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8/28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0 - 제23차 세계산림과학대회(IUFRO) 폐막
나무꾼 잔치, 전인류 잔치돼 기뻐
최완용 산림과학대회 조직위원장
산림학술 분야의 세계 최대 행사인 제23차 세계산림과학대회(IUFRO)가 28일 ‘미래를 위한 서울선언’을 채택하고 막을 내렸다. 100개 나라 3천여명의 참가자들은 서울선언을 통해 ‘인간을 위한 산림, 기후변화와 임업, 바이오 에너지, 산림생물다양성 보전, 산림과 물의 상호작용, 미래를 위한 산림자원’ 등 6개 분야를 연구 과제로 설정하고 국제협력 강화를 다짐했다.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최완용(사진) 국립산림과학원장은 30일 “한때는 ‘나무꾼’(산림전문가)들의 잔치였던 세계산림과학대회가 전 인류의 잔치로 자리잡았다”고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는 경제학과 환경학 등 인접 분야의 전문가들도 많이 참석했습니다. 고은 시인 같은 분은 기조연설에서 ‘인간이 문명이란 좋은 너울을 쓰고 산을 파괴하는 죄를 지었다’고 외부인의 시각으로 질타해, 진한 감동을 주었구요.”
최 원장은 1980년 임목육종연구소에 들어와 30년 동안 ‘산림 보존’ 외길을 걸어왔다. “산림은 우리가 잠깐 빌려쓰는 것입니다. 최소한 지금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후세에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산에 가서 막걸리 한 통 마시는 것도, 골프장 건설도 자제해야 합니다.”
산림유전학자로서 그는 고산지역의 희귀식물 보존 대책을 과제로 삼고 있다.
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한겨레 2010-08-30 오후 09:27:34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437515.html
2007 - 미국의 공기역학자, 항공기술자 폴 매크레디(MacCready, Paul) 사망
매크레디 [MacCready, Paul (Beattie), 1925.9.29~2007.8.28]
미국의 공기역학자.
장시간 동안 비행이 가능한 인력(人力) 비행기와 태양력 항공기를 처음으로 설계·제작한 팀을 이끌었다(→ 태양전지).
그는 1930년대 미국 모형비행기 제작자 챔피언이었고 16세 때에 조종사 자격증을 땄다. 1947년 예일대학교(뉴헤이번에 있음)의 물리학 학사과정을 졸업하고, 1948년 물리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52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항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7년부터 글라이딩을 시작해 1948, 1949, 1953년 미국 활공 경기의 우승자가 되었고, 1956년에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에어로 바이런먼트사를 세우고 공기의 질(質) 향상, 에너지 보존, 바람이나 물에서 동력을 얻어내는 것 등의 작업을 했다. 1977년 8월 23일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즈필드 근처의 샤프터 공항에서 자전거와 행글라이더 광인 62㎏의 브라이언 앨런이 매크레디가 만든 인력비행기 '고사머 콘도르'를 타고 페달을 밟으며 필요한 항로를 완전히 비행해서 5만 파운드의 크레머상을 받았다. 이 항로는 0.8㎞ 정도 떨어진 탑 주위를 8자 비행을 하면서 3m 높이에 놓여 있는 출발·결승선을 통과하면 되는 것이었다. 6분 27.05초 동안에 비행을 한 전체 거리는 1.85㎞ 가량이었는데 최고속력은 18㎞/h 정도였다. 이 비행기의 무게는 32㎏, 날개길이는 29m 가량이었다. 곧이어 1979년 6월 12일 앨런은 더 유선형의 형태를 갖춘 매크레디의 인력비행기 '고서머 알바트로스'의 페달을 밟아 영국 켄트의 포크스턴 근처에서 프랑스의 케이프 그리네까지 약 37㎞의 거리를 2시간 49분 만에 비행했다. 이 비행은 인력 비행기를 이용해 처음으로 영국해협을 횡단한 것으로, 10만 파운드의 크레머상을 받았다. 이 비행기의 날개길이는 28.6m, 무게는 31.5㎏이었으며 재료로 마일러(강화 폴리에스테르), 폴리스티렌, 탄소섬유 막대기를 이용했다. 1981년 7월 7일 설계한 태양력 비행기 '솔라 챌린저'가 파리 근처의 푸앵투아즈 코르메유 공항에서 영국 켄트의 맨스턴 영국 공군기지까지 258㎞의 거리를 5시간 23분 만에 비행했는데, 평균속력은 약 48㎞/h였으며 비행고도는 3,350m였다. 조종사는 몸무게가 55㎏인 스티븐 프타섹이었다. 1만 6,128개의 태양전지를 2개의 전기 모터에 연결한 이 비행기는 무게가 95㎏, 날개길이는 14.3m였다. 그는 국제인력수송수단협회(International Human Powered Vehicle Association:1975 창설)의 국제부 회장이다. 이 협회는 자전거의 속력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브리태니커
- '지원의 얼굴', 테라코타
2003 - 권진규 30주기전
8월28일~9월15일 서울 인사아트센터(02-736-1020)
