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고속도로는 스페인과 또 다르다. 구비가 많지 않아 곧게 뻗어있고, 스페인에는 볼 수 없던 하이패스가 설치되어있다. 하이패스를 최초로 개발한 나라라고 한다. 테주강에 걸려 있는 '4월 25일 다리'를 건너 리스본에 들어 설 무렵 날씨가 갠다. 과거 독재자의 이름을 따서 살라자르 다리라고 부르던 이 다리는 카네이션혁명을 기리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4년 4월 25일, 40년을 넘게 이어진 살라자르 정권의 독재와 해외식민지에서 이어지는 독립운동을 탄압하는데 대하여 반발한 좌파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살라자르 다리를 건너 리스본 시내로 들어오는 군대의 앞에 작은 소녀가 막아섰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소녀의 행동에 놀란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는 순간, 소녀는 카네이션을 내밀었고 군인은 꽃을 받아 총구에 꽂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주면서 지지를 표시했고, 결국은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은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전반기까지 아시아로부터 들여오는 향료와 브라질에서 발견된 금과 귀금속 등이 유입되면서 호황을 맞이했지만, 국내 산업기반이 없어 영국으로부터 소비재를 수입해야 했다. 결국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고스란히 영국으로 나가고 말았다. 1807년 나폴레옹은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포르투갈을 침략하였고 포르투갈 왕실은 1808년 브라질로 도피했다. 19세기 동안 포르투갈은 내전과 혁명, 전쟁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혼란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908년 2월 1일 국왕 동 카를루스와 왕세자 동 루이스 필리프가 암살당했다. 1910년 10월 5일에는 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노동자 투쟁과 소요 사태, 재정위기 등으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1926년 군대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1928년 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군사정권의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32년에는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살라자르는 단일 정당과 국영 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 이스타두 노부 (신국가체제)를 수립하여 국가재정을 회복하였지만, 파시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독재체제를 유지하였다. 살라자르 정권 당시 포르투갈의 사회적 분위기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읽을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만큼이나 정확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전문헌학 수업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손에 넣은 책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끌려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찾아간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체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27쪽)"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쓴 '언어의 연금술사'의 서문의 일부이다. 리스본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본 유혹적인 햇살이 그레고리우스의 발길을 붙들어 아마데우의 행적을 뒤쫓게 한다. 독재권력을 비호하는 비밀경찰의 감시에 리스본 시민들이 얼마나 진저리를 쳤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 설교단에서는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 아마데우가 졸업식장에서 라틴어로 한 연설문의 한 구절이다.
4월 25일 다리를 건너 리스본 시내로 들어가면서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리스본시가 파스텔톤의 도시'라고 하는 표현이 그렇게 안성맞춤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70살이 되던 해 집을 팔고 세계를 떠돌면서 살고 있다는 린과 팀 마틴 부부는 보헤미안 같은 삶의 이야기를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에 담았는데, 포르투갈이 마지막으로 소개된다 . 첫인상이 이스탄블과 샌프란시스코를 합친 것 같았다는 린이 테주강에서 페리를 타고서 바라본 리스본의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빨간색 다리 위로 뜬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리스본은 파스텔 색의 웨딩케이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린이 리스본을 샌프란시스코에 비유한 것은 아마도 4월 25일 다리가 금문교와 같은 사장교인데다가 교각이 빨간 페인트로 칠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버스가 다리를 지나 호시우(Rossio)광장으로 가는 언덕길을 굽이굽이 돌아 내려가면서 샌프란시스코의 꽃길을 떠올렸다. 리스본은 7개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라서 길이 굽이굽이 오르내린다는 것이다. 봄이 되어 길가에 꽃화분이라도 늘어놓으면 샌프란시스코의 꽃길이 오히려 부러워할 것만 같다.
