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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글 제목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굳이 따지고 들자면 외래어의 번역이라는 표현이 뭔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아리송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어 anxiety와 fear처럼 불안 내지 공포를 뜻하는 일반적 낱말인 독일어 Angst와 달리 영어에 들어온 독일어 외래어 angst는 실존적 불안 내지는 신경질적 불안에 가까운 뜻으로 특정한 함의를 지니기에 영어 angst를 독어 Angst로 그대로 번역할 수는 없는데 '외래어의 번역'이라고 하면 왠지 영어에 들어온 외래어 angst를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 하는 문제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컨대 일본어 アパート(아파토)는 한국어 연립주택과 비슷하고 아파트에 해당하는 말은 マンション(만숀)이듯이 언어들 사이에서 어원이 같거나 형태는 비슷해도 뜻은 다른 낱말을 가리키는 false friend의 번역에 관한 것이다. 우리말에는 이 용어에 대응하는 정착된 용어가 아직 없는 듯하고 거짓 짝, 사이비 유사어, 얼핏 비슷한말 따위로 불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계통적으로 고립어인 한국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얼핏 비슷한말의 상당수는 외래어일 수밖에 없으므로 굳이 false friend의 번역 말고 외래어의 번역이라고 해도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다고 판단하여 제목에는 '외래어'라고 썼다. 물론 한자어도 있으나 한자어도 넓은 의미의 차용어(loanword)이고 우리말에서는 차용어가 외래어보다는 다소 낯선 전문용어인 데다가 여기서 한자어보다는 외래어를 다룰 것이기에 일단 외래어라는 용어를 쓰기로 한다.
이 글에서는 플래카드와 피켓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두 낱말은 직접 어원이 되는 영어와 뜻이 다르기에 콩글리시로 불릴 수도 있는데 이 용어에 다소 부정적인 어감이 있고 뭔가 불안정한 순화 대상 어휘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여기서는 콩글리시라 부르지는 않겠다.
플래카드
이 낱말의 직접 어원이 되는 영어 placard는 '붙이다'를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placken(현대어 plakken)에서 유래하여 불어를 거쳐 들어온 낱말이다. 불어에서도 공고문 따위의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현대어로는 (붙박이) 옷장을 주로 가리킨다. 영어도 공문서, 포고문 따위의 뜻으로 쓰였으나 현대어는 주로 게시물을 가리키며 특히 시위대가 구호 따위를 써 붙여 들고 다니는 널빤지를 지칭하는 한국어 '피켓'에 해당한다. 따라서 현수막과 비슷한말이며 '긴 천에 표어 따위를 적어 양쪽을 장대에 매어 높이 들거나 길 위에 달아 놓은 표지물'을 뜻하는 한국어의 플래카드와 닮기는 했으나 다른 말이다.
피켓
영어 picket은 원래 말뚝을 뜻하는데 여기에서 외연이 확대되어 경계병도 뜻하게 되었고 노동 쟁의 때에 파업 이탈자를 막는 감시인 따위를 뜻하다가 '시위대'로 의미가 넓어졌다. 한국어 피켓은 여기서 더 나아가 '주장을 알리는 내용을 적어서 들고 다니는 자루 달린 널빤지'를 뜻하기에 이 의미에 맞는 영어는 picket이 아니고 placard다. 다만 picket sign이라고 하면 한국어의 피켓에 해당되는 말로 쓸 수 있다. 우연히도 그리스어 πικέτες(피케테스)가 한국어 피켓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래 사례를 보면 60년대는 지금처럼 현수막을 뜻하는 뜻으로만 '플래카드'를 쓴 것 같지는 않다.
동아일보 1960년 6월 13일자: 'We dislike Ike'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 사진 밑에 <'우리는 아이크를 싫어한다'라는 프라카드를 든 아이크 방일 반대 시위자들>
1960년 7월 11일자: 선거 플래카드 사진 밑에 '맑게 갠 창공에 나부끼는 프라카드'
경향신문 1961년 9월 4일자: 피켓을 든 사람들 사진 옆에 '백여개의「플라카드」를 들고 비내리는 거리를 행진하는 연예인궐기단'
1961년 9월 4일자: 플래카드를 든 사람들 사진 밑에 '플라카드를 앞세우고 서울 거리를 데모하는 사백여 명의 대학교수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플래카드와 피켓을 구별해서 쓰게 된 듯하다.
