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의 이력이 일천해보였던지 강의를 시작해도 메모지를 준비해온 사람이 없어서 원래 강의하고자 했던 내용은 '이순신 장군의 리더쉽'이었지만 즉석에서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이유?"로 제목을 바꿔서 교육을 진행했다.
먼저 수강생들에게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12척 전함과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 등 한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극히 상식적이고 표준적인 답변들이었다.
우리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손꼽으라면 세종대왕과 함께 쌍벽을 이룰만큼 회자되는 분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12척의 전함으로 수 백척의 적선을 상대로 세계 해전사상 유례가 없는 승리를 거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승리다.
그런 뛰어난 지략과 리더쉽은 어디서 왔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글쓰기'다.
우리가 교과서에 배웠던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응시해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낙마했을 때 나이가 28살이었다.
조선시대 사람의 평균수명이 45세라니 이를 감안한다면 꽤나 늦은 나이였다. 그 이후에도 몇차례 낙방을 하고나서 32살이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니 시쳇말로 무술이나 학문이 출중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관직에 오른 그는 우리가 말하는 육군 보병에 근무하다가 지금의 해군(수군)인 전남 고흥군 발포만호에 수군절도사로 취임했다.
바다가 고향이 아닌 그가 세계 해사에 유례가 없는 승전보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말한 바로 글쓰기 습관이였다.
발포만호에서 어부들이 배를 만들어 보호하던 굴강에 착안해 상대는 보이지 않지만 아군은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바로 출항할 수 있는 더 큰 굴강을 만들어 전쟁시에 거북선을 만들고 숨겨두기도 했다.
조류의 흐름을 배워 물 때를 숙지했으며 해도(바다 지도)를 만들었다.
이런 바다에 관한 지식들을 기억에만 의존했다면 리더로서의 통찰력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난중일기"를 써서 관찰하고 배운 모든 것들을 기록했다.
왜군 함대의 장단점과 우리 판옥선의 장단점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자료화 하여 휘하 부하들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거북선이라는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진수하게 된다.
전쟁을 분석하여 패인을 파악하고 승기를 잡는 전략전술을 구사하였으며 하다못해 군량미가 떨어져 군사들이 배를 곯을 때 자신이 남해안 순찰길에서 얻어먹었던 해초주먹밥을 떠올려 전쟁시에 유용하게 써먹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이순신 장군처럼 훌륭한 전과를 올린 무인들도 없다 아니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바로 후세에 알릴 수 있는 자신의 기록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후세사람들에게 찌질이라 불리는 선조는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이순신 장군이 자신보다 백성들에게 신망받는 것을 질투하고 싫어했다. 그래서 애써 이순신 장군을 외면하거나 폄훼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만약 '난중일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실록에 나온 자료를 가지고 역사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지라 선조의 눈으로, 선조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순신의 이미지를 우리 역시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자신이 남겨둔 자료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원균보다 더 한 사람이라고 비아냥 거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글이란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다.
글이란 먼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를 연결해주고 기술의 진보,문화의 확장성 등 인류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이룩하게 만들었다.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사람이 싫어지면 안 좋았던 기억만 떠오른다.
하지만 예전에 서로 좋았던 기억들을 글이나 사진으로 남겨뒀다면 최소한 지금은 싫지만 한 때는 좋았던 시절도 있었구나를 떠올리며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법이다.
이처럼 글로서 기록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거나 회사의 발전을 꾀하거나, 세계사를 흔들 수 있는 것도 기록의 힘이다.
기록을 통해 박학다식함을 쌓고 박학다식 속에서 성찰과 사색을 더함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고 현명함을 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