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17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1-3ㄱ.5-16)
"Do you want to be
well?"
"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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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초대
바빌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에제키엘은 이미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고한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치게 한다. 다시 세워진 성전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현존하시며 예루살렘이 살아나게 하시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못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앓아 온 병자에게 건강을 되찾게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으로서 죽어 가는 병자를 살리시지만, 그날이
안식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가장 불운한 시기에
활동하던 에제키엘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이미 바빌론에 유배되어 있었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운명에 대한 환시를 봅니다. 그가
주님께서 성전을 떠나가시는 환시를 본 뒤(에제 10장 참조), 성전이 파괴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겪은 다음 그는 주님께서 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환시를 봅니다(에제 43장 참조). 주님께서 성전에
돌아오시면 예루살렘에는 생명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그 물이 가는 곳마다 나무가 자라고
물고기가 우글거리며 모든 것이 살아납니다. 주님께서 계신 집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그 회복된 예루살렘을 “야훼
삼마”(에제 48,35), 곧 ‘주님께서 여기 계시다.’고 부릅니다. 주님의 현존이 예루살렘에 생명을 줍니다. 에제키엘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오고 성전을 재건할 때부터 실현되기 시작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으로써 다른 차원에서 성취됩니다. 벳자타 못
가에 누워 있던 병자는 물이 출렁거릴 때에 자신이 물에 들어가도록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물의 힘으로 건강을 되찾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낫게
한 것은 벳자타 못의 물이 아니라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요한 5,11)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아니라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에게서 생명이 흘러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하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요한 5,21 참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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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제에 이
정도면 엄청 잘했죠?’
종종 묵상하다가
주님께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예전에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꽤 능숙하게 되고, 다른 이들로부터 칭찬의 말도 듣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주님의 도우심이 가장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주님한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제 주제에 이 정도면 엄청
잘했죠?’라는 말씀을 드리게 되네요.
사실 예전에는 이런
말을 감히 어떻게 드릴까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눠가면서 또 점점 가까워지면서 이런 대화가 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주님이 멀다고
생각될 때는 대화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뜻을 따를 때 멀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시며, 늘 우리 편에서 ‘괜찮다’라고 응원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우리는 용기 내어 주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갑곶성지에
있을 때 출판했던 저의 세 번째 책 제목이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입니다. 혼자 갑곶성지에서 살면서 있었던 이야기들 중심으로 쓴
책이지요. 솔직히 이 책 제목이 지금까지 출판한 7권의 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듭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서 그럴까요? 그래서
이 책 제목만으로도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고 좌절에 빠지는 우리이기도 합니다.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다시 한 번 해보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이런 사랑을 다시금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반응으로 나중에 십자가 죽음까지 이어질 수도 있었음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해주십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아무런 치유도 받지 못하고 고생하는 그 사람을 가만히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에
큰 용기를 얻게 됩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큰 사랑, 그래서 세상의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한 배려와 사랑을 먼저 실천하시는 분임에
큰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한 번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어렵고
힘드십니까? 용기를 가지고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용서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떠올리면서 말이지요.
스스로 알을 깨면
한 마리의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 주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
재능의 비밀
재능을 발견하는
것은 ‘감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감각이 나의 재능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현시키는 것은 ‘열정’이라고 하네요. 물론 여기에 운이
작용한다면 좀 더 쉽게 실현시킬 수는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이며, 이를 뒷받침할 성실이 또한 함께 해야 합니다.
재능을 실컷
발휘하며 원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구도자처럼 일정한 삶의 규칙대로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러므로 재능의 첫
번째 비밀은 절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재능을 한꺼번에 탕진하지 않고,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겸손해하고 감사하면서 매일매일 벽돌을
차곡차곡 쌓듯이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받은 재능을 소중히 다룰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재능의 두 번째
비밀은 매일 매일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조차도, 심지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꿈속에서도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타오르는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재능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에 대한 무구한 ‘집중’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잠깐의
불꽃놀이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났다가 사라지는 ‘재주’아니라, 살아있는 한 끝까지 자신의 삶을 불태울 수 있는 솜씨야 말로 우리의 삶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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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시대보다
나은 것 없어요.
-이기정신부-
본질이 우선이고
형식은 나중인데 순서가 바뀌면 본질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말은 삶에서 중요한 대전제인데 요새는 이런 바뀜이 너무 심합니다. 돈은 사람이 사는
데 편하자고 정한 건데 돈에 매인 사람이 많습니다.
돈 때문에 사랑도
인척관계도 친구 사이도 금가는 일이 허다하지 않나요? 사람보다 재물 권력 지식 재능 점수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질식시키네요.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걸 보면 예수님 시대보다 나은 것 없어요.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요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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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쩡하면
쓸모없다 >
-전삼용신부-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한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나는 두
개의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보다는 덜했지만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내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나와 꼭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사랑으로
나는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도로 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보조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빠?......”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 팔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습니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4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울지
마.
