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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짐작도 못한 채 그녀는 몇 초 간
멍하니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용기를 되찾아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어 차를 비춰보았다. 밀러는 그녀가
남기고 간 모습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나는 바보였어.’
그녀는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있지도 않은 허깨비를 허공에다
그리고는 그런 것 때문에 죽도록 떨었으니.’ 물론 이 남자는
죽었어. 머리를 써서 정확하게 계획을 세웠으니 실패할 리가
없지 않겠어 ? ’ 가스로 가득 찬 차고에 그 이상 발을 디디기
전에 그녀는 가슴에 신선한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잠시 뒤
그녀는 차 속에 있는 밀러 곁에 탔다. 밀러의 팔은 축 늘어진 채
겨드랑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 손목에 가볍게 손가락을
대보았다. 맥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대단원의 장이야.’ 그녀는 의기양양했다. 악으로 몇
분만 있으면 일련의 연극에 막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하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면 이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부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적어질 텐데. 우아한 동작으로
차에서 내려 그녀는 넙죽 엎드려서 출입구로 향했다. 기름이
흘러 있는 바닥에 코트를 끌고 가야만 하는 것이 조금
유감이었다. 하지만 밍크 코트 같은 거야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그녀는 고쳐서 생각했다. 게다가 지금부터 닥쳐올 일을
조금이라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에 찰리를 죽일 정도의
일산화탄소가 있다고 하면 나 역시 서서 걸어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당장이라도 맥없이 쓰러질 것만 같은 상태라 간신히
출입구까지 기어나간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야만 했다. 연극을
위해서는 약간의 희생은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문에 도착해서 그녀는 눈속에 난 깊은 발자국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까 문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발이
만든 흔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세세한 점에까지 생각이 미친
걸 만족해 했다. ‘역시 나는 빈틈이 없어.’ 하고 그녀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았어. 아무도
이런 발자국은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이것은 역시 내가
지워버리지.’ 축축한 눈을 한줌 집어서 그녀는 그 발자국에
부렸다. 이어서 그녀는 그 근처의 땅을 마구 휘저어 누군가가
거기에 서 있었다는 흔적이 남지 않도록 했다. ‘이제 됐어.’
하고 그녀는 자신을 북돋았다. 이 위를 몸을 질질 끌고 가면,
호흡을 되찾을 동안 내가 여기에서 뒨굴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되겠지.
그녀는 그곳에서 약간 비탈져 있는 샛길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손에 돌이 잡히고 무릎이 까지며, 스타킹은 몇 줄이나
올이 찢어졌다. 손발이 시렵고, 차가운 밤바람에 숨을 쉴 때마다
코가 아팠다. 처음에 느꼈던 흥분이 가라앉자 고통이 고개를
들고 올라와서 통증이 더해 왔다. 걸어가면 그렇게 가까운
샛길이 마치 무한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이 눈이 차의 히터를
사용하는 데 변명의 여지가 없는 구실로서 아까는 그렇게
고마웠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녀의 머리와 정갱이와 발에도
얼어붙일 것만 같은 위력으로 흥건하게 흐르는 것이었다.
‘독감이라도 걸려 죽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것 때문에 간염이라도 걸려 죽어버린다면
얄。은 애기가 되겠는데.’ 납처럼 무거워진 팔다리로 땅을
기어가고 있는 동안에 움직일 때마다 새로운 고통이 더해 오고,
간염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점점 남의 일이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이제 일이 눈악에 닥쳐왔기
때문이야.’ 그녀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 이런 짓을 했다고 해서 누구 하나 기뻐해 주지
않을 텐데.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도 모두가 속을 것이다. 지금
로드스가 죽은 이상 아무도 의심할 사람은 없어. 하지만 이
행동을 계속해야 해. 이것은 계획 속에 있는 중요한 부분인
거야. 만일 다른 사람에게서 조사받게 되면 상대편에서 무엇을
찾아낼지 모른다. 하지만 조사해 봐도, 모두 미리 예상한 대로
딱 들어맞는다면 아무런 의문이나 의혹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때문에 만사 조리가 닿게 보이고, 내 입장을 완전하게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 것도 헛된 일은 아니지. 내
모습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만큼 내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을 염려도 적어지니까.’
