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40년
정기채
내 고향은 경남 하동이다. 13가구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낡은 흙집이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반 조립식으로 새로 지었다. 마당 앞에는 대나무가 있어 여름엔 제법 서늘했다. 마을에서 500m 떨어진 곳이라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들어왔다. 벼농사, 밭농사, 밤농사를 지어 1년 동안 벌어들인 돈을 아버지는 노름으로 다 탕진하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가난했다. 아버지는 약주를 많이 드셨는데,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은 집안이 떠나갈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싸움을 했다.
나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를 못했다. 학교 성적도 최하위였고, 친구들보다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 소외감을 느꼈다.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께서 공부를 못한다고 많이 때리기도 했다. 반에서 형편이 제일 어렵고 못 생긴 여자 친구를 일부러 골라 짝지 시켜 주곤 했다. 한번은 이 친구와 공부를 못한다고 단상에 꿇어앉아있는데, 반 여자 친구들이 꽃 왕관을 씻어 주며 결혼 축하곡을 불러주었다. 그때의 부끄러움 지금도 가시질 않는다. 그 일로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좋은 기억도 있다. 5.6학년 담임 김은경 선생님과의 추억이다. 김은경 선생님은 29살의 지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4월 5일 식목일 날, 산에 나무를 심고 돌아오는 길에 가정 방문을 하였고,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두 명의 집은 방문을 하셨는데 우리 집엔 안 오셨다.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배려를 해주신 것이다. 그때 저의 집이 너무나 초라했고 집안 분위기도 좋질 않았던 것을 선생님도 알고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다음날부터 나를 유난히 잘 챙겨 주셨다. 선생님이 나의 첫 사랑이자 이상형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는 너무나 힘들었다. 성적도 최하위였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를 못해 늘 왕따를 당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쁜 손버릇 때문에 어머니 돈을 훔치곤 했다. 하동읍내에서 자취를 할 때는 가게 물건을 훔치기도 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처럼 나의 도벽은 심해져 갔다. 읍내 가게에서 청바지를 훔치다 잡혀 경찰서 유치장 10일, 부산 보호관찰소 에서 한 달 동안 정신 수양을 하고 나왔다. 이때 나쁜 손버릇을 고쳤으니 돌이켜 보면 참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려 친구들보다 일찍 군에 지원을 했다. 운전병으로 입대를 했고, 조직적인 군대의 단체 생활에 원만히 적응을 하지 못해 병장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관심 사병이었다. 군에 있을 때 조울증을 경험했다. 늘 기분이 우울했는데, 첫 휴가 때 병의 징조가 나타났다. 버스를 타고 강원도 인제에서 서울로 가면서 터무니없이 기분이 좋았다. 집에 가면 실습을 하면서 모아둔 500만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붕 뜨기 시작했다. 고향에 도착을 해서 4박 5일 동안 잠을 안자고 사람들을 만나며 100만원을 써버렸다. 여동생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것 도 사주고 형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놀러 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좋아했든 여자 친구도 만나 진주성에서 사진도 찍었다. 친구가 군대 가더니 성격이 밝아지고 자신감이 넘친다며 칭찬을 많이 해 주었다. 400만원은 부모님 드리고 부대에 복귀했다. 얼마정도 기분이 붕 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우울증이 더 심하게 찾아 왔다. 휴가기간 동안 고향에서 잠시 트였던 말문이 막히자 더 힘들었다. 선임들이 제대를 하고 병장으로 진급하면서 차종 반장을 하였다. 5/4톤 차량 45대의 차량 검열과, 훈련, 후임 병들 운전교육을 가르치며 성격이 많이 밝아졌다. 6개월간 내 나름대로 착한 선임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내가 격어든 가혹행위나 얼 차 레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사히 제대를 하였다.
제대 후 부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이트클럽, 단란주점, 웨이터 일을 1년 정도 하였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만두집 1년, 횟집 2달, 갈비 집에서 1달을 일했다. 적금 식 보험을 들어두었기 때문에 쉬지도 않고 일을 해 무릎이 무리가 와 3개월간 쉬어야 했다. 포항 일식집에서 2년간 일을 했고, 그 무렵 또 다시 조울증이 찾아왔다. 기분이 붕 떠 있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늘 흥분되어 있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터무니없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그땐 이 정도면 성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금 삼천만 원을 모아 두었고, 일식 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일식 조리사 경력 2년, 월급 150만원을 받는데다가 존경하는 롤 모델 스승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쁜 마음에 지인들을 찾았다. 제일 먼저 초등학교 담임 김은경 선생님을 찾아 제가 열심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교 장경훈 선생님, 직장 상사 이계하, 이승수기사님 군 선후임들 에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말을 했고 그들 또한 잊지 않고 찾아 주웠다 며 고마워하였다. 그 당시 수영장에 다니며 사람 만나는 재미에 즐거워 일을 소홀히 했고 주방장님 앞에서 분에 넘치는 행동을 해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 적응을 못하고 우울증 때문에 6개월간 밥 먹고 잠만 잤다.
