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강
정종량
뽀얗게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 도로에 인접하여 야트막한 야산이 있다. 허리가 휜 조선솔 몇 그루와 듬성듬성 들어선 산철쭉 몇 그루, 허리춤 높이의 갈참나무 덤불들이 산의 명맥을 유지해주는 듯싶다. 그래도 도로변에는 이미 저버린 하얀 목련과, 제철을 만난 흰 철쭉, 민들레, 씀바귀, 제비꽃 등 노랗고 하얀 야생화들이 시골풍의 은은한 봄빛을 발하고 있다. 길을 따라 공사용 덤프 차량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도로 한편은 논인데 기존 도로를 확장하여 흙을 돋우고 있다. 도로변을 따라 빈집들이 많아 보인다. 논밭이 꽤 멀리까지 뻗어 있어도 농작물을 심은 곳은 눈에 띄지 않고 자운영과 민들레 벌판이다. 산 뒤편으로는 전주에서 유명하다는 에코시티가 한창 개발 중이다. 향토사단이 어딘가로 이전하고 아파트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얼마나 과밀하게 짓고 있는지 서쪽 하늘에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듯 했다. 에코시티 후문 쪽에는 눈에 익은 초등학교가 보인다. 포플러, 단풍나무, 조팝나무 그리고 버드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에 묻혀서 그런지, 아님 아이들 숫자가 적어서 그런지, 평일인데도 학교는 산사처럼 조용하다. 산 끝자락 도로변 공터에는 옛 집터인 듯 건물 잔해들이 나뒹굴고 있다. 웬 벤츠 한 대가 공터 앞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온다. 젊은 기사가 내리더니 재빨리 오른쪽 뒷문을 연다. 감색 양복에 중절모를 쓴 초로의 신사가 천천히 내려섰다. 신사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동산으로 올라섰다. 뭔가 감회에 젖은 듯 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 산이 왜 이리 초라해졌지? 집은 또 언제 헐린 거야?
-여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신사는 지천으로 핀 철쭉으로 시선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두런거린다.
-어디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눈빛은 점점 초점을 잃어간다. 분명 화사한 봄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가 기사에게 가자고 한다. 기사가 어디로 모실 거냐고 묻자, 학교 방향으로 가자고 한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학교를 지나 에코시티 공사장 옆길로 접어들었다. 아직도 버스가 다니는지 대형 버스와 마주쳐 비켜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학교 뒤쪽으로 고개를 넘어서자 옛 공동묘지 터가 나온다. 이장 공고문이 붙어 있고, 아직 이장을 하지 아니한 묘소 몇 기만이 오지 않는 후손을 애타게 기다리는 듯 했다. 에코시티를 짓느라 옛 부대의 흔적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잠깐 차에서 내린 그가 이젠 짓뭉개진 옛 공동묘지 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는다. 옛 추억들이 떠올라 퍼즐처럼 하나하나 제 자리를 찾아간다.
-바로 저 위에 부대를 출입하던 작은 초소가 있었는데….
그가 다시 차에 올라 에코시티 공사현장을 벗어나자 또 다른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단지 전체가 두터운 측백나무로 둘러 처져있다. 이윽고 아파트 단지 정문에 차를 세웠다. 진한 원시의 향이 코를 자극한다. 그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푸른 빛 고향 냄새다. 서서 좌우를 가름해 보더니 단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기사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 크지 않은 저층 아파트인데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아 보였다. 봉완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핀다. 동사무소가 저곳에 있었는데. 그 안에 야학이 있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건물 안 오른쪽에 야학을 위한 임시 교실이 두 칸 있었다. 물론 이제는 흔적도 없지만 봉완은 옛 추억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당시 군인들 나서서 중학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신설했다. 처음엔 국영수만 가르치다 나중에 한문을 추가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아이들부터 스물이 넘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집안 사정으로 진학을 못한 가난한 청소년들이었다. 낮에는 주로 장사를 하거나 직장을 다니며 막노동을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게 중에는 이곳을 거쳐 중학교에 진학을 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영어의 알파벳을 읽고 쓰는 수준에서 끝마쳤다. 교재로는 당시 군에서 사용하던 ‘중학과정 종합 강의록’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끼니 걱정에 옷마저 변변치 못해서 아이들은 겨울옷을 초여름까지 입고 다녔다. 원래 하나이던 교실을 군인 선생님과 학생들이 낮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흙벽돌을 만들어 둘로 나누었다. 처음엔 전등도 없이 호롱불을 쓰다가 동사무소의 배려로 문명의 혜택을 보기도 했다.
그가 세월을 실감했는지 기사에게 돌아가자고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처음 공터 부근에 있던 부동산으로 가자고 한다.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시골 바닥에 웬 부동산? 도저히 투자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차가 학교 앞과 영신이 살았던 옛 집터를 지나자 조그만 부동산이 나타났다. 도로확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틈새에 부동산이 외로운 투쟁이라도 벌이려는 듯 꿋꿋이 버티고 서있다. 본인도 헐려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할 처지에 무슨 부동산 중개업을 한다고 그러는지 대단한 농담이었다. 그 아래로 식당도 있고 주유소도 보였다.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순간 대형 덤프트럭이 클랙슨을 울리며 가까스로 비켜 지나간다. 트럭 뒤꽁무니에서 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어딘가에서 흙을 실어다 새로 확장하려는 도로예정지를 돋우려는 것 같았다. 중앙 분리선도 없는 좁은 아스팔트 도로는 검은 흙더미 잔해들로 지저분했다. 그래도 도로변에 핀 노랗고 붉은 들꽃이 그나마 삭막한 풍경을 감싸주는 듯 했다. 농촌이라는데 도무지 사람 꼴이 안 보였다. 다 어디로 간 걸까? 경로당? 도시로? 신사는 일단 기사에게 차에서 대기하라고 한다. 그가 부동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곱슬머리 중년 사내가 책상에 앉아 뭔가 열심히 뒤적이고 있다. 작은 키에 얼굴은 가무잡잡한데 머리는 시골스럽지 않게 말총머리를 했다. 옷도 개량 한복 차림이어서 예사 부동산 아저씨들과는 품격이 달라 보였다. 좌우 벽에 대형지도와 함께 에코시티의 조감도가 시원스럽게 걸려 있다. 복덕방 남자는 신사를 보더니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소파로 자리를 안내한다. 다짜고짜 차부터 뭐로 할지 묻는다. 종류라야 달랑 막대 커피 아니면 녹차일 텐데. 그래도 사내의 과잉 친절에 신사는 빙긋이 웃는다. 커피 어떠시냐고 다시 묻자, 봉완이 아무거나 좋다고 한다. 커피 두 잔을 만들어 온다. 오랜만에 찾은 손님이 그리 반가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신사가 먼저 입을 연다.
