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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하회마을안내
금강송 추천 0 조회 48 12.09.23 1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하회마을를 찾아오신 관광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http://hahoechon,kr/http://하회촌/http://하회마을.org>홈페이지 관리자 유영일 입니다,

하회마을의 옛모습을 보시기위하여 그 먼길을 찾아오셨으나

오늘날 상업화된 모습에 실망이 크시리라 믿습니다,

관계요로에서 무던히 노력하고 있으니 머지않은장래에 정비가 될것 입니다.

더구나 안내자가 부족하여 상세한 설명조차 들어보지못하다보니

그저 아무생각없이 보고만가는 견학수준에 불가한 실정입니다.

내가 이 먼길을와서 무었을 보고가는가? 반문하며 후회만하고 가시는분이 다수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가슴을열고 살펴보실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육백년의 역사가 살아숨쉬고 있는마을입니다, 왜 보실것이 없겠습니까?

2010년8월1일 경주 양동마을과 하회마을이

34차 세계유산 위원회(유네스코) 로부터 세계유산으로 의 지정이 확정되었습니다, 

 

148개국에911건이 세계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는중 우리나라는 현제10건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우선 하회문화권을 3곳으로 나누어서 보시도록 합시다.

 

코스 1

 

 1)병산서원-2)화천서원-3)부용대 정상-4)겸암정사

-5)옥연서당-6)하회마을.

 

 

1) 병산서원

 

1978년 사적260호로 지정되었으며 고려중기부터있던 풍산류씨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을 모체로 건립되었습니다,본래 풍산에있었는데

1572년(선조5)에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서당을 현위치로 옮기고

병산서당으로 개칭 그후 임진왜란때 소실된것을 1607년에 다시 중건하였고

1613년(광해군5)에 서애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등 지방유림이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하여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향사의 기능을 갖춘 서원이 되었습니다,그후1662년 수암 류진(1582~1635)이

추가배향되었으며 1863년(철종14)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고종때 훼철되지않고 존속한 서원과사당 47개소중 그 한곳입니다.

서애는 이황 선생으로부터 성리학을배운 선조때의 문신이며,정언,대사간,대사헌,

대사성,도승지,경상도 관찰사,대제학,병조판서,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역임,

임진왜란때는 선조를 호종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하는데 크게 공헌 했으며,

이순신,권률 등을 등용하여 임진왜란을 역전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서애는 1598년(선조31)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징비록 등을 집필 했습니다,

 

<징비록>은

 우리역사상 가장 위급했든 국란을 이겨낸 구국의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다시는 이나라에 이러한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후세에 알리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시경 소비편에 "미리 지난일을 징계해서 뒷근심이 있을것을 삼가한다"고한

구절에서 따온것 이라합니다,

서애는 하회마을 앞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있는

옥연서당 원락재에서 징비록을 썼습니다,

 

선생의호 서애는 서쪽에있는 언덕이라는 뜻인데,

해마다 여름이면 큰물이 들어서 그때마다 서쪽 언덕에 부닦친 물이 얕은 구렁으로 바로 넘어가서

마을은 언제나 보호가 되었는데 바로 그언덕을

자호로 삼았고,임진왜란때엔 자신의 역활이 서쪽 언덕처럼 나라를 구하는데 일조 했다 합니다,


 

해 뜨는아침 병산서원 전경입니다,  

 

ㄱ) 復禮門(복예문)

 

서원의 정문입니다.본래 만대루 동쪽에 있던 대문을 1921년에 이전하여 중건한

정면세칸,측면한칸 규모의 소슬대문입니다,복예는 <논어>안연 편에나오는

"克己復禮爲仁"에서 따온 말 입니다,"자기를 누르고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라는

 이뜻은 곧 세속적인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극복하고 예를 다시 갖추라는 뜻입니다,

예란 곧 질서이며 아비에게는 孝로서 예를갖추고 연장자에겐

공경(敬)함으로 예를 갖춘다 고합니다.



   

 

 

 

ㄴ)晩對樓 (만대루)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윗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공간을 형성하고 있어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유학의 꼿꼿하고 청청한 맥이 동시에 아래,위층 건물에 살아나 있는듯 합니다,

만대는 중국 당나라 시성 두보의詩<白帝城樓>에나오는 翠屛宜晩對

"푸른절벽은 오후늦게 대할만하니"에서 따온것이나

"병풍같은 푸른 산기운에 취해 늦도록 편안하게 마주 대할만 하다"

라고도 합니다,이 만대루는 유생들이 휴식도하고 풍광을 보며

詩會를 가졌든 곳입니다,앞에있는 작은연당<광영지光影池>는

 방형의 연당속에 원형의 작은섬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방지원도(方池圓島)라하며 주변에는 사철 청청한 대나무가 식재되어 있습니다,

 

백제성루(白帝城樓)    두보

강도한산각(江度寒山閣)   강은 차가운산 전각을 지나고,

성고절새루(城高絶塞樓)   성은 아득한 변방 누각에 높다,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   푸른절벽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녁이 마주할만하고,

백곡회심유(白谷會深遊)   흰바위 골짜기는 여럿모여 즐기기 좋구나,

급급능명안(急急能鳴雁)   울줄아는 기러기는 빠르디 빠르고,

경경불하구(輕輕不下鷗)   내려오지 않는 갈매기는 가볍디 가볍다,

이릉춘색기(夷陵春色起)   이릉에 봄빛이 일어나니,

점의방편주(漸擬放扁舟)   점점점 작은배를 띄워볼까하네.


 

만대루,병산서원,입교당,등현판3개를 한눈에 보실수있습니다.

  

소낚비가 그친뒤라 방지원도는 물에잠기고 대나무는 더욱 푸르기만합니다.

 

 

 

 河南 柳漢尙 님의 작품입니다.

 

竹者何哉乎(죽자하재호) 대라는것이 무엇인고하니,

其本固(기본고) 그 근본은 굳고(단단하고),

其莖直(기경직) 그 줄기는 곧고(바르고),

其心虛(기심허) 그 마음은 비었으며,

其節堅(기절견) 그 마디는 견고하고,

其行直(기행직) 그 행실은 바르고,

 其氣淸(기기청) 그 기운은 맑고,

經霜雪而不고(경상설이불고)

서리와 눈을 맞고도 얼지않는것을보면,

可以爲人法(가이위인법) 가이 사람이 본 받을법하다.

