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삶을 돌아본 시간이어서 행복했습니다
미소원도반님과의 인연 감사합니다
저보다 훨씬 많은 수행과 불심이 깊으신 분들이라는 것을 압니다
각자 한번씩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부처님과 만난 여러가지 행복과 어려움을 극복한 삶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을 겁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 자신에 대한 것을 회향할 수 있는 법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함께 가게 되어서....
봄꽃이 눈처럼 내리던 날 어머니를 보내며(조계종신행수기 중앙신도회장상)
이희숙 님(보덕심)
초하루 스님의 법문이 이어진다.
“인간의 삶이란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 조건에 의해 만났다가 조건에 의해 흩어지는 것, 내가 아니라는 것, 내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늙어지는 것, 죽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세요.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나눔을 하세요.” 법문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본다. ‘반야심경’의 공을 지금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의구심으로 스스로 집착을 가진 삶을 살아 온 것 때문일까?
첫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가부장적인 문화의 사회에서 젊은 나이에 4명의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에게는 가혹한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정이라고는 알지 못한 채, 막내이다 보니 어머니의 아픔이나 힘듦도 모른 채 철없이 살았다.
생계에 바쁜 어머니도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자주 가시던 절에 데리고 갔다. 오색의 등들이 만개한 봄꽃과 어우러져 그림같이 아름다웠고 절에 따라가던 어린 나는 어머니와 소풍이라도 가는 마음인 양 노래를 부르며 깔깔거렸다. 부처님을 향해 어머니를 따라 조그마한 두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그런 나를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쳐다보셨고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어려서 그때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절하시는 모습은 비장하리만치 절실해 보였다. 아마도 우리 4남매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는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힘들고 모진 삶에 지탱이 되었던 부처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젊은 날은 직장에 다니느라 그냥 절에 가면 삼배만 하는 정도였고 법문을 공부할 인연은 오지 않았다.
결혼한 후 둘째 딸을 낳고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어머니가 오셨다. 기저귀도 개어주시고 미역국도 맛있게 끓여 주셨고 첫 아이도 딸을 낳아서인지 ‘아들을 낳았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씀하시고 가셨다. 그런데 다음 날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죽음이라니. 어릴 때부터 늘 따라다니던 죽음이란 의문이 다시 떠올려졌고 사람은 왜 죽는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와 얼어붙은 사람처럼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없는 나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삶의 의지처였다. 그런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보내게 된 것이다. 죽음이 이런 것인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뒤늦게 몸부림치며 울었다. 우리 4남매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회한과 효도를 할 시간조차 없이 헤어져야 했던 죄책감으로 오랜 세월을 힘들게 보내야 했다.
봄꽃이 눈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내린다. 어머니를 보낸 봄은 수없이 오고 갔다. 나는 늘 봄이 되면 아프다. 꽃비가 내리는 봄이 되면 울며불며 보낸 어머니와 49재를 지낸 어머니가 자주 다니시던 절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하염없이 멍하니 앉았다 오던 나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어린 딸 2명을 키워야 하는 나로서는 49재를 마친 뒤 인근 가까운 절에 새벽마다 다니기 시작했다. 법당에서 염불 소리만 나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속에 있던 온갖 감정들이 올라와 울고 또 울었다. 내게 이렇게 많은 눈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부처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부처님을 향해 수없이 물었다. 부처님은 언제나 빙그레 웃고 계셨다. 나는 답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한없이 헤매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남을 위하여 불도를 닦는 일
오래전부터 우리 절 스님은 좀은 다른 방법으로 포교를 하시었다. 불자들에게 수행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회복지의 차원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를 하도록 하셨다. 도반들과 함께 팀을 나누어 봉사를 했다. 구치소, 교도소에 가서 어려운 사람에게 영치금도 넣어주었고 케익 및 음식 등을 준비해서 생일을 축하해 주는 봉사를 하였다. 정신병원, 결핵병원 등에 가서 청소하고 반찬, 김치 등을 전달하며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었다.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와 지역사회 어려운 이를 돕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녔다. 시간이 안 되는 사람들은 말없이 보시금을 내어 동참하는 마음을 보태었다. 스님께서는 남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보시와 수행이라는 것을 체득하여 알게 해 주셨다.