-요즘 어떻습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죽는 소리를 한다. 서울이며 전주에서 눈이 벌게 달려들던 투기꾼들은 벌써 한물 지나갔단다. 이젠 되파는 매물이 간간이 나오는 정도인데 그것도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어 겨우 문만 열어놓고 버티고 있는 정도란다. 요즘 서울이나 지방이나 부동산 경기가 모두 얼어붙어서 밥 벌어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고 어디서나 듣던 소리다. 그래도 이곳은 에코시티가 한창 올라가니까 거래가 좀 나은 것 아니냐고 되묻자, 남자도 지지 않고 대꾸한다.
-그거 다 옛말입니다. 저거 지금 4~5년째 저러고 있어요. 거래는 이미 짓기 전에 다 끝났고요. 이젠 집값도 오를 만큼 다 올라서 사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근방에서 간간이 나오는 땅을 바라보고 있는 거죠.
무엇보다도 실수요자가 턱없이 부족하단다. 몇 만 세대를 채울 인구가 어디서 나오겠느냐고 했다. 결국 풍선효과를 일부 기대하지만 그것도 어려울 거라고 했다. 신사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탁자 위에 컵을 내려놓으며 명함을 꺼낸다. 명함을 받아든 부동산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캘리포니아주 LA 부동산 투자 컨설팅 주식회사’, 회장 이봉완’
뒷면에는 영어로 뭐라고 쓰여 있다. 부동산 남자도 황급히 일어나 책상 위에서 명함을 집어 든다.
-아이고 이거 초라합니다. '초포부동산'에 오진곤’입니다.
-아 네, 오 사장님, 잘 부탁합니다.
봉완이 자기도 미국 LA에서 부동산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기를 소개했다. 실거래라기보다는 주로 기업을 위한 전문 투자 컨설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따금 지역 TV에도 출연해서 일반 투자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단다.
-아니, 미국 LA에서 부동산 회사를 하시는 분이 어찌 이런 촌구석까지….
남자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얼버무리자, 봉완이 말을 받았다.
-실은 저 위쪽 헐린 집터에 관심이 있어 왔습니다.
-그 땅을 사시려고요?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짐짓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왜요? 어렵습니까?
-아니요, 어렵진 않지만, 왜 하필 그 땅을 사려고 하시는지? 학교 앞에 목이 좋은 땅도 있는데요. 사실 그 공터는 집주인이 전부터 내놓았지만 나가지 않고 있는 땅이라서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정말 모르세요?
-네, 실은 그 땅 주인, 아니 그곳에 살던 사람을 좀 찾아보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조금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부동산 남자가 다시 묻는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도 그 땅 내력을 처음부터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대충은 압니다.
-그럼 그 집이 왜 헐렸고, 거기 설던 사람들은 어디로 이사 갔습니까?
-거기까지는 모르지요. 다만 집이 팔리고 헐린 이유야 알지요.
전에는 그곳에서 이발소를 했고 사진관도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집주인은 집을 세놓지 않고 아예 헐어버렸다. 몇 십 년 된 목조가옥이라 가볍게 철거한 것이다. 집을 헐고 땅을 내놓았는데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땅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질 않았다. 그 집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알려면 저 위쪽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그 앞에 작은 공방이 하나 있다고 한다. 아마 그 주인이 좀 알거란다. 이곳에서 꽤 오래 살았다고 했다. 그곳 아니면 그 아래에 있는 보신탕집 주인도 알거라고 했다. 그곳 주인장이 원래 황해도에서 월남한 사람인데 좀 왈가닥이란다. 그래도 이곳에선 터줏대감이니까 잘 알거라고 했다. 봉완은 부동산을 나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공방부터 먼저 들르기로 했다.
멀리 학교 운동장에서 체육을 하는지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이제야 사람 사는 세상 같아 보였다.
사실 봉완이 바쁜 와중에도 이 먼 시골 벽지를 방문하게 된 것은 영신에 대한 옛 추억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 중 그녀는 유독 봉완을 따랐다. 당시 그녀의 나이 열일곱, 아직 새파란 들꽃 같던 소녀였다. 그녀가 살았던 집이 헐리고 사라진 바로 그 공터였다. 영신이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삼아 오게 된 곳이 한 때 봉완이 가르쳤던 야학이었다. 유난히 웃음꽃이 만발해서 뭇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했다. 활기에 찬 그녀의 모습과는 달리 책을 들고 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해 보였던 그녀의 관심은 온통 야학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인 듯 했다. 특히 봉완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우연히 마주치는 눈빛이라도 영신은 마치 기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봉완의 일거수일투족을 훑어 내렸다. 그해 겨울은 왜 그리도 추웠던지, 교실 앞쪽에 조개탄 난로가 하나 있었지만, 봉완조차도 그 온기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창가나 뒤쪽 문 옆에 앉은 친구들은 얼마나 추웠을지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시기였다. 그래도 대부분 결석 한번 안 하고 꼬박꼬박 나왔다. 비록 낮에는 썰렁하고 볼품없는 두 칸짜리 공간이지만 밤만 되면 삼십여 명이 샛별 같은 눈동자로 초롱초롱 밤을 밝히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가난 저 너머에 있는 핑크빛 꿈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영신의 애정 공세가 본격화된 것은 야학건물 앞 화단에 생강나무, 목련, 살구꽃, 라일락이 화려한 자취를 드러내면서 진한 향내가 진동할 무렵이었다. 저녁 쉬는 시간이면 영신은 봄나물을 캐서 반찬으로 저녁 간식을 만들어왔다. 김밥이며 쑥떡, 찐빵 등 넉넉하게 가져와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래도 마음과 시선은 늘 봉완에게 꽂혀 있었다. 봉완도 다 큰 처녀의 시선이 뒤통수에 와 꽂히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야학이 파하면 봉완은 영신의 차지였다. 봉완의 옆에 바싹 붙어서 부대 후문까지 걸어오면서 무슨 얘기들을 했는지 일 년여를 그렇게 보냈다. 아마도 청소년기 시절이었으니까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물어보고 또 추천해 주지 않았나 싶다. 영신을 처음 봤을 때 봉완은 조금 조숙하다고 생각했다. 장마가 지나고 따가운 햇볕의 예봉이 꺾이던 초가을 저녁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야학을 끝내고 부대로 돌아가던 봉완에게 영신이 다가왔다. 주변엔 가로등도 없고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감싸고 있었다. 지척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학생들조차도 분간이 어려웠다. 오직 빛이라곤 하늘의 은하수와 주변 사단에서 간간히 뿜어져 나오는 보안 탐조등의 차가운 불빛뿐이었다.
-선생님,
-응?
-저…,
-왜 그래?
-저 선생님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응, 그래. 나도.
-장난 아니에요.
-…….
-저 정말 선생님 사랑한단 말이에요.
처음으로 그녀가 평소와 달리 무척 수줍은 표정으로 봉완에게 고백을 했다. 봉완은 학생들 사이에서 의례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하고 가볍게 넘겼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흐뭇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후 야학이 끝나고 마무리할 무렵 영신이 작은 상자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뭐야?