아빠는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오늘은 그 어린
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 봐서......”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는 나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나는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습니다.
그때 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나였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 속으로 더 많이 흘러내렸습니다.
[출처:
작성자
비익연리,
위로(격려)에 관한 예화
모음]
왜 과부의 헌금이
몇 푼 안 되는데 부자들의 큰 헌금보다 갚진 것일까요?
왜 하느님은
아브라함보고 유일한 아들 이사악을 재물로 바치기를 원하셨을까요?
또 왜 하느님은
욥의 모든 자녀들과 재산과 그의 건강까지도 앗아가셨을까요?
이태석 신부님은 또
왜 그렇게 빨리 허물어져버렸던 것일까요?
하느님은 과연 굶고
상처입고 병든 가난한 모습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스스로
당신 아드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은
십자가위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달려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해주시기 위해 그렇게 무너지셨습니다.
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곧 오늘
독서에서 등장하는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와 모든 땅과 바다에 생명을 주는 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오른편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우리가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
그분이 그렇게 허물어지지 않으셨다면 절망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수가 없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너지지
않으면 누구도 우리의 위로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허물어지기 전까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지 맙시다.
그것은 단지
자기만족일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뷸라라는 한
성실한 간호사는 급성 관절염으로 오른쪽 손가락 외에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그
손가락으로 전화를 걸어 슬픔에 빠져있는 이들을 위로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살직전에 있다고 그녀의 전화를 힘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무너져있기에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전화’의
시작입니다.
내가 다른 이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면 세상 누구도 나에게서 위로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성전은 뚫려야만 그
통로를 통하여 주님께서 세상에 생명의 물을 나누어주실 수 있으십니다.
멀쩡한 성전은
쓸모없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야만 생명의 샘이 터져 나와 세상을 살리는 주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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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유배(流配)
-이수철신부-
내
안식년은 광야순례여정의 기간이었습니다.
자주
나는 웃음지으며 이를 하느님 친히 특별히 마련해 주신
회개와
보속의 '사랑의 유배(流配)기간(?)'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의 각별한 사랑의 안배에 감격(感激)하고 감사(感謝)합니다.
하여
어제만 해도 짧은 자작시 2편을 지었습니다.
-1.
주님,
당신만 바라 봐도
하늘과
산/주님, 당신만
바라
봐도 살것 같다
족하다/행복하다
더
바랄 것 없다
내려
놓으니/비워 버리니
이렇게
편하고 자유로울 수가!
제자리에/돌아오니
세상이
안정되었다-
-2.
지금
여기
떠났다/지났다
삶은/흐르는
강이다
지금/여기를
살자
내
집무실 책상 좌우 편의 배치가 의미심장합니다.
오른쪽
벽 게시판에는 내 사랑하는 도반인 빠코미오 원장수사가 내 귀원을 환대하며 만들어준
'안식년
순례여정-이수철프라치스코수사 무사귀원-'이란 게시물이 붙어있고,
게시판
왼쪽 면은 산티아고 순례를 상기시키는 여러 자료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더
특별한 것은 책상 오른쪽의 배치입니다.
상단
중앙에는 '돌아온 탕자를 얼싸안고 있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렘브란트 그림이,
그
하단 왼편에는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성모님'이,
그
하단 오른편에는 '산티아고 순례'때의 배낭과 그 위에 미사가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으로
상징성이 깊은 배치로 얼마전의 기발한 착상입니다.
늘
기억하고 싶은 나의 갈망에 주님은 이런 배치의 영감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배낭과
미사가방에 대한 내 애착이 참으로 큽니다.
늘
순례여정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요,
하느님
주신 평생 지고 가야 할 내 운명의 '선물'이자 '짐'인 십자가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등에 업고 가듯이 산티아고 순례 때에 꼭 내 십자가를 상징하는 배낭에 미사가방을 넣고,
신들린
듯이 걸으며 매일미사를 봉헌하며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늘
끊임없이 되뇌었던 기도문은 다음 시편 구절입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사실
산티아고 대성전에 가까울수록 설레는 마음에 뛰듯이 걸었습니다.
어제
오늘 복음 묵상 중 이 모든 것의 의미가 다음 한 구절로 다 풀렸습니다.
"Rise,
take up your mat, and walk,“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읽었기에 실마리가 풀렸습니다.
즉시
연상된 것이 루카 복음(6,23)의 말씀이었습니다.
"If
anyone wishes to come after me,
he
must deny himself and take up his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38년동안 벳자타 못가 옆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하신 주님 말씀과 일치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deny)' 대신 '일어나(rise)'란 말로,
'네
들것을 들고(take up your mat)' 대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take up his cross daily)'란
말마디로,
'걸어가거라(walk)'
대신 '나를 따라라(follow me)'란 말마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과거의
온갖 부정적 아픈 추억들을 말끔히 버리고,
불운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deny),
벌떡
일어나(rise)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걸어가라(walk)'란
말은 '나를 따라라(follow me)'란 말씀으로 구체화됩니다.
