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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反民族行爲者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한민족을 배신하고 일제
중국어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주로 친일파친일파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진 용어로 쓰였는데[1],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매국노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인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해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 반역자', '부일(附日, 일본에 빌붙음) 협력자' 등이라고 칭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일본 제국을 높이 평가해주기 때문에 '친일제파'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애매한 과거청산만큼이나 한국 안팎에서 친일파라는 용어의 애매함 자체가 문제가 되는데, 친일파는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 그래서 한자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한국에서 쓰이는 "친일파"의 의미는 일본을 좋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비시 프랑스의 경우처럼 식민 통치 당시 일본 제국에 협력한 반역자들 즉 침략자의 끄나풀들을 뜻하였다. 그래서 용어를 부일 협력자(附日協力者)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물론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 정도의 뜻밖에 없는데, 친일파라는 말이 하도 한국의 언론에서 많이 쓰이다 보니 "일본을 좋게 본다는 것만으로 까일 만큼 한국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는 건가"라고 오해하거나, 물론 극단적인 사람들은 그렇다 나아가서 이 오해를 넷 우익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
본 항목에는 친일반민족행적이 기술된 김승학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친일진상규명위) 중 포함되어 있는 인물을 다룬다.
친일 행적이 있긴 하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기 힘들거나 애매한 사람은 물음표로 표기한다. 되도록이면 물음표 표시가 된 자들은 골수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판단이 어려우므로 신중히 중립적으로 생각할 것. 특히 정치적인 인물의 기재는 작성자마다 반달이 있을 수 있으니 정치 성향에 어울려서 편향적으로 서술하는 행동
또한 여기 들어간 자들 중에는 단순 친일부역자도 많다. 이들은 조선이 망하고 한참 지난 뒤 부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게 보통이고, 그 목적도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노덕술이나 김덕기
범례 |
낚여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람들(■) |
특히, 그 악성이 단순 친일을 넘은 자들이나 매국노들(볼드체) |
친일파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는 사람들(?) |
권상로 :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한일합방에 찬성한 불교 승려로, 법명은 퇴경이다. 조선총독부의 친불교 행적을 찬양하며[3] 2차대전에서 일본을 위해 승리하는 것이 곧 성불하는 것이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며 <임전동국대학교 초대 총장 김활란 보다 악질이다[4]
고황경 :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자
김극일 : 신의주경찰서 경부로 이륭양행 홍성일 등 독립운동가 4명 체포. 이후 양양군수, 인제군수 등을 지냄.
김덕기 : 그 제대로 처리조차 못한 껍데기. 반민특위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악질.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설이 있으나, 독립투사인 정이형 씨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 한다잘 됐네!
김석원 : 일본군성남고등학교독립군 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의 가족을 돌봐준 걸 보면 어느 정도 양심은 있던 사람이다.
김성수 :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후 고려대학교조봉암을 지원하여 ‘유상매입 유상분배’ 원칙의 농지개혁법
김인승 : 구한말 이전 인물로 아래 김인승과 동명이인. 그리고 임종국이 지목한 친일파 1호. 1876년 일본 외무성의 외국인 고문으로서 일본의 강화도 조약
김활란 : 일본명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이화여자전문학교한국인[6] 이화학당위안부, 정신대유관순 열사가 존경했던 선배였는데 왜 존경했는지 유일한 유관순 열사의 단점이다
김희선 : 신민회 출신으로 일경에 체포된 후 풀려나 평남군수, 개천군수 등을 지냄.
노덕술 : 일본명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고문경찰이였다.
노수현 : 호는 심산(心汕)으로 조선일보에서 한국 최초의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하여 유명세를 타다가 해방 뒤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노주봉
문명기 : 일본명 후미아키 기이치로(文明琦一郞). 별칭 헌납병 환자, 야만기라고도 불린다. 이 자는 경상북도 영덕군문태준
민규식
민영기 : 을사늑약 체결 당시 탁지부 대신(지금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을 때 을사오적과는 달리 조약체결에 반대했으나 후에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동양척식회사 부총재와 이왕직장관을 지냈다.
백붕제 : 친일 관료. 그는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군수품 공출을 지휘했으며, 일본국방헌금 모금,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일본군 후원, 일본군 유가족 방문 등을 수행했다. 그의 친일반민족행위는 일제로부터 매우 높이 평가 받아 조선총독부의 '지나사변공적조서'까지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쇼와 천황으로부터 자작백낙청
백선엽 : 일본명 시라카와 요시노리[8] 간도특설대간도특설대는 오로지 독립군과 독립운동가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전쟁에서 불세출의 활약을 한 구국의 영웅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때 비교적 개념적인 행보를 보인 덕에, 볼드급 매국노로는 치지 않는다.
서정주 : 일본명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静雄). 군사독재정권을 찬양하기도 했던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선우순-선우갑 형제: 형은 대동동지회장, 동생은 일본 경시청 고등계 형사를 각각 지냄.
선우영빈 : 일명 하야시. 하지만 여타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다른 행보를 걸어온 편이다.
손석도
안준생 : 이 사람은 안중근의 아들로,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크게 공헌을 한 분이지만, 정작 그의 아들은 일본 제국주류 학계에서!