리스본의 명동이라는 호시우 광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광장 부근에 있는 먹자골목의 한 식당에서 포르투갈의 전통음식 바깔라우(Bacalhau)를 먹었다. 바깔라우라는 이름의 염장한 대구를 재료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요리를 이르는 것 같다. 우리가 먹은 바깔라우 요리는 염장한 대구살을 부숴 양파, 계란 그리고 감자 등과 잘 으깨서 만든 음식이었는데, 살을 부순 탓인지 양념이 잘 배어서 대구살의 퍼석한 식감을 느낄 수 없다. 식당에 따라서는 짠맛이 강한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곳 식당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자주 찾는 탓인지 많이 짜지는 않았다. 점심을 먹고 자유시간에는 꼬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까지 걸어갔다. 호시우광장에서 꼬메르시우 광장까지 이르는 지역은 1755년 11월 1일 아침 9시반에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면서 건설된 지역이다. 당시 세 차례의 강진이 이어지고 이어서 11경에는 엄청난 규모의 해일이 세 차례나 테주강을 거슬러 해안을 덮쳤다. 지진이 있은 직후 사망자가 10만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당시 리스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다. 시간이 경과되고서는 2만5천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모든 성인들의 축일인 만성절이라서 많은 시민들이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에 피해가 컸다고 한다. 건축비평가 니콜라스 시라디는 '운명의 날'에 리스본 대지진을 전후한 리스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격렬하게 요동치던 땅이 잠잠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로 해안가를 덮쳤던 테주강이 잔잔해진 뒤에야, 모든 것을 집어삼킨 거대한 불길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생존자들은 리스본의 종말을 경고한 예언들을 기억해냈다.”라고 시작한 서문은 “요한 계시록에 묘사된 최후의 날-당대 사람들은 리스본 지진을 그렇게 기억한다. 사실 1755년 11월 1일은 최후의 날에 다름 아니었다. 땅과 바다, 불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리스본을 돌이킬 수 없는 폐허로 만들었다."라고 마무리된다. 세 번에 걸친 지진과 해일 그리고 화재를 기적적으로 이겨낸 건물도 있었다. 테주강가에 있는 벨렝탑과 제로니모 수도원, 1748년에 개통된 58km에 달하는 기념비적인 수로교, 그리고 상파울루 거리에 있는 주조소(鑄造所)였다. 특히 주조소가 지진을 견뎌냈을 뿐 아니라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많은 금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지 않은 것은 포르투갈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지진으로 무너진 감옥에서 수백 명의 범죄자, 탈주병 그리고 노예들이 빠져나와 약탈과 방화,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주조소를 지키던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버리고 열여덟 살쯤 된 젊은 병사 하나가 꿋꿋하게 자리에 남아 금화 200만냥을 지켜냈던 것이다. 천지가 뒤집히는 위험천만한 순간에도 맡은 임무를 다한 젊은 병사의 용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젊은 병사가 지킨 금화는 유럽 각국에서 답지해온 지원금과 함께 리스본을 재건하는데 소중하게 쓰일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 마흔에 나라를 다스리는 골치 아픈 업무보다는 화려한 오페라공연과 신나는 사냥을 더 즐기던 주제1세Jose I)는 폐허가 된 리스본을 버리고 코임브라, 심지어는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기자는 신하들의 말에 흔들렸다. 하지만 뒷날 폼발 후작으로 더 알려진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ao Jose de Carvalho e Melo)를 접견하고 "하느님께서 내리신 이 형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죽은 자를 묻고 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라는 답변을 듣고 카르발류로 하여금 아수라장이 된 리스본을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운명의 날 35쪽, 에코의 서재, 2009년) 지금의 리스본을 보면 상상도 되지 않을 당시 리스본의 참상은 2011년 3월 11일 일본의 도후쿠지방을 강타한 진도 9.0의 지진과 해일의 참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카르발류는 "11월 1일은 리스본이 지진과 화재로 완전히 파괴된 날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에게는 왕실 재원과 개인 재산을 비롯해 폐허를 딛고 일어설 재원이 충분히 있다."라는 짤막한 메시지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시체를 처리하고 식량을 공급하며 전염병을 막았다. 덕분에 리스본 시민들은 엉망이 된 일상을 조금씩 수습하기 시작했다.
카르발류는 일흔여덟 살 된 포르투갈의 수석도시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아(Manuel da Maia)에게 리스본 재건의 책임을 맡겼다. 군생활을 통하여 군사와 예술, 요새학 등에 정통한 마이아는 수도교건설을 비롯하여 왕궁과 왕실건물들을 정비하는 등, 리스본에 대한 도시공학적 조사를 수행해왔기 때문에 리스본 재건의 적임자였다. 지진이 일어난 두 달 뒤, 마이어는 모두 다섯 가지의 리스본 재건 기획을 왕에게 제출했다.
