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육산악회 5월 답사산행-결과
일시: 2013.5.19.(일)
장소: 남연군묘-가야산 석문봉-덕산온천-마애삼존불
참석: 박정천(회장), 김경흠, 김용만, 박형수, 임명수, 이원식, 신수호, 송관순, 허창무, 류제형, 김완규, 이기성-- 12명
[커플참석]곽대현(총무) 부부, 이종복 부부, 문상두 부부, 이영호 부부, 장갑문 부부, 이춘형 부부, 김종용 부부, 정병무 부부-- 8쌍
모두 28명
산행경과:
이번 일육산악회 산행은 충남의 가야산인데 이 가야산 주변지역은 예부터 내포(內浦)라고 불리우면서 산과 바다가 어울린 역사관광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산도립공원으로 차령산맥의 끝자락에서 예산, 서산, 당진에 걸쳐있는 산이 가야산인데 상왕산(象王山)이라고도 불리웠다. 주봉인 가야봉(677미터), 석문봉(653미터), 옥양봉(621미터)의 3봉을 중심으로 3봉 주변에 여럿 봉우리가 연접하고 바로 남쪽으로는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449미터)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대체로 산세는 유순하고 골짜기도 험악하지 않다.
그리고 정상에 서면 서해바다까지 조망이 되고 사방에 큰 저수지가 많이 있고 수목이 울창하여 “수려하다”는 한마디로 정리된다. 게다가 주변에 백제말기에 조각되었다고 추정되는 마애삼존불에다 백제 말(648년)에 창건된 개심사, 수덕사와 정혜사(두 곳 모두 599년 창건) 등 고찰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해미읍성, 남연군묘, 윤봉길 생가가 있고 400년전 상처입은 학이 3일간 온천물에 담그고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덕산온천은 예부터 유명하다.
우리는 그 중에서 남연군묘, 가야산 석문봉, 덕산온천, 마애석불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처음 기차여행으로 계획했었다는데 예상외로 참가인원이 늘어 버스를 대절하여 다녀오는 것으로 변경하였다. 서울 잠실에서 25명, 죽전에서 3명이 합류하여 모두 28명이 되었다. 이번 산행에는 미국에서 잠시 귀국했었던 허창무가 마침 출국 전날이라면서 참가했고 정병무가 아주 오랜만에 참가했다.
8시 10여분에 출발하여 10시경에 산행초입 주차장에 도착했다. 남연군묘에 올라 한바퀴 돌아보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시간관계로 석문봉만 오르기로 하였는데 크게 가파르지는 않지만 능선까지 숨을 헐떡이며 바로 치고 올라 쉬엄쉬엄 2시간 반 정도 걸려 석문봉 정상에 도착했다. 석문산 정상까지 능선을 타는 동안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어 멋지다는 서해조망은 불가능하였지만 그러나 그 대신에 “이건 어때?” 하듯 가야산을 배 삼아 구름 바다를 항해하는 듯 안개 속을 걷는 기분도 나이스!!
하산 후 수덕사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덕산온천에 들러 1시간 정도 따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나오니 5시쯤 되었다. 여기서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마애삼존불을 잠시 구경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예상과 달리 교통체증도 없이 순조롭게 올라와 저녁8시쯤 도착하였다.
죽전에서 탔었던 3명과 이영호부부, 임명수는 먼저 하차하고 나머지 22명은 신천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특기사항:
-임명수는 자녀결혼식에 많이 와주어 고맙다고 20만원을, 그리고 허창무, 정병무, 장갑문이 따로 10만원씩 찬조해주었다.
-곽대현 총무내외가 밤새워 준비해 온 간식보따리에 정성이 가득했다.
-“오늘도 좋은 날, 내일도 좋은 날 언제나 좋은 날—좋은 날!”이라는 회장의 건배사처럼 어째 오늘은 기분이 갑자기(?) 업(up)되어 여행 내내 하도 시끄럽게 굴어 여학생들로부터 조용히 하라는 경고까지 들을 정도였다. So sorry!!