매일경제 1974년 9월 7일자: '「배신자 일본을 규탄한다」는 프래카드를 들고 7일에도 반일 데모가 계속되었다'라는 글이 사진 밑에 나오고 기사 본문에는 '피켓'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을 보면 플래카드와 피켓을 든 사람이 모두 보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별해서 쓴 것 같기도 하다.
1971년 6월 14일자: '사회도덕 바로잡자'라는 프래카드와 피케트를 들고 유원지를 출입하는 소풍객들
한국어에서 프랑카드, 프랭카드, 플랑카드, 플랭카드, 프라카드, 프래카드, 플라카드, 플래카드 등 상당히 많은 변이형으로 쓰인다. 루마니아어는 placardă와 pancartă(불어 pancarte에서 유래)라는 말이 있어서 이 둘이 합쳐져 plancardă로 잘못 부르는 경우가 있어 어쩌다 보니 플랑카드와 비슷한 꼴이 되기도 하는데 한국어 플래카드의 변이형 플랑카드도 불어 pancarte의 영향이 행여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보지만 현대 불어 pancarte는 주로 표지판을 뜻하기에 별 개연성이 없어 보이고 스페인어 pancarta가 한국어 플래카드와 같은 뜻이지만 역시 영향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비자음 'ㅇ'이 왜 첨가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영어 scoop과도 어원적 관련이 있는 네덜란드어 schop(스홉: '삽'을 뜻함)이 일본어 スコップ(스콥푸)를 거쳐 경남 방언 일부에서 비자음 'ㅁ'이 첨가된 수금포 또는 수건포로 불리기도 하듯이 일종의 활음조 현상으로도 추정된다. 뼁끼도 네덜란드어 pek에서 일본어 ペンキ(펭키)를 거쳐 들어왔는데 이 말은 일본어에서 이미 비음이 첨가된 것이라 경우는 달라도 참고될 만한 사례라고 본다.
다음은 책에 나온 번역문을 보기로 한다. 독어와 영어는 원문을 찾을 수 있어서 함께 썼으나 일본어는 그렇지 못해서 번역문만 썼다.
문제가 있는 번역
1. An den Wänden hingen Plakate mit Aufschriften wie International Summer Conference of Seville...
벽에는 <세비야 국제 여름 학회> ...이란 제목의 플래카드들이 걸려 있었다.
독일어 Plakat는 주로 포스터를 뜻한다. 물론 영어 placard도 그런 뜻이 있긴 하나 poster가 더 널리 쓰이고 독어 Plakat도 들고 다니는 게시물도 뜻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포스터의 뜻이 기본적이다. 한국어의 플래카드에 해당하는 말은 Transparent나 Spruchband다. 사실 이 경우에는 게시물이 벽에 붙어 있는 (hangen은 걸려 있다와 붙어 있다의 뜻이 다 있음) 것이므로 플래카드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2. Ein heute 52-jähriger Chemiemanager zerstörte aus politischer Unzufriedenheit noch mit Anfang dreißig Wahlplakate in seinem Stadtteil - übrigens von der Partein, die er heute voller Überzeugung wählt.
오십대 초반의 어느 화학회사 대표는 삼십대 초반에 정치적 불만에 가득 차서 자신이 사는 지역의 선거 플래카드를 모조리 찢어버린 일이 있었다.
독일은 한국처럼 선거 기간에 플래카드(현수막)를 걸어 놓지 않는다. 물론 선거 포스터든 플래카드든 후보자나 당의 공약을 알리는 기능을 하기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나 아무튼 정확하게 옮기자면 선거 플래카드가 아니라 선거 포스터가 맞다.
3. A photo of Lontae Burton had been enlarged and mass-produced on large placards, trimmed in black, and under her face were the ominous words: Who killed Lontae? These were dispersed through the crowd, and quickly became the placard of choice, even among the men from the CCNV who'd brought their own protest banners.
확대된 론타 버튼의 사진이 커다란 플래카드로 대량 제작되었다. 사진 주위에는 검은 테가 둘러져 있었다. 사진 밑에는‘누가 론타를 죽였는가?' 하는 무시무시한 말이 적혀 있었다. 군중에게 나누어준 이 플래카드는 곧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플래카드가 되었다. 자기 나름의 시위용 깃발을 가져온 CCNV의 사람들조차도 이 플래카드를 집어들었다.