-제가 재미삼아 선생님 얼굴을 조각해봤어요.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어요.
-아니, 뭐라고?
그는 급히 상자를 열었다. 공책 크기보다 조금 작은 나무판에 얼굴을 양각한 판화였다. 머리와 눈썹, 눈동자, 코, 입술까지 아주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있었다. 갈색 음영까지 넣어서 흡사 실물과 유사했다.
-내가 이런 모습인가?
-왜, 싫으세요?
-아니, 놀라워서 그래.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영신에게 이런 재주가 있다니 정말 놀랍군.
-칼로 조각한 후에 인두로 약간 그을린 거예요. 심심하면 아는 사람들 얼굴도 조각해서 선물로도 주곤 했어요. 이런 것 아빠가 알면 불같이 화내요. 계집애가 일은 안 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요.
그 후로도 소인지 거북인지 무슨 동물의 조각들을 선물로 받았는데 미국으로 이사하면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봉완은 영신과 너무 가까워지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 근무를 하면서도 봉완은 영신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조금 조숙해서 몸에 처녀티가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뒤로 동여맨 까만 머리카락이며, 동그란 얼굴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시골 소녀였다. 약간 치켜 올라간 눈매가 조금은 야무져 보이기도 했고 웃을 때 드러나는 잇몸은 천진난만하면서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올림머리를 하고 왔을 때, 귀가 유난히 뒤로 제켜진 게 눈에 띄었다. 어르신들 말씀에 귀가 너무 뒤로 제켜지면 남의 말을 안 듣는다고 했는데, 혼자 피식 웃었다. 오히려 영신의 얼굴에 매력 포인트가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은 영신은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 왼손잡이다. 물건을 줄 때도 이따금 왼손을 사용했다.
영신은 봉완이 자신에 대해 너무 아이 취급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어느 날 조그만 쪽지에 간단한 내용과 함께 자기 나이가 실은 열여덟 살이라고 밝혔다. 자기도 알 것은 다 아는 처녀란다. 사실 열일곱이나 여덟이나 그 나이가 그 나인데. 그리고 저녁이면 교실에 조그만 화병을 교탁 위에 놓았다. 화병 속에는 장미, 들국화, 구절초, 코스모스, 갈대, 원추리, 분꽃, 맨드라미 등 집 안팎에 있는 꽃들을 그때그때 꺾어서 꽂아 놓았다. 뭇 아이들이 들끓어 냄새도 나고 썰렁했지만 영신의 꽃 봉사로 교실 분위기가 확 변했다. 모두가 영신에게 박수를 보냈지만 영신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끈질긴 애정 공세에 봉완도 이젠 야학에 도착하면 눈길은 영신부터 찾았다. 사실상 지정석이 된 뒤편 창가에 있는 영신을 확인한 다음 출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영신은 봉완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둥지를 틀었던 셈이다.
야학의 인기가 많았던지 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 교실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생님들의 대기소마저 없애고 교실을 확장한 터라 더는 공간이 나오질 않았다. 앞으로는 선착순이었다. 늦는 사람은 맨 뒤에 서있거나 창 밖에서 소리만 들어야 했다. 영신도 간혹 교실 뒤쪽에 서 있더니 언제부턴가는 보이질 않았다. 수업이 파할 무렵에야 나타나 봉완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다. 봉완은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마저 졸업하면 봉제회사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가업을 이어가야할 처지였다. 부모님이 영신을 어떻게 바라볼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청춘의 심장에 불이 붙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둘이 바짝 붙어 다니기 시작하자 소문은 금세 퍼져나갔다. 둘 사이에 이미 선을 넘었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영신이 울고불고 부정했지만 그럴수록 아이들은 재미있어 했다.
그해 가을 소풍을 간다는 공지가 떴다. 낮에 일하는 아이들은 야학이 무슨 소풍이냐며 볼멘소리를 뱉어냈다. 결국 이러한 친구들을 배려해서 일요일에 가기로 했다. 날짜가 발표되자 몇몇 여학생들은 선생님들 도시락을 어떻게 할지 걱정을 했다. 그러자 영신은 봉완의 것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자원하고 나섰다. 소풍은 덕진 건지산에 있는 옛 목조 능으로 결정되었다. 걸어서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반장이 눈치도 없이 봉완의 옆에 바짝 붙어 서서 한참을 걸어간다. 틈을 엿보던 영신이 잽싸게 봉완의 옆으로 끼어들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아이들이 일제히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둘은 뒤에서 보내는 따가운 눈초리와 부러움 반, 질투 반의 야유를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다. 서로 손을 꼭 잡고 다정한 연인처럼 앞서 걸었다. 덕진공원 연못까지 한 바퀴 돌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두가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졌다. 영신은 봉완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르익는 둘의 사이처럼 가을도 여물어가고 있다. 비교적 한적한 곳으로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얼핏 보니 짐을 푼 장소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인적이 드물어 기척조차 없었다. 드디어 자리를 잡았다. 누구의 능인지는 모르지만 잔디가 무성하고 폭신폭신했다. 곱게 다듬어진 잔디가 벌써 누런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오늘 따라 가슴이 깊게 파인 반소매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를 입은 영신이 앉기엔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봉완을 보고 마주 앉기가 창피했던지 옆으로 앉아 점심 보자기를 풀려고 했다. 더욱 불편한 모습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봉완이 영신의 손을 잡아 잔디에 앉히려다 그만 균형을 잃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런데 넘어지는 봉완의 발에 영신의 치마가 걸렸다. 자연히 봉완의 몸 위로 영신이 덮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순간 봉완의 눈에 영신의 우윳빛 가슴이 생경한 초록빛 하늘처럼 덮쳐왔다. 그가 당황해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되려 영신의 젖가슴이 봉완의 얼굴을 짖누르게 되었다. 지금껏 참아왔던 봉완이 그만 두 손으로 영신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몸을 일으키려던 영신도 기다렸다는 듯 봉완의 머리를 두 팔로 감쌌다.
-선생님, 정말 사랑해요.
-나도 영신을 사랑해.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멈출 줄을 몰랐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산전수전 다 겪은 듯 허리가 휜 조선솔 두 그루가 이들 젊은이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창포빛 하늘엔 흰 구름도 멈춰 섰고, 새소리도 그쳤다. 가져온 도시락이 오히려 초라한 모습이 됐다. 마지막 순간 봉완이 일어나고 영신이 몸을 일으키자 짓눌렸던 노란 잔디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런데 영신이 누웠던 아래쪽에 채 마르지 않은 선홍빛 반점이 설핏 눈에 띄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한 시간도 더 지난 듯 했다. 점심을 먹는다면 아래에 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찾아 나설 게 분명했다. 오후에 각종 게임과 상품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배는 고팠지만 둘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봉완은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을 참지 못해 제자를 범했으니 문제가 아니 될 수 없었다. 영신과 봉완이 일행에게 돌아오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들의 전신을 훑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은 잔디밭에서 일어나자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잔디를 다 털어내지 못했다. 머리며 등, 바지에 온통 잔디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단순히 놀리는 수준의 야유를 보냈지만 선생님들은 일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중 제일 고참인 국어선생님이 봉완을 부르더니 한쪽으로 끌고 갔다. 둘이 한참 옥신각신 다투더니 얼굴이 많이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해 가을 소풍은 그렇게 지나갔다.