[양천한담]
기연(奇緣)과 악연(惡緣)
1)천자의 묘
1868년 4월 독일상인 오페르트(Ernest Oppert)가 덕산의 남연군묘(南延君墓)를 파헤쳤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조선 왕국 최고권력자의 부친의 묘를 파헤치기로 하였을까?
이야기는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李球)는 1836년 죽기 전에 당시 16세였던 아들에게 “훗날 좋은 묘 자리가 생길 터이니 그때 꼭 이장(移葬)하거라. 그러면 반드시 너는 크게 될 것이니 부디 몸을 잘 돌보거라.”라고 했다.
이하응은 젊을 때는 정치적 야망이 있어 이리저리 세도가에 줄을 대기도 하였으나 한직(閑職)조차 얻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유명한 지관 정만인(鄭萬仁)을 만나게 되었다. 정만인은 이하응을 보자 바로 크게 될 인물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하응이 아버지를 이장할만한 좋은 묘 자리가 있는지 물었을 때 저도 모르게 언젠가 자기 자신을 묻으리라고 생각했던 천하제일의 명당을 귀띔해 주게 되었다. 은밀하게 털어놓은 곳이 바로 보령의 오서산과 예산의 가야산이었다.
“오서산의 터는 만대영화(萬代榮華)를 누리는 곳이요, 가야산 터는 2대천자(二代天子)를 낳는 땅입니다.”라고 하자 이하응이 바로 응대하기를 “내게는 가야산 터를 알려 주시요.” 하였다. 어떻게 하면 왕위를 승계할 수 있을까 하고 있었으니 다른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허나 만약 오서산의 터를 잡았다면, 이하응의 세도정치가 어디까지 어떻게 이어졌으며 조선의 운명은 과연 어찌 흘러갔을지?
여하튼 지관의 말을 듣고는 옳다거니 하고 바로 경기도 연천에 있는 묘를 이장하려고 서둘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관이 알려준 바로 그 자리에 가야사라는 절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이장하기 위해서는 오직 이 절을 없앨 뿐이요, 그 수단으로는 방화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이장을 하기 전에 꿈도 야망도 잃은 영락(零落)한 듯 그렇게 허랑방탕(虛浪放蕩)하게 살면서 미리 세도가(勢道家)에도 이리저리 뇌물을 넣어 혹시 방화로 인한 문제가 생겨도 덕산군수 쯤에서 무마가 되도록 손을 써놓고는 가야사에 불을 낸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운 좋게 무사히 이장을 하게 되었다. 훗날 그가 근처에 보덕사를 세운 것은 가야사를 불태운 보상이었을 것이다.
이하응은 이장하면서 지관이 당부한 말을 곰곰히 상기했다. “혹 누가 도굴하여 묘 자리를 바꿔 치기 하면 안 하니 만 못하게 되니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관을 깊이 묻고 여러 번 두껍게 회 칠을 하여 쉽사리 파내지 못하게 해놓았다. 그렇게 이장이 끝난 것이 1844년이었다(1846년이라고도 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에서는 제법 능력 있고 싹이 있어 보이는 왕족들에 대해 견제와 제거를 해왔는데 1862년 왕족 이하전(李夏銓)의 제거가 그 절정(絶頂)이었다. 이하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날을 기다리면서 왕권에는 뜻이 없는 듯이 가장하고 건달처럼 행세해왔다가 이 때쯤에는 온전히 파락호(破落戶)처럼 굴었다.