피켓으로 옮겨야 할 placard를 플래카드로 직역했고 플래카드를 뜻하는 protest banner는 시위용 깃발이라는 잘 안 쓰는 말로 옮겼다.
4. 어디에서 플래카드를 들고와 자리를 잡았다. "아파트 건설 반대"라고 적힌 널빤지였다. "한번 파괴된 숲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도 적혀 있었다.
널빤지에 적는 것은 플래카드가 아니고 피켓이다.
5. 올림픽의 입장 퍼레이드 때 혹시 눈치를 채셨는지요? 전에는 유고슬라비아라는 하나의 플래카드 아래 있었지만, 지금은 플래카드가 다섯 개나 됩니다.
올림픽 개막식에 들고 나오는 것도 피켓이다.
현대 한국어의 외래어는 일본어를 통해 들어온 것이 매우 많지만 흥미롭게도 플래카드와 피켓에 해당하는 일본어 プラカード(푸라카도)와 ピケ(피케)는 위에서 말한 현대 영어의 뜻에 가깝게 쓰인다.
잘된 번역
6. Wahlplakat der CDU aus den fünfziger Jahren
1950년대 독일 기독교 민주당의 선거 포스터
선거 플래카드가 아니라 포스터로 잘 옮겼다.
7. One day, this bookstore owner came to work to see that the competitor on his right had unfurled a huge banner: "Monster Anniversary Sale! Price shlashed 50%!" The banner was larger than his entire storefront.
어느 날 주인이 서점에 출근해보니 오른편에 있는 경쟁자가 다음과 같은 거대한 플래카드를 펼쳐놓은 것을 보게 되었다. “창립 기념 파격세일! `50퍼센트 파격 세일!” 그 플래카드는 그의 서점 입구보다도 더 컸다.
현수막의 뜻으로 플래카드를 썼다. 영어 banner를 그대로 배너라고 부르는 사례가 관찰되기도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주로 인터넷 광고의 일종을 뜻할 때만 쓰는 말이다.
8. When the television cameras present the event to a world audience, it is notable how often a message in English can be seen on a banner or placard as part of the occasion.
텔레비전 카메라가 시위현장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때 시위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플래카드나 피켓에 영어로 써서 들고있는 모습을 흔히 보게 된다.
플래카드와 피켓이 한 문장에 한꺼번에 나와 헷갈릴 수도 있었으나 제대로 옮겼다.
우리말로 옮긴 책 번역문을 통해 실제 사례를 살펴보았다. 사실 낱말 하나의 번역은 사소한 오류가 생길 수도 있고 다른 어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외래어의 뜻이나 쓰임이라는 게 상대적으로 유동적인 경우가 많아서 이런 오역 사례만 갖고 번역 전체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며 번역가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되짚어 봄과 더불어 여러 언어에서 어원이 같은 말들의 의미 차이 내지 변천을 캐물으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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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 재미있으면서도 어렵군요. 이런 공부는 꾸준히 하면 우리한테는 참 좋을 것 같네요.
기계적으로 옮기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인데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
네, 저도 공부 잘 했습니다. 플래카드 나올 때마다 헷갈렸거든요. 감사합니다. ^ ^
몰랐네요. 헷갈린 적도 없고 ㅜㅠ 그게 더 부끄럽다능
전 최근에 khaki 땜에 고민 중이에요. 카키 바지 해버리면 우린 걍 카키색 바지 아니면 밀리터리풍 카고 바지를 떠올리는데 미국은 평범한 베이지색 면바지를 가리킬 때가 더 많은 것 같거든요.
해서 전문가용 해석은 카키 바지/카키 이러고 일반인용은 면바지라고 번역한다고 나름 정리하는 중...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부산쪽의 삽의 사투리가 "수풍푸" (발음은 여러 버젼이 있지만) 인데 이것이 scoop에서 나왔다니 참 신기 하군요. // 외국어가 우리 문화에 들어와서 외래어가 될 경우에는 원래의 의미와 많이 혹은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 저는 한영 번역시 banner, placard를 혼용하고, picketing은 시위하는 내용일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좀 헷갈리게 썼나 보군요. 네덜란드어 schop이 일본어 스콥푸를 거쳐서 경남 방언에 들어왔다는 것이고 영어 scoop는 네덜란드어 schop과 어원적 관련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