찬바람이 불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영신은 수업을 빠지기 시작했다. 함께 오던 친구에게 물으니 가출을 했단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 묻자 집에서 아버지한테 엄청 혼나고 쫓겨났단다. 며칠 후 어르신 한 분이 한 손에 작대기를 든 채 성난 얼굴로 야학을 찾아왔다. 밭일을 하다 온 것인지 한복 저고리며 바지에 흙물이 붉게 배어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덥수룩한 모습에 눈썹마저 희어서 할아버지를 연상케 했다. 그는 다짜고짜 이봉완 선생이 누구냐고 다그쳐 물었다. 봉완은 직감으로 영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신이 임신했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버지가 딸을 두들겨 팬 뒤 봉완을 잡고 늘어지라며 집에서 내쫒았다고 했다. 영신의 아버지는 혹시 봉완이 딸을 숨기고 있지 않나 해서 찾아온 것이다. 그는 딱 한마디 밖에 안했다.
-내 딸 책임지시오.
봉완은 연신 백배 사죄했다. 딱 부러지게 책임지겠다는 말은 못했지만 눈빛은 이미 수그리고 들어갔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그는 야학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영신만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제대를 한 후에라도 영신을 다시 찾아 꼭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했다. 그의 기억은 여기에서 멈췄다.
봉완은 차를 학교 앞 너른 주차장에 대고 공방으로 향했다. 간판이 하도 오래돼서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글씨도 퇴색했다. 그래도 ‘들풀공방’이라는 이름만은 분명했다. 바로 이웃해서 문방구가 하나 있지만 찾는 이들은 없는 듯 했다. 공방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 실내가 조용하고 어두컴컴해서 사물이 쉽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작업대와 의자들이 ㅁ자형으로 둘려 있고 작업대 위에는 한창 작업 중인지 조각을 하다만 통나무 조각품들이 몇 개 놓여 있다. 자세히 보니 황소와 거북이 상 같기도 했다. 우선 사위를 둘러보니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바닥도 깨끗했다. 작업도구들이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주인이나 일꾼들의 단정함을 말해주는 듯 했다. 선반에는 동물과 새, 꽃, 아이들의 얼굴 등이 새겨진 다양한 볼륨의 작품들이 상당했다. 큰 목재들은 보이지 않았다. 창가 벽에 있는 진열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봉완은 순간 입이 떡 벌어졌다. 석굴암이며, 다보탑, 사자입상, 코끼리상 등이 있는데 아직 끝마무리가 필요한 작품 같아 보였다. 그런데 손가락 마디 크기의 아주 작은 소품도 보였다. 저것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 아무래도 액세서리 같아 보였다. 한참을 정신없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어느 새 주인인지 젊은 남자가 다가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 봉완이 사전에 양해도 없이 들어와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남자는 자기가 주인이라며 천천히 보라고 한다. 봉완이 실은 저 아래 공터에 대해서 좀 문의할게 있다고 했다. 영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얘기 좀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청년이 쾌히 승낙을 했다.
-지금은 한가한 시간이거든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시는 것만 해도 고맙습니다.
그는 봉완을 안으로 안내했다. 아담한 실내 공간이 숨어 있었다. 목제 책상과 의자, 철재 캐비닛, 커피포트 등이 눈에 띄었다. 눈을 돌리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둘이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다. 다가가 아는 체를 하자 쑥스러운 듯 웃는다. 바로 옆 선반에는 여자의 얼굴을 세긴 조각품들이 십 여점 놓여 있고 간혹 남자의 얼굴상도 눈에 띄었다. 비록 문외한이긴 했지만 봉완이 보기에도 보통 작품은 아닌 듯싶었다. 이런 인재가 왜 이런 곳에서 눌러 지낼까 궁금했다. 주인이 녹차 두 잔을 만들어 하나를 건넨다. 이어서 책상 서랍을 열더니 명함을 꺼내 역시 건넨다. 봉완도 명함을 꺼내 건넸다.
-‘들풀공방 대표 박장수’, 박 사장님이시군요. 간판 이름이 참 친근감이 있습니다.
-네, 제가 나이는 아직 젊지만 들풀처럼 험한 인생을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같다 붙인 겁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더욱 많은데 좀 건방진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그 속에 사장님의 인생역정이 묻어 있다니 더욱 정감이 가는군요.
-아니, 미국에서 오셨습니까? 설마 땅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것은 아니시죠?
-왜요, 여기는 안 된다는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회장님 같은 분이 이런 시골구석에 투자할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봉완은 속으로 장수의 얼굴이 어딘지 조금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장님, 근데 저 선반에 있는 조각품 말입니다. 왜 여자들 상만 조각해서 진열해 놨습니까?
-아 네, 제가 원래 고아출신이라 어머님 얼굴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좀 외로울 때 마다 그냥 어머니일거라 생각하고 상상을 해서 만든 것들입니다. 그때그때 느낌에 따라서 조각을 했기 때문에 작품마다 조금씩 모습이 다릅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렇게 성공하셨다니 참 장하십니다. 그런데 앞에 진열된 조각품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보이는데 작품 전시회 같은 것은 안 하셨습니까?
-아이고, 회장님도 참, 이게 무슨 작품이라고요. 이거 아직 소품에 불과합니다. 작품 정도 되려면 열정과 혼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직 멀었습니다. 저희 스승님도 장인 반열엔 들지 못하셨으니까요.
그는 원래 공방이 아닌 가구제작소에서 일을 했다. 한번은 사장이 장수의 손재주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전문 공방에 소개해주었다. 공방에서의 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소한 일거리였다.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작업 준비하고, 나무가죽 벗기고, 잘라서 삶고 말리고, 공구실 정리하는 게 일이었다.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공구 다루는 법을 배우고, 나무 다루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곳 스승처럼 직접 디자인하고 손에 공구를 들고 나무에 조각하는 것은 엄두도 내보지 못했다. 다만 그간 어깨 넘어 보와 왔던 스승님의 작업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쉬는 날이면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을 뿐이다. 그게 지금 실력이다. 장수는 스승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그곳 공방을 나왔다. 결국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했다.