지금 그녀는 샛길의 길모퉁이까지 가서 천천히 바닥을 기며
돌아갔다. 3층 창에 그림자가 되어 비친 토미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기운이 났다. ‘친절한 토미 아주머니.’ 그녀는 애정을
담아 중얼거렸다. ‘저 사람은 항상 의지할 수 있어. 창도
정확하게 열려 있네. 토미도 감기에 걸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쯤에서 도움을 청해 보는 게 좋겠어. 집안에 누군가가 들릴
만한 곳에 있는지도 몰라.’
" 도와줘요." 그녀는 힘없이 외쳤다. " 누구든 도와줘요."
그녀는 잠시 쉬었다가, 이번에는 조금 큰소리로 외쳐보았다.
" 부탁해요 . 10. 도와줘요. 안 들려요 ? 도와줘요."
그녀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외쳤다. 토미는 아직 꼼짝않고
창가에 서 있다. ‘저런 멍청이 ! ’ 하고 그녀는 화를 냈다.
‘왜 사람을 부르러 가지 않는 거야 ?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까 ? 사람을 부르러 가지 않고 창가에 서 있으면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 토미는 저곳에서 졸고 있으면서 나를 이
눈 속에서 헛되이 죽게 내버려둘 작정이군. 조금은 내 입장을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저 사람이 여기에 와서 추위에
떨어봐야 해. 이대로 집에까지 가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연기하는 쪽이 연극으로서도 돋보이는 거야.’
곱은 손가락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서 그녀는 또 손전등을
꺼냈다. 스위치를 넣기 위해 엄지손가락의 감각을 되살리는 데도
잠시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어야만 했다. 잠시 뒤 그녀는
손전등을 곧바로 토미의 방을 향해 비췄다. 토미는 마치
바늘에라도 찔린 듯이 뛰어오르더니 양손을 모아쥐고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마거트는 불을 떨어뜨렸지만 창가의 사람
그림자가 물러나고 모습을 감춰버릴 때까지 불을 켜놓았다.
‘저 사람이 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빌고 싶을 정도야.’
하고 그녀는 간절히 생각했다. ‘저 사람이 하는 일은 얼마 되지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이야. 아, 그렇다고 해도 너무 추워.’
그대로 꼼짝않고 누워, 부엌에 불빛이 켜지는 것이 보이고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가냘픈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이크 셸던이 가장
먼저 왔다. 침대로 들어가려다가 불려서 나왔는지 바지는 입고
있었지만 셔츠는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 곁에 한쪽 무릎을 괴고
땅에서 그녀의 머리를 안듯이 들어올렸다. 토미는 바로 그 뒤에
왔다. 얼굴 가득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아, 마거트 양." 토미가 끝없이 울부짖었다. " 어떻게 된
거예요 ? 상처는 ?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 "
‘정신차려요, 토미.’ 마거트는 초조해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너무 지나쳐서는 안돼. 너무 수다를 떨면 안된다고.’ 그녀는
놀라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토미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눈을
흘겨 주고 싶었다.
" 나는 괜찮아요." 마거트는 헐떡였다. 거친 숨결로 한마디
한마디 쥐어짜듯이 말했다. " 찰리가, 나는 괜찮으니까 차고로
가보세요."
파자마 바람의 수잔 퀸이 울 로브(길고 품이 큰 겉옷)를
케이프처럼 어깨에 걸치고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 뒤에는 얼룩말
같은 화장복으로 땅딸막한 몸을 감싼 R 데이븐퍼트 케이츠가
육중하게 샛길을 내려왔다.
" 차고요." 마거트가 재촉하듯이 되풀이했다. " 찰리를
도와주세요 ! 빨리 ! "
마이크와 수잔이 샛길을 급하게 뛰어갔다. 토미는 땅바닥에
앉아서 마거트의 얼굴을 자기 무릎에 올려놓고는 횡설수설
종잡을 수 없는, 동정에 찬 애기와 비탄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케이츠는 선 채로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케이츠." 마이크가 차고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 이쪽으로
와요, 좀 도와줘요."
잠시 투덜거리더니 뚱뚱한 남자도 차고로 들어갔다.
" 이 남자를 밖으로 끌어내야 해요." 마이크의 말소리가
마거트에게도 들려왔다. "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소."
우선 엔진을 끄고, 다음에 라디오를 껐다. 케이츠가 마치
거인이 체조를 하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마거트의
귀에 들려왔다. 잠시 뒤 셸던과 케이츠가 축 늘어진 밀러를
가운데 매달고서 안절부절못하는 수잔의 뒤를 따라 차고에서
나왔다.