‘금강경’ 묘행무주분에서 말씀하셨듯이 “보살은 마땅히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하나니 이른바 모양에 얽매임 없이 보시해야 하며,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감촉이나 생각에 얽매임 없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어떠한 상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그때 우리들의 마음은 환희심으로 가득하여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였고 부처님의 뜻을 따라 실천했다는 기쁨으로만 가득했었다.
천진불 어린이와 함께 한 시간들
큰딸이 대학교를 다니면서 몹시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세상에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이나 아픈 것이라고 했다. 아이가 아프니 나는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부처님께 빌었다. 심장을 달라면 줄 것이고 나의 생을 딸에게 줄 수 있다면 주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매달렸다. 봉정암에 백일기도를 붙이기도 하고 가는 절마다 기와 불사를 하였다. ‘부디 딸 아이가 건강하게만 해주세요. 자신을 낮추어 남을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겠습니다.’ 그동안 나는 부처님께 기도할 때마다 원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 무엇을 달라고도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이생을 잘 살다가 가겠습니다. 잘살아보겠습니다.’라고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원인도 모르게 아플 때는 부처님 앞에서 울면서 도와달라고 기도하였다. 내가 아이를 잘못 키웠는지 바쁘게 살면서 좀 더 사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나를 자책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광명진언을 외우면 좋겠다는 스님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정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온 마음을 다해 광명진언을 외웠다.
부처님의 가피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조금씩 몸이 회복되었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수없이 절을 하였다. ‘보왕삼매론’의 10가지 짧은 가르침도 삶을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그 일이 우리 가족을 더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그때부터 딸과 함께 일요일마다 하는 어린이 법회에 봉사하기로 하고 어린이 법회 지도자과정을 이수하였다. 어린이는 불교의 미래이니 꼭 어린이 법회는 해야 한다는 큰스님의 말씀으로 일요일마다 천진불 어린이들과 놀면서 나는 불교의 가장 기본 교리를 다시금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고 어린이 법회를 어떻게 하면 활성화할 수 있을지 어린이 법회 책임자이신 선생님과 함께 고민하였다. 어린이 법회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어린이 법회를 그만두게 되었을 때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저출산 시대에 아이도 적지만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던 부분도 있지 않았나 후회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한동안 마음이 힘들었다. 지금도 어린이 법회를 하는 절이 있다면 모두가 어떤 방법이든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상담을 만난 행복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공부도 잘했었다. 그러나 가난하였고 어머니가 힘들까 봐 말하지 못하고 직장을 선택하였다. 아이들이 컸고 봉사를 하면서 좀 더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그러다 우연히 사회복지법인에 일하게 되면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게 되었고 상담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가정 일을 하며 공부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사람을 도와주는 여러 가지가 방법 중에서도 마음이 아픈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론과 기술은 당연히 배우고 훈련을 하면 되지만 자신의 내면이 단단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상담이었다. 나는 겉으로는 바쁘게 살아가고 즐겁게 봉사를 한다고 다녔어도 미해결 과제처럼 늘 마음은 외롭고 슬펐다.
명상에 관심이 많아 명상지도사 공부를 할 때였다. 각자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고 생각나는 일, 어릴 때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에서 나는 어머니를 만났고 지금도 어머니만 생각하면 슬프다고 했다. 그때 명상을 지도하시던 스님께서는 나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슬픔이란 감정을 왜 스스로가 꼭 잡고 있는지…. 그냥 놓아버리면 될텐데….”
스님의 말씀이 머리를 쳤고 오랫동안 슬픔이란 감정을 꼭 쥐고 혼자 그것을 키우고 있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냥 놓아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슬픔이라는 감정을 놓아버렸다. 슬픔과 함께 비로소 어머니를 보낼 수 있었고 나는 자유로워졌다. 정말 마음이 편안해 졌고 여러 가지 감정을 바라볼 수 있는, 알아차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상담을 공부할수록 불법이 상담과 비슷하다는 점에 놀라웠다. 명상이 부처님의 ‘대념처경’에 기본이 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문다.’ 몸, 느낌, 마음, 법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자기 자신을 알아차리고 분명하게 알아차림하여 행하라고 하였다. 행복의 길, 해탈의 길을 알려주신 부처님이 경이로웠다.