-명함을 보니까 이 회장님, 근데 뭘 물어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봉완이 그제야 이곳을 찾게 된 동기, 즉 옛날 군 시절 영신을 만나 사랑을 나누웠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오랜 세월 그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그녀를 잊지 못해 모든 걸 팽개치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봉완이 이곳에 온 주 목적은 부동산에 있는 게 아니고 아래 공터에서 살았던 영신을 찾아보려고 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장수가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참 대단하시군요. 첫사랑을 못 잊어 긴 세월의 강을 건너 이렇게 찾아오시다니요. 그렇지만 첫사랑이란 들쑤시면 인생의 열정과 향기가 사라지는 것 아닐까요? 첫사랑은 인생의 용광로에 불쏘시개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썩이다보면 불이 꺼질 수도 있고요. 그냥 고이 간직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박 사장님,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난 첫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십 년을 기다려왔소. 그게 허망한 꿈일지라도 말이오.
-그래요, 허망한 꿈. 회장님은 지금 청초했던 옛 소녀의 모습을, 아니 벌써 사라진 무지개를 찾아 헤매고 있는 거라구요. 누군가 말했지요. 먼 뒷날 백합처럼 시들어가는 첫사랑 여인의 모습을 보고선, 차라리 아니 만남보다 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찌되었건 그녀는 내겐 희망의 자양분이었고 이젠 제 인생의 부챕니다. 그녀는 늘 제 기억의 중심에 있어왔습니다. 힘든 이민생활 시절에도 날 쓰러지지 않도록 붙들어준 것도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소?
-그럼 그분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상상이라도 한 번 해보신 적 있습니까?
그녀가 오래 전에 결혼해서 이젠 자손들과 함께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지, 아니면 힘든 막장 생활로 근근이 풀뿌리 연명을 하고 있을지. 기약 없는 연인을 못내 그리워하다 끝내 진이 빠져 이미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나까. 또 이런 모습으로 그녀와 맞닥뜨리게 된다면 어쩔 작정인지.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이 전부’라는 얘기도 있는데 봉완이 사랑의 감성과 이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혹시 ‘수구초심’이라고 옛 추억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벌써 인생의 황혼 길에 접어든 것 아니신지, 장수는 냉정하게 봉완을 몰아붙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장수는 사랑의 미학 전문가라도 되는 양, 봉완의 열망을 좌절시키려 들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영신이라는 소녀에 대한 나 스스로의 오래된 약속이오.
봉완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LA에서 어느 정도 사업기반이 잡히고 아이들도 다 컸다고 생각되자 부인과도 정리를 했다. 이제 영신을 만나 결합한다는 것 보다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살아있다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게 그의 간절한 소망이다. 봉완의 간청에 결국 장수는 유쾌하지 못한 기억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장수가 이곳에 왔을 때 공터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이발하던 사람은 꽤 젊은 친구였다. 인사성도 밝고 주변 학생들, 특히 어른들에게 인기가 있어서 파리 날리는 여느 이발소와는 달리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이발사는 몇 년이 지나 맞선까지 보고 결혼 상대까지 정해져서 한창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멀쩡하던 사람이 시름시름 앓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야말로 돌연사였다. 사람들은 급성 폐암이니, 간암이니 하면서 말이 많았다. 가족들도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으니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이발소는 폐업을 했고 사진관이 들어섰다. 사진사도 꽤 젊은 사람이었는데 붙임성이 있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들 좋아했다. 특히 사진 기술이 좋아서 여학생과 아이들이 그곳을 찾는 주요 고객이었다. 덕분에 돈도 꽤 모았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 친구도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먼저 이발사 총각의 죽음처럼 이번에도 말이 많았다. 무슨 급성 백혈병이니 숨겨둔 아가씨와 어찌어찌 하다가 복상사를 당했다느니 별의 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 그런 와중에 집 가까이에 있는 대형 변압기가 사망의 주범으로 부상했다. 전부터 고압 전류가 흐르는 곳에 오래 있으면 암 발병률이 높다고 했다. 두 젊은이가 죽어나간 것은 아무래도 대형변압기 영향이 크다는데 동네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되는 듯 했다. 드디어 마을 이장이 대표로 나섰다. 그는 한전을 상대로 변압기의 이전을 요구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봤다. 그러자 한전이 나섰다. 이미 이사해버린 사망자의 가족들을 차례로 찾아 나섰다. 그들의 사망원인을 따져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전 측이 마을 이장에게 알려 온 내용에 따르면 두 사람은 암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급 심정지에 의한 사망이며 그 원인은 불명이라고 했다. 결국 밤에 잠을 자다가 급작스레 심장이 멎었다는 것이다.
-아니, 그럼 무엇을 보고 놀라 심장이 멎었다는 겁니까?
-아 네, 아무튼 끝까지 들어 보십시오.
사건이 이렇게 돌아가자 서울에 살고 있던 집 주인은 집을 세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난데없이 스님을 불렀다. 근방에 송광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는데 그곳의 주지 스님이 세상만사에 용하다고 해서 초빙한 것이다. 집 주인이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원인을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스님이 그 집 가까이 오자마자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네 이년, 여기가 어디라고 주저앉아 뭇 사내들을 잡아먹느냐? 냉큼 떠나가지 못할까?
함께 간 사람들이 기절초풍을 했다. 멀쩡한 대낮에 스님이 집안에 대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안 놀랄 사람이 있겠는가? 죽은 처녀 귀신이 그곳을 떠나지 않고 떠돌고 있다고 했다. 스님 눈에는 그 처녀 귀신이 대들보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는 아마 스물 댓 쯤 되어 보인다고 했다. 스님이 왜 여기를 떠나지 않느냐고 묻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꼭 돌아올거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부모의 학대와 모진 세상살이를 견디다 못해 이 한 많은 세상과 결별했지만 그 남자가 오기 전까진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스님 말씀이 지금 몇 십 년이 흘러서 그 남자 돌아올 가망이 없는데 이젠 떠나거라, 하자, 스님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했다. 봉완은 가슴이 철렁했다. 자살했다는 처녀가 영신이란 말인가? 차마 되묻기가 두려웠다. 그는 잠시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기다리다 죽었다고? 그게 정말 영신이라는 건가?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려 애썼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얼핏 그렇게 들었습니다. 저도 이 동네에 들어와서 흘려들은 거니까요. 이상한 소문을 전해들은 집주인은 결국 집을 철거하기로 결심을 했단다. 귀신이 묵을 터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속셈이었다. 그 길로 땅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부동산에서는 조금 주저하는 눈치였다. 흉가 터라는 소문이 파다한 난 마당에 누가 그 땅을 사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럼 그 여자의 가족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거기까진 모르겠습니다. 저 아래 보신탕집 여사장을 만나면 좀 더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여잔 이곳 토박이거든요.
-…,
-어떡하시겠습니까? 아래에 있는 보신탕집 사장을 한 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봉완이 시간을 보자 벌써 저녁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봉완이 아예 저녁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좀 더 하자고 제안했다.
-공방 사장님도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시죠? 제가 저녁을 사겠습니다. 왠지 사장님이 친근감이 가는군요. 사장님의 살아온 얘기도 좀 더 들어보고 싶고요.