폐허의 잔해들을 이용하여 옛 리스본과 유사한 모습으로 재건하는 방안으로부터 아예 지진의 잔해들을 싹 밀어내고 새로운 거리를 마음껏 조성하는 방안, 리스본 인근의 벨렝 지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 방안까지 다양하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호시우광장과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을 남북 축으로 한 격자모양의 재건축도면이었다. ‘질서와 진보’라는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을 합리적인 도시계획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노브르스 거리, 즉 귀족의 길이라 불리는 세 개의 대로가 두 광장을 연결했고, 일곱 개의 직선 도로가 대로들을 가로질렀다. 좁고 구불구불한 옛 리스본의 거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로는 가슴이 뻥 뚫릴 만큼 넓어 보였다고 한다. 왕궁이 자리 잡았던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은 왕궁이 있던 서쪽에는 무기고를, 동쪽에는 세관건물을 그리고 북쪽에는 민사법원을 배치하고 남쪽을 비워 테주강 쪽의 전망을 열어 놓았다.
세 개의 노브르스 거리 중 중앙 대로에는 개선문을 배치했으며,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의 중앙에는 주제1세의 기마상을 만들었다. 두 광장 사이에 조성된 건물들은 상공조합별로 배정하였다. 1775년 봄, 지진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음에도 전체 지구의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주제1세의 기마상이 완성되자 동상 제막식을 겸하여 공식적인 축하행사를 열었다. 주제 1세의 예순한 번째 생일인 6월 6일의 일이다. 기마상은 포르투갈의 천재 조각가 조아킹 마샤두 드 카르트루(Joaquin Machado de Castro)가 제작을 맡았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고 흔들리는 포르투갈 사회를 안정시키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은 카르발류는 주제1세의 죽음과 함께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가 추진한 과감한 개혁은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뉘었던 모양이다.
카르발류의 전기를 쓴 케네스 맥스웰은 카르발류에 대한 이중적 평가를 이렇게 정리했다. "1750년부터 1777년까지 포르투갈을 사실상 통치한 폼발은 어떤 사람에게는 계몽절대주의를 펼친 위대한 정치가로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1세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같은 군주들에 비길만한 인물이었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얼치기 철학자이며 잔인한 폭군일 뿐이다."
카르발류는 1934년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에 의하여 포르투갈의 영웅적 정치인으로 재평가되었다. 영웅도 시대를 제대로 만나야 그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고, 인정을 받게 되나 보다.
완공 당시에는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넓어보였다는 노브르스 거리는 명동의 거리보다 좁아 보였지만, 이어지는 아케이드가 깔끔한 인상과 함께 한가롭기까지 하다. 노브르스를 가로 지르는 길을 건널 때는 전차가 달려오지 않나 살펴보아야 한다. 건설한지 100년도 넘었다는 전찻길을 달라는 전차들 가운데는 나무로 된 것도 있다고 한다.
영국 출신 작가 존 버거가 유럽의 여러 장소에서 죽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독특한 형식의 단편소설을 묶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 리스본의 전차가 등장한다. 존이 리스본에 갔을 때 엄마를 만난다. 왜 리스본에서 나를 기다렸냐고 묻는 존에게 엄마는 전차가 다니는 몇 안 되는 도시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존이 어렸을 적에 엄마와 함께 전차를 즐겨 탔는데, 다리가 불편한 엄마가 힘들어 하는데도 불구하고 위층의 맨 앞자리에 앉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앞자리에 앉아 전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엄마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다. 특히 모퉁이를 돌 때가 제일 폼을 잡았다고 한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필자에게 특별한 느낌을 남겼다. 주인공 존이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사람이 죽으면 지상에 머물 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저자는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장소는 그냥 아무 장소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인 것이다.
주인공은 오월의 끝자락에 포르투갈 사이프러스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리스본의 어느 광장에서 우연히 엄마를 만난다. "얼굴이 보이기 한참 전에 걸음걸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도착하기 전에 앉을 생각부터 하는 그 걸음걸이. 내 어머니였다." 그렇다. 작가는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중에서 엄마를 제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 해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필자는 아예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답답한 느낌이 들던 노브르스 거리의 끝에 있는 개선문을 지나는 순간, 널따란 코메르시우 광장이 펼쳐지면서 멀리 테주강을 건너 낮으막한 언덕을 지나 먼 하늘까지 눈에 거치는 것이 없다. '코메르시우광장은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늘 반쯤 빈 듯한 인상을 준다'라는 존 버거의 비유가 그리도 적절할 수가 없다.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주제1세의 기마상은 지금이라도 광장을 차고 튀어 나갈 듯하다.