봉사단체 미소원과 함께 가는 세상을 향해
35년 전 스님의 봉사단체 시절부터 장유정 이사장님과 인연이 되어 오랜 시간 이어져 왔다. 이사장님은 11년 전 수행 및 봉사를 하는 미소원을 사단법인으로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과 즐겁게 봉사하는 일을 하자고 하여 도반들과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청소년부터 노인까지를 목표로 체계적인 봉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소년원 청소년들의 상담 멘토, 구치소 교육 교정위원으로 자살위기 상담 및 이사장님을 따라 여사법회에도 가끔 시간을 내어 참석하여 법을 전하기도 했다. 독거노인 쪽방 사람들을 위한 밑반찬배달, 장애우, 다문화가정에 장학금 및 생활지원금을 지원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랑 함께 가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와 풍성함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함께 가는 세상을 만드는 미소원에서 우리 도반들이 함께 봉사하며 갈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생에서 부처님의 법을 만난 다음으로 나에게는 큰 선물이었고 행운이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부처요, 주인의식을 가지고 각자 잘하는 것,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여 봉사하고 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여러 단체가 있고 단체마다 시끄러운 일이 많이 발생하여 갈등이 많은 데 미소원 회원들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부러워했다. 회원 모두 끊임없이 자기 수행을 하면서 봉사를 하기 때문이리라.
구치소 교정위원으로 상담 봉사를 가는 줄 아는 사람들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많은 데 왜 죄지은 사람들에게 가서 상담하느냐?”라고 종종 물었다. 우연이 인연이 되어 구치소 봉사를 하게 된 것도 있지만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다. 어리석음 때문에 지은 죄이기에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다시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서다.”라고 말했다. 상담이 끝난 어느 날 구치소 소장님과 차 한잔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소장님은 왜 이 일을 하시는지요?” 불자이셨던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우리는 사회라는 큰 원 속에 그들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죠. 그 속에는 평범한 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살인자. 성폭력자. 마약범, 절도, 사기 등 수없이 많은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교정, 교화시키지 않으면 사회에 나갔을 때 자신들의 불평등함에 화가 나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도 잘살아 갈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하죠.” 어차피 같이 살아가야 한다면 그들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정, 교화에 힘쓰고 구치소나 교도소에 가셔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법문을 하시는 스님들 혹은 법사님들을 뵈어도 참으로 남다른 생각과 행동으로 포교를 실천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회를 하시는 큰스님은 교도소, 구치소 법회 중에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여러분과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머리를 깎고 회색 옷과 회색 장삼, 자유가 없는 삶, 고무신을 신은 나나 당신들 똑같지 않은가. 이곳에서 수행한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의 법을 공부하여 해탈의 길을 찾아가길 바란다.” 삶을 살아가면서 어리석음으로 고통의 밑바닥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편이 되어 줄 것이니 힘을 내라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이 되어 주는 일인 것이다. 코로나 이후 상담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를 만난 사람 중 조금이라도 잘 살아간다고 마음을 바꾼다면 나의 봉사가 헛되지 않았으리라.
미혼모와 아기 살리기
5년 전 큰스님과 몇 분의 스님 그리고 재가분들이 뜻을 같이하여 사람들이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라는 사단법인을 만드셨다. 행복을 위한 여러 가지 포럼 및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소중한 생명살리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도권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힘들어하는 미혼모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여 미혼모 상담을 해주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네 알겠습니다.”라며 기꺼이 승낙하였고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하게 되어 낙태할 수 없을 만큼 아기는 커버렸고 사회적 및 가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미혼모들이 아이와 함께 센터에 찾아오면 상담을 하고 설득을 하여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한다. 서울에 있다는 베이비 박스와는 다른 차원에서 돌봐주면서 아기에 대해 잘 선택할 수 있도록 2주간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면서 상담을 한다. 아이를 키우든, 입양을 원하든 아이는 출생신고를 꼭 해야 한다. 그런 부분을 두려워하는 미혼모들이 많다. 그들의 환경과 상황을 이해하고 아이를 키우겠다고 결심을 하면 공적 자원의 정보제공 및 민간단체의 지원을 연결해 주어 아이를 키우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부산 홍법사는 ‘행복드림센터’라는 이름으로 시설을 개원하여 미혼모를 위한 지지 및 지원을 하고 있다. 불교계에서 이런 일을 한다는 것도 처음이다. 홍법사 스님께서 다른 많은 일도 하고 계시지만 아이 생명 살리기와 미혼모를 위한 지원은 사회를 위한 거시적인 생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참으로 존경스럽다.