포항 호미 곶에서 2003년 새해를 보며 용기를 달라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는데 거짓말처럼 저리던 무릎에 통증이 없어졌다. 다음날 대이동에 있는 횟집에 취직을 하였다. 그곳에서 일을 하다 사고가 났다.
어느 날 사장님과 바에서 술을 먹었는데 사장님께서 나에게 힘을 줄 테니 잘 해 보자고 한다. 사장님은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배운 것이 없어 권력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횟집은 장사가 잘되었다. 음식도 잘 나오고 손님도 많았다. 이때 기분이 또 붕 뜨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보다 장사가 더 잘되게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하는 사람들끼리 손발이 잘 맞아야 한다. 횟집은 장사는 잘되는데 직원들 일이 너무 힘들다. 홀은 주방장 때문에 분위기가 안 좋고 참모 이모는 바쁜데 설거지 이모가 도와주지 않아서 불만이고 설거지 이모는 설거지가 너무나 많아 힘들다. 그래서 나는 참모이모를 불러 설거지 이모를 뭐라 할 게 아니라 참모 보조를 구해 달라고 사장님에게 이야기하라고 했다. 밖을 나갔다 오니 참모 이모께서 소주 2병을 마시고 밥은 내가 차려 주었는데 왜 설거지 이모 편을 들어 주냐면 그만 둔다고 한다. 3층에 주무시든 사장님이 이것을 보더니 정기채 따라와 하며 3층 방으로 들어가 욕을 하신다. 네가 먼데 주방에 간섭 하냐며, 나는 사장님이 나에게 힘을 주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정신과 몸이 두 개로 분리가 되는 체험을 했다. 것 모습은 우는 데 마음속으로는 웃는다. 이것이 사장의 마음이 구나 나는 커다란 깨우침을 얻은 사람처럼 행동을 했고 다음날 가게에 가니 참모이모가 주방 칼도 갈아 주었으면 좋겠다한다. 주방장은 이 세상에서 장미꽃을 제일 좋아 한다고 한다. 사장님께서 오늘은 황금의 금요일 이 다면 고기를 한없이 잡으라고 한다. 수조관에가 고기를 잡으려고 하니 작은 고기들이 배 을 뒤집으면 죽으려 한다. 고기를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죽든 고기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파닥 거린다. 그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살생을 하지 말아야지 생각을 가졌고 옷을 챙겨 가려고 하는데 사모님께서 말리 섰다. 이것을 본 사장님이 기채 신들렸다 하면서 보내 달라고 한다.
그길로 집 에와 신선처럼 살기위해 회색 바지에 회색 티 빨간색 모자와 다이어리를 들고 바둑학원에 갔다. 일을 그만 두 엇 다는 이야기를 하니 돈은 많이 모아 두 워냐고 물어 봤고 생각해 보니 내 수중에 80만원이 전부다.
그날 저녁 많은 일이 있었다. 관장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내가 잠을 잘 못 잔다고 하니 신경안정제라며 알약을 하나 주셨다. 약을 먹고 관장님과 내가 서로를 높여주면서 방귀를 뀌며 기 싸움을 했다. 정수기 물을 컵에 담아 그날 저녁에 갔든 슈퍼와 PC방을 되돌아가 잔돈을 받기도 했다. 내 앞은 어두웠지만 내가 지나온 곳은 밝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되돌려야 할 곳이 횟집이란 생각에 옷을 가지고 횟집에 찾아가 문을 열어 달라고 소리를 쳤다. 사장님께서 창문을 열 드니 웃으시며 내일 낮에 오라고 한다. 옷을 같다 놔야하는 강박관념과 불안 증세 때문에 괴로워하며 집으로 못 돌아와 관장님이 포스코로타리까지 택시를 타고 데리러 왔다. 관장님 방에 누워 두려워하다, 새벽에 침술원원장님이 나쁜 사람에게 잡혀있다는 생각에 티코를 타고 침술원에 갔다. 원장님은 사장님이 소개 시켜줘 내가 무릎이 아플 때 마다 시원하게 침을 놓아준 은인이다. 문을 여니 잠 겨 있었고 나는 현관문을 다리로 찾다. 유리에 아킬레스건이 끊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의학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고 체험이 얻다. 제일 횟집 때부터 하동우리들 병원에서 기브스를 풀 때까지 신들린 느낌 그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잊히지가 않는다. 괘 오랜 시간 동안 불면증을 달고 살았고 신경이 예민한 편이여서 병이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포항 선린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진주 제일병원으로 이송하였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고 나는 사회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 중에서 한명이 오면 나의 배필로 결혼을 해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 거라 생각했다. 끝내 한명도 오지 않았다, 울고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해서 결국 진주의료원 정신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원이 감옥 같아 너무 힘들었다. 보름 후 고향에 있는 하동 우리들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다. 고향이여서 그런지 마음도 편하고 좋은 일도 많이 있었다. 가족과 지인 분들이 면회도 자주 오고 간식이 많아 환우 분들이 부러워했다. 그곳에서도 신적인 느낌이 있었고 다리기브스를 풀며 다 사라졌다. 4개월간 치료를 받으며, 퇴원하면 열심히 살아야지 마음을 먹었다. 막상 퇴원을 하고 나니 내가 의도했던 만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음성증상, 우울증, 불면증, 대인공포증으로 자살의 문턱에서 재입원을 하였다.
