 품목
춘천은 남동부와 북서부로 태백산맥의 지류가 지나는 곳에 분지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대체로 산지가 많고 경사가 가파른 지형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금강산에서 흘러드는 북한강의 물줄기와 설악산에서 흘러드는 소양강의 물줄기가 춘천이라는 몸통을 휘감아 지나는 형세를 띠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춘천은 고대국가가 세워진 땅이었고 신라 때에 우수주, 삭주, 광해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고려에 들어서 춘주가 되었다. 그 이후 고려 신종 때에는 안양도호부가 되었다가 조선시대 태종 때에 이르러 춘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이후 1888년에 유도부로 승격되어 경기도에 속했다가 1895년에 강원도로 환원되면서 춘천군이 되었고, 1939년에 춘천면이 춘천읍이 되었다가 1947년에 춘천시로 승격되었다.
춘천은 동으로는 인제군, 서쪽으로는 경기도 가평, 남동쪽으로 홍천, 북으로는 화천군과 양구군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