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④] 태조 이성계, 사리(舍利) 수집에 몰두하다
조선왕조 창업 직전, 아내 강씨와 함께 심취… 태종 대에 들어 명에 보내지는 등 모두 사라져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는 사리신앙에 심취해 있었다.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이성계를 그의 5남인 태종 이방원(유동근 분, 왼쪽)과 2남인 정종 이방과(태민영 분)가 보살피는 장면.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는 사리신앙에 심취해 있었다.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이성계를 그의 5남인 태종 이방원(유동근 분, 왼쪽)과 2남인 정종 이방과(태민영 분)가 보살피는 장면.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고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왕조가 개창됐다. 태조 3년(1394) 10월에는 한양 천도가 단행돼 한양 조선이 개시됐다. 천도 당시 한양의 종묘, 사직, 궁궐 등은 터만 결정된 상태라 태조는 임시 거처에서 생활했다.
궁궐과 종묘 공사는 태조 4년(1395) 9월에 마무리 됐고, 한 달 후에는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이 설치됐다. 당시 종묘 이안은 개경에 있던 종묘 신주를 한양 종묘로 옮겨 모시는 역사적인 행사였다.
10월 5일 태조는 면류관 차림으로 종묘제사를 거행했다. 유교의례에 맞춰 거창하고 웅장하게 치러진 이 행사는 신왕조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의식이었다. 새로 건설된 궁궐 역시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10월 27일 정도전은 궁궐 이름을 경복궁으로 지어 올리고, 그 외 각 건물과 문의 이름도 지어 올렸다. 정도전은 연침을 강녕전, 동소침을 연생전, 서소침을 경성전, 보평청을 사정전, 정전을 근정전, 정전의 문을 근정문 등으로 지었는데 이런 이름들은 모두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상징했다. 이처럼 종묘제사, 궁궐명명 등이 모두 유교식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태조가 신왕조 조선을 유교 국가로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막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신왕조 조선이 과연 유교국가인지, 또 태조는 과연 유교국가 왕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태조의 사리 수집과 사리탑 건축이었다.
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시점은 4년(1395) 12월 28일이었는데, 당시 한양은 도성 축조로 분주했다. 태조는 ‘씨 뿌릴 때가 되면 모두 돌려보내 농사짓게 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적어도 다음해 3월 이전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과연 태조는 다음해 2월 28일 일꾼을 모두 돌려보냄으로써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한양건설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한양건설이 일단락되기 직전에 태조는 기이한 명령을 내렸다. 개성 송림사에 보관돼 있던 불두골(佛頭骨)·불아(佛牙)·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菩提樹葉經) 등을 궁궐로 가져오라 명령했던 것이다. 왜 이 명령이 기이한가?
태조가 가져오게 한 불두골·불아·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 등은 본래 통도사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자 안전 보관을 위해 개성 송림사로 옮겨왔다. 이 불두골·불아·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 등은 불교 보물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졌는데, 태조는 바로 그것들을 수집하려 했던 것이다. 유교국가를 표방하는 창업군주가 다른 것도 아닌 불교 보물을 공개 수집하려 한 것은 아무래도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분신이자 영물로 알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