 

 河南 柳 漢 尙 先生 作

 

 

대(竹)라는것은, 그 근본은 굳고,그 줄기는 곧고,

그 마음은 비었으며,그 마디는 견고하고,

그 행실은 바르고,그 기운은 맑고,서리와 눈을 맞고도 얼지 않는것을 보면,

선비가 그와같이본 받을법 하다,하여 옛 선비들은

자연을 의인화 하여,주변에 가까이 두고 심성을 다스렸다 합니다,


 

 

못에 연을심은 이유는,염계 주돈이 선생(1017~1073)께서 지으신 詩 애련설에서 본받아

연꽃의 이미지를 통하여 군자의 고고한 삶을 지향했다 합니다,

 

 

 

 연은 더러운 진흙에서 자라지만 깨끗함을 지닌것이

선비의 이미지를 닮았다 하여,

 

한평생 알아주는이 없어도 저 홀로 은은한 향기를 발하듯

속세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히 살아가는

군자의 삶을 본 받고자 함이라 합니다,

 

동재와 서재앞에 매화나무가 각각 한구루씩 식재되어 있는데,

매화는 일평생 춥게살지만 그러나 그 향기만은 팔지않는다

(梅一生寒不賣香)하여 선비의 고결한 기상을

자연에서 터득하게 하기위함 이라합니다,

  

만대루에 올라서 병산을 바라보면 절로 시가한수 나올것 입니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四時) 가흥(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야 어늬 그지 있으랴

                       

 

봄바람에 꽃은 산에 가득 피어 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樓閣)에 가득히 비쳤으니
춘하추동 사 계절이 각기 지닌 멋은

사람의 흥겨워함과도 다를봐가 없구나!
그러니 더군다나, 고기가 물에서 뛰놀고 소리개는 높이 날며,

흘러가는 구름은 그림자를 던지고,

밝은 햇빛이 온 누리를 비추는

저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에 어찌 한도가 있을 수 있겠느냐?

 

퇴계선생께서 지으신 詩 도산12곡중 전6곡 6수 雲影天光입니다,




 

 

   

 

평생에 여가없어 이름난곳 못왔더니,     백발이된 오늘에야 만대루에 올랐구나,

그림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펼쳐있고,     강물은 소리내며 밤낮으로 흐르누나,

지나간 모든일이 말을타고 달려온듯,     우주간에 내한몸이 오리마냥 떠있구나,

백년동안 이런경치 몇번이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벌써 늙어있네.

 

김삿갓 의시 안양루에올라 에서 인용해서 한수올립니다.  草牧  柳 永 一



  


 ㄷ)立敎堂(입교당)

스승의 가르침을 받든 강학당 입니다.중앙은 강학당,동쪽은 명성재,서쪽은 경의재,

모두 세칸입니다,明誠齋는 학문을 밝게 이룬다는 뜻이있고,敬義齋는 남을 공경하고

의리를 지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경의재 안에는 서창이 있는데 하회 남산에있는 삼태봉을 바라보기 위함이고,

세분의 정승을 탄생시킨다는 전설을 가진터라, 많은인재를 배출코져 배우는

학동들로 하여금 매일 바라보게하여 희망을 갖도록 하였다 합니다,

 

희망은 내것이 되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나 가질수 없으나, 누구나 가질수 있는 희망! 하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이 희망을 미루는 사람은 평생을 자기것으로 소유할수 없다는 사실 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을 바르게 가르친다는 뜻을가진 입교당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병산서원의 중심 역활을 하는곳 입니다.

 

서애선생 께서는살아 생전에 이곳에서 후학과 동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식견이 부족하면 큰일을 하지못할것이며, 재주가 골고루 미치지못하고 한정되어

있으면 사리에 통달하여 활용할줄아는 학자가 될수없다"고 말씀하셨고,

"책이나 읽으며 글자 풀이나 한다고 해서는 선비라 할수없고,

최소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해줄 치국안민 능력이 있어야하고,

오랑캐를 물리치고 재용을 넉넉히하며 문무를 겸해야만 참된 선비라 할수있다"

고 말씀 하셨다 하며

"학문에 익숙하지 못한 덜된선비,부폐한선비,더러운선비,험이 많은선비,

도둑질을 일삼는선비,돈이나 밝히는 천한선비,적은것에 탐을내는 속된선비,

매사에 트집이나 잡고 남의 험담이나 일삼는 쓸데없는선비,

등을 세상에서 없어져야할 못된이름의 선비라며 삼가하라"

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천문,지리,수학,의술,병법,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겸비 하셨다합니다.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입니다.

 

ㄹ)尊德祠(존덕사)



   

 

서원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서애 류성룡 선생과 그의 셋째아들 수암 류진 공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입니다,1610년(광해군2)우복 정경세 공을비롯 사림들이

서당안에 존덕사를 세우고 1614년(광해군6)에 선생의 도학과 훈업을 흠모한 나머지

 선생의 위판을 봉안함으로서 서원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세째아들 류진 공을 1662년(현종3)사림에서 추가로 종향하였습니다,

광해군6년에 주향,광해군12년에 여강서원(숙종때 호계서원으로 사액)으로

옮겨 모셨다가 1629년(인조7)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하고 있습니다.

 

1620년(광해군12)에 여강서원에 퇴계선생의 위판을 모시고 선생의 큰제자 서애,학봉,

두 유현중에 어느분을 상석인 왼쪽에 모시느냐가 문제였습니다.

학봉 측에선 "향당은 막여치"를 주장하여 4살위인 학봉을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고,서애측은 "조정의 막여작"을주장 관직이 영의정에오른

서애를 상위에 두어야 한다고주장함으로서 팽팽히 맞섰습니다.

그래서 양측은 당시 상주에 있는 우복 정경세 공에게 위차의 재정을 받기로 했습니다,

공은 고명한 성리학자로 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했고 왕자의 사부까지 지낸 국가의 원로 였습니다,

영남학파의 최장노로서 널리 존경받고있던 사람입니다,

우복 정경세 공은 재정에서 <두선생의 년치 차는 견수(년장자와 함께갈때 조금뒤에 떨어저서

따라 간다는뜻)에 미치지 않고 작위의 차는 절석에 있다>라고 말하고

서애를 상위인 좌측에 학봉을 하위인 우측에 모시도록 했습니다,

학봉측은 거역할 명분이 없자 일단 승복했습니다, 

그로부터 약200년뒤인 1805년 영남유림에서 서애,학봉,한강,여헌등 4현의 위패를

서울 종묘에 종사키위해 청원을 할때 상소장에 서열문제,

1812년 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합사하는문제,대산유고의 출간분쟁,

묘우내의 위패이동설분쟁,등 조정에서도 해결을 못하고 1629년(인조7)에

서애는 다시 병산서원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2)花川書院(화천서원)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謙菴(겸암) 류운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한 유림이 정조10년

경덕사 를세워 선생을 配享(배향)하였고 그후에 졸재 류원지 공과  동리 김윤안 공을

추가배향 하였습니다.