" 그 사람은 어때요 ? 부탁해요, 괜찮다고 말해 줘요."
마거트가 기도하듯이 말했다.
" 당신도 몸이 차가워졌어요." 토미는 얼음 같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싼 채 비비고 있었다. " 이런 눈 속에 있으면
안돼요."
" 나는 괜찮아." 마거트가 말했다. " 찰리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돼요. 부탁해요, 괜찮겠죠 ? "
" 아직은 모르오." 마이크가 불쑥 내뱉었다.
" 케이츠, 어떻게 생각하시오 ? "
" 때를 놓친 것 같은데." 케이츠가 대답했다. " 심장의 고동이
없소. 할 수 있는 거라면 인공호흡 정도인데, 다행히도 나는
보이스카웃에 들어간 적이 있었으니까 치료법이 떠오를지도
모르겠소. 차 안에 모포가 있는지 봐주시오."
수잔이 재빨리 차고로 되돌아가 모포를 갖고 왔다. 마이크와
케이츠가 밀러를 그 위에 엎어 뉘여놓고 케이츠가 그 위에
말타듯이 무릎을 교다.
‘지겨운 데브 공 얼간이 ! ’ 마거트는 거칠게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내 일을 망치려는 거지 ?
죽어 있는 것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나 ? 그녀는 되살아날
징후에 대해 신경을 모아서 듣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밀러가 되살아났을 때를 대비해서 말을 생각해 놓았다. 그것이
사고가 아니라고는 그 남자 역시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다른
대책을 쓰기가 어려워진다. 이번에는 상대편도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 토미, 가만히 있어요." 그녀는 토미를 타일렀다. " 저쪽
상황을 들어보게."
그러나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케이츠가 리듬을 맞추는
소리뿐이었다.
" 나쁜 공기는 나가고, 좋은 공기는 들어가라." 그러는 동안에
이 운동으로 인해 그의 호흡이 거칠어져 갔다.
" 효과가 없어." 그가 겨우 말했다. " 이 사람은 이미
죽었어."
" 아, 세상에." 마거트는 울듯이 부탁했다. " 좀더 계속해
봐요. 그 사람이 죽다니 . 10. " 나중에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 당신을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소." 마이크가 동정을
담은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당신도 상당히 지쳐
있어요. 자, 옮겨 드리죠."
" 아니에요, 나는 걱정하지 마세요." 마거트는 거절했다. "
밀러 씨를 살펴드리세요. 의사를 불러요. 무슨 수가 있을
거예요. 안된다니, 생각만 해도 무서워요 . 10. " 여기서 또
그녀의 말은 중단되어 버렸다.
" 물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겠소." 마이크의 어조에는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밀러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마거트는 녹초가 되어 토미에게 의지한 채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수잔이 바로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거트는 곧바로 침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따뜻한 목욕과
마사지 덕분에 혈액순환을 정상으로 되찾고, 감기를 방지하기
위한 뜨거운 위스키로 기운이 되살아났다. 마이크와 케이츠가
상태를 보러 와서 의사가 오늘밤엔 오지 않겠단다고 알려주었다.
" 아무래도 그 양반은 이제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소."
마이크가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 의사에게 전화해서
상황을 애기했더니 인공호흡을 해도 안된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거요. 밀러는 이미 때가 늦었소. 게다가 이 눈 때문에
도로가 유리처럼 미끄러지기 쉬워요. 내일 아침 눈을 치우는
차가 길을 깨끗하게 만든 다음 온다고 합디다. 당신도 의사의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오."
" 아뇨, 나는 괜찮아요."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 단지
찰리를 도울 수만 있다면. 무서웠어요.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 난 전혀 몰랐어요. 차에 올라타서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애기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는 동안에 갑자기 그 사람이
이상해지더니 정신을 잃는 거예요. 난 너무 마신 탓이겠거니
생각했죠. 그런데 나도 어쩐지 묘한 느낌이 들어서 빨리 맑은
공기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간신히 문가에까지 갈 수
있었답니다."
" 위험할 뻔했소." 마이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완전히
닫힌 차고에서 엔진을 가동시키다니, 그 정도는 밀러가 알고
있었어야 했는데."