막연히
살아가는게 아니라
십자가를
상징했던 '들것(mat)'을 버리지 말고, 잊지 말고 늘 보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달고 있는 노란리본처럼 말입니다.
하여
얼마동안이 될지는 몰라도 나는 오늘 복음의 병자의 '들것(mat)'대신
산티아고
순례 때의 '배낭(knapsack)'을 늘 놓고 보려고 집무실 한편에 놓아 두었습니다.
아,
오늘 복음 말씀은 38년 누워있던 병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진짜
벳자타 못은 '생명의 샘'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에제키엘이
환시 중에 보았던 '생명수의 강'의 시원(始原)인 '주님의 집'은 바로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서의 후반부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참으로 놀랍고 풍요롭습니다.
우리
영혼의 식(食)과 약(藥)이 되는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다시 새롭게 살아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전시켜 주시며 사랑 가득 담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나를 따라라(Rise,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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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무덤
없다
-반영억신부-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거리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 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대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 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건강해 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 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거리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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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철학 시간에
‘Prima
Causa'라는 말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제1원인‘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면 그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우리가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잘 모를 뿐이라고 합니다.
제 방에는 제가
오기 전부터 있던 것들이 있습니다.
고상,
시계,
책장,
옷장,
책상,
거울,
소파와 같은 것들은
제가 오기 전부터 제방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
방에 오게 된 이유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지난
40년 한국의 경제
발전은 대통령과 재벌의 지도력과 경영 능력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어려운 여건에서
고통을 감수하며 피와 땀을 흘린 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탄생의 순간을 ‘빅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느 한 순간에
커다란 폭발이 있었고,
그때부터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이 광대한 우주의
탄생치고는 초라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탄생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만남일 수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배우자의 사랑의 결실인 것처럼 우주의 빅뱅 또한 누군가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그것을
제1원인이라고
말하고,
신학은 그 대상을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같은 물을 마셔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됩니다.’
꼭 물만이
아닙니다.
같은
공기,
같은 음식을 먹어도
먹는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기도 하고,
세상에 추한 모습을
남기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에게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기,
분노,
질투,
욕정,
탐욕,
미움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예언자는 생명을
살리는 물,
생기와 활력을 주는
물을 보았습니다.
물은
필요하고,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순히 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삶이 생명을 살리는 말과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용이 곧
방법이고,
방법이 또한
내용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삶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우리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창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곧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시켜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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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치유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벳자타라고 하는 이
연못은 가끔 물이 출렁일
때가 있는데 그때 가장 빨리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치유를 받는다는
전설이 있어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이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요행수만 바라지 말고 들것을 들고 일어나
보라고 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기고 38년을 그냥 물만
쳐다 본 이 사람에게
"아니다. 너는 할
수 있다. 해 봐라!" 하신거죠.
여러분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십니까? 그래서
무기력하고 요행수만
바라고 기적만
바라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벌떡 일어나 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일어나
걸어 가보라!" 하십니다. 그냥 "예"
하고 일어나
보십시오.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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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중독과 건강
가난
-김찬선신부-
건강해지고
싶으냐?”
제
생각에 요즘 많은 사람이 건강 중독증에 걸린 것 같고,
건강
스트레스 때문에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건강
중독과 건강 스트레스 때문에 오히려 건강을 잃는 것이지요.
상당한
아이러니입니다.
건강
중독이나 스트레스란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술
중독이 술이 뇌리에서 늘 떠나지 않는 것처럼
건강에
대해서 생각지 않는 날이 없고 늘 건강! 건강! 하며 삽니다.
술
중독이 술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술에
의존하는 것처럼 건강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고
건강하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건강 중독이나 스트레스가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을 해칩니다.
지금
당뇨 수치가 100일 때 건강 스트레스가 있으면 200이 됩니다.
간염
수치가 100일 때 그것을 스트레스 없이 받아들이면
100
그대로일 텐데 스트레스가 있으면 그 스트레스만큼 수치가 올라갑니다.
아니
건강 스트레스가 있으면 없는 병도 생기거나 새로운 병을 만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스트레스라는
마음의 병이 육체를 망가뜨릴 뿐 아니라
정신도
망가뜨리고 영혼도 망가뜨립니다.
육신이
망가지고 아픈 것은 그저 고통일 뿐인데
정신과
영혼이 망가지고 아프게 되면 불행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히 수도자들은 <건강 가난>을 살아야 합니다.
건강
가난이란 무슨 뜻입니까?
처음
들어보는 말이지요?
쉽게
말하면 건강에 있어서 가난하자는 것이지요.