양주삼
엄인섭
유명한 : 일본명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 유일한 박사의 동생이자 유유그룹 창업주인 유특한골수 극악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집안을 엿먹였다.[10] 게다가 액수로만 따져도 김순흥은 그대로 쌈싸먹는다.[11]
유창렬 : 1920년 김도원 등 보합단원 체포에 기여한 친일경찰.
윤갑병
윤극영(?)
윤시병
이갑수 : 군국주의 파시즘을 매개로 한 우생학의 잔재로 인해 한센병위의 송병준과 쌍벽을 이룬다.
이규서 : 그야말로 위의 이갑수, 송병준과 맞먹는 악질 친일파. 이 쪽은 친일 활동은 물론 자신의 삼촌 이회영
이규완 : 실제 일제강점기 때 도지사 등의 고위직을 지낸 것은 맞으나, 다른 친일파들과 달리 평상시 생활에서 성실하였으며 악습근절에 앞섰고 신간회, 물산장려운동창씨개명
이규동 :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이며 만주국 사무관급 문관 출신.
이광수 : 일본명 가야마 미쓰로(香山光朗).
이봉창 : 일본으로 건너가 적극적으로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으나, 일본에서 갖은 차별을 받아 생각이 변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해 히로히토 덴노 암살미수 의거(義擧)를 일으켰다. 사실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그냥 일반 조선인이라서 일본 측에서도 쓸 이유가 없었긴 하다.
이상범 : 화가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한 사건
이성근 : 친일 경찰 출신으로 충남도지사, 매일신보 사장 등을 역임.
이숙종 : 성신여학교 설립자
이원수(?)
이유립
이종욱
이종찬 : 일제강점기 중에는 분명히 친일파가 맞았으나, 해방 후에 크게 회개하고 독립 대한민국을 수호하고자 6.25 전쟁김석원이나 이규완[12]
이주회 : 을미사변 가담자 중 하나.
이회광
이효석 : 이 사람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사연이 정말 애절하다. 생활고로 아내와 차남이 병을 앓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더 안타까운 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 지 얼마 안 가서 두 사람은 병사하고 만다는 거다. 이 일과 더불어 자신의 변절을 비웃는 발언에 부끄러움을 느껴서 친일파 노릇을 때려 치운 일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이렇게 살고 있다.
이희덕 : 전 일진회 간부, 간도 룽징 조선인거류민회장.
임문호 : 일제 강점기 중에 천도교의 주요 인사로 활동하던 종교인인데, 태평양 전쟁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임종국의 아버지 되시겠다. 취소선이 그어진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는데, 아들 임종국이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알고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아버지 이름을 넣을까 하고 고심하던 차에, 임문호 본인이 직접 "내 이름도 넣어라. 거기에 내 이름이 없으면, 그건 죽은 책이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이름을 수록할 것을 간곡히 요구하여 자신의 죄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장면(?) :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긴 했지만 그의 제자였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장면에게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정치가 김대중
장우성(?) : 호는 월전으로 이순신, 유관순 등의 표준영정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나, 1943년에 조선총독부의 주최로 열린 '조선미술전람회 창덕궁상 수상 시상식'에 '부동명왕상' 모델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13]참고.
장은산 : 만주군관학교 3기 출신.
장지연(?)
전영택
정춘수 : 개신교(감리회) 먹사민족대표 33인의 일원이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구속되고 전향하여 친일 활동에 나서며 비행기 헌납, 교회 종이나 대문 헌납, 신사참배
채만식 : 왜 취소선인지는 해당 항목으로.
최린 : 일본명 가야마 린(佳山麟). 민족대표 33인 중 1명이나 변절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친일 행위를 인정하고 사죄했는데, 공판정에 같이있던 이광수가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한 것이다"라고 하자 "입 닥쳐"라 말하기도 했다. 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한국전쟁
최운하 : 조선총독부
최재서
최정규 : 친일 무장단체 '보민회'의 리더로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선 인물.
최정희
최태민 : 일명 조선의 그리고리 라스푸틴 일제강점기 황해도 지역에서 순사로 근무,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던 친일매국노였고 해방 이후엔 사이비 종교 영세교 교주 및 사기꾼으로서 정치, 사회, 종교계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을 헬조선으로 망친 온갖 적폐의 만악의 근원
하판락 : 이놈은 진주 하씨 문중에서 대놓고 숨기려다 문중 전체가 개망신을 당했다.
한상룡 : 일제 시기 조선의 금융거물.
현영섭 : 일본명 아마노 미치오(天野道夫). 일제 때 무정부 독립투쟁을 벌이다가 옥살이를 한 뒤 변절하여 조선어 전폐론 등 온갖 친일 이론을 제창함.
홍난파(?)
홍인화
홍종철[14]
홍택기
참고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초기의 기준은 장교뿐만 아니라 관공서의 말단 공무원한민당과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주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 "창씨개명한 사람은 다 친일파냐"는 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기준은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이기 때문.