고종8년에 2차 서원훼철령에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가 1996년에 복설되었고.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승교당, 동재 존현재, 서재 흥학재,

문루 지산루, 원문 유도문, 주소 전사청,이있습니다.

 

 

    

 

3)芙蓉臺 (부용대)정상

하회마을 맞은편에 솟아있는산 이며,강건너산은 일월산줄기를 타고내려왔고

마을쪽은 태백산줄기를 타고내렸왔으며 마을은 부평같아(떠있는 연꽃) 밤낮으로

떠있는 모습을 한눈에 내려다볼수있는 64메타 높이의 자연전망대 입니다.


 

  

굽어는 千尋綠水 (천심록수) ,  아래를 굽어보니 천길이나되는 깊고 푸른물,

돌아보니 萬疊靑山 (만첩청산),           돌아보니 겹겹이 쌓인 푸른산,

十丈紅塵(십장홍진)이 얼마나가렸는고,   번거로운 세상일이 산수의 풍강을 가렸는고?

江湖(강호)에 月白(월백)하거던,            아름다운 자연속에 달이밝으니,

더욱 無心(무심)하여라,        세상일이 더욱 무심하구나.

 

농암 이현보 선생 어부가 에서 발취  草牧 柳 永 一



  

 

남쪽을 바라보면 묻봉오리들이 들쑥날쑥 섞여서서 마치 두손을 마주잡고 읍을하는

형상은 한폭의 그림이요, 어촌두어집이 나무숲사이 강물에 어리어 아른거린다.

 


 

 

4)謙菴精舍(겸암정사)

겸암 류운룡 선생께서 29세때 지으시고 후학을 양성하시든곳 입니다.

부용대 서쪽끝 입암위에 있으며 겸암 선생께서 거처하시면서 자호로 삼으셨던곳이며

현판은 퇴계 이황 선생께서 손수 써보내신것입니다.. 백길 창벽이 우뚝한 그밑으로 푸른강물이

유유히 감돌아 흐르는데 물안개는 아득히 나무?사이에 엉키어 흐릿하게 보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변화하는 장면을 모두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는곳입니다.

벼루의 암벽과 칡덩굴사이로 은연히 가리워져 보일락말락하며 왕왕 이정자가 있는줄도

모를 지경입니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겸암정사 입니다.


 

 

 

겸암정사 서문에서 바라본 갈모바위

 

 

 

 

 겸암정사기(謙巖精舍記)

 

亭在河回之立巖上 ,(정재하회지입암상) 정사가 하회마을의 입암 위에있으니,

謙菴柳先生之所燕處 ,(겸암류선생지소연처) 겸암류선생이거처 하시면서,

而用以自號者也 ,(이용이자호자야) 자호로 삼았던곳이다,

永嘉古稱多名山水 ,(영가고칭다명산수) 영가는옛부터이름난 산수가 많다고하나,

爲東南奇偉秀絶之地 ,(위동남기위수절지지) 동남쪽이 더수려하며 기절하고,

 而河流一帶爲之最 ,(이하류일대위지최) 그중에서도 하회일대가 가장뛰어났다,

綠河數百里 ,(록하수백리) 강물따라 수백리 사이에는,

明潭脩瀨 (명담수뢰)맑은소(沼) 좋은나루와,

奇巖異麓,(기암이록) 기이한 암벽과 빼어난산줄기가,

往往錯置星列 ,(왕왕착치성열) 곳곳에뒤섞여 별처럼 나열해있는데,

而河回一曲爲之首, (이하회일곡위지수) 하회한구비를 첫머리로 꼽는다,

河回下上 ,(하회하상) 하회마을 아래위로,

凌波,達觀之臺,玉淵,翔鳳,遠志之舍,(능파,달관지대,옥연,상봉,원지지사) 

능파 ,달관대와옥연 ,상봉, 원지정사와 ,

與夫桃花遷 萬松洲諸勝, (여부도화천 만송주제승)

더불어서 도화천과 만송주등 여러승경들은,

皆靈眞絶特 (개령진절특) 모두영묘하게 뛰어나서,

望若神仙異境 ,(망약신선이경) 바라보면 흡사 신선이사는 별천지같으나,

而惟斯亭爲왕美 ,(이유사정위왕미) 유독이정자가 더욱아름답다,

夫以河回 ,(부이하회) 대저하회는,

擅永嘉之勝, (천영가지승) 안동에서승지의 제일로 드러났고,

而斯亭又獨專河回之美, (이사정우독전하회지미)

이정자가 또한하회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고있다,

凡明沙玉礫之浩미 ,(범명사옥력지호미) 무릇흰모래사장과 옥같은자갈의 벌이

 넓고 아득하게 쳐저 있고 蒼崖綠水之초천而演이, (창애록수지초천이연이)

백길 푸른 절벽이 우뚝한그밑으로 푸른강물이 유유히감돌아 흐르는데

與夫煙雲杳靄 ,(여부연운묘애) 물안개는 아득히,

樹木엄예 ,(수목엄예) 나무 숲사이에 엉키어 흐릿하게 보이는데,

朝暮而異趣者, (조모이이취자) 아침과 저녁으로 변화하는 장면을,

一寓目而盡取諸庭戶규步之間 ,(일우목이진취제저호규보지간)

모두한눈에 내려다볼수있다 아늑한집안의 뜰을 조심스레거니는사이에,

其所有, (기소유) 그 소유한 바가,

不旣富且多矣 (불기부차다의) 이미 넉넉하고 많지는 않지만,

而亭處兩巖之間 (이정처양암지간) 정자가있는곳은 두암반사이에 서있어,

함하奧衍(함하오연) 골짜기가 넓고깊으나,

宅幽而勢阻 ,(택유이세조) 집은그윽한곳에있고 지세는높아,

循河而過者, (순하이과자) 강기슭을따라서 지나가면서,

濊而視之 ,(예이시지) 옆으로흘켜보면,

隱見出沒於전崖蔓회之間,(은견출몰어전애만회지간)