-말씀을 안 드렸는데요. 저도 이상하게 회장님께 정감이 갑니다. 그럼 같이 가실까요? 밥값이야 누가 내든 어떻습니까?
사실 보신탕집이라는 말에 봉완은 조금 꺼림칙했다. 하고많은 음식 중에 보신탕이람? 봉완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뭔가 다른 것도 있겠지 하며 공방을 나섰다. 버드나무, 포플러의 짙푸른 나뭇가지가 봄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철쭉 울타리 너머로 군데군데 붉은 장미가 어스름한 저녁 기운을 야하게 채색하고 있다. 멀리 녹색 기와지붕의 아담한 학교는 벌써 인기척이 끊긴 듯 정적에 휩싸여 있다. 인근의 아이들이 놀러와 시끌벅적할 법도 한데, 요즘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실감이 갔다. 기사가 봉완에게 다가와 뭔가 한참을 얘기한다. 봉완이 기사에게 식당으로 함께 가자고 했다. 기사가 마지못해 따라온다. 뒤에서 나오는 장수의 모습을 보자, 봉완은 순간 누군가의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잇몸이 훤히 드러나게 활짝 웃는 모습이며, 귀가 뒤로 제켜진 모습까지 닮아 보였다. 아무렴 우연의 일치겠지. 장수가 앞장서서 봉완을 안내한다. 경운기 한 대가 덜덜덜 소리를 내면서 뒤에서 다가오더니 속도를 줄인다. 경운기에 탄 아저씨가 뒤에서 장수를 부른다.
-어이! 박 사장! 우리 다현이 아직도 거기 있는가?
-아니요, 조금 전 집으로 갔습니다. 무슨 일하고 오세요, 어르신?
-아이고 가뭄 때문에 고추밭, 감자밭이 다 타들어가고 있어. 늦게까지 물 줬어.
다시 경용기가 속도를 내며 앞으로 내달린다. 좌우 들판을 둘러봐도 특별히 뭘 심은 흔적이 보이질 않았다. 마을 주변에 비닐하우스 몇 채만이 듬성듬성 보일 뿐이다. 봉완이 물었다.
-박 사장님, 들판이 휑하네요. 뭘 심은 것 같지도 않고요.
-네, 인건비 때문에 뭘 심고 가꿀 엄두를 못 내는 거지요. 아시잖아요, 요즘 농촌에 일할 사람 없다는 거요. 있어봤자 다 노인네들뿐인데요 뭘. 저쪽 안동네에 미나리 밭이 있는데요, 인부들이 다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요.
-아, 그렇군요.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 보이는 작은 동네가 좀 특이해 보였다. 집은 몇 채 안 돼 보이는데 엄청 커다란 교회가 가분수처럼 보였다. 붉은 벽돌로 높게 지어진 데다가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재해 있어 온통 교회마을 같았다. 봉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마을은 손바닥만 한데 교회는 서울의 백화점 건물 같군. 어디서 신도들을 끌어 모으지?
-허허! 그 교회 우습게 볼 일 아닙니다. 교회 차만 세 대라고요. 주일이면 멀리 다른 도시까지 가서 사람들을 싣고 와요. 부흥회도 자주해서 벽지라도 서울의 기라성 같은 교회 부럽지 않지요.
영신이 살았던 공터에 이르자, 봉완이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다. 무슨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에서였다. 그는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더미를 유심히 살폈다. 담장 모서리에 붉은 접시꽃 한 그루가 긴 꽃대 끄트머리에 꽃 한 송이를 매단 채 외로이 서 있다. 봉완이 넋을 놓고 바라본다. 그는 갑자기 기사를 부르더니 뭐라 이르고, 장수에게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기사가 학교 앞 쪽으로 급히 종종걸음을 치더니, 잠시 후 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난다. 소주 한 병이었다. 이를 받아든 봉완은 공터 안으로 들어가 주변에 술을 뿌리기 시작했다. 먼저 영신의 혼령이 아직도 이곳에 머물러 있다면 이젠 이승의 미련일랑 접고 저승으로 건너가 편히 지낼 것을 기원했다. 봉완에 대한 원한이 있다면 본인에게 저주를 퍼부으라고 했다. 접시꽃이 영신이라도 되는 양, 멀리서 바라보며 뜨겁게 눈시울을 적셨다. 이어 억울하게 청춘을 빼앗긴 두 영혼에게도 깊이 사죄했다. 봉완의 심정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장수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이윽고 봉완에게 다가서더니 나지막하게 이른다.
-이젠 가시죠? 그분도 아마 기뻐하셨을 겁니다. 늦게나마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셨지 않습니까?
봉완이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보신탕집에서 한 무리의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온다. 조금은 비틀거리는 모습들이다. 주인 여자가 따라 나오더니 큰 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며 손을 흔든다. 아무래도 단골인 듯싶었다. 단층 건물 전체가 온통 검게 그은 듯 했다. 역사가 꽤 오래된 듯 했다. 외관은 이래도 얼마 전 TV의 맛집에도 나온 유명한 식당이라고 했다. 남원, 익산, 군산에서까지 원정을 온다고 했다. 입구의 손잡이가 번들번들 했다. 봉완과 장수가 식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식당 안은 의외로 넓었다. 창가 쪽으로 앉은 한 무리의 사내들로 시끌벅적했다. 장수를 보자 체격이 당당해 보이는 여주인이 걸어 나오며 큰 소리로 아는 체를 한다. 가까이 다가오더니 장수에게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
-형님이유?
-아니에요.
-그럼, 아버지?
-아 참, 사장님은 내 가족이 없다는 걸 다 알면서 웬 생뚱맞은 소리를 해 싸요?
-아니, 두 사람이 비슷해서 그런 거 아니유.
둘은 재미있다는 듯 한바탕 웃어젖혔다.
둘은 안내하는 대로 룸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장수가 조금은 장황하게 식사하러 온 목적을 얘기했다. 그러자 여사장 왈,
-아니, 박 사장, 그런 얘기는 소주잔 좀 기울이면서 손님이 없을 때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하지요. 맛있는 것 시키겠습니다. 아니 비싼 것으로요.
봉완이 이어받아 한바탕 폭소를 자아냈다. 대신 봉완과 건너편에 앉은 기사는 오골계 백숙을 주문했다. 그러자 박 사장도 혼자 먹기 그렇다고 오골계로 통일했다. 채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여주인이 소주 몇 병을 들고 온다. 그 여자 얘기를 하려면 이게 필요하단다. 주방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안줏감으로 뭐든 좀 우선 내오라고 했다. 조선족으로 보이는 식당 도우미가 급히 쟁반을 들고 나오자 사장이 받아 테이블을 차린다. 이윽고 잔에 소주를 따랐다. 공방의 박사장이 술병을 받아 먼저 봉완에게 따르고 주인에게도 한 잔 권한다. 셋이서 한 잔씩을 비우자, 여사장이 봉완에게 왜 영신에 대해 묻느냐고 한다. 봉완이 박 사장에게 했던 것처럼 간략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거 참, 늦어도 너무 늦었네.