" 나도 깜빡 잊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히터를 켜야겠다고
했을 때, 먼저 엔진을 가동시켜야 한다는 것은 몰랐어요. 나도
조금 마신 뒤고, 게다가 차에 관한 것에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난 그만 깜박 잊었던 거예요. 그렇지 않았으면 차 열쇠를
그 사람에게 건네줄 리가 없죠. 어쩐지 내 잘못 같은 느낌이
들어요."
" 어머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돼요." 수잔이 위로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 이런 사고는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차로 가자고 고집부린 사람은 밀러 씨였고, 당신 역시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생긴 일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당신이 자학할 필요는 없어요."
" 그 말대로요." 마이크도 뒤를 이었다. " 대단한 충격이었을
테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볼 생각은 하지 마시오. 랜더스 의사도
자기가 와서 진찰할 때까지 우리들에게 당신을 잘 간호하라고
하더군요."
" 그 선생님은 대단히 친절하세요." 마거트는 중얼거렸다. "
내일 아침에 와 주신대요 ? "
" 그렇소, 보안관도 데리고 오겠답니다." 마이크가 대답했다.
" 보안관 ! " 토미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세나왔다.
‘토미 ! 입 다물어 ! ’ 마거트는 마음속으로 심하게
호통쳤다. ‘일을 엉망으로 망쳐버리면 안돼 ! ’ 하지만 셸던
쪽으로 치켜뜬 그녀의 눈은 침착한 질문을 담고 있는 눈길에
지나지 않았다.
" 아니, 판에 박은 조사뿐입니다." 마이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설명했다. " 사고사일 경우에는 조사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여러 가지를 기입하는 서식 같은 것이 있어서요. 뭐, 그런
정도입니다. 그다지 당신을 괴롭히지도 않을 겁니다."
" 그러면 좋겠어요." 마거트가 고상하게 말했다. " 어떤
질문에도 기꺼이 대답하겠어요."
" 이제 우리는 모두 저쪽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수잔이
말했다. " 당신은 잠을 자야만 해요."
모두가 잘 자라고 말하고는 수잔과 마이크와 케이츠가 나갔다.
토미는 안절부절못하며 이불을 고쳐주기도 하면서 뒤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지쳐서 일그러지고, 손가락 끝도
떨리고 있었다.
" 토미, 당신도 가요." 마거트는 초조해져서 말했다. " 오늘은
고통스러웠어요. 조금 쉬어야겠어요. 그리고 나서 좀더 확실하게
해두어야겠어요. 셸던이 보안관 애기를 했을 때 당신이 펄쩍
뛰면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 아녜요 ? "
" 경찰이 온다잖아요.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 "
" 가만둬요, 토미. 가서 자요. 당신이 이상한 얼굴을 하고서
그 사고가 우연은 아니라고 남에게 의심의 씨를 심어놓기라도
하지 않는 한, 경찰 역시 아무리 와봤자 의심받을 일은 없어요.
당신이 정신을 차리고 있어서 안심할 수 있기를 빌 뿐이에요."
" 당신이 애기한 대로 하겠어요." 토미가 대답했다. " 하지만
조심하세요. 당신 일이 염려돼서."
" 괜찮아요. 방으로 돌아가요. 그렇게 끙끙 앓을 거라면 당신
방으로 가서 앓아요. 나도 좀 자야 해요."
그녀는 거칠게 베개를 두드리고는 머리를 내렸다. 토미는
고분고분하게 방에서 나갔다. ‘정말로 토미는 바보야.’ 하고
그녀는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염려할 게 없는데.
보안관이 와서 보고서에 기입한다고 해도 자기 맘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되는 거야. 기꺼이 도와주겠어. 일산화탄소 중독은
잘 알려진 사건이고, 내 경우는 완전히 애기가 만들어져 있지.
보안관이 증인들에게 심문하면 밀러가 막무가내로 차로 가자고
하며 나를 끌고간 것을 모두가 증언해 줄 거야. 의사와 함께
온다고 하니 더욱 안성맞춤이지 뭐야. 반드시 내가 불쌍한
미망인이라고 미리 불어넣어 줄 테니, 틀림없이 부드럽게
다뤄주겠지. 그리고 붙임성있게 밀러가 히터를 켰을 때 차
안에서 있었던 상황 등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 거야. 그런 일은
편리하게 자기가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밀러가 본명이 아니라는 것은 경찰에선 곧바로 발견할 거야.