벼루의 암벽과 칡덩굴사이로 은연히 가리워져보일락 말락하며,

而往往不知有亭焉 ,(이왕왕부지유정언) 왕왕이정자가 있는줄도 모를지경이다,

蓋有而若無 (개유이약무) 대저 있어도 없는것 같고,

內富而外儉 (내부이외검) 안으로는 부유하면서도 밖으로는 검소해보이는것은,

皆近於謙之義也 (개근어겸지의야).모두 "겸(謙)손에 가까운뜻이다"하였다,

先生之處是亭也 (선생지처시정야) 선생이 이정자에서 거처하실때,

則振衣而步岡 (칙진의이보강) 옷을걷고 오르내리며,

伎筑而弄源 ,(기축이농원) 작지를 짚고서서 그원류를 즐기며,

凡淙箏於耳 (범종쟁어이) 무릇맑은물소리를 귀로 듣기도하고,

而최瓚於目者, (이최찬어목자) 옥빛처럼 선명한 물빛을 눈으로 보기도하는것이,

無非所以體仁智風詠之趣者, (무비소이체인지풍영지취자)

모두인(仁)과 지(智)를체득하여 풍영의 취향을 가지지 않은것이없고,

而天地盈謙之道 ,(이천지영겸지도) 천지의 영허(盈虛)의도와,

山川損益之妙 ,(산천손익지묘) 산천손익의묘한이치를,

固默然神會於造次顧眄之頃矣.(고묵연신회어조차고면지경의)

진실로 묵묵히자연그데로 따르면서도 감상하는 순간에 깨달았다,

返及基興極而 ,(급기흥극이반) 미쳐 그흥이 극도에이르면 돌아왔다,

 則一室虛明 (칙일실허명) 방안은 밝고비었는데,

左右圖書 (좌우도서)좌우가 도서로쌓여있어,

涵萬象以一理, 斂太極於方寸 ,(함만상이일리, 렴태극어방촌)

만상이 태극의 일리에모여 함유되어 있음을알았다,

學已成矣 (학이성의) 학문은 이미 성취하였는데도,

而猶不及 (이유불급) 오히려 부족한것같이 여겼고,

道已明矣 (도이명의) 도(道)도이미 깨달았는되도,

而如未之見 ,(이여미지견) 그렇치못한것 같이여겼으나,

自他人視之(자타인시지) 다른사람들은 보기를,

巍然尊且光矣 (외연존차광의) 인격이워낙 놉아서 밝은빛이 난다고 하였으나,

而先生方減然自小 ,(이선생방감연자소) 오히려 모자라는듯이여겨

스스로 조심하여, 면焉日有자자 (면언일유자자) 날마다 부지런히 힘썼으며,

而且以是終身焉(이차이시종신언)이것은종신토록 변치않았다,

在易謙之象曰(재역겸지상왈) ;주역의겸괘(謙卦)에 형상하기를,

"謙謙君子, 卑以自牧",(겸겸군자 비이자목)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는

스스로 자기몸을 낮춘다 는말은 참으로,

先生實有之焉 (선생실유지언)선생께서 실천에 옴김이 있으니,

然則,是亭也,(연칙,시정야,)그런즉 , 이정자는,

 固得先生以著基勝 ,(고득선생이저기승) 진실로 선생을 만나서 그절승 을드러냈고,

而先生,又因是亭, (이선생,우인시정) 선생 또한이정자로인하여,

而助基游詠發舒之趣 (이조기유영발서지취) 산책하며음영(吟詠)하는운치를 길렀으나,

然乃先生之樂 (연내선생지락) 선생의 즐거움은,

則超然於山水之外, (칙초연어산수지외) 초연히도산수밖에 있었으니,

而初不以是亭爲加損也.(이초불이시정위가손야)

처음부터 이정자는 유무에 무었을 더하고 뺄것이 있었겠는가,

先生與西崖季先生 (선생여서애계선생) 선생은동생서애선생과 더불어,

從遊退陶夫子之門 ,(종유퇴도부자지문) 퇴도부자의 문하에 종유하여,

蓋得基心傳之妙 ,(개득기심전지묘) 그심법 전수의묘를 이어받았고,

而受是扁 ,(이수시편) 겸암정사란 편액을 받아, 以揭諸楣 (이게제미)

여러미간(楣間)에 붙였다, 相與博約於斯亭玉淵之間 (상여박약어사정옥연지간)

서로 더불어 굳게맺고 정연(精硏)하던이정사와 옥연정 사이에는,

使煙霞雲物之區(사연하운물지구) 물안개가 끼이는 구역으로서,

鬱然爲仁義道德之鄕 (울연위인의도덕지향) 조용히 자연스럽게인의(仁義)와

도의의 고장으로 드러났으며, 而與古者龍門.武夷, (이여고자용문.무이)

옛날의 용문과 무의(주자)와 더불어,

幷미於千載 ,(병미어천재)명망이 천년토록 드러났으니,

是豈不山水之幸也歟.(시기불산수지행야여)

그어찌 산수의 다행이 아니라 할까보냐?.

亭久而비 ,(정구이비) 정자가 오래되어 허물어지니,

大賢心畵 ,(대현심화) 또한 대현의 마음자취가,

亦逸而不傳 ,(역일이 불전)숨겨저 전하지못해서,

使遺芬剩馥 ,(사유분잉복) 그유풍여운이,

日就於煙沒(일취어연몰) 날로희박해가고,

而過者 ,(이과자) 지나가는 길손들도,

爲之躊躇而悽愴 ,(위지주저이처창) 머뭇거리며 애석해하자,

嗣孫 泳氏 ,(사손 영씨) 후손 영씨가,

慨然思有以新之, (개연사유이신지) 슬프게여겨 이제개축할 마음을굳혀,

積畿歲而成 ,(적기세이성) 몇해동안 주선해서 이룬것인데,

基用心則己勤矣.(기용심칙기근의) 그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然, 以是 (연, 이시 ) 다이루었다는것은,

而欲嗣守先生之緖(이욕사수선생지서)으심컨데 선생께,

則或未也. (칙혹미야)옳치 않을것이다.

