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길고 팀별 분석을 해놨으니 읽고싶은 부분만 읽으셔도 되고...
10여년 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가장 인상깊었던건 역시 주형광의 18승과 221탈삼진~~
해태 부분에서 고졸신인 "김상진" 부분이 참 안타까웠다는...
정규시즌 경과
'도깨비시즌'이라고들 했다. 프로야구 전체 판도가 당초 예상에 비해 완전히 물구나무서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전년도에 반게임차로 1, 2위를 주고 받았던 LG와 OB는 이번에는 서로 꼴찌를 해야겠다고 이전투구의 추태를 벌였는가 하면 상위권으로 예상됐던 롯데와 삼성도 하위권으로 가라앉아버렸다. 그 대신 하위권으로 예상되던 해태 쌍방울 한화 현대가 4강을 점유했다. 그리고 전년도 우승팀이 이듬해에 꼴찌로 떨어진 것은 한국 프로야구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선동열의 일본진출, 김성한의 은퇴 등 투·타의 핵이 빠진 해태는 심지어 꼴찌후보로 꼽히기까지 했다. 아닌게아니라 해태는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4월중에는 최하위로 처져 과연 그런 평판이 사실로 나타나는 듯했다.
그러나 투·타의 새로운 주력인 이대진과 이종범이 방위복무를 끝내고 팀에 복귀하면서 저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5월에는 꼴찌에서 탈출하더니 6월에는 4강에 진입했고 그 뒤로 계속 상승세를 타면서 7월 30일을 기해 현대와 공동선두를 이루더니 이튿날에는 마침내 단독선두로 나섰다. 해태가 선두에 진출한 것은 7번째 정상에 올랐던 1993년의 페넌트레이스 마지막날 이후 1,046일 만의 일이었다.
탄력이 붙은 호랑이군단의 질주는 멈출 줄 몰라 시즌이 끝날 때까지 선두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진정한 해태의 강인함은 한국시리즈에서 나타났다. 태평양을 인수, 신장개업한 현대를 상대로 4승2패로 승리, 8번째 한국시리즈 무대 진출에서 단 한번도 정상정복에 실패하지 않았다.
해태의 성공에는 팀의 정신적 지주 이순철의 독려가 크게 주효했다. 이순철은 후배선수들에게 "선동열과 김성한이 빠졌다고 우승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조리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면서 전통으로 쌓아올린 저력을 발휘하자고 당부했다.
그러나 해태는 확실히 팀칼러가 바뀌어 있었다. 과거 선동열-김성한을 주축으로 한 소수정예주의에서 벗어나 관록과 팀웍으로 우승을 일궈낸 것이었다. 관록이란 전통의 마운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동열이 빠진 마무리 자리를 1년후배 김정수가 훌륭히 메웠다. 8년연속 두자리승수를 올린 이강철과 16승8패3세이브를 기록한 이대진은 선발의 두 축을 이뤘다. 고졸신인 김상진(金相辰)과 2년생 임창용(林昌勇), 좌완 강태원(姜泰遠)과 이재만(李在晩)의 성장도 돋보였다.
야수 중에서는 이종범과 홍현우, 김종국(金鍾國) 등 젊은 트리오의 빠른 발과 맹타가 두드러졌다. 이종범은 25홈런과 57도루, 홍현우는 17홈런과 18도루로 팀의 선두질주에 앞장섰으며 계약금 2억6천만원을 받은 김종국은 타율 0.215로 '멘도사 라인'(규정타석 채운 38명중 38위)에 머물렀으나 단단한 2루수비로 한몫을 거들었다.
가난과 난청의 장애를 딛고 일어선 박재용(朴在容), 삼성에서 이적해온 동봉철, 안방을 든든하게 지킨 최해식(崔海植) 등이 새로운 챔피언팀을 가꾸는 새 식구들이었다.