3개월 정도 입원 후 여동생의 권유로 퇴원을 하여 부산으로 올라왔다. 중국집배달, 닭 집 배달을 해 보았지만 대인공포증 때문에 좌절을 했다. 한없이 걷다 만덕 쪽에 교촌치킨 전단지 알바가 있어 그나만 1년 정도 했다.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와 2년 정도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대인공포증이 도져 여동생의 권유로 다시 부산으로 올라왔다. 개금에 있는 백병원에서 상담을 받으니 선생님께서 이 병이 약물 치료도 중요하지만 어려를 때 환경과 내면에 있는 자아를 치료해야 한다며, 정신 장애인이 활동하는 사회복귀 시설 <송국클럽하우스> 플랜 카드를 주셨다. 나는 다음 날 <송국>에 등록을 해 직장처럼 꾸준하게 다니게 되었다. 3개월쯤 되었을 때, 소장님께서 취업 한 번 해보지 않겠냐 하셨다. 병이 아직 깊었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효부병원 노인요양병원에서 가사 도우미로 9개월간 임시 취업을 하였다.
그 결과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고 또 그간의 문화적 체험에, 용기를 내어 일식집에서 8개월 횟집에서 2개월 독립취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노래연습장에서 8년간 청소 일을 하였다. 그런데 2016년 8월에 무거운 것을 들다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한의원에서 침을 맞으면 일을 하였는데 2017년 4월에 재발을 했다. 그래서 온천장 우리들 병원에 입원을 해 MRI를 찍었고 2번 3번 허리 디스크라고 판정을 받았다. 수술을 하려다 비용이 많이 들고, 주위에서 수술은 피하라는 말에 수술은 하지 않고 걷기 운동과 약물 치료를 하였다. 퇴원 후 불면증 때문에 12년 만에 하동 우리들 병원 개방병동에 입원을 하여 한 달 보름간 치료를 받았다. 불면증이 잡히지 않아 부산으로 다시 올라와 연산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약이 잘 맞아 불면증을 치료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부산 연산 병원에서 약을 타 먹고 있다. 2018년 1월부터 일주일에 세 번 양산으로 가 여동생과 필라 테스 운동을 한다. <송국클럽하우스>에 두 번, 하루는 도서관 강의를 듣고 토요일에는 문학 시 공부와 지인들을 만나 당구도 치면서 여가 시간을 보낸다. 한 달에 한번 소테리아에서 진행하는 침묵의 소리 자조모임과, 희망바라기 당사자 자조모임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겪은 이 병이 오히려 내 삶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포항에서 사고가 나지 않았다며 돈과 성공이라는 강박관념에 끌려갔을 것이다. 조현 병을 진단받고 오랜 시간동안 힘들었지만 다행히 재기를 해, 10년 동안 일도 하고 문화생활도 맛보았다. 처음 내 돈으로 산 50cc 오토바이, 애마를 타고 부산의 민주공원, 용두산 공원, 중앙동, 남포동, 해운대, 광안리를 달려보기도 했다. 나에게 발이 되고 친구가 되 준 노란색 오토바이, 도난을 당해 끝은 안 좋았지만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 나의 ‘노랭이’다. 가끔 힘든 점도 있지만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포항 선린병원에서 아킬레스건 수술을 할 때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마지막 고통 애기 울음소리에 어머니라고 외쳐는 데 그때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머릿속에 강하게 인식 되었다. 앞으로 살면서 사랑을 실천하며 나누고 싶다.
내게 꿈이 있다면 내가 살아 온 이 길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료 지원가나 사례 관리자가 되고 싶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네^^
인생에는 전화위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해도 분해도 고진감뢰입니다 글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