광장을 지나 테주강변으로 다가가면 4월 25일 다리가 아스라이 보이고, 다리 건너편에는 105m 높이의 좌대 위에 서서 리스본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28m높이의 예수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한다. 테주강(타호강)의 삼각 하구 우안(右岸)에 위치한다. 이 나라 최대의 도시이며, 유럽대륙 대서양연안 굴지의 양항(良港)이기도 하다. 일찍이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시대부터 항구도시로서 알려져 왔으며, BC 205년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14년 이래 다시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리사보나로 불리다가, 1147년 알폰소 1세에 의해 해방되었다. 1255년 코임브라로부터 천도한 뒤 수도로서 현재까지 이르렀으며, 15∼16세기 해외진출시대에는 유럽 유수의 상공업 도시가 되었다. 1755년의 지진과 그에 따른 화재·해일로 시가지의 2/3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인 건조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동부의 알파마 지구에는 성(聖)조지성(城)이, 서부의 벨렝 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렝의 탑, 바스쿠 다 가마를 기념한 고딕양식의 수도원 및 아주다 궁전(현재의 외무성)·박물관 등 역사적인 건축물이 남아 있고, 1290년에 창립된 대학이 있다. 시가지는 3개 부분으로 나뉜다.
중앙부는 바이샤라고 부르는 저습지로 거의 전지역이 지진 후에 재건되어 상업·행정기관이 이곳에 집중한다. 동부는 본래 페니키아인·로마인의 거리였던 옛 시가지, 서부는 신 시가지이고 또 최근의 시가지 확장은 북부로 펼쳐 나가고 있다. 독·부두등 항만시설은 테주강 우안을 따라 30km에 걸치고, 그 북동부에 곡물·냉장창고 및 시멘트·정유·철강·코르크제품 등 공장이 자리한다. 어항은 벨렝 서쪽에, 대서양각지를 잇는 여객항은 시 중심부에 위치하나, 1966년에 테주강에 가로놓인 현수교(懸垂橋:2.3km)가 완공되어 강의 좌안(左岸)에도 철강·화학·조선 등 대공장이 건설되어 발전하고 있다. 유럽공동체(EC)는 1994년도의 유럽문화도시로 이곳을 지정했다.
대지진과 새로운 리스본
1755년 11월 1일에 무서운 대지진이 일어나 리스본 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수많은 교회당을 포함한 1만여 채의 건물이 무너지고, 약 5,000명의 인명 피해를 냈다. 그날은 성자의 날이고, 마침 미사가 진행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성당 안의 초만원을 이룬 신자들이 참사를 당했다. 그러나 사망자들 중에서 귀족들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항상 조금 늦게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기 때문이었다.
지진으로 인한 건물 파손과 잇따른 화재는 도시의 중심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지만, 알파마(Alfama)를 비롯한 몇몇 지역은 경미한 피해를 입었을 뿐이었다. 이 재앙은 폼발 재상의 역량을 평가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는 우선 혼란을 틈타 날뛰는 도둑을 가려 내어 재판에 회부하고, 지방에 주둔해 있던 군의 병력을 리스본으로 불러들여 공포에 질린 시민들을 안정시키고 치안 질서를 회복시켰다.
폼발 재상은 곧이어 수도의 재건 사업에 착수했다. 초심의 건물 소유주들은 파괴된 건물의 수리나 복구를 서둘렀지만, 폼발 재상은 새로운 도시 계획이 확정될 때까지 작업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1758년 7월 12일에 발효된 도시 계획법은 낡은 기존 건물과 도심지 땅의 소유자들에게 계획에 의거하여 건축을 하도록 강요했다.