민족문제연구소링크[15] 또 조선귀족, 일본육군사관학교
또한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이들이 이런 점만 가지고 애먼 사람들을 친일파로 몰아가는 글을 올려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이들에 의해 오해를 받은 대표적인 유명인사로는 김수환누구누구 아버지는 일제가 세운 은행의 은행원이었으니 친일파 자손이다라는 식인데, 애초에 저 명단에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친일적인 기관에 소속되었다 할지라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명단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에 잠시 관제 단체에 몸담았던 김순남친일반민족행위자한홍구기사
진짜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은 과거 흑역사는 감추고 잘난 척을 하는 일부 높으신 분들당시 언론의 친일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민족정론지라는 자랑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함부로 집안 자랑을 하는 후손들 때문에 저런 사실이 까발려지는 경우도 있다.
급진개화파인 갑신정변 사람들, 그리고 온건개화파인 김홍집 내각들(이완용, 박영효친일파
이 시기에는 먼저 개화를 이룬 아시아 국가인 일본청나라
게다가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인 미-영-러-청-일 중에서 가장 국력이 약해 보여서, 다른 열강에 의지하여 개화를 할 경우 그 나라에 종속되거나 그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것 같았으나, 일본의 경우 후발 주자에다가 약해보여서, 비교적 대등한 관계에서 도움을 받고, 산업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본성을 헤아리지 못한 못했던 어리석은 판단이었으며, 이 중 많은 사람들은 일본의 실체가 드러나자 후회하고 반일 성향으로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영효와 같은 경우처럼 지일파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처음에는 단지 왜인(=일본인)이라고 묘사하더니 나중에는 왜놈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여운형도 젊은 시절 러일전쟁
친일 개화파였던 김옥균
일본을 이렇게까지 '선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은 조선인들의 현실 인식의 한계로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 조선인 지식인들의 사상이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결(高潔)하고 순수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급진은 물론이고 온건 개화파들도 나중에 일본을 등에 업게 되는것도 있고, 이 시기의 그런 개화파들은 일본의 힘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힘을 등에 업고 있던 김홍집 정권 하에서는 나라를 위한 근대 개혁들이 펼쳐졌으며 아관파천 이후 살아남았던 김홍집 정부 인사들도 일본이 나라를 먹는 것에는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참고로 조선 말고도 베트남이나 인도나 여러 나라에서 일본을 아시아 형제판보이쩌우와 호찌민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처음에 일본을 호의적으로 접근하다가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본질을 알게되면서 극반일
또한 반민족행위자는 개화파에서만 나온게 아니라 개화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왕실, 척족, 수구파 관료들 내에서도 많이 나왔다. 이완용 또한 대한제국 초기에 친러파로 활동했지만 이후에 친일파로 갈아탔다. 때문에 반민족행위자는 정파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출현했던 만큼 개화파와 수구파를 놓고 어느 한쪽이 반민족적이다 라고 논할 수 없다.
일본광복 이후에도 문제가 됐는데 3.1 운동이완용, 송병준
다만 당시 상황이 어느 쪽으로 봐도 독립의 희망이 희미하고 없었던 때인 만큼, 단순히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친일을 한 것만으로 매국노의 의미로서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할 수 있냐는 반론도 있다. .
특히 이런 점이 가장 크게 논란이 되는 시기가 바로 일제 강점기 말기. 즉, 전시 체제 시기다. 이 부분에 대해 학계에서는 '생계형으로 어쩔 수 없이 불명예를 남긴 경우도 고려해야한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그래서 이런 논리를 펼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논리를 과거사 부정이나 정당화에 악용하고 있다. 여기에 관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청산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김동춘 성공회대
한국 현대사에서 권위높은 학자인 서중석 교수에 따르면, 오늘날 대한민국에 있어서 가장 부정적 영향을 끼친 요인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경찰 출신들과 일제강점기 말 내선일체 운동에 적극 가담한 지식인들
기존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논란에 대해 크게 2가지 기준을 놓고 정하고 있다. 첫 번째는 '지속적, 반복적, 적극성'등 여부를 놓고 보는데, 여기서 '생계형'에 대해 극명하게 나뉘게 된다. 여기서 '지속성', '적극성', '반복성'이 결여되어 생계형으로 제외된 대표적인 인물은 소설가 이효석, 채만식과 시인 정지용#1#2
이 기준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인물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미당 서정주 춘원 이광수 등이[17]
또한 이 시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관해 문제가 되는 것이 이른바 '자치론자'이다. 이광수야 좀 막나갔지만 당시 조선에 체제하는 많은 이들이 자치론의 성격을 나타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치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자치론이란 기본적으로 일본의 현재 통치를 긍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치를 하고 차츰 민족의 역량을 늘려나가자는 것인데 이 흐름에 있던 많은 이들 역시 최종적인 단계로 독립을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립이 요원해보이는 상황에서 가능한 정도만이라도 민족의 힘을 기르자는 것인데 기본 전제의 특성상 어느정도 일본에 협력하는 체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수행한 많은 이들이 간단하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통칭되고 있으나 생각해보면 이를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비슷한 예로 미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 증진을 원했던 엘리 파커미국 정부
물론 독립을 주장했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거 없고 민족 반역자가 맞다. 왜냐하면 자치론을 주장했던 이들 중에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독립이 안 될 줄 알았다라고 주장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로 이들이 독립을 최종 목적으로 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은 것이다. 독립을 최종 목적으로 해서 실력양성운동을 벌였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개량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에는 단 한명도 없고, 근접한 시기에도 안창호
독립을 최종목적으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 언제인가 하면, 당연히 독립된 이후에 자신의 행적을 변명한 것이다. 만일 독립이 최종 목적이었다는 부분이 논란이 되면 평가도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독립은 어차피 요원해 보이니까 일본인에 동화되어서 잘 살아보자가 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를 위해 노력한 엘리 파커 역시 "인디언이 언젠가 독립할 것이니 그 준비를 하자"가 아니라, "미국인비시 프랑스
해방 이후 38도선 이남을 통치하게 된 미군정
제2조. 정부 등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부 맥아더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무장해제 시켰지만 일경으로 복무했던 조선인 경찰들은 거의 그대로 기용했으며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들도 변함이 없었다.