비록 우승은 놓쳤지만 현대의 약진도 눈부셨다. 전년도 7위였던 태평양을 인수, 신장개업한 현대는 '뛰어봤자 벼룩'이라는 괄시를 받았지만 김재박이 감독초년생답지 않게 '그라운드의 여우'에서 '덕아웃의 여우'로 변신, 재치있는 경기운영으로 정규시즌 전반기에 줄곧 1위를 달리는 예상외의 레이스를 펼쳤다. 다만 해태에게 선두를 내준 뒤에는 그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점점 미끄러지기만 해서 4위로 정규시즌을 마쳤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2연파했고, 쌍방울과의 플레이오프에서는 먼저 2패를 당하고도 3연승을 거두는 대역전극을 낳으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정명원이 시리즈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선전했으나 결국 해태에 2승4패로 물러서고 말았다.
현대가 이런 망외의 호성적을 올리는 데는 박재홍(朴栽弘)이라는 '괴물신인'의 가세가 주효했다. 1994년에 등장한 삼성의 양준혁과 달리 호타에다 빠른 발까지 갖춘 박재홍은 7월 16일에 벌써 20-20클럽에 가입하고나서 결국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30-30클럽을 개설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당연히 신인최다홈런 신기록을 세운 것이었고 신인왕은 그의 몫이었다. 왕년의 홈런왕 김봉연을 연상시키는 호쾌한 타격폼을 가진 그는 스트라이드하는 왼발이 투수쪽으로 타석을 벗어난다는 상대방의 어필로 부정타격시비를 낳기도 했다.
현대의 약진에는 또하나의 신인 박진만(朴鎭萬)이 뒷받침했다. 인천고를 졸업한 박진만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유격수를 맡아 김재박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를 사는 호수비를 펼침으로써 전체 내야수비를 안정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의 타격솜씨는 별로 뛰어난 편이 아니라는 것이 뒷날 판명되지만 이 해만은 0.283을 기록하며 공격에서도 한몫을 거들었다.
투수 중에서는 팔꿈치 수술을 받은 '병상(病床) 동지' 정민태가 15승9패, 정명원은 8승5패26세이브로 부활, 자신의 감독생명 연장에 급급하지 않고 재활의 기회를 열어준 전임감독 정동진의 배려에 보답했다. 프로2년생 위재영은 12승7패로 선발의 한 축을 성공적으로 맡았다.
그리고 전년도 팀이 바닥권으로 떨어지도록 주포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던 김경기는 한때 박재홍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으나 20홈런, 64타점으로 간판타자의 위신을 되찾았고 좌타자 이숭용은 100안타를 돌파하고 12홈런 47타점을 기록하면서 팀타선의 기둥감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 2년연속, 그리고 4년 사이 3차례나 꼴찌를 도맡았던 쌍방울의 약진은 강도(强度)에서 현대의 변신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현대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지는 바람에 종합순위는 3위로 내려앉았지만 쌍방울이 정규시즌에서 해태에 이어 2위를 마크하고 포스트시즌에 출전한 것은 1991년 창단 이래 처음이었다.
이런 쌍방울의 환골탈태는 뭐니뭐니해도 김성근이 지휘봉을 잡은 것이 가장 큰 변수였다. 취임 첫마디가 '목표 60승'이라던 김성근은 8월을 마치면서 벌써 목표승수에 도달했고 9월의 잔여경기 13게임에서 9승4패를 보태 당당 2위로 시즌을 마쳤다. 특히 8월 14일 전주 홈구장에서 현대와의 더블헤더를 독식하면서부터 28일 대전 한화전까지 현대-OB-롯데-LG와의 3연전들을 싹쓸이하기까지 거둔 13연승은 4위권에 안주하던 팀순위를 확고부동한 2위로 끌어올리는 자양제였다. 쌍방울은 한때 선두 해태를 5게임차로 뒤쫓아 해태가 뒤돌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김성근의 용병술은 비록 우승을 일궈낸 적은 없었지만 중하위권팀을 상위로 끌어올리는 데는 탁월한 효능을 갖고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평소처럼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995년 삼성에서 트레이드해온 김현욱(金玄旭)과 신인 박주언(朴柱彦)을 중간계투요원으로 요긴하게 활용하고 팔꿈치 부상에서 재기한 조규제(5승5패20세이브)로 뒤를 막았다. 두자리 승수를 올린 투수는 프로4년생 성영재(成英在)밖에 없었지만 위기에 몰릴 때마다 올망졸망한 투수들을 잇달아 투입하면서 팀방어율 3위(3.03)를 마크한 것이 성공의 배경이었다. 그런 인해전술식 투수운용을 하다보니 승리기록을 갖게 된 투수는 프로야구사상 유례가 없는 15명에 달했다.