이하응은 주색잡기나 유람을 하면서 세도정치가에 이리저리 빌붙어 주정도 하고 구걸도 하였기에 재상가 김씨들로부터 놈팽이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하응은 그런 식으로 재상가를 제 마음대로 찾아다니면서 권력층의 동향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하응은 조선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안동 김씨에게는 못난이 광대처럼 굴었으나 한때 세도가문이었던 풍양 조씨와는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왕대비 조씨와 그 일문(一門)과는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광일미구(曠日彌久)의 40여년 세월, 그 세월이 무심하지 않았는지 드디어 그에게 때가 왔다. 1863년 12월8일 철종이 갑자기 급사했다. 이때 철종에게는 세자가 없었으며, 따로 후사를 정한 바도 없었으며, 그 동안 세도가에 의해 박해당했던 터라 왕족 중에서 달리 나설만한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당장은 김씨 벌족들도 아무런 복안(腹案)이 없었다. 이것을 단지 운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 와중에 후사를 정하는데 있어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조대비 뿐이었다. 여기에서 이하응을 좋게 보고 있던 조대비(趙大妃)가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로 후사를 정한다고 하자 별다른 이의 없이 결정이 났다. 거기에는 이미 파락호라는 이미지가 붙어버린 이하응을 기존 김씨 세력들이 사실상 우습게 보았고 게다가 이하응은 오래 전부터 김씨 가문 중에서 자신에게 동정적이었던 사람들과는 친교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과신했던 것이다. 게다가 바지저고리로 생각했던 이하응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고 살아서 왕의 아버지가 된 사람은 오로지 대원군 이하응이 조선 역사상 처음이라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지나쳐버렸다. 그러므로 김씨 세도가문은 얼떨결에 호랑이를 맞은 셈이 되었다.
11살의 어린 왕에게 혈기 왕성한 40장년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파락호 생활을 하면서 대원군 이하응은 백성들의 어려움과 세도정치의 폐해를 생생하게 체험하였으니 그가 개혁의 드라이브를 걸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초기 2년 동안 백성들의 호응 속에 해냈던 개혁정치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게 된 것이 세도정치로부터 왕실의 권위를 되찾자는 명분으로 시작한 경복궁 중건이었다.
기공 후 1년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던 중건사업은 1866년 3월 한밤중에 갑자기 불이 나 가건물과 재목이 모두 불타버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꼴이 되었다. 그 결과 재정이 궁핍해져 백성들의 자발적 호응을 받으며 시작한 경복궁 중건이 드디어는 백성들의 원성(怨聲)을 쌓아가며 준공시킨 격이 되었다. 이것으로 대원군은 지지자를 모두 잃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대원군이 초기부터 국제정세에 눈감은 것이 아니었으니 1865년 말에 점증하는 외세를 막기 위해 천주교도 남종삼의 건의를 받아 프랑스의 힘을 빌리려는 구상을 하였으나 국내 천주교 지도부, 특히 남종삼이 중간에서 이리저리 시일을 천연(遷延)하다가 결국 대원군의 신뢰를 잃었고 게다가 프랑스 주교의 소극적 태도까지 있어 한때 천주교의 힘을 빌어보려던 대원군이 돌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866년 1월부터 3년간에 걸쳐 천주교금압령(天主敎禁壓令)을 내렸다. 그 결과를 보면 그 이전에 보였던 관용적 태도와 8천여명의 학살이라는 지나치게 과격한 탄압과는 너무나 극과 극의 양상이었다.
생각컨데 이것은 대원군으로서는 기대했던 프랑스의 협력을 이루어내지 못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실망감에다 조대비를 비롯한 기존 보수세력들의 지지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 방관(傍觀)한 결과로서 내정(內政)에 진력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어 벌어진 미국 셔어먼호 사건과 프랑스와의 병인양요 등으로 조선의 국정은 비록 혼란했지만 천주교도의 억울한 참화 속에서도 조금씩 정국이 안정되어가고 있었으므로 대원군이 쇄국 일변도로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2)보물도둑
그런데 여기에 엉뚱한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것이 바로 독일인 오페르트가 일으킨 남연군묘 도굴사건이다. 이런 이상한 짓을 한 오페르트는 독일 프러시아의 유태계 상인이었다. 그는 이미 186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충청도 해미현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런 그가 2년여에 걸쳐 준비를 하고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우선 미국인 모험가 젠킨스(Jenkins)를 물주(物主)로 하고 천주교도 대학살 시에 간신히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론(Feron), 그리고 백인과 말레이지아인 수십명, 그리고 100여명의 중국인이 승선하였고 몇 명의 한국인 천주교도가 향도(嚮導)가 되었으니 말하자면 다국적연합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대형선박 챠이나호를 본선으로 하고 작은 증기선 그레타호를 끌고 1868년3월 상해에서 출항하여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1868년4월18일에 우선 행담도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그레타호로 갈아타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 정오 못 미쳐 구만포(九萬浦:현 예산군 고덕면 구만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육로로 행군하여 덕산관아를 습격하고는 남연군묘에 오후 늦게 도착했다.