군정 경찰은 경무국이라는 이름으로 1945년 10월 21일에 창설됐다. 1946년 11월 기준으로 상위 계급의 간부가 된 군정 경찰의 82%에 달하는 사람들이 친일 경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계속 쓰는 일이 현명한 처사인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경찰로서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일본인을 위해서 훌륭한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일본인이 훈련시킨 사람들을 경찰에서 몰아내는 일은 공정하지 못한 것입니다."[18]
이 이유에는 맥아더 사령부의 규정에도 나와 있듯이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구축하는 것"[19]어제의 동료이자 오늘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불과 한달 전까지 피 튀기게 싸우던 어제의 적
게다가 미군정은 해방된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극히 부족했다. 항복 조인식을 끝낸 하지 중장하지는 미군정 초기부터 기자들에게 '나에게 필요한 지식을 주는 사람은 일본인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다. 거기에 더해 일본인을 제외한 한국인을 '준 우호적' 또는 '해방된 국민'으로 대우하라는 맥아더와 스틸웰 장군의 조언도 무시하고 휘하 장교들에게 한국인을 '준 적국인'으로 취급하라고 지시하는 어이없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 고문이었던 랭던은 한국인에게 분열, 아첨, 과도한 이기주의, 강력한 대립, 아량 부족 등이 있다며 혹평을 해댔다. 이러한 한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은 일본의 탓이 컸는데 일본군 조선군사령부가 패전 후 오키나와의 미 24군단에 한반도 상황을 타전하면서 남한 사회가 공산주의 세력에 물들어있다거나, 치안 질서가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있다고 왜곡했기 때문이다.[20]
"조금만 불똥이 튀어도 폭발할 것 같은 화약고, 이것이 남한의 현재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높은 교육수준을 가진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들 대부분이 일제에 협력하였지만 이러한 오명은 곧 사라질 것이다.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으며 가장 큰 그룹이 한민당
미군정 정치 고문 베닝호프(H.M.benning-hoff)의 초기 보고서[21]
미군정은 행정 인력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는 정당 세력을 원했고 그런 정당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민주당이었다. 한국민주당은 초기에 송진우를 비롯해서 흥사단, 동아일보 계열, 호남지역 정치세력, 심지어 사회주의 우파 세력 등 비교적 다양한 세력을 모은 정당이었으나 1945년 12월 밀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김성수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을 통과시킬 경우 친일파들이 대거 잘려나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인준을 거부했다.
1948년 5.10 총선거와 제헌국회를 거쳐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어서 8월에 헌법 101조를 바탕으로 국회에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통과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려는 시도로 10월에 반민특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친일 세력, 특히 경찰들이 거세게 반발했는데, 노덕술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 국회의장 신익희, 검찰총장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거다 그러나 이 암살 시도는 사전에 걸리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반민특위가 활동하자, 한민당 등 친일 세력을 기반으로 하던 이승만
조바심이 난 이승만 정부와 경찰은 국회 프락치 사건
이상으로 내용들을 정리하면 용이한 행정과 냉전에 따른 반공 논리를 위해 미군정은 친일파들을 선택했으며,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친일파를 비호하였고 이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가 바뀌었다.
이데올로기와 권력 외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히 활동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앞서 베닝호프의 보고서에도 언급되었듯이 당시 한민족으로서 고등교육을 받은 계층이 매우 적었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제도권 교육은 일제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고, 그러한 교육의 기회 자체도 매우 한정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당시 일본과 한반도 내 제도권 교육 체제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선 싫어도 표면적으로는 친일적 성향을 지니거나, 실력 그 자체가 아주 뛰어나야 했다.