夫得先生之心 (부득선생지심) 무릇선생의 심정을얻어,

而後可以語山水,(이후가이어산수) 안이후 가히산수를 말하고,

而知先生之學 (이지선생지학) 선생의지혜와 학문의 깊이를,

然後可以稱斯亭(연후가이칭사정) 안이후에야 가히이정자를 칭찬할수 있을것이다,

觀瀾而悟夫道, (관란이오부도) 물결을보고 도(道)를깨닫고,

仰山而與於仁, (앙산이여어인)산을우러러보고 어진마음을 이르켜서,

谷吾體以若虛之量; (곡오체이약허지량) 내마음을 넓은산곡에비하여

내몸의 허심(虛心)을해아리고,臺吾陟以自卑之序 (대오척이자비지서)

대에올라서는 스스로 자기의차례를 낮춤을생각한,

然後先生之所以樂者 (연후선생지소이락자)다음에야 선생이 즐거워한바를,

庶幾其萬一焉,(서기기만일언) 거의 만분의일 일지라도 알수있을것이다,

登玆堂而覩是扁者,(등자당이도시편자) 이마루에올라 이현판을보고,

可不思所以自修(가불사소이자수) 가히스스로 닦을생각을 하지않고,

而比於先生之觀乎哉(이비어선생지관호재) 감히 선생의관행에 비할손가,

象靖蓋慕先生之風而願學焉者(상정개모선생지풍이원학언자) 상정이 일찍이

선생의인품을 풍문으로듣고 흠모해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而得以荒蕪之辭,(이득이황무지사)지금에와서 거치른글로,

托名其間(탁명기간) 이름을 그사이에 넣케되니,

又豈不後學之幸也歟(우기불후학지행야여)

어찌후학의 영광된행위라 아니하리오,

 

歲丁丑七月之旣望(세정축칠월지기망)

 

정축년(1757년영조33년)7월16일, 韓山李象靖 謹記

 

 (한산 이상정 근기)한산 이상정 삼가지음.

 

2004년 6월 29일.

 

하회문화 지킴이  草牧   柳  永  一

                                      

 

                  

 

 

5)玉淵書堂(옥연서당)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406년전에 이곳 원락재에서 국보 132호인< 징비록>을쓰신역사의 현장입니다.

"임진왜란중에 일어난일을 회고반성하여 뒷날에 이런낭패스런일이

다시는 없도록 미리 경계하여 뒷근심을 없엔다는데 의미를두고 저작하였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습니다.1592(선조25)년에서 1598년까지7년간의

 임진왜란에대한 사실을 기록한수기 이며16권7책이 있습니다.

선생께서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거처하시면서 저술한것이며

"豫基懲而毖後患(예기징이비후환)지난일을 경계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한다".

는뜻에서 <懲毖錄>이라 서명하셨다 합니다.

 


   

 

玉淵書堂記(옥연서당기)

 

余旣作遠志精舍,(여기작원지정사) 나는 이미 원지정사를 지어 놓았으나,

猶恨其村墟近, 未燁幽期,(유한기촌허근, 미협유기)마을이 멀지 않아, 

그윽한 맛을 누리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한 쉬움이 있었다. 

渡北潭, 於石崖東,(도북담, 어석애동) 이에 쪽으로 沼(소)를 건너, 돌벼랑 동쪽으로, 

得異處焉,(득이처언)이한 터를 잡았는데,

前읍湖光,(전읍호광) 앞으로는 호수의풍광을 지녔고, 

後負高阜,(후부고부) 뒤로는 높다란 언덕에 기대었으며,

丹壁峙其右,(단벽치기우) 오른쪽에는 붉은 벼랑이 치솟고, 

白沙榮其左,(백사영기좌) 왼쪽으로는 흰모래가 띠를 두른듯 했다   

 

南望,(남망) 남쪽으로 바라보면,

則群峯錯立(칙군봉착입) 뭇 봉우리들이 들쑥날쑥 섞여 서서

拱읍如畵,(공읍여화) 마치 두 손을 맞잡고, 읍하는 형상이 한폭의 그림이요.

漁村數鮎,(어촌수점) 어촌 두어 집이,

隱映烟樹間.(은영연수간) 나무숲 사이 강물에어리어 아른 거린다. 

花山自北而南,(화산자북이남) 화산은 북쪽에서 달려오다가 남쪽의

隔江相對,(격강상대) 강을 대하고 멈추어 섰다.

每月出東峰,(매월출동봉) 달이 동쪽의 산 봉우리에서 떠 오를 때, 


 

 

 

 

寒影倒垂,(한영도수) 차가운 산그림자는, 

半浸湖水,(반침호수) 반쯤 거꾸로 호수에 드리워지는데,

纖波不起,(섬파불기) 물결 한점 일지않는 잔잔한 강물에, 

金壁相涵,(금벽상함) 금빛 달 그림자까지 담겨진듯한, 

殊可玩也.(수가완야) 관경이야 말로 매우 볼만한 것이었다.

地去人烟, 不甚遠,(지거인연, 불심원) 이 곳이 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으나,

 而前阻深潭,(이전조심담) 앞에 깊은 (소)가있어, 

人欲至者,(인욕지자) 사람이 오고자 해도, 

非舟莫通,(비주막통) 배가 없으면 올 수가 없다.


 

 

舟艤北岸,(주의북안) 그래서 배를 북쪽 기슭에 메어 두면, 

則客來坐沙中,(칙객래좌사중) 사람들이 와서 모래 사장에 앉아, 

招呼無應者,(초호무응자) 이쪽을향해 소리쳐 부르다가 오래도록 대답이 없으면, 

良久乃去,(양구내거) 스스로 돌아가곤 하였으니,

亦遁世幽루之一助也.(역둔세유루지일조야) 

이 또한 세상을 피해 그윽히 들어앉아 사는 일에 한가지 도움이 된다. 

於是,(어시)나는 이것을, 

余心樂之,(여심락지)마음 속으로 좋아하여,

 欲作小宇,(욕작소우)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爲靜居終老之所.(위정거종노지소) 늙도록 조용히 거처할 곳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願家貧無計,(원가빈무계) 살피건데 집이 가난하여 도무지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 

有山僧誕弘者,(유산승탄홍자) 마침 산승탄홍이란 자가, 

自薦幹其役,(자천간기역) 그 건축을 주관하고, 

資以粟帛,(자이속백) 곡식과 베를내어 놓으니, 

自丙子始, 越十年丙戌粗成,(자병자시,월십년병술조성) 

일을 시작한 병자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병술년에, 

可棲息.(가서식) 겨우깃들고 쉴만하게 되었다. 

其制, 爲堂者二間,(기제, 위당자이간) 집 구조는 당2칸은 

名曰瞰綠,(명왈 감록) 감록헌이라 부르고, 

取王羲之'仰眺碧天際, 俯瞰綠水외'之語也.(취왕희지앙조벽천제부감록수외지어야) 

왕희지의"우러러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래론 푸른 물구비 바라보네"

라는 시어에서 따온 것이고. 

堂之東,爲燕居之室二間,( 당지동, 위연거지실이간) 

이 당에 붙어 있는 편히 쉴 수 있는 방 2칸 이름을, 

명왈세심(名曰洗心,)洗心齋(세심재)라 지었으니,

取易繫辭中語,(취역계사중어) 주역계사편중 

意或從事於斯, 以庶幾萬一爾.(의혹종사어사 이서기만일이) 

여기에 마음을 두어 만에 하나라도 이루기를 바란다.”는뜻을 담고 있다. 