더
건강해지려고 욕심 부리지 말자는 것이며
건강하지
않은 것을 그러려니 하자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그랬고 글라라는 일생 병을 달고 살았는데
두
분 다 다른 사람이 아프면 마치 자기가 아플 때
누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잘 보살펴주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아플 때는 병에서 낫기를 지나치게 안달하지 말라고 하였지요.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가 있듯이
건강에
가난함으로써 오히려 정신과 영혼이 건강해지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건강하냐고 물으실 때
우리는
“예, 건강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지만
그것은
육신의 건강 못지않게 아니 육신의 건강보다도
더
정신과 영혼의 병이 없는 그런 건강 주십사고 청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의 병자처럼 38년이나 고질병을 앓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과 영혼의 고질병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물줄기를 차단한 데서 오는 병입니다.
생명의
물줄기가 차단되면 건강을 잃게 되고 마침내 죽게 되는데
우리는
생명의 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오염된 물을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살게 하는 물을
주님께
청했듯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생명의 물을 청하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사순시기에 이루어야 할 회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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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씨름판 한가운데서
-기경호신부-
영원하신 창조주의
사랑의 작품인 인간은 늘 영원을 갈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시공의 한계 속에 던져진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늘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거룩한 안타까움과 긴장’을 피할 수 없다. 오늘의 성경말씀들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며 직면하는 선과 악의 씨름판을 보여주며, 나에게
영원을 향한 결단을 촉구하고 행복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벳자타 연못가에서 무려 서른여덟 해나 앓아온 사람을 고쳐주신다. 예수님 편에서 먼저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겪어왔다는 것을 헤아리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5,6) 하고 물으신다. 이 물음은 단지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희망을 바라느냐, 변화되기를
바라느냐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특이한 점은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이 병자 자신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
하고 치유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병자에게는 친구가 없고 일시적으로라도 못에 자신을 넣어줄 사람조차도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인간
편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하느님 부재’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선을 드러내신다. 동시에 이 사건은 하느님의 본성인 선(善)과 사랑을 외면한 채
그럴싸한 자기들만의 논리를 펴는 것이 얼마나 악하며 허무한지를 폭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나의 매순간의 삶도 선과
악이 씨름하는 곳이리라!
예수님께서는 그날이
안식일임을 너무나 잘 아시면서도 율법에서 금한 치유행위를 하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먼저 치유를 받은 이에게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시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5,10) 하며 시비를 건다. 이 불평은 미쉬나 율법에 의해 정당화 된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일의 종류는 어떤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외에 40가지가 있다(Shabbath 7,2). 나아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5,16). 유다인들은 왜 예수님을 적대시하였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곧,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5,18)
예수님께서는
율법논쟁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활동을 하느님과 동일한 차원에 둠으로써 그의 행동을 변호한다. 곧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삶을
묶어버리는 율법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창조의 호흡이라 할 수 있는 안식일의 정신을 극도로 심한 병의 치유를 통해 보여주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이 하는 일을 하셨다. 반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분의 놀라운 치유행위를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신성모독으로 보는 자기 함정에 빠져버렸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치유받은 이를 만나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5,14)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이라는 말씀을 통해 죄가 그 어떤 육체적 질병보다도 더 나쁘다는 점을 알려주신다. 이 죄는 윤리적인 잘못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 일체의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은 분명 이 사람이 그 자신의 힘이나 장점들로
인해 선택받은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 여기서 이 말씀을 통해 신체적인 질병의 치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이 이미 다
처리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묻고 있다. “너는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나는 선과 악의 씨름판 한가운데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되기를 바라는가?
선(善) 자체이신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망하며 그 희망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아니면 육(肉)의 영(靈)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과
선과는 무관한 외형적인 규정과 제도에 얽매여 살아가지는 않는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인간은 바라는 바대로 변화되고 성숙된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5,8) 하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일하도록, 스스로 찾도록 도우시는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우리의 영성생활은
게으름이나 무력함 속에 절망하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하느님의 은총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은 채 내맡기는 생활도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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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신부-
"건강해지고
싶으냐?"
산을 오르며 봄기운을 가득 느꼈습니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건강한 삶이란 무엇보다도 생명의
주님을 원하는 삶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 도달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건강치
못한 우리의 삶까지도 사랑으로 가득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병들게 하는
건 주님을 만나야 할 우리자신이 언제나 뒷전으로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숨쉬는 이순간이 건강한 행복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서 우리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다시 보게
됩니다.
우리의 건강하지 않는 삶이 가닿아야 할 곳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사순시기는 이제 우리의 들것을 들고 주님께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더이상 죄에
머무르며 죄를 만나야 할 시간이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야 할 기쁨의 시간들입니다.
건강한 삶은 온통 생명의
주님으로 더 좋은 일을 보게 될 뿐입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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