그의 짐에서는 아무것도 단서가 없을 테지만. 경찰에서는 신원을
조사해 내는 방법이 있을 게 틀림없어. 하지만 그런 건 내게
있어선 어떻게 되든 똑같아. 경찰이 내게 와서 그가 실은 로키
로드스라는 탐정이었다고 하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깜짝
놀라면 되는 거야. 게다가 그 남자가 전에도 이 호텔에 묵은
적이 있고, 주인과도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그런 것 정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야. 그 남자가 가명으로 여기에 온 것은
경찰에게는 아무렇게나 좋을 대로 생각하게 놔두면 되는 거야.
단, 상대편에서는 그 남자와 나를 연결지어 생각할 수는 없어.
게다가 그 남자가 집주인의 사인(死因)을 조사하러 왔었다는
것은 경찰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거야. 가장 중요한 점은,
주인이 죽어 있는 것을 안 것이 그 남자가 와서 하룻밤 묵은
다음날 아침이었기 때문이지. 나는 깨끗한 몸, 보안관이
얼마든지 와도 상관없어.’
그녀는 마음속으로 보안관이 물어볼 만한 질문과,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가를 대강 그려보았다. ‘틀림없이
보안관은 나와 호텔 안 사람들과 애기해 보고, 시체도 조사해 볼
테지. 어쩌면 차고로 가서 차도 대강은 훑어볼 것이다. 좋아. 난
특별히 뭐 하나 숨기지 않겠어.’
갑자기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보안관이 차를 조사하는
모습을 그려보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다. 마이크는 그저 형식적인
조사라고 했지만, 지문을 뜨는 것도 형식적인 조사에 속하는지
모른다. ‘경찰의 방식에 대해 좀더 조사해 놓았으면 좋았을걸.
점화전의 열쇠를 조사해 본다면, 밀러가 그 열쇠엔 손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낼지도 몰라. 정말 그 바보는 어째서 그렇게
서툴렀을까 ? 그자가 점화전에 열쇠를 꽂고서 돌리는 간단한
일을 해주었다면, 이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건데. 물론
열쇠를 꽂고 스위치를 넣은 것은 그가 시켜서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밀러가 했다고 애기해 버린걸. 수잔과
마이크와 케이츠가 그 애기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게다가
엔진을 작동시킨 것도 몰랐었던 것처럼 얼빠진 연극까지
해놨는데. 안돼, 이제 와서 내 애기를 번복할 수는 없어. 그
애기로부터 도망갈 수는 없어. 게다가 열쇠에 내 지문이 있는
이상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고 말아.’
그녀는 완전히 잠이 달아나 버렸다. 잠잘 때가 아니었다.
‘보안관은 몇 시경에 올까 ? ’ 그녀는 생각했다. ‘아침 일찍
올 거야. 그 열쇠를 보안관 손으로 넘겨주는 위험한 행동은 할
수 없어. 내게 불리한 증거는 단지 그거 하나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처치해 버려야만 해.’ 이것도 역시 허깨비를
상대로 싸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엔진을 끄면서 자기
지문을 남겨놓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지문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어서 자신이 없다. 게다가 틀림이 없도록
해놓아야만 한다.
그녀는 침대에서 나왔다. 떨면서 로브를 입고, 그 위에 모피
코트를 입었다. 창 밖을 내다보고 눈이 아직도 끊임없이 내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구두 위에 오버슈즈를 신었다.
‘아직도 운이 붙어 있어.’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타일렀다.
‘눈에 남긴 발자국 때문에 의심받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게다가 그 열쇠 역시 그저 하찮은 실수에 지나지 않아. 무슨
일이든 나는 무심코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야.’
고무로 된 오버슈즈 덕분에 복도를 걸어 뒷계단을
내려가는데도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상황은 완전하게
자기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어쩌다가 누군가가
잠을 깼더라도 내가 몽유병으로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텐데. 남편을 잃은 그날 함께 자리한 사람이 사고로 죽었으니 그
정도 머리가 된다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게다가 악몽에
빠져 끌려간 곳이 바로 이 차고라면 몽유병 환자의 입장에선
완벽하게 설명될 수가 있어. 하지만 맥베스 부인 애기는 싫어.
손에 묻은 피를 씻으면서 중얼거리는 건 딱 질색이야. 애기에
의하면, 잠을 자면서 단정하게 외출복을 입은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 코트를 입고 오버슈즈를 신은 것도 변명거리가 된다.
그러나 아무튼 아무도 잠을 깨게 해서는 안돼. 꼴사나운 일이긴
하지만.’