앞서 말한 김현욱이 대표적인 예이지만 김성근은 삼성에서 용도폐기해버린 선수들을 데려다 귀중하게 재활용했는데 오봉옥(9승7패4세이브) 김실(타율 0.290 38타점) 등이 이에 포함된다.
팀의 체질개선을 위한 한화 강병철 감독의 암중모색은 3년째 이어졌다. 1995멤버 중 남아 있던 마지막 고참인 투수 이상군과 진정필, 포수 김상국(현대로 트레이드), 내야수 강정길을 엔트리에서 제거한 강병철은 3루수 홍원기(洪源基), 좌익수 송지만(宋志晩), 1루수 이영우(李榮雨), 2루수 임수민(林秀敏) 등 4명의 신인을 선발로 기용하는 과감한 교체를 단행했다. 팀내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는 네 명뿐이었는데 기존선수 중 강석천을 제외하면 나머지 3명은 홍원기 송지만 이영우 등 신인들이었다. 장종훈은 타율 0.266에 15홈런 57타점으로 뒷걸음질치며 규정타석조차 채우지 못했다.
한화는 5월 초까지만 해도 이런 대량교체의 충격으로 최하위로 미끄러지는 곤욕을 치렀으나 5월 11일부터 6연승을 거둔 것을 계기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 6월 초에는 2위까지 진격하는 기세를 자랑했다. 그러나 시즌 후반에는 뒤에서 치고 올라온 해태와 쌍방울에게 앞자리를 내주고 전반기 선두를 달리던 현대를 제쳐 3위로 시즌을 마감했으나 한국시리즈까지 진격한 현대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2연패를 당하는 바람에 종합순위는 4위가 되고 말았다.
한화가 대폭적인 세대교체에도 불구하고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프로입단 4년 만에 만개된 기량을 발휘해준 구대성 덕분이었다. 전년도에 마무리와 선발을 오가며 4승14패18세이브를 올리면서 특급투수로서의 노하우를 쌓은 구대성은 팀이 4연패에 빠져 있던 5월 11일 대구 삼성전에 선발로 등판, 5-3 승리를 이끌면서 6연승으로 분위기를 바꾸는 데 앞장섰다. 그때부터 팀이 안정세에 접어들고 구대성이 마무리투수로서 완벽한 뒷마무리를 해낸 덕분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포스트시즌으로 팀을 이끌었던 것이다. 18승(16구원승)3패24세이브, 방어율 1.88에 승률 0.857. 투수3관왕은 원년의 박철순, 1989∼91년 3년연속의 선동열이 있었지만 선발투수가 아닌 구원투수가 그런 타이틀을 석권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즌 MVP의 영광은 별다른 이의없이 구대성에게 돌아갔다.
구대성을 든든한 버팀목으로 삼은 한화 마운드에서는 정민철이 13승12패를 기록하면서 203탈삼진을 마크, 15승9패를 마크한 송진우와 함께 선발 마운드의 두 축을 이뤘다.
전년도 준우승팀 롯데는 투타의 불균형으로 참담한 시즌을 보냈다. 0.274로 팀타율 1위에 8개 구단중 최다득점(566점)을 기록하고도 팀순위가 5위로 처진 데에는 3.74로 6위에 그친 팀방어율이 짝을 맞추지 못한 탓이었다.