又齋在北者三間,(우재재북 자삼간) 또 북쪽 집3칸은,

以舍守僧, 取禪家說, 名曰玩寂,(이사수승 취선가설 명왈완적) 이 집을 지키는 중을 위해, 

선가의 말을 따서, 玩寂齋(완적재)라 하였다. 

東爲齋二間,(동위재 이간) 동향집 2칸은,

以待朋友之來訪者,名遠樂,(이대붕우지래방자 명원락) 

친구의 내방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遠樂齋(원락재)라 하였는데, 

取'自遠樂乎'之語.(취자원락호지어) 이 명칭은 論語(논어)에서 따온 것이다.

 由齋西出爲小軒二間,(유재서출위소헌이간)

이재의 서쪽으로낸 조그마한 마루 2칸은

與洗心齋相比, 名曰愛吾(여세심재상비, 명왈애오) 

세심재와 이웃하고 있기에, 愛吾軒(애오헌)이라 하였다.

取淵明'吾亦愛吾廬'之語(취연명'오역애오려'지어)

이 명칭은陶淵明(도연명)의 시<讀山海經>(독산해경)에서

<衆鳥欣有托, 吾亦愛吾盧>”(중조흔유탁,오역애오려) 

“뭇새들도 깃들 둥지를 ?아 기뻐하듯이,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노라.

라는 시어에서 따온것이다.

合而扁之,曰玉淵書堂(합이편지,왈옥연 서당) 이 모두를 합하여 편액하기를,

玉淵書堂(옥연서당)이라 하였다.

江水至此 匯爲深潭,(합강수지차, 회위심담) 

대개 강물이 흐르다가 이 곳에 이르러서는, 깊은 (소)가 되었고, 

其色潔淨,(기색결정) 그 물빛이 깨끗하고 맑아,

如玉故名.(여옥고명)옥과 같은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人苟體其意, (인구체기의) 사람이 진실로 그 뜻을 본 받고자 한다면,

則玉之潔, 淵之澄,(칙옥지결 연지징) 옥의 깨끗함과, (소)의 맑음이란,

皆君子之所貴乎道者也.(개군자지소귀호 도자야) 

이 모두가 군자가 귀하게 여길 (도)인 것이다.

余嘗觀古人之言曰(여상관고인지언왈) 내가 일찍이옛 사람의 말을 살펴보건데,

"人生貴適意,(인생귀적의) "인생이란 스스로 뜻에 맞는 것이 귀한 것이지, 

富貴何爲,"(부귀하위) 부귀가 무슨 귀한 것이 되리요하였거니와," 

余以鄙拙,(여이비졸) 내가 옹졸하고 부족하여서,

素無行世之願,(소무행세지원) 평소 행세하기를 원치 않았으나, 

譬如미鹿之性,(비여미록지성) 사슴, 고라니 같은내 천성은, 

山野其適, 非城市間物,(산야기적 비성시간물) 

산야에 삶이 알맞지,시정간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而中年妄出宦途,(이중년망출이도) 중년에 망령되게도벼슬길에 나가, 

汨沒聲利地場, 二十餘年矣.(골몰성리지장 이십여년의)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20여년이 되었다. 

擧足搖手,(거족요수) 손발움직일 때마다,

動成駭觸,(동성해촉) 걸핏하면 해괴한 일만 저질렀으니,

當其時,大悶無聊,(당기시 대민무료) 그 당시에, 크게 답답해했었고,슬퍼하면서, 

未嘗不창然思茂林豊草之爲樂也.(미상불창연사무림풍초지위락야) 

이 곳의 무성한 숲속을 그리워하며 즐거움을 삼았던 것이다. 

今幸蒙恩,(금행몽은) 지금은 임금의 은혜로,

解綬南歸,(해수남귀) 벼슬을 그만 두고 돌아 올 수 있었으니,

軒曼之榮過耳,(헌만지영과이) 정말 벼슬 따위와 같은 영화란 이미지난일이었다, 

鳥音而日丘一壑(조음이일구일학)새소리 들리는 언덕과 골짜기의 

樂意方深.(락의방심) 즐거움이 깊어 가는 이 때에. 

時, 而吾堂適成,(시시, 이오당적성) 마침, 나의 집이 완성되었다.

將杜門却掃, 潛深伏奧(장두문각소, 잠심복오) 문을 닫고,찾아오는이도 사양한채, 

면仰乎一室之內,(면앙호일실지내)방안에 깊이 들어 박혀 지내며, 

放浪乎山谿之間,(방랑호산계지간) 산과 계곡을이리저리 거닐기도 하며,

圖書,足以供玩索之樂,(도서,족이공완삭지락) 때론 서적들로취미를 붙여, 

그 의미를 궁구하기도 하고,

疏려, 足以忘芻환之美.(소려, 족이망추환지미) 

성긴 밥이나,맛있는 음식의 기름짐을 잊기에 족하니. 

佳辰美景,(가진미경) 좋은 때 아름다운 경치에, 

朋偶集,(정붕우집) 정겨운 벗들이 우연히모여들면, 

則與之,窮回溪,(칙여지,궁회계) 그들과 더불어,굽이진 계곡을 거닐기도 하며, 

坐巖石,(좌암석) 바위에 앉아 望靑天,(망청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歌白雲,(가백운) 흰구름을 읊기도 하면서,

蕩押魚鳥,(탕압어조) 물고기 새들과 함께 어울려 호탕히 지내노라면,

皆足以自樂而忘憂.(개족이자락이망우)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즐겁게 하여 근심을 잊는다.

嗚呼, 斯亦人生適意之大者,(오호,사역인생적의지대자) 

아! 이것 또한“인생이 스스로의 뜻에 맞는 큰 것인 즉"

外慕何爲,(외모하위) 밖으로 달리 그 무엇을 그리워할 것인가?

懼斯言之不固,(구사언지불고) 내 이 말을 굳게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聊書壁而自警.(요서벽이자경) 

벽에다가 글로써 

붙여 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하고져 하노라.


 

丙戌季夏(병술계하) 丙戌年(1586) 늦 여름

主人 西厓居士記(주인 서애거사 적다)

甲申年(갑신년) 2004. 3월 7일

河庭齋에서 십삼대손 

 柳 永 一  번역

 

 

 

원지정사


 

 

<遠志精舍記(원지정사기)>

 

 築精舍 干北林(축정사 간북림)

북쪽 숲속에 정사를 지으니,

 

凡五間(범오간)

모두 다섯칸이다.