-네? 뭐라고요?
-아, 아냐, 아니유. 그러니까 다 늙어서 첫 사랑이 그리워 찾아오셨다 이말 아니유? 아님 마나님한테서 쫓겨나기라도 했수?
뭔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위아래를 훑자 봉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것은 아니고 평생 가슴으로만 품어왔던 그 여자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 이렇게 왔다고 했다.
-그럼, 아직까지 결혼을 안 했단 말이유?
-그건 아니고요. 미국에서 결혼해 애들도 있습니다. 이젠 다 컸지요. 다만 부인과는 정리를 했습니다.
-그럼 여자가 살아있다면 합치기라도 할 작정이유?
-그럼 살아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듣자하니 무슨 신파극 같아서 하는 말 아니유.
드디어 뜨거운 김이 솟아오르고, 펄펄 끓는 오골계 백숙 탕이 나오자, 모두가 잠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내 그 여자 얘기부터 하겠수다.
언제 적 얘긴지 이젠 까마득하지만 하여간 오래전 얘기라고 했다. 나이라고 해봤자 채 스물도 안 되었을 때니까. 그 애가 저녁이면 어떤 군인 놈하고 정신없이 싸돌아다녔는데, 어쩌다가 임신을 하게 되었단다. 지금이야 맘에 안 들면 떼어버리고 새 남자 만나면 그만이지만 그 때야 어림도 없었지. 그 놈한테 죽기 살기로 시집을 가야만 하던 때였다. 그래서 영신네 아버지가 그 못된 군인 놈을 쫒아갔다고 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군인이 직업군인도 아니고 일반 병이었는데 제대를 해서 도망가 버렸단다. 집에서는 식구들이 집안 우세시킨다고 난리를 쳤는데 결국 딸은 고집을 부리고 애를 낳고 말았단다. 집안 식구들이 눈만 뜨면 동네 사람들 부끄럽다고 야단을 처댔다. 영신이 애를 데리고 사라졌는데 몇 년이 지나 혼자서 나타났다고 했다. 누구 하나 애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영신네 부모들이 일찍 죽고, 멀리 살던 오빠도 입에 풀칠하기 어렵게 되니까 서로 간에 왕래마저 끊겨버리고 말았단다. 집 한 채만 달랑 물려받은 셈이었다. 언젠가 영신이 그래도 이웃이라고 보신탕집 여자를 찾아와 신세 한탄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얘긴즉슨 이러했다.
영신은 애를 버리고 전주 섬유공장에 취직해서 몇 년을 일했다. 그러다가 괜찮은 직공과 눈이 맞아서 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내놈 이미 결혼해서 애까지 있던 기혼자였다고 했다. 영신은 그길로 회사를 나와 화려한 룸살롱으로 들어갔단다. 직장 다닐 때 회식하던 남자 직원들 따라서 몇 차례 들렸던 곳이라고 했다. 영신은 그곳 여자들이 하는 일도 없이 엄청난 팁을 받는 데 놀랐다고 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밤늦게 한 달 일해 봤자 룸살롱 여급 하루치 팁도 안 되는 현실에 그녀는 분개했단다. 쉽게 벌 것 같은 돈은 회사에 다닐 때 보다 더 모아지지 않았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기둥서방과 삐끼에게 이리저리 뜯기고,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세상을 잊으려다보니 그날그날이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착했던 곳이 군산이었다. 코쟁이 미군을 하나 붙잡은 것이다. 처음엔 우리 촌동네 남정네와는 달리 아주 살갑게 잘해주는 척 하더니만 얼마 안가 짐승으로 돌변했단다. 매일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얼굴과 몸에 멍을 달고 살았다. 생활비 조로 얼마간 주는 척 하더니만, 나중엔 입을 씻고 발길마저 끊어버렸다고 했다.
-혹시 그 아기는 어떻게 되었답니까?
봉완이 차마 여주인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물었다.
-모르죠. 버렸다니까 누굴 주어버렸는지 말을 안했으니까.
식당이 술렁술렁 하더니 왁자지껄 해진다. 아마 손님들이 들이닥친 모양이다. 여주인이 잠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겠다며 일어선다. 봉완은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아이는 살아 있을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니 교육은 제대로 받았을까? 봉완이 죄책감에 고개를 숙이고 양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는 장수는 속으로 참 딱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적 이야긴데 저리도 매달리며 골머리를 썩이시나. 문득 자기 부모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과연 살아있기나 한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고아원이 없어지지만 않았어도 뭔가 흔적을 찾아보기라도 했을 텐데. 장수는 봉완을 한참 바라보다가 술병을 들었다.
-회장님, 그러시지 말고 술이나 한잔 하시죠!
봉완이 고개를 쳐들자 장수가 잔을 내민다. 오골계 탕은 이미 다 식어버린 듯 했다. 장수가 종업원을 불러 다시 데워오라고 하자 봉완이 말렸다. 그냥 먹자고 한다.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봉완을 바라봤으나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곧 이어 주인 여자가 다시 들어섰다.
-내 어디까지 얘기했수? 근데 왜 식사엔 손도 안 댔수? 맛이 없는 겨?
-아닙니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요.
봉완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주인 여자가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군산에서 그 미군 놈하고 그렇게 되고나서 영신이가 갈 데가 없어진 게 아니겠수.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빈 집이어서 영신이 들어와 살게 된 거지. 얼마간 평온한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신이 매일 술타령이었으니까. 아예 이 앞 도로를 휩쓸고 나다니면서 동네방네 소릴 질러댔지. 그런데 언젠가부터 갑자기 조용해진 거야. 밭일하러 오가던 동네 여자들이 수군수군 얘길 했어. 영신 네가 갑자기 소용해졌다고.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별 일이야 있겠어?, 하면서 넘어갔지. 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왔더라고. 아마 누군가가 연락을 한 모양이야. 와서 방문을 열어보고선 그만 모두가 기절해버렸지. 대들보에 목을 맸는데 오래 되서 그랬는지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던 거야. 제대로 배우길 했나, 부모 복을 타고났나, 사내놈을 한 번 제대로 만나본 적이 있나, 정말 박복하고 불쌍한 년이었지. 그 여자 죽고 나서 집은 지금 쥔한테 넘어갔지. 그 때 수리를 해서 세를 놓았는데, 처음엔 이발소를 했단다.
-아, 거기서부터는 내가 다 말했어요. 거기까지면 충분해요. 사장님.
-박 사장이 다 했다고요? 절 주지스님이 와서 한 것까지 다 말했수?
-네, 그 다음부턴 알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장님, 바쁘신데 시간 내줘서요.
봉완이 말하자, 여주인은 식당으로 사라졌다. 장수는 다시 봉완의 잔에 술을 채웠다. 기사가 연신 기웃기웃 하면서 눈치를 준다.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회장님.