한반도 이외 지역의 대표적인 고등교육 수혜층은 중국이나 소련, 미국에 있었는데, 소련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정치적 입지를 다진 인물들은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남한 지역에서 등용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물들이거나, 이승만과는 정파를 달리하는 세력이었기에 역시 등용되기 힘들었다. 조소앙이라거나 지청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고 나중에 고려대학교 교수 및 총장까지 역임한 김준엽 등은 일본의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김원봉, 스탠포드 로스쿨 법학 박사까지 따고 OSS의 훈련까지 받은 유일한
건국준비위원회미군정이 실체를 인정했더라면 친일 세력을 대체할 상당한 행정 집단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탁 통치가 무산되고 좌우익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행정 기구를 운영하고 정책을 입안할 계층은 일제 강점기 당시 식민지 체제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은행 등의 경제기구나 총독부, 법원 등과 같은 관청, 군경 기관 등에서 실무 경험을 축적한 친일파들로 국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해방 공간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문제 상황이긴 하나 이들 모두를 쳐낼 경우 미군정청의 업무가 마비된다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을 팔아먹었던 자들이 해방이 되고 나자 아무 일 없었단 듯이 그대로 돌아와 민족의 지배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제점이다. 당시 국민들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구 10.1 사건과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
동족을 고문하고 탄압한 친일파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친일 경찰의 경우 노덕술, 이정용 등이 6.25 전쟁백선엽박정희[22] 정부에서의 박흥식 등이 한일협정매카시즘
친일반민족행위자 척결 문제에서 한가지 특이점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리승기, 채희국[23], 계응상[24]은 반민특위에 불려가 상당한 고초를 겪었고, 당시 반민특위와 대한민국 정부[25]로 한국전쟁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친일 행위가 묵인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병도[26]
친일반민족행위자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육체적'은 약하게 남아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아 남아있기 때문. 또한 한국 한정으로 제2의 일제강점기를 바라고 있는 쓰레기들도 존재한다.(특히 정치권)
일본 자위대의 군국주의화에 무비판적이거나 동조하는 정치인, 한일 역사 문제에서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박근혜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와 그 후속 조치로 여성가족부 주도로 위안부 관련 백서를 만들어 발간하려다가 포기한 것, 소녀상의 건립을 방해하는 세력들 등이 있다.
그 동안 외교를 맡은 행정부의 정치인들이 이 유형이 많았으나 사법부에서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관련 소송을 파기하여 수면 아래로 덮는 걸 고려하는 정황과 증언이 드러남에 따라 정부의 삼권분립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강제징용 사건 재판거래에 대한 증언박근혜의 지시에 따라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과 황교안검찰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에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려 들지 않았는데, 상술했듯 친일 매국 행적이 드러났고 게다가 아베 총리가 3연임이 되면서 일본을 전쟁국가로 만들려 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
여기서 말하는 정치성향이란 기본적으로 극우 성향아래 일제시대의 발전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 외에 극도의 반공주의[27]
이들은 생계형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주장이 비슷하기도 한데, 주로 뉴라이트조선총독부식민지 시혜론으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다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하면 좌빨
심한 경우는 독립운동가
여기에 첨가해서 과거 극우반공주의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한승조산케이 신문
여기서 그는 '일본의 지배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자극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군 위안부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물론 처음부터 극우 세력이 아주 급진적인 친일, 반민족적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해방 후 한국과 일본은 공산진영에 대한 경계심 및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했고, 또 한미동맹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에게 주요 군사기지를 제공하며 유사시 병참 및 기뢰 제거등의 역할을 수행할 일본과의 우호 관계를 맺을 필요는 있었다. 이를 인지한 김일성은 ‘갓끈전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남한이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갓끈으로 유지되는 체제이고 이 중 하나만 잘라내도 남한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 중 일본은 과거 식민지배기간 동안 만행을 저질렀고 지금도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했기에 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한 고리였고, 따라서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강경한 반일적 주장 및 행동을 보여주었다. 일본 대사를 습격한 김기종이 대표적 인물이고, 정대협도 훌륭한 취지와는 별개로 일부 활동가들이 끊임없이 보수층에 의해 종북단체와의 연대 의혹을 제기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초창기 보수세력의 주장은 일본과의 역사적, 영토적 갈등과 관련해 대한민국의 원칙적 입장은 유지하되 일부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극단적인 반일 선동은 경계하자는 온건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지만원과 한승조 같은 극우 논자들은 단순히 일본과의 협력 및 극단적 반일 선동을 경계하자는 주장을 넘어 일본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고 위안부 문제와 같은 과거사를 부정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조선의 과거를 필요 이상으로 깎아내리고 독립투사에 대해서도 일본측의 논리를 그대로 끌어다 쓰고 있다.
