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294) 본래 아무 일이 없다
"편안히 쉬십시오"
[앎]은 치성한 분별심에서 마음이 늘 고요히 관조되는 평등지로 넘어가는 중요한 관문이다. /셔터스톡
생각은 쉬지 않고 마음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계속 떠들고, 감정은 쉬지 않고 마음속에서 자기를 좀 더 잘 돌봐달라고 칭얼대며, 감각느낌은 쉬지 않고 더 맛있거나 좋은걸 느끼자며 자꾸 벨을 눌러댑니다.
이것이 중생이 가진 쉬지 못한 채 오온에 종이 되어 시달리는 마음이지요. 이걸 분별지(1~6식)안에 꼭꼭 갇힌 중생심(7~8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은 대항해 싸우거나 무조건 억누르는 게 아닙니다.
또는 정화를 한답시며 평생 도 닦는다(명상한다)고 앉아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비결은 오온의 바탕인 의식(의식 없이는 1~8식은 작동불가하다)자리에서 볼 때 오온이 만들어내는 온갖 소동들과는 약간의 정신적 거리가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약간의 거리를 두면 모든 것의 질료가 되는 이 바탕의 의식이 바로 진짜 나 자신임을 자각하게 되는데 이것을 순수의식 또는 생명에 깨어나는 일대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본성자리를 잠깐 본 것이라 해서 십우도에선 견우(見牛)라고도 합니다.
생명과 의식은 하나(9식)이므로 이 자리에서 나머지 분별들(1~8식 활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알아차리는 걸 [앎]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림 수행을 오래하면 마침내 이[앎]만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앎]은 의식의 기능일 뿐 [앎]이 곧 순수의식(생명)의 전부인 것은 아님에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스터공부가 필요한 거지요.
[앎]은 치성한 분별심에서 마음이 늘 고요히 관조되는 평등지로 넘어가는 중요한 관문입니다. 왜냐면 자기 분별을 스스로 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자동적으로 오온의 분별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분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온 수많은 세월을 한번 돌이켜보세요. 그동안 그 얼마나 많은 분별들(생각, 감정, 감각느낌)이 난리법석을 쳤었지만 지금 와서 그중에 스스로 남아있는 것이 있습니까? 내가 분별심속에서 뭔가에 먹이(관심)를 주면서 부채질한 것들만이 지금까지 남아서 날 여전히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닙니까?
우리는 이렇게 과거-현재-미래를 넘어서는 초3차원적 능력을 가지고 자길 자꾸 괴롭히는 데나 쓰고 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을 정견해 [앎]의 자리에 더 집중할 때 문득 깨닫게 되는 건 본래 나란 존재의 바탕(생명의식)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건만 에고분별심이 자꾸 앞장서니 문제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아무일도 없었으니 현재에서 미래로도 아무 일이 없습니다. 사실 본래 신(부처)인 O자리에 무슨 별일이 있을 수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린 자꾸 제 생각으로 이건 이래서 걱정, 저건 저래서 걱정이라고 자기 생각을 붙들고는 씨름하며 쉬질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저 바보나 목석처럼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생각을 많이 해도 그것이 매 순간 쓰고 버려지는 환영 같은 의식의 기능에 불과함을 철저히 보고 안다면 늘 쉬는 평안함뿐 어떤 생각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의 근본취지입니다.
그러므로 본래를 알았다면 편안히 쉬십시오. 왜냐면 오늘의 걱정근심도 내일이면 사라질 허망한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최선을 다해 해결하되 불필요한 걱정근심에 흔들리지 마세요. 삶에는 이런 저런 기복이 있는 게 당연하나 그 역시 생각 속에 일들일 뿐입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