봉완이 눈을 감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양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낸다.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내가 정말 죽일 놈이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사람 도리일까요?
-도리라니요. 이미 오래 전 이야기인데요. 그리고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첫사랑은 그야말로 첫눈이자 불장난 아닙니까? 그 추억이 아무리 오래가고 아쉽다 해도 첫눈은 금세 사라지고 맙니다. 그게 세상의 이치고요.
-아니, 불장난이라고요. 박 사장님,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난 영신 씨를 불장난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책임을 지진 못했지만요. 전 평생을 두고 그녀를 잊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장수는 자기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에 놀라서 이내 사과를 했다.
-제가 가방끈이 짧아서 말실수를 했나 봅니다. 회장님의 그 식지 않는 열정을 폄하하려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나도 알고 있소. 박 사장님 진의가 아니라는 것은. 다만 내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사죄가 될지 모르겠소.
장수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 문제는 쉽게 생각할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구상해 보는 게 어떠냐고 한다. 굳이 죽은 영신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게 아니냐고 했다. 생각하던 봉완은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박 사장의 생각이 의외로 깊다고 감탄을 했다. 장수가 식사가 끝난 줄 알고 일어서려고 하자, 봉완이 갑자기 잠깐 앉으라고 한다. 더 들어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번엔 박 사장의 얘기를 좀 듣고 싶다고 했다.
-저기, 사장님은 원래부터 고아였습니까? 아니면 무슨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왜요? 궁금하십니까?
장수는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머뭇머뭇 하더니 이윽고 결심이라도 한 듯 봉완을 바라보았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고아 출신입니다. 저도 엄마가 그리워서 찾아보려고 노력도 많이 해봤습니다만 헛수고였지요.
장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한 많은 설움의 꼭지를 터트렸다.
그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지산 자락에 있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지금은 전라선 철도와 도로가 새로 나는 바람에 고아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어떻게 고아원에 맡겨졌는지는 추적하기 어렵다고 했다. 뒤에 들은 얘기로는 누군가 아이를 낳은 후 보육원에 놓고 갔는데 당시 CCTV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모른다고 했다. 그는 다행히도 세 살 무렵 어느 젊은 교사 부부에게 입양되어 갔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양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졸지에 다시 고아가 된 것이다. 그쪽 할머니 할아버지도 어린 장수를 돌볼 형편이 못 되어 그는 결국 거리로 나와 헤매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처참한 밑바닥 인생이 시작되었다. 구걸을 하기도 하고 가게 막일이며 알바를 하기도 했다. 너무 어려서 그런지 그는 임금이라는 것을 제대로 받아보질 못했다. 그저 하루 두세 끼 목구멍에 풀칠하기 바빴다고 했다. 시커멓고 꾀죄죄하게 돌아다니던 그가 불행 중 다행으로 당시 목공소 사장의 눈에 띄었다. 그때부터 목공일을 배우고, 후에 연이 닿아 공방으로 옮겨, 공예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익히게 되었단다.
봉완이 학업은 어디까지 마쳤느냐고 물었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쳤다고 한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면서 그 정도의 작품 실력이라면 기본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나 생각했다. 갑자기 옛날 영신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는데도 봉완의 얼굴이 담긴 판화를 뚝딱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그는 머리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군.
기사가 다가와 서울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한다. 둘은 밖으로 나왔다. 소주 몇 잔인데도 취기가 도는지 밖의 사물들이 어렴풋이 겹쳐 보인다. 서쪽 하늘을 바라보자 공룡 같은 에코시티의 아파트 건물 사이로 노을빛 잔상이 번진다. 찻잔 속에 번지는 홍차처럼 틈새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하늘은 이들의 사연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순백의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봉완은 별들의 온기에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셋이서 차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시내버스가 가까운 정류장에 멈춰 서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을 토해낸다. 학원 가방을 둘러 맨 아이들과 엄마들의 주고받는 경쾌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마중 나온 노인네들과도 큰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봉완과 장수를 지나쳐 간다. 이를 바라보던 장수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봉완에게 한마디 건넨다.
-회장님, 생각났습니다. 첫사랑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고 하셨지요?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요?
-이 동네에 문화원을 만들면 어떨까요? 저 아이들 보세요. 뭔가 배우러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부모까지 동반해서요. 그리고 그 뒤로 어르신네들 보이시죠. 이곳엔 소일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밭일 아니면 손자들에게만 매달리는 것 아닙니까?
봉완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생각해보겠습니다.
봉완이 차에 오르기 전 갑자기 생각이 나기라도 한 듯 장수에게 한마디 건넨다.
-박 사장님, 부모님 말입니다. 나랑 함께 찾아봅시다. 시청이든 주민센터든 찾아가보면 뭔가 짚이는 게 있지 않을까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봉완이 첫사랑을 찾아 이곳에 왔다가 실망을 하고 돌아서는 것처럼 자기도 가슴에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 얽매이는 것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중요한 것 아니냐며 제법 봉완을 가르치려 들었다. 봉완이 알겠다며, 자주 보자고 손을 내밀자 장수도 기꺼이 손을 내민다.
서울을 향해 한참을 달리는 동안 봉완은 문화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5층으로 1층엔 공방과 전시장을, 2층엔 어르신들 문화센터, 3층엔 아이들의 보습센터, 4~5층엔 마을 도서관을 만들면 어떨까. 지하에 주차장도 만들어야겠군. 그렇지 문화원의 이름은 들풀문화원? 아냐, 영신문화원이 낫겠군. 관장에는 공방, 그 박사장을 앉히는 거야. 자세한 설계는 봉완보다는 마을 토박이인 공방의 박사장이 보다 구체화 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설계까지 맡겨볼 심산이다. 그가 밖을 내다보니 차는 아직 고속도로에 진입하지 않은 듯 했다. 봉완이 다짜고짜 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한다. 기사가 놀라며 너무 늦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자, 무조건 돌리라고 평소 부드럽던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었다. 차가 시내로 들어와 다시 에코시티로 향하자 사위는 칠흑 같은 절벽이 되었다. 그가 아직까지 공방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란다고 봉완은 일사천리로 처리하고 싶어졌다. 이일이 아니면 영신에게 사죄할 방법이 없기라도 하는 양 그는 서둘렀다. 어느덧 차가 공터를 지나 공방 앞에 도착했다. 봉완이 급히 내려 공방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짐작대로 안은 깜깜했다. 그래도 문을 힘껏 밀어봤다. 꿈쩍도 안했다. 자세히 보니 문에 팻말이 걸려 있다.
“매주 수요일은 공휴일”
아, 내일은 쉬는 날이구나. 그래도 그의 가슴 한편으론 뭔가 뿌듯해짐을 느꼈다. 서두르지 말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머나먼 시간의 강을 건너온 듯 그의 표정엔 감회가 서렸다. 그는 호주머니 속에 잡히는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아쉬움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러나 돌아서는 발걸음만큼은 가벼워보였다. 끝.(원고지 139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