사실 서구의 네오나치히틀러는 볼셰비키2차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동맹도 삼국 방공협정
참고
말 그대로 그저 재미로 관심 받고 싶어서 하는 부류. 사실상 인터넷에서 친일 행각하는 대다수가 이런 부류이며, 정말로 친일반민족행위자라기보다는 단순히 관심
21세기가 되면서 정보화시대에 접어들었고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인터넷에 피력할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블로그나 SNS가 대표적인 예시. 때문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흐려졌고 온라인은 더 이상 전문적인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당연히 이에대한 부작용으로 별 다른 생각 없이 재미 내지 정신 미성숙, 관심좀 받아보자싶은 마음으로 올리는 글이 많아졌고 한국인의 대표적이 뇌관이 대일문제인만큼[28] 그를 건드려 관심좀 받아보자 싶은 마음으로 인터넷에 친일글이나 사이트를 만들고 올리는 부류의 인간들[29]
이런 류의 사람들은 친일 주제의 블로그나 역사 갤러리 등에서 종종 발견되며, 전성기는 2000년대 중후반 인조이재팬혐한국사 교과서로 대표되는 민족주의트롤링을 하고, 즐거워한다. 앞서 적었듯, 무시하자. 남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못난 짓을 하는 비참한 사람들에게 굳이 관심을 적선해서 더 병이 도지게 할 필요는 없다. 네이버 뉴스에 소셜댓글이 활성화 된 이후, 관심병형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많이 보이고 있다. 간혹 트위터나 페이스북
2011년에는 인천 부평에 산다는 '장주원'이라는 가명을 쓴 일명 인하대지망생 또는 애니전문가로 불리웠던 소년이 블로그에 친일부평동 청소년 범죄인증사건
2017년에는 한 트위터 유저가 욱일기가 그려져 있는 걸로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센징
일단 일본은 한국보다 개화도 빨랐고 확실히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부터 90년대까지 한국이 극도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 및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사회인데다가 2010년대에도 그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제3공화국~제5공화국등 군사독재정권과 징병제의 영향으로 군대 문화와 똥군기가 민간에서까지 일상화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일본이 인권의식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한국보다 앞서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 뿐 현재에 대입할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과거를 기준으로 본 시각으로 한국을 비하하며 일본을 찬양해서는 안된다. 일본 사회에도 부라쿠민, 아이누[30]일본의 문제점을 덮어둔 채 무조건 대한민국 사회를 비하하는건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현재의 상황을 100년전 구한말의 상황 또는 민주화 이전의 대한민국과 완전히 동일시하며 자국혐오 행위를 하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라고 할 수 있다. 디시인사이드, 루리웹 같은 일빠 성향이 강한 곳에서도 이런 자국혐오 성향의 유저들이 종종 보인다. 심지어 일부 오덕들은 엔화 인상이나 일어 선호 등을 이유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방하다 번짓수를 잘못 짚은 자들은 착취적 성향을 띄는 징병제, 낮은 시민의식과 인권의식, 미약한 노동권, 빈부격차, 대기업/재벌의 횡포,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 등을 이유로 '독립이 되지 않고 차라리 식민지로 남았으면' 이란 위험한 생각을 지니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디시인사이드의 역사 갤러리와 근현대사 마이너 갤러리나 서기석[31], 고 젠카, 헬조선닷컴
2012년 9월 인터넷에 태극기를 불태운 흔적의 사진을 올린 13세 김 모군이 친일카페 운영자이자 개인 블로그에도 일장기와 일본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대한민국친일카페 청소년 범죄인증사건
대한민국 시기만 한정하지 않고 구한말과 광복이전까지 포함할 경우 박중양조선/대한제국과 조선인 비하형과 신념형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이 분류에 포함된 이유는 박중양은 부조리함이 만연한 구한말 당시 조선 사회[32]
미국 정치가였던 더럼 스티븐스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하며 은덕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재미 한국인들의 비난을 받아왔다가 1908년 재미 독립 운동가 전명운, 장인환
1890년~1900년대 무렵 러시아 제국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윌리엄 시볼드,[33] 토니 마라노,[34] 켄트 길버트
실제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력인 미국과 유럽의 경우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인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를 위해, 또한 그들은 일본욱일기 들고 거리 돌아다니거나 서구에서 하켄크로이츠잘 모르니까 그러나 그것이 서구에서도 일본 군국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가장 엄격하게 처벌했다. 더불어 같은 혐일 국가인 미얀마, 북한
물론 중국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있었다.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왕징웨이만주사변,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중국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었고, 중국 국민당 장제스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미얀마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하면 사형이나 무기징역인 것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와 기무라 헤이타로태평양 전쟁 당시 기무라 헤이타로"버마 정부는 내게 훈장을 줘야 한다. 내가 버마의 인구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지."라 망언을 했다. 그리고 이 개소리를 들은 검찰에서 어찌나 격분했는지 "이런 도살자 놈을 봤나!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뭐? 니가 사람이냐?!"라고 일갈했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에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갈 수 있는 반체제행위이고, 미얀마에서는 기무라 헤이타로의 만행 때문에 사형이나 무기징역
대한민국에서 친일 재산 환수, 진상규명 같은 문제가 불거지는 과정에서 한나라당 등 보수노무현 정부
또한 뉴라이트의 경우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극단적인 사람들이 식민지 수혜론, 즉 "조선은 일본의 통치로 발전했으므로 일본에 감사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펴서 공분을 사기도 했다. 뉴라이트가 현재 보수 세력에 사상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는 시각이 조금 더 견고해 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무조건 '보수 = 친일반민족행위자' 공식을 들이대며 보수진영을 비난 내지는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부분은 고찰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된 과거 한나라당의 친일청산 반대도 친일 재산 환수에는 찬성했으나 친일파의 기준을 잡는데는 야당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것을 야당에서는 무조건 반대한다는 입장으로 호도하고 보수진영을 친일집단으로 매도한 것이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 직후의 대표적인 (극)우파 인사였다.[35] 사회주의자에 대한 백색테러를 옹호했으며, 이 때문에 일부 진보민족주의