 

東爲堂, 西爲齋(동위당, 서위재)

동쪽은 마루요,

서쪽은 서재이다.

 

由齋北出(유재북출)

서재에서 북쪽으로 나가다가,

 

又轉而西(우전이서)

서쪽으로 돌아서,

 

高爲? 以俯江水(고위루 이부강수)

높게 루를 지었는데,

강물을 내려다 보기 위함이다.

 

旣成, 扁其額曰, 遠志(기성, 편기액왈, 원지)

집을 다 짓고서,

편액하기를

 원지라 하고,

 

湖山登望之美, 不識言(호산등망지미, 불식언)

산수의 아름다움은

 말하지 않았다.

 

客疑其義, 余告之曰, 遠志(객의기의, 여고지왈, 원지)

 어떤 나그네가 그 뜻을

이상히 여기므로 내가 그에게 일러주기를

원지는

 

 本藥名, 一名小草(본약명, 일명소초)

원래 약초이름으로서

 일명 小草(소초)라고 한다.

 

昔 晋人, 問謝 安曰 “遠志, 小草, 一物”(석 진인, 문사 안왈, “원지, 소초, 일물”)

 옛날 중국의 진(晋)나라 사람 환온(桓溫)이

사안(謝安 字는 安石)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한물건인데

 

而何 爲二名(이하 위이명)

어찌

 두 이름을 쓰는가? 라고 했다.

 

或曰, 處爲遠志, 出爲小草(혹왈, 처위원지, 출위소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들어앉아 있을 때는 원지요.

 밖에 나가서는 소초가 된다하니,

 

安有愧色(안유괴색)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余在山, 固無 遠志, 出 而爲小草, 則固也(여재산, 고무 원지, 출 이위소초, 칙고야)

내가 산야에 살 때에

 본래 원지가 없었으니,

시정간에 나아가 소초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是有相類者(시유상류자)

이것이 서로가 비슷한 점이다.

 

又醫家 以遠志, 專治心氣, 能撥昏?煩(우의가 이원지, 전치심기, 능발혼익번)

또한 의가(醫家)에서는 원지로서,

오로지 심기(心氣)를 다스려,

혼탁한 정신과 번민을 풀어 헤칠 수 있다.

 

余年來, 患心氣, 每餌藥(여년래, 환심기, 매이약)

내가 여러해 전부터,

 심기가 맑지 못함을 걱정하여

늘 약을 쓸때마다

 

輒用遠志(첩용원지)

원지를 사용하니,

 

其功不敢望, 因推類, 而引其義(기공불감망, 인추류, 이인기의)

그 공을 내 감히 잊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뜻을 미루어 보면

 

治心之說, 亦儒者商談, 如此數義(치심지설, 역유자상담, 여차수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설(說)은

우리 선비들이

늘 하는 말이다.

 

 皆可爲齋號(개가위재호)

“이 두가지 뜻만 하더라도 서재 이름으로 할만하다.” 하였다.

 

 而舍後西山, 適産遠志(이사후서산, 적산원지)

정사 뒤 서산에

 마침 원지가 저절로 자라나

 

每山雨時至, 靑翠秀佳, 助爲精舍幽趣(매산우시지, 청취수가, 조위정사유취)

늘 산비에 흠씩

 푸른 빛을 머금고,

빼어나는 모습이

 

隨命精舍, 曰遠志, 取其實也(수명정사, 왈원지, 취기실야)

정사의 그윽한 정취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음에랴!

 드디어 원지정사라고 이름 한 것이니,

모두 사실을 취해온 것이다.

 

嗚呼, 遠者, 近之積也(오호, 원자, 근지적야)

 아!

먼 것은

가까운 것이 쌓여져 나아간 것이요.

 

志者, 心之所之也(지자, 심지소지야)

 뜻(志)은

마음이 방향을 잡은 것이다.

 

上下四方之宇, 古往今來之宙, 可謂遠矣(상하사방지우, 고왕금래지주, 가위원의)

상하사방의 끝없는 공간으로 보나

아득한 옛날로부터 흘러온 지금까지의 시간으로 보나,

우주란 참으로 멀고도 먼 것이다.

 

而吾之心, 皆得之焉(이오지심, 개득지언)

내 마음이

방향을 얻었고,

 

 之焉 故有所玩(지언 고유소완)

 방향을 얻은 까닭에

기뻐하는 것이며,

 

玩焉 故有所樂(완언 고유소락)

기뻐하므로서

즐거움을 얻었고,

 

 樂焉 故有所望(락언 고유소망)

즐거워하므로서

자연 잊은 것이 있으니

 

望者何 忘其室之小也(망자하 망기실지소야)

잊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의 협소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淵明詩曰(연명시왈)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心遠之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세속과 머니 사는 것이 절로 한가롭도다 하였으니

 

微斯人, 五誰與歸, 是爲記(미사인, 오수여귀, 시위기)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취향(趣向)을 같이 할 것이었던가!

이로서 기(記)하노라.

 

戊寅 四月 望前一日 主人 西厓居士 書

(무인 4월 망전1일 주인 서애거사서)

 

무인년(1578년 선조11년) 4월 보름 하루전날

주인 서애거사 쓰다.

 

甲申年(갑신년) 2004. 2. 河庭齋에서 십삼대손 柳永一 근역

 

 

 

 陶淵明의 詩 飮酒

 

結廬在人境(결여재인경)이나, 내가사는 초가집 마을안에 있으되,

而無車馬暄(이무거마훤)이라, 시끄럽던 수레소리 들려오지 않노라.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오. 그대에게 묻노니 이럴수가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이라, 마음이 멀리 있으매 사는 것이 절로 한가로울수밖에,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라가 , 동쪽편 울타리밑에서 국화송이 꺽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이라 , 허리펴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보노라.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에, 산의기운 밤낮없이 매맑기 그지없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이라, 날새들은 서로서로 짝지어 돌아간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하나, 내가 사는 이 삶에 참뜻 있건마는,

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이라. 말하려하다가 할말 이미 잊었노라.

 

 

 

※ 욕변이망언(欲辯已忘言), 말하고자 하나 이미 할말을 잊음.

老子의 도덕경 56장에서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

(言者不知, 知者不言)에서 나온 것.

 

 

6)하회마을

 

河回마을 (국가민속자료 122호)은, 풍산류씨(豊山柳氏) 일문의 관향(一門의 貫鄕)으로서,

육백 여 년동안, 대를 이어 살아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씨족마을입니다.