이들이 도굴을 시작하였지만 너무 깊고 단단히 묻혀져 있어 밤이 늦어서야 겨우 관 뚜껑까지는 닿았으나 황급히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늦은 밤이었어도 주변에 덕산군수를 위시하여 동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데다 썰물 시각이 가까워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떠나는 와중에서도 위세를 떨치면서 유유하게 민가도 습격하며 20일에야 행담도에 도달하여 본선을 타고 떠났다. 관찰사가 병사들을 출동시켰으나 이미 떠난 다음이라 헛물만 켜고 말았다.
그들이 어째서 분묘를 도굴하려고 하였는지 그 이유는 분분하다. 오페르트가 쓴 조선기행에서나 재판에 회부된 미국인 젠킨스가 재판정에서의 밝힌 것처럼 통상조약 체결과 은둔국 조선을 세계에 소개시킨다는 목적에 천주교를 억압하는 대원군을 제지시키려는 목적도 있다는 것인데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원군이 왕의 아버지로서 왕보다 윗자리에 앉은 최고 권력자가 되자 20여년전 이장할 당시의 이야기가 이리저리 구전되어 흘러가는 중에 살이 붙고 붙어 “천자의 자리”라는 말에서부터 묘 속에 황금보화가 가득 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로 뻥튀기가 되어버렸다.
이 이야기를 천주교도로부터 오페르트가 듣고 에집트의 피라미드에서처럼 묘 속에 황금보화가 있다면 이문이 남는 장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기에 모험가 젠킨스가 합세하여 “인디아나존스”처럼 보물찾기에 나서게 된 것이다. 한편 페론신부는 이해하기 어려운 황당한 설명이지만 수천명의 교도를 참살한 대원군을 교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대원군의 아버지의 시신을 담보로 하여 천주교금령을 해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들의 행위는 자국인사들로부터도 파렴치한 행위로 단정되어 물의를 빚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조선의 운명까지도 좌우한 셈이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만해도 대원군의 개혁드라이브가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국내정치가 안정이 된다면 서서히 대외관계에 관심을 가질 때였으나 이들의 행위로 인해 극렬한 대원군의 분노와 증오심을 자아내게 되어 천주교도에 대하여는 다시 한번 가혹한 탄압이 계속되었고 외국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는 쇄국양이(鎖國攘夷) 일변도의 정책으로 달려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3년 후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나지만 이 사건이 없었으면 그렇게 큰 전투로까지 벌어지지 않고 어쩌면 통상교섭이 이루어졌을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왜 하필이면 경복궁건설 때 대화재가 발생했는지? 왜 하필이면 남종삼과 같은 무능한자가 대원군과 교섭을 하게 되었는지? 왜 하필이면 오페르트가 도굴까지 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에게 묻게 된다.
적어도 화재 건은 그렇다 하여도 나머지는 “천주교와 도굴”이 겹쳐 대원군이 쇄국의 대못을 박게 만들었다. 그로써 대원군 집정10년 중 집권 후반기 5년 동안 내내 내정(內政)이라는 우물 안에서 정권투쟁에나 몰두하게 만들었다고 하면 지나친 과대해석일지도 모르나 그만큼 잃어버린 대원군의 초기의 개혁정치가 너무나 아쉬울 뿐 아니라 조선의 망국(亡國)을 암시하는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씁쓸하기만 하다.
아침에 일어나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저녁엔 돌아가는 새를 본다 나그네 마음 본디 씁쓸한데 하물며 모과산을 바라볼 때에야 (早起見日出 暮見棲鳥還 客心自酸楚 況對木瓜山) [李白:望木瓜山]
(2013.5.22. 양천서창에서 문상두 씀)
첫댓글 좋은 내용 잘 보았소. 역사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안목에 감탄합니다.
ㅣ양천서창님! 산행후기 잘 읽었음다. 감사함다. 곽대현
이이야기도 옳고 저이야기도 맞네
문상두의 역사 지식은 항상 감탄할뿐이요~~!
공부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