만약, 5년의 기간 내에 계획을 시행하지 않을 때에는 권리를 상실하게 되고, 땅은 사려는 사람에게 양도되었다. 새롭게 건축할 능력이 없는 많은 소유주들은 주로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에게 권리를 넘겨야만 했다. 1763년에는 많은 집들이 세워졌지만, 거주를 원하는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에 빈 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리스본 시의 설계는 에우제니우 도스 산토스(Eugénio dos Santos), 마누엘 다 마이아(Manuel da Maia), 그리고 카를로스 마르델(Carlos Mardel)의 세 건축 기사가 맡았다. 새로운 도시는 폼발의 착상이 반영되어 기하학적이고 직선을 중시했으며, 모든 건물의 높이는 동일하게 제한되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건물의 소유주가 귀족임을 나타내는 어떠한 표시도 외부에 붙이지 못하도록 지시했던 점이다.
2015년03월12일(목요일) 저녁식사를 했던
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
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
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에서
반주로 마신
와인
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에서 먹은
저녁식사
2015년03월12일(목요일) 여행기
06:30~07:00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에 있는 Hotel Cruz Alta 214호 객실에서 기상하여 세면
07:00~08:00 Hotel Cruz Alta 근방에 있는성모 마리아 발현 성전을 재탐방 (1시간 소요)
08:00~08:45성모 마리아 발현 성전 옆에 있는 Hotel Estrela De Fatima 부속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
08:45~09:00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에 있는 Hotel Cruz Alta 214호 객실로 돌아와서 짐 정리
09:00~10:00전용 버스로 포르투갈의 파티마(Fatima)에 있는 Hotel Cruz Alta를 출발하여
1210년에 아퐁소 2세가 아내인 우래카 왕비(Queen Urraca)에게 결혼 선물로 준 성곽 도시인 오비도스(Obidos)로 이동
(1시간 소요)
10:00~11:001210년에 아퐁소 2세가 아내인 우래카 왕비(Queen Urraca)에게 결혼 선물로 준 성곽 도시인 오비도스(Obidos)를 관광
(1시간 소요)
11:00~12:20전용 버스로 포르투갈의 중서부에 위치한 오비도스(Obidos)를 출발하여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북서쪽으로 28㎞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트라(Sintra)로 이동 (1시간20분 소요)
12:20~12:50 신트라(Sintra)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포르투갈 전통 요리인 바깔라우(Bacalhau 소금에 절인 대구)로 점심식사
12:50~13:00전용 버스로 신트라(Sintra)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신트라 왕궁으로 이동 (10분 소요)
13:00~14:35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및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포르투갈 왕실의 여름 별궁이었던 신트라 왕궁을 관람
(1시간35분 소요)
[왕궁 입장요금 : 8.5유로]
14:35~15:10전용 버스로 신트라(Sintra)를 출발하여
유럽의 최서단이며 포르투갈의 땅끝 마을인 까보다호까(CABO DA ROCA)로 이동 (35분 소요)
15:10~15:40 유럽의 최서단이며 포르투갈의 땅끝 마을인 까보다호까(CABO DA ROCA)를 탐방 (30분 소요)
15:40~16:25전용 버스로 까보다호까(CABO DA ROCA)를 출발하여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Lisbon)에 있는 벨렝(Belém) 탑으로 이동 (45분 소요)
16:25~16:45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벨렝(Belém) 탑을 탐방(20분 소요)
16:45~16:50전용 버스로 벨렝(Belém) 탑을 출발하여
대항해시대의 선구자 엔리케 왕자가 세운 예배당에 미누엘 1세가 제로니모스 파 수도사들을 위해 수도원으로 건립한
제로니모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으로 이동 (5분 소요)
16:50~17:40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제로니모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과
1958년 11월 엔리케 왕자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인 발견의 탑을 탐방 (50분 소요)
17:40~18:00전용 버스로 제로니모스 수도원(Jeronimos Monastery)을 출발하여 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으로 이동
(20분 소요)
18:00~18:45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에서 중국요리로 저녁식사
18:45~19:15전용 버스로 리스본에 있는 중식당인 “동해반점”을 출발하여
포르투갈의 주요항구이자 최대 도시로서, 타호 강이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유럽 대륙 서쪽 끝에서 13㎞ 상류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Lisbon)에 있는 Holiday Inn Express Lisbon Oeiras로 이동 (30분 소요)
19:15~21:30Holiday Inn Express Lisbon Oeiras 111호 객실에 체크인하여 샤워 후 휴식
21:30~Holiday Inn Express Lisbon Oeiras 111호 객실에서 취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