또한, 최능진 선생 역시 분명한 우파, 보수 민족주의자로 해방정국 시기 국립경찰 수사국장(경찰직으로 3번째로 높은지위)으로서 친일 경찰들과 직접 맞짱까지 떳었던 인물이었다. 김구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 6대 공군참모총장인 김신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의 경우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성하였으며 이승만
이승만이나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 정권을 비판할 때 "친일독재"라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 당시 독재정권에 협력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출신/후손들이 상당 부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독재정권 자체가 '친일'이었나에 대한 문제는 다른 문제다. #
제1공화국은 대외 외교에서는 반일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의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선언하고, 쓰시마 섬6.25 전쟁 당시 일본이 대한민국반일[36]
그나마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 김종필의 제2의 이완용독도 밀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박정희가 독도린든 B. 존슨
한일 관계는 1972년 일본이 대만을 버리고 중국을 승인, 수교한 일로 틀어지고 있었고 김대중 납치 사건과 1974년 광복절의 영부인 육영수가 재일교포 문세광에게 피격 사망하는 일로 한일관계동경폭격론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일본과 협력하고 과거사 보상 문제를 덮었다. 한일국교정상화에 국민들이 항의해 일어난 6.3 항쟁을 계엄령을 선포해 진압하였고, 일본 전범 정치인들과 친하게 지내며 기시 노부스케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을 계기로 반일감정이 강화됐으며 아직 남아있는 일본군 위안부
친일인명사전이 막 출간될 당시, '이왕가', 즉 대한제국의친왕처럼 적극적으로 일본 제국에 맞섰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민태자처럼 아예 볼모로 끌려가 소극적이나마 일제 통치에 협력하기도 했고, 혹은 이재면, 이준용
서구권의 과거사 청산은 대체적으로 추축국 협력자들에 대해 공소시효 자체를 두지 않는다.[37]
식민지배 피해국으로서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제와 군사독재 같은 대한민국의 어두운 과거사를 인정하는 문제는 군부독재세력과 친일세력에 겹치는 부분이 많아 직접적인 연결성이 있는 주제이고 부정주의 움직임이 양측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둘 다의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1.추축국의 범죄적인 과거사에 대한 정당화/부정 움직임과 이를 처벌하는 법률
2.추축국에 협력했던 자들에 대한 처벌.
1번의 경우는 서구권의 많은 나라에서 홀로코스트 같은 나치 독일독일의 경우 나치의 과거사를 철저히 청산한 것으로 유명하며 심지어는 헌법으로 집회/결사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위에 나치 독일
나치 독일처럼 극단적인 주장을 가진 집단이 득세하는 일을 막기 위해, 비헌법적인 정강을 갖고 있다 판단되는 정당을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해산을 명령해 까부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의 허점을 파고들어 권력을 잡은 것이 나치 독일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도 꽤나 아이러니한데, 한국의 몇몇 언론은 군부독재 당시 언론의 자유를 탄압하는 권력에 충실히 복무하다가 민주정권이 성립되면서 언론의 자유가 실현되자 이제는 그 언론의 자유를 충실히 활용해서 '아니면 말고' 식 보도로 특정인을 매장한다거나, 편향되거나 잘못된 정치적 주장을 퍼트리는 용도로 악용하며 맛나게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2번의 경우, 대국이자 문명국을 자부하고 독일을 은연중에 야만인, 훈족으로 묘사하며 깔보던 프랑스머리를 박박 깎이고 공개적으로 린치를 당했다.[38] 《밴드 오브 브라더스[39]
이 대독협력자 청산을 프랑스어로는 "에퓌라시옹 레갈(Épuration légale)"이라고 하는데[40][41]
몇몇 과학자 같은 정작 나치 독일페이퍼클립 작전미국의 저명한 사학자 마크 마조워는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그리스와 벨기에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죽은 사람들은 정말로 나치에 협조해서 친독파 짓을 한 사람보단 독일 군인과 사귄 여자, 독일군[42]사적제재이용우 교수의 견해. 프랑스 해방 후 부역자들에 대한 신속한 처벌을 요구하던 알베르 카뮈는 사적제재와 복수심이 들끓는 청산 행태에 대해 비판적인 스탠스로 돌아섰으며[43]앙리 필리프 페탱[44][45]
그나마 나치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던 사람들만 죽은 것도 아니고 좌익 레지스탕스가 우익 레지스탕스를 반동으로 나치 부역자로 죽이거나 우익 레지스탕스가 좌익 레지스탕스를 나치 부역자로 몰아 죽이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이념 대립으로 독립군끼리 서로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 죽인 격. 한국전쟁
일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서구의 나치 청산과 우리의 친일 청산을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하며 대신 제국주의 시대 때 식민지였던 다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 아일랜드베트남과 미얀마는 대략 90년, 60년 이상[46], 대만은 50년 이상[47], 그리고 인도와 인도네시아, 수많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여러 국가들, 유럽의 아일랜드,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몰타, 보스니아, 핀란드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에 의해 민족,언어,종교,문화,역사등 전부 다 무시된체로 식민 종주국들의 편리에 맞게 일방적으로 국경선이 그려졌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시기에 서구 열강들이 남기고 간 식민 유산들을 전부 내재한 상태에서 독립하는 등 급조적으로 독립된 신생 국가들이 많았으며[48][49]
대한민국과 북한 초대 행정부/내각의 구성요원들 및 이들의 항일/부일 행적을 정리한 표[50](출처는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의 <너무나 유치한 북한 초대 내각 친일반민족행위자 득세론>) 이 링크도 참고하면 좋으며 굽시니스트가 예전에 연재했던 만화에서도 참고하면#
북한은 (일단 절대적인 수치만 놓고 보면) 중국&프랑스보다는 조금 더 청산 못 했고 대한민국매일신보
이 수치를 근거로 북한
다만 북한이라고 모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처벌받은 것은 아니며, 심지어 관료, 고위층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등용됐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뿐만 아니라 지금 북한의 수장 김정은의 어머니 고영희는 일제시대 친일로 부를 쌓은 사업가 고경택의 친딸로 북한에서는 알면서도 쉬쉬하는 분위기다. #황철[51]
한편, 이들 친일반민족행위자 세력들이 북한정권에서 '주도권'을 쥐고 그 의도대로 세상을 움직이거나, 문화적·정치적·경제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는가에 대한 부분은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정권 성립 이후 김일성
북한에서 친일경력자들이 두드러지게 많은쪽은 특히 문화, 예술, 연극, 문학계열에서 상당히 많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고자라니 심영을 비롯해 문예봉, 황철, 최승희북한은 마치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정국가인 마냥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워낙 막장이라 친일반민족행위자들까지 같이 쓸려나갔을 뿐.