우리가 물고기를 방생하는 것도 생명을 살리는 것이지만 저출산 시대 아기를 살릴 수 있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는 이것 또한 수행이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하고 있다. 행복드림센터에 아기가 들어오면 모든 일을 두고 아기와 산모를 돌보는 자원봉사자들도 참으로 보살이 아닐 수 없다. 불교를 통해 좋은 인연, 좋은 도반을 만나는 행복에 참으로 감사했다.
행복드림센터를 통해 거쳐 간 미혼모 중 지금도 열심히 아이를 키우며 한 달에 한 번 자조 모임을 통해 만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지원도 해주는 분들이 있다. 그들이 당당하게 아기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선물이다.
크나크신 부처님의 사랑
평생을 나는 늘 바빴다. 왜 바쁜지도 모르게 살아왔다. 스스로 바쁘게 일을 만들고 사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늘 마음 속에 의문이 있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수행을 깊이 하지 않았고 열심히 하지 않고 있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불교대학도 이수하였고 좋은 법문을 듣고 있어도 자신감이 없었고 수행을 열심히 하는 도반을 보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가게 된 절에서 스님의 제안으로 우리 일행과 차 한잔을 마시는 기회가 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 나는 조심스럽게 스님께 질문하였다.
“스님 저는 왜 늘 바쁨 속에서 초하루, 보름, 이런 날도 챙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저의 게으름 때문인가요?”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살님, 귤이 제주도에서 우리에게 오기까지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오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서 우리가 맛있게 먹게 되는 것이지요. 꼭 절에 와서 하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것 또한 수행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받아들인다고 하였는데 스님의 말씀을 수행에 열심히 하지 않는 나를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발원하였다. 내가 가진 능력을 나와 인연되어 만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 잘하려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 그냥 기꺼이 하기,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하기, 살아오면서 만나진 모든 인연에 감사하며 부처님 만나 상담을 만나 행복해진 나를 사랑하며 ‘부처님, 오늘도 잘살아보겠습니다. 잘 살다가 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실거죠?’라고 기도한다. 부처님께서는 어머니 같은 미소를 띠고 언제나처럼 나를 내려다보실 것이다. 삶에서 부처님은 언제나 나의 든든한 의지처였다. 어머니처럼.
상담소에서 퇴직하고 조금은 자유롭게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늦은 나이에도 도반의 권유도 있고 하고 싶었던 합창단에 들어갔다. 찬불가 하나하나를 배우고 부를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법문이 노래 속에 녹아 있었고 가사들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불교를 포교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아름다운 찬불가를 부르며 포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기쁜 시간이었다. 지휘자님은 언제나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웃으시며 가사에 대한 부처님의 이야기도 재미있게 해주신다. 덕분에 연습하는 내내 우리는 즐겁게 웃으며 찬불가를 배운다. 올해 봄 지휘자님이 계신 불교 중창단에서 신작 찬불가 발표회를 하게 되었다. 그날 공연장을 꽉 채운 사람들과 함께 찬불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모두 감동의 시간을 가졌다.
합창단이 아니라도 절에 오시는 신도님께 찬불가를 하나씩 가르쳐 주어 부를 수 있도록 하면 법회가 더 재미있고 함께하는 감동과 환희로움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법회 중 부처님께 꽃을 헌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꽃을 든 보살님이 정성을 다하여 부처님 전에 올리고 있었다. 합창단들이 고운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를 부른다.
“꽃을 바치나이다. 꽃을 바치나이다. 님께 바칠 것은 피어지는 꽃이니라.”
순간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아! 사랑하는 님, 부처님께 나는 커다란 사랑을 받기만 하였구나. 나는 그냥 받기만 하였구나. 크신 부처님의 법을 따라 여러 스님께서 던져주신 법문과 답을 받기만 하였구나. 나는 그렇게 사랑을 받고 살아왔구나.’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마음속으로 수없이 절을 하고 절을 하였다.
부처님 법 만난 것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첫해부터 미소원에서 도전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수행을 응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