시즌을 맞기 전만 해도 전년도에 보여준 기동력이 건재한 데다 팀내 역대최고인 5억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차명주(車明珠)가 마무리로 가세하면 주형광 강상수 박동희 윤학길로 짜여진 선발마운드가 더욱 단단해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기대치는 당연히 우승이었다.
그러나 시범경기 때부터 노장 윤학길이 허리부상을 당한 것을 스타트로 마운드에 도미노현상이 일어났다. 박동희는 시즌개막 후 통풍과 허리부상으로 한달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신인 차명주는 컨트롤 불안과 어설픈 경기운영으로 마무리요원이라는 보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차명주는 6월 들어 선발로 보직을 바꿔봤지만 그 역시 결과는 신통치 않아 2승5패8세이브에 머무르고 말았다.
롯데는 강상수와 주형광을 마운드의 투톱으로 내세워 5월 중순까지는 그나마 근근히 5위를 유지해 나갔으나 17일부터 5연패에 빠져 7위로 처지고 5월 31일부터 7월 10일까지 40여일 동안은 8위에 붙박이가 됨에 따라 4강진출은 언감생심이었다. 다만 도토리 키재기식 레이스가 펼쳐지는 터라 한번만 기세를 타면 상위진출을 바라볼 수도 있긴 했지만 8월 11일 광주 해태전부터 23일 잠실 OB전까지 치른 12게임에서 2승1무9패를 당하고는 4강권을 완전히 단념해야 했다.
롯데의 1996시즌에 위안거리가 있었다면 주형광이 18승7패1세이브에 221탈삼진을 기록, 다승왕과 탈삼진왕에 오른 것과 1993년 다리골절상을 입었던 박정태가 0.309의 타율과 61타점을 기록하면서 재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3년임기를 마친 김용희 감독은 시즌종료 후 3년연장 계약에 성공했다. 2위로 끝낸 1995년 앞뒤로는 6위와 5위로 부진했지만 기동력을 가미한 공격으로 팀칼러를 바꾼 것이 좋은 평판을 받은 덕분이었다.
백인천으로 사령탑을 교체한 삼성은 결국 3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좌절을 면치 못했다. 주전급 선수들이 부상에 허덕인 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백인천 감독과 불화로 잡음을 일으키는 통에 삼성은 창단 이래 가장 밑바닥인 6위로 가라앉고 말았다. 삼성구단은 강인한 정신력 배양을 기대하며 사령탑을 우용득에서 백인천으로 교체했지만 백인천의 카리스마는 삼성선수들의 체질과는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김상엽과 김태한이 부상과 부진으로 제몫을 해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시즌초반에는 최재호(崔在皓)와 최창양(崔昌洋) 등 신인투수와 장정순(張定淳), 이태일, 김인철(金寅哲)이 마운드에서 팔팔한 기운을 발휘하고 5월 말에는 박충식이 방위병근무를 마치고 선발진에 합류, 상위권을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6월의 첫머리를 3연패로 시작하면서 9승1무15패로 한달을 마감, 팀순위는 5위로 처졌고 패수가 늘어나자 마구잡이식 투수운용으로 투수로테이션이 무너지면서 선수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더구나 박충식이 마무리요원으로 보직을 바꾸면서 연패를 끊어줄 마땅한 에이스감이 없어 더더욱 자중지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때 가장 아쉬운 것이 김상엽이었지만 백인천 감독과의 사이가 벌어진 그는 부상을 이유로 등판을 거부했고 백인천은 그의 트레이드설을 흘려 선수단의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이런 마운드의 불안 위에 타선마저 덩달아 침묵, 5∼6위를 전전하던 삼성은 8월 17일부터 4연패를 당하고는 포스트시즌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다. 주포 양준혁은 타율(0.346) 최다안타(151) 장타율(0.624) 등 3개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이승엽은 입단 2년째에 주전1루수로 자리잡으면서 0.303의 타율을 기록하는 활약을 보였지만 두 선수를 제외하곤 3할타율 근처에 얼씬도 못했고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도 유중일까지 합친 3명뿐이었다.
