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 교회에서 점심을 먹고, 저희 교회(월곡교회) 한 집사님과 이것저것에 관해 잡담을 나누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보니, 이 집사님도 ‘저패니메이션’(‘Japan’과 ‘Animation’의 합성어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일컫는 독특한 일반명사가 되었습니다)의 애정이 가득한 팬(Pan)이시더군요. ‘은하철도999’, ‘마녀배달부 키키’, ‘이웃 집 토토로’, ‘공각기동대’ 등등.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저패니메이션의 명작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라고 해봐야 ‘그거 봤습니까?’ ‘예 물론이죠. 무지 감동적으로 봤습니다.’ 정도의 이야기였지만, 한 동안 가슴과 머릿속에서 잊혀졌던 옛 친구를 다시 생각해 낸 짧지 않은 이야기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와 기청서울북연합회가 함께 진행하는 “‘더 하나’ 프로그램에서 볼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없을까”를 고민하고 있던 윤 국장님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선뜻 추천하지 못했었지만 집에 오는 길에 “뭐가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저패니메이션이 있더군요. 바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였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우시카를 봤을 때의 설레임과 감동이 되살아나 가슴 떨림과 웃음이 지어집니다. 전 나우시카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선합니다. “아~ 애니메이션이 저런 것을 담아 낼 수 있구나!(생태문제)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야를 저렇게도 그려낼 수 있구나!(여성 메시야론) 서양이라는 그릇에 동양을 담아낼 수 있구나!(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사실 마지막의 제가 느꼈던 동도서기론은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인 도(道)는 지키되, 근대 서구의 기술인 기(器)는 받아들이자는 이론”입니다. 지금은 이 “동도서기론 자체가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가슴에 와 닿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도서기론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조선 말 서구문물이 급격히 유입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김윤식(金允植),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등의 온건파 세력은 “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수용하되 제도나 사상은 우리의 것이 우수하니 이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주창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중체서용’이란 중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고 서구의 물질을 이용하자는 것이고, ‘화혼양재’란 일본 고유의 정신을 가지고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기술을 활용하자는 주장입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네요. 하여간 집에 돌아와 나우시카에 대해 이것저것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월요일 부산에서 노회 참석 차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도 부산 집에서도 이래저래 짱구를 굴려보았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이렇게 요즘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글을 몇 편 써볼까 합니다(생각은 몇 편이지만, 아마 쓰다보면 한두 편에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는 게 다 그렇죠 뭐...ㅋㅋㅋ).
스포일러!!!
거대문명이 ‘불의 7일’이라는 전쟁으로 붕괴하고 천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지구는 황폐해진 대지와 썩은 바다로 뒤덮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부해’라고 불리는 독기를 내뿜는 균류의 숲이 확장되면서 인류는 제2의 종말이라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바람계곡은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부해의 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던 작은 왕국입니다.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공주인 나우시카를 중심으로 자연과 평화로운 공동체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사대국인 토르메키아의 비행선이 바람계곡에 추락하고, 그 안에서 ‘불의 7일’의 전쟁에서 지구를 불태워버린 거신병(巨神兵)의 알이 발견됩니다.
토르메키아는 거신병을 부활시켜 부해를 태워버리고 지구상에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려고 도시국가인 페지테로부터 그 알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알을 되찾기 위해 토르메키아 군대가 바람계곡을 습격하고, 나우시카를 인질로 잡아 돌아가다가 페지테의 공격을 받아 그들이 탄 비행함대가 부해로 추락하게 됩니다.
부해의 밑바닥에 내려간 나우시카는 부해가 오염된 지구를 정화시켜 물과 토양을 깨끗하게 만들고 있으며, 오무는 그런 부해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페지테는 토르메키아에 복수하기 위하여 오무를 유인하고,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기세로 바람계곡으로 향하는 오무의 무리 앞에 나우시카는 자신을 희생하여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오무는 신비한 능력으로 죽은 나우시카를 회생시키고, 바람계곡은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에코소피아를 향한 긴 여정
“그 사람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설지니.
그 때 잃어버린 대지와 끈을 다시 맺고서
저 푸른 청정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리라.”
마치 저 고대 희랍의 서사시인 ‘호머’를 연상시키듯, 눈 먼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 예언이야말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기본 동력입니다. 바람계곡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기다립니다. 세라믹의 유적으로 황폐화된 대지에 나타난 바다, 즉 유독의 장기를 내뿜는 균류의 숲이 있는 ‘부해’의 침식으로부터, 그리고 부해에서 살아가는 무시무시한 곤충 떼의 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주고 마침내 저 푸르른 생명의 세계로 인도해줄 위대한 지도자를, 그래서 부해 최고의 검사 유파 선생도 그를 찾아 세상을 끊임없이 떠돌아다닙니다. 마치 그 예언의 지도자가 먼, 그 어느 곳에 있다는 듯이.
하지만, 모든 예언들이 그런 것처럼, ‘그’는 바로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나우시카가 바로 ‘예언 속의 그 사람’이었습니다. 인자하고 온후한 중년 남성의 얼굴로 그려져 있는 벽화의 인물이 나이 어린 처녀 아이로 치환되고, 게다가 그 위대한 지도자가 서 있는 황금 벌판이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오무 떼의 촉수라는 것에서 관객들은 전복적 상상력의 쾌감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대지의 분노가 가라앉고,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오무가 동정과 우정으로 마침내 마음을 열고, 부해가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순간, 이것이 바람계곡의 사람들이 천 년 전부터 기다려왔던 ‘에코소피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에코소피아를 향한 장엄한 서사시라 이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7.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6F4%26fldid%3D2zPs%26dataid%3D887%26fileid%3D1%26regdt%3D20061115130914%26disk%3D34%26grpcode%3Dproky%26dncnt%3DN%26.jpg)
첫댓글 저패니메이션 중에서 영화관에서 본 유일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그때 감동이 느껴집니다. 또한 이렇게 설명을 더해주니 더욱 좋네요 ^^ 앞으로 글을 기대합니다. 아자 !!
영화 내용 삭제. 이게 뭡니까? 영화 보자면서. ㅋㅋ 모노노케 히메도 괜찮죠. ^^;;
그리고 어쨌건 어중간한 온건파와 동도서기론, 지금의 디지로그를 칭하는 일종의 변종들은 한 쪽의 급진파에 의해 없어진다는 거~ 현재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좋은 점만 합치려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별로 쓸데없어 보인다는 거~
이어령 선생님의 책은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만 가지고 아직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 할 말이 없네... 쩝... 하여간 우리 이야기를 우리 스타일로 이야기 할 수 있겠지... 그렇게 되려면 우리 그릇을 잘 알아야하겠지...^^:
마녀 배달부 키키, 천공의 성 라퓨타,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움직이는 성, 토토로... ㅎㅎ 컴터에 싹 다 내려놓고는 두고두고 봤다는...ㅎㅎ
참고로 내 생각엔 그 책 별로임. 그 책 읽고 리폿 쓰는 게 있어서 읽어봤는데 그다지 별로... 역시 돈주고 안 사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