뒷문을 열고 발을 내밀자 차가운 바람이 날카롭게 피부를
찌른다. 그녀는 차고까지 단숨에 달려가서 안으로 들어가 얼른
차에 올라탔다. 안을 살펴보니 점화전에 열쇠는 꽂혀 있지
않았다. ‘끝났어.’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엔진을 끄고
누군가가 열쇠를 가져간 것이다. 자, 그자가 누군지 찾아내서
보안관이 오기 전에 되찾아야만 한다. 게다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되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마이크라면
문제없을 텐데. 하지만 케이츠라고 하면 일이 성가시게 될지도
몰라. 내가 열쇠를 탐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재미있어 하며
그것을 숨길 심술。은 사람이니까. 왜 있던 곳에 놔두지를
못하는 것일까 ? ’
바닥에 떨어졌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녀는 손전등을
켜보았다. 빛의 고리가 시트를 비추자, 거기에 찾고 있던 작은
가죽열쇠 케이스가 있는 것이 보였다. 겨우 걱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올려 손전등과 함께 코트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방으로 갖고 돌아가 점화전의 열쇠를 잘 닦아
숨겨놓으려고 생각했다. 낮에 그것을 차고 밖의 눈 속에 묻어
눈이 녹고 나서 발견되도록 해놓아야지. 그렇게 하면 밀러의
몸과 함께 옮겨질 때 우연히 아래에 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묻혀 있다는 점에서 지문이 없어진 것도 설명이
될 것이다. ‘이 계획에는 한치의 잘못도 없어.’
그녀는 급히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 문을 잠그고 침대에 앉아
열쇠 케이스를 꺼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복잡한 생각에
잠기며 그녀는 잠시 케이스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몹시 가벼운
느낌이 든다. 케이스를 열고서 그녀는 몇 초 간 그것을
바라보았다. 열쇠가 하나밖에 없었다. 점점 심해져 오는 불안에
싸여 그녀는 하나만 남은 열쇠를 꼼짝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차 문 열쇠지 점화용 열쇠는 아니었다. ‘점화전의
열쇠가 없어졌어 ! ’
이 말이 마음속에서 비명처럼 울려퍼졌다. 누군가가 지문이
묻어 있는 열쇠를, 점화전의 열쇠를 가져가 버린 것이다.
점화전에 꽂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이것은 틀림없이 고의로 가져간 것이다. 항상 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엔진을 끄고서 기계적으로 열쇠를 가지고 나오는, 습관에
의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것은 일부러 한 짓이었다. 일부러
케이스를 열고서 열쇠 하나를 쇠사슬에서 떼어낸 뒤 케이스를 차
안에 던져넣는 불필요한 순서를 밟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 열쇠를 손에 넣고 싶어한 것이다.
‘왜 ? ’ 그녀는 이 의문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누군가가 내 열쇠를 탐냈다고 하면 그건 무슨 이유일까 ?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열쇠의 지문을 조사하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이 사고를 위장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런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로키 로드스라면야
그럴지도 모르지. 이것이 그 탐정의 최초의 활약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키 로드스는 죽었잖아.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지문에 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누군가가 그 열쇠를 가져간 거야.’
그녀의 생각은 다람쥐 쳇바퀴돌 듯할 뿐이었다. 마치
순환논리처럼 그녀를 괴롭힌다. 열쇠를 가져간 인물은 지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지시를 받아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탐정만이 이렇게도 사고라는 것이 확실한 이 일에 살인이
얽혀 있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로키 로드스만이 .
10.
하지만 로키 로드스는 죽었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되풀이
반복되는 이 말을 억눌렀지만, 그때마다 자신감이 없어져 가는
것이다. ‘밀러가 로키 로드스라는 건 확실히 확인했어.’ 하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의혹을 억누르려고 했다. ‘내가
여배우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가 틀림없어. 그
남자는 그런 사실을 누군가에서 들어서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도 없다. 반드시 그자가 탐정이야.
게다가 그자가 죽은 것은 확실해. 그렇다 해도 로키 로드스가
아니면 이런 . 10. ’
‘그것이 틀림없을까 ? ’ 결국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항복했다. ‘로키 로드스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일까 ? 아직 이
호텔에 있으면서, 나를 사형장으로 보낼 만한 증거를 하나하나
모으며 내가 굴복할 때를 기다리면서 꼼짝않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일까 ? 아, 그럼, 나는 다른 사람을 죽여버렸단 말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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