시즌이 끝나자 이만수 유중일은 남겨두고 제몫을 하지 못한 고참들을 대거 정리했다. 김성래는 자유계약선수로 풀려 쌍방울 김성근 감독의 애정에 기대야 했고 이종두는 포수 김성현과 함께 쌍방울로, 이정훈은 OB로, 강기웅은 현대로 각각 트레이드됐다. 그나마 강기웅은 개인사정에 얽혀 현대 유니폼을 입어보지도 않은 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성적부진에 대해서는 감독과 프런트에게 순번적으로 책임을 묻거나 한꺼번에 퇴입시키는 그룹고위층은 전년도에 감독을 경질한 데 이어 이번에는 프런트에게 메스를 가해 이광진 사장, 김대훤 단장을 퇴진시키고 전수신(全秀信) 사장, 김종만(金鍾滿) 단장을 구단 수뇌진으로 임명, 1997시즌으로 배를 띄웠다.
LG의 추락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그 균열은 송구홍의 보직변경을 둘러싼 코칭스태프간의 이견에서 비롯됐고 끝내 천보성 코치가 감독직을 찬탈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1995시즌에 반게임차로 페넌트레이스 1위자리를 놓친 것이 끝내 종합순위 4위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지만 1990년대 들어 두차례 우승을 차지한 LG선수들은 신흥명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자만심으로 이어져 몇몇 젊은 선수들이 거들먹거리면서 팀내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말았다. 더구나 프런트는 1992년 1차지명선수 임선동(林仙東)의 입단문제를 놓고 법정시비를 벌이는 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새로운 전력보강은 전혀 이뤄놓지 못했다. 임선동파동에 관해서는 별도의 항목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엄지손가락 부상을 당한 2루수 박종호의 공백을 메우는 문제를 놓고 코칭스태프 간에 이견이 벌어졌다. 이광환 감독은 3루수이던 송구홍으로 그 자리를 메우려 했으나 천보성 수비코치가 이런 포지션 변경에 불만을 표시하는 바람에 코칭스태프 사이에 심상치 않은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이광환 감독은 이같은 코치의 항명성 불만표시에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못해 통솔력에 의문이 제기됐다.
LG 추락의 불씨는 애당초 신인보강의 실패에 있었다. 일본 진출을 도모하는 임선동을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LG는 엉뚱하게 이정길에게 계약금 4억원을 투입하며 큰 기대를 걸었으나 이정길은 기량미달에다 어깨고장으로 1군마운드에 한 게임도 마운드에 서지 못하는 속빈 강정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에이스 이상훈마저 척추분리증이라는 병으로 5월 1일 대구 삼성전 도중 쓰러져 들것에 실려나가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상훈의 고장은 동료들에게 부담을 주어 김태원 김기범이 줄줄이 무너지는 도미노현상을 일으켰고 김용수마저 5월 중순까지 네차례 구원패를 당하면서 마운드 붕괴는 감당키 어려웠다. 이런 투수진의 난조 속에 최근 3년 사이 신바람야구를 몰고왔던 타선마저 침묵, 5월 말에는 급기야 최하위로 추락하는 다급한 사정에 몰렸다.
LG는 5월 18일 이상훈이 구원투수로 전환, 마운드 적응력을 길러가는 동안 그의 투지에 고무된 선수들의 분발로 6월 15일에는 5위까지 상승, 선두 현대에 6게임차로 접근하면서 투지를 불태웠으나 6월 16일부터 5연패, 그리고 7월 16일부터 다시 6연패(1무 포함)에 빠지면서 다시 7위로 뒷걸음질쳤다.