옛 부터 이 마을은 지형적으로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등으로,

일컬어져왔으며 경관(景觀)이 수려(秀麗)하고,거유(巨儒)와 명관(名官)이

많이 배출된 자랑스러운 고장이기도 합니다.특히 우리 역사상,

위대한 성리학자(性理學者)이신, 문경공(文敬公) 겸암 류운룡(謙菴 柳雲龍)선생과,

그의 아우이며 임진왜란 때의 치란재상(治亂宰相)이신,

문충공 서애 류성룡(文忠公 西厓 柳成龍)선생이,

바로 이 마을에서 자라 나셨습니다.

서애선생은, 어려운 국란(國亂)을 당하여, 영의정과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

비변사(備邊司)와, 훈련도감(訓練都監)의 도제조(都堤調)등, 중책(重責)을

 한몸에 지시고, 심모원려(深謨遠慮)의 경륜(經綸)으로서,

몸소 발란극복(撥亂克服)하여, 국가와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 하셨고,

한편으로는 겸암선생과 함께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에게서,

도학(道學)의 진결(眞訣)을 전승(傳承)한, 영남학맥(嶺南學脈)의

거봉(巨峯)을 이루는 대유학자(大儒學者)이기도 합니다.

또한 하회는, 려말선초(麗末鮮初)부터 내려오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고이 간직한 채,대대로 전수(翟?해온, 전통 민속마을이기도 합니다.

하회 별신제(別神祭)나, 줄불놀이 등은,우리문화를 대표하는 민속놀이이며,

 양진당(보물306호)이나, 충효당(보물414호)같은, 유서깊은 종택고가(宗宅古家)는,

잃어져 가는 전통문화의 숨결을 아직도 옛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특히 忠孝堂 경내에는, 1966년 6월11일 정부의 지원하에,서애 선생의 유물전시관

(遺物展示館)인,영모각(永募閣)을 건립하여, 일반에게 널리 공개함으로서,

 그 동안 많은 관람객들이 西厓선생의 위업(偉業)과

사상(思想)을 쉽게 접할수 있었습니다.

특히 서애선생 유물중, 징비록(懲毖錄)은, 국보132호로(1969년11월11일)지정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일을 회고 반성하여,

뒷날에 이런 낭패스런일이, 없도록 미리 조심한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

 저작하였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습니다.

1592년(선조25년)에서, 1598년까지 7년간의 임진왜란에 대한 사실을 기록한 수기이며,

 16권7책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생께서 벼슬에서 물러나

옥연서당에서 거쳐하시면서 저술한 것이며, 외손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선생의 손자께서 조수익에게 부탁하여

1647년(인조25년)에 간행한 것으로서 시경 주송 소비장(詩經 周頌 小毖章)에

 "예기징 이비후환(豫基懲 而毖後患)", "미리 경계해서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한다."

에서 따온 것인데"내 지난일을 경계하여 뒷근심이 있을까 삼가한다" 는

 뜻으로 "懲毖錄"이라 서명하셨다.하며,그 외 방대한 유물(보물160호 11종 22점,

보물406호 35점등)과,저술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날 이곳 하회마을을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하며,

가치를 따질수 없는 보물이라고 합니다.

물질을 떠나,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입니다.

옛것을 통해, 새것을 창조하려는 의지요, 정신입니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고장의 문화유산을 가꾸고 또 그것을 후손들에게 창조적인 에너지로 이어주어서,

세계속의 위대한 대한민국의 새역사를 우리모두 다함께 만들어 갑시다.

 

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부-어스틴 이라는 분이 <탐구자들>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큰 질문에 대해,

"역사는 쉼없이, 묻는자 에게만 답한다"고 하였습니다.

많은분들이 서애 류성룡 선생(1542 중종37 년10월1일~1607 선조40년 5월6일)의

진정한 인간상(人間像)과 河回마을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된다면,더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2004년 3월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04-1 하정재 에서 하회문화 지킴이

 

        柳  永  一  삼가 아뢰옵니다.



  

부용대 위에서 내려다본 설경


 

강건너 겸암정사 에서찍은 설경입니다.


  

 

보물306 양진당 입니다.

고려말 건축양식이며 조선조 초기건축물 입니다. 공조전서 벼슬에서 물러나이곳에 세거지를 

  마련하신 입향시조 류종혜 공께서 건축하신 이마을 최초의 건물입니다.

이자리에 서있든 재목을사용하여 기둥의로 썼다하며 여러차례 시행착오가있어

중단하고 덕이 부족한데 원인을두고 만인에게 덕을베푼연후에 다시시작하여 완성했다는

고사가있으며 당초에는 당호없이 큰집이라고만 불렀으나 충효당이 나중에

지어지고 당호를 사용하게되어 그당시 주손인 류영 공의 호를 당호로사용케 되었으나

그후 문중회의에서 입암 류중영 선생의 호를 당호로 쓰게되었 습니다.

한집안에 두분의 불천위 사당을모시고 있으며 높은지붕엔 입암선생의 위패를모시고

옆에다른사당엔 겸암선생의 위패를모시고 있습니다.

 


 

 

양진당 안채입니다.


    

 

강건너 겸암정사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입니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유물전시관입니다. 맞은편에 선생의불천위사당이 있습니다. 


 

보물 414호 충효당 입니다.

서애 선생이 임진왜란이 끝나고 벼슬에서물러나서  옥연정사에서 거처하시며

국보132호인 징비록을 집필하시고 학가산 기슭에있는 서미동에 삼간초옥(농환재)

을 지으시고 말년을 보내시다가 66세의 생을마감하셨습니다.

사당조차 세울수없어 지역유림들이 후학들과 힘을합처 선생의 손자를도와 집을지어

충효당 이란당호를 쓰게되었고 증손자 대에와서 사랑채를 증축하고 8대손 일우

류상조 공이 정조때 병조판서를 부름받고 대문간채를 지었다합니다.


 

충효당 사랑채 입니다.


 

충효당 대문간채 입니다.  

 

충효당 대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대청위에 당호 현판이 붙어있는데 숙종때

우의정 을지낸 명필 미수 허목 선생의 전서채로쓴< 충효당> 이란글씨입니다.

선생은 주역에 해박한식견이있어 육효를풀이하여 쓰신글씨라 충자는 옥편에도

없는글씨이며 선생의 글씨가 붙어있는곳엔 재화를 입지않는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선생은 백호 임제 선생의 외손자이며 , 오리 이원익 선생의 손서 이기도합니다.

태어날때 손바닥에 글월文자를 손금으로 세기고 태어나셨다하며,전서채글씨는

동양 제1인자란 찬사를 받고있습니다.

 

하회마을 동행안내 문화해설사 성균관전학 유영일 010-8588-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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