북한이탈주민 출신인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대한민국은 북한보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이 부진했던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라며, 북한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청산을 비판/폄하하는 것은 보수
친일문제는 어디까지나 어느 정권의 '정통성'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친자들에 대한 문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나무위키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리스트를 포함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에 대해서 지나치게 감정적인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우선 일제시대 조선에서 활동한 조선인 엘리트들 중 일제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자는 드물었고, 특히 일본이 미쳐 돌아갔던 태평양 전쟁윤치호, 김성수, 방응모
물론 이시형 형제들처럼 국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주나 중국, 해외로 떠나 임정 등 여러 독립단체에 참여한 엘리트들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런 행동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모두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모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독립운동가를 악착같이 밀고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엘리트들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임시정부 환국환영회의장에서 임정측의 신익희가 "국내에 남은 자들은 다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주장하자 송진우, 장덕수가 강하게 반발한 것, 윤치호의 "한 노인의 명상록"에서의 이야기는 국내 잔류 독립운동가와 소극적 친일을 해야했던 엘리트층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비판을 받았을 때의 억울함을 엿볼 수 있다.
평가 기준에서 국내 잔류 엘리트층에 대한 지나치게 엄격한 관점은 임정 환국파와 국내 잔류파와의 간극을 만들었고, 건국과정에서의 송진우, 장덕수의 암살과 같은 수많은 테러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식의 엄격한 기준으로 들이댄다면,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에서 소련에 부역하여 같은 독립군이 참살되는 것을 방치한데 엄청난 책임을 져야할 민족반역자고, 홍명희는 근대 한민족 내전
일단 친일 부역자 청산 문제는 오늘날 현재에도 한국 근현대사의 가장 큰 암종에 속한다. 정치 논리 앞에서 구렁이 담타듯이 넘어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례를 들어, 대구 10.1 사건조갑제는 친일 경찰 출신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부정적인 해악을 끼친 자들로 이들은 반드시 단죄를 해야 한다고 규정내렸을 정도. (조작과 고문의 기술자들. 1987년. 한길사 책 참고.) 이들 '집단'으로서의 친일세력들은 대부분 매우 부패하고, 당시 사람들에게 인식이 상당히 안 좋았다.[52]
일단 대한민국의 초기 내각은 독립운동가 출신이 많았지만 하부 조직에 일본에 복무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잔류했고 60~70%에 달하는 공무원들과 법관들이 이미 일제 치하에 복무했던 사람들이란 통계가 60년대 언론에 의해 제시된 바가 있다. 과거 친일 경력이 있는 자들의 건국의 주역, 이어 6.25의 영웅들이 되었으니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라는 문제로 흘러가버리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과거 부역자들을 국가 재건의 대의를 앞세워서 면죄부를 준 것은 서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서유럽이 국민적인 동의를 얻어 진행한 것과 달리 대한민국에선 이승만의 반민특위 습격을 비롯한 편법적인 방법과 친일청산에 적극 앞장섰던 무소속 구락부의 제헌국회의원들을 때려잡았던 국회프락치 사건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들이 6.25전쟁에서 활약하면서 과거에 대한 속죄를 확실히 했다면 모를까, 이들은 그대로 군부 쿠데타의 주역이 되어 친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공산당의 "대한민국 정체성 흔들기"등의 반체제, 반정부적인 행동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친일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한 논란에 대해 지속성, 반복성, 적극성 등을 고려해 '진상규명'하는 식으로 과거사 청산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또한 무리를 무릅쓰고 지금 하자니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들이 생존해 있기 때문에 '진상규명' 방식으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에 충실히 부역한 몇몇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생활 양식이나 습관까지도 철처히 일본화가 된 케이스가 있어서, 기모노를 일상적으로 입는다거나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로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잠꼬대까지 할 정도[54] [55]
반민족행위자는 반민족주의침략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히려 반민족주의자들 중에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