LG구단은 이런 부진이 '유약한' 자율야구의 훈련부족에서 온다고 판단, 7월 24일 올스타 휴식기중 계약기간 1년 4개월을 남긴 이광환을 해임하고 천보성을 감독대행으로 임명했다. 이광환은 1990년 OB 감독 시절 이재우 타격 인스트럭터에 당한 데에 이어 두번째로 팀내부로부터 등에 칼침을 맞은 꼴이 됐다. 천보성은 7월 초부터 구단측에 이광환의 선수기용과 경기운영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며 지휘체제 변화를 모의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감독교체라는 특단의 조치도 팀의 회생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일부 선수들과 코치들은 감독교체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발, 이를 무마하는 데에도 적잖은 신경을 써야 했고 천보성은 1997년에 정식감독 승격을 위한 예비작업으로 잔여경기를 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천보성 체제에 가장 노골적으로 반발한 이상훈은 결국 1997시즌을 끝내고 해외진출을 모색했고 구단도 그의 궤도이탈을 굳이 막으려 하지 않았다.
OB의 꼴찌추락은 다분히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었다. 시즌 초입에는 그룹창립 100주년 행사를 더욱 빛내기 위해 2연패의 의욕을 불태우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7월 20일 꼴찌에 처박힌 다음에는 아예 고개를 쳐들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더구나 마지막 8게임을 남기고는 바테르를 당하는 레슬러처럼 바닥에 배를 깔고 납작 엎드려 LG와 노골적인 '꼴찌 쟁탈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9월 8일 현재 0.5게임차로 뒤져 꼴찌 차지에 유리한 '저지(低地)'를 점령하고 있던 OB는 자기들이 꼴찌하겠다고 덤벼드는 LG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7연패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우승팀이 불과 1년 사이에 최하위로 전락한 것은 프로야구사상 OB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서울 두 팀이 불명예를 감수하면서까지 이상한 꼴찌다툼을 벌인 것은 2차지명 드래프트에서 최하위팀에게 우선지명권 두 장을 주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려는 것이었다. 마침 1997년 자원으로는 포수로서 군계일학이라는 진갑룡(陳甲龍)이 지명대상에 올라 있어 그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부산고-고려대 출신인 진갑룡은 롯데가 손민한(孫敏漢)과 함께 1차 지명대상에 올려놓고 저울질하다가 내놓은 카드였다.
LG의 추락이 마운드 붕괴에 따른 것이었다면 OB의 파탄은 타선의 침수에 원인이 있었다. 5월 24일까지만 하더라도 2위를 달리던 OB가 축축 처진 것은 주력타자들이 돌림병처럼 부상에 시달린 탓이었다. 1995년 한국시리즈 MVP인 톱타자 김민호는 허리고장으로 전열에서 이탈했고 장타력을 뽐내던 이도형은 군문제와 결부돼 제대로 출장하지 못했다. 전체 타자들을 통틀어 3할대 타율에 가장 접근한 선수가 0.281을 마크한 이명수였다.
물론 마운드에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에이스인 김상진은 미국 플로리다 전지훈련 때부터 불성실한 훈련태도를 보인 끝에 시즌 중반 오른쪽 쇄골통증을 호소하며 5승7패3세이브를 남기고 7월 28일 이후 마운드에서 사라졌고 시즌내내 투구밸런스를 찾아 헤매던 김경원도 3승7패9세이브에 그쳤다. 그나마 마운드에서 제몫을 한 것은 13승으로 팀내 유일한 두자리승수를 기록한 진필중이었다.
첫댓글ㅎㅎ 96년 한국 시리즈는 김응룡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 시리즈였던듯,,,정명원에게 노히트 노런 당한 후,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를 특유의 으름장 놓기로 바꿔버린 우리의 용 사장님. 음모론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렇게 보였던 시즌인듯.ㅋㅋ 원영이행님 고3 이었겠네. 야구만 보고 사셨을 것 같다에 한 표.ㅋ
첫댓글 ㅎㅎ 96년 한국 시리즈는 김응룡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 시리즈였던듯,,,정명원에게 노히트 노런 당한 후, 넘어갈 것 같은 분위기를 특유의 으름장 놓기로 바꿔버린 우리의 용 사장님. 음모론 비슷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렇게 보였던 시즌인듯.ㅋㅋ 원영이행님 고3 이었겠네. 야구만 보고 사셨을 것 같다에 한 표.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