권진규(權鎭圭·1922~73)라는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미술교과서에 실려 있던 그의 테라코타 작품 <지원의 얼굴>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자폐적인 그의 내면을 반영하듯 침울하면서도 부드러운, 내면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 권진규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한국 미술사에서 근대 조각을 완성하고 현대 조각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 조각가인 권진규는 1959년 일본에서 귀국한 뒤 흙을 사용한 테라코타와 옻칠 기법을 원용한 건칠(乾漆)로 독창적 양식을 개척했다. 일본에서 부르델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에게서 배우는 등 유럽 조형 예술을 흠뻑 받아들였으면서도 한국의 고대예술에 심취했던 그는 엄격한 고전성과 현대성이 어우러진 리얼리즘 조각들로 20세기 한국 조소예술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이번에 열리는 ‘권진규 30주기전’에는 테라코타, 건칠, 석조, 목조 등 대표작 70여점과 미공개작 50여점 등 모두 120여점의 유작이 전시된다. <지원의 얼굴> <자소상> <춘엽니> <말> 등 잘 알려진 작품 외에 사후 30년 동안 서울 동선동 작업실에서 잠자던 작품 20여점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다. 석고틀에서 재현한 <여인>, 부조 <작품> 등 처음 일반에게 모습을 보이는 이 작품들은 권진규의 생전 그의 곁을 지졌고 그의 죽음 뒤에도 작업실을 그대로 보존해온 막내 여동생 권경숙씨가 내놓은 것이다. 역시 처음 공개되는 <여인상>은 모델이었던 권진규의 제자가 소중히 지니고 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권진규가 일본 유학시절인 1950년대에 남긴 초기 스케치북 2권이 포함됐다. 미술학교 후배로 일본에서 함께 살았던 오기노 도모 여사가 권진규의 30주기를 맞아 공개한 것이다. 총 38점의 다양한 드로잉들은 그의 작품에 대한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작품들이다.한겨레21 문/화/게/시/판 [2003.09.04 제474호]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854.html
2003 - International Ministerial Conference of Landlocked and Transit Developing Countries on Transit Transport Cooperation
UNCTAD, Kazakhstan, 28-29 Aug 2003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2009.asp
2000 -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발족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일지
8.15 광복 이후 혼란기에 발생했던 '제주 4.3사건'은 역대 정부에서 제주도민들이 줄기차게 '신원(伸寃)'을 요구했지만 논의자체가 금기시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때 비로소 공론화됐다.1999년 12월 '4.3 사건 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됐고, 참여정부 들어 지난 2003년 10월 노무현( 盧武鉉)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국가 차원의 공식 사과 입장을 표명했다.'4.3 사건'은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 좌익세력에 의한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하자 군.경을 투입, 1954년 9월21일까지 진압 및 소탕작전을 벌이던 중 많은 양민들이 공권력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다음은 4.3 사건에 대한 정부 입장과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사업 추진일지이다.▲1999년 12월16일 =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 법'(이하 '4ㆍ3사건 특별법') 국회 본회의 통과▲2000년 1월12일 = '4ㆍ3사건 특별법' 공포▲2000년 3월3일 = 행정자치부에 제주 4ㆍ3사건 처리지원단 설치▲2000년 5월10일 = '4ㆍ3사건 특별법 시행령' 제정.공포▲2000년 8월28일 =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발족▲2001년 9월27일 = 헌재, '4ㆍ3 사건 특별법' 위헌심판 청구 각하▲2002년 11월20일 = 4ㆍ3사건 희생자 1천715명 첫 결정▲2003년 3월25일 = 제주도내 4ㆍ3사건 관련 단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55주년 4ㆍ3 위령제 참석 요청▲2003년 3월29일 = '제주 4ㆍ3사선 진상보고서' 채택, 추가 심의 거쳐 보고서 수정키로▲2003년 4월2일 = 노 대통령 "내년 4월3일에는 반드시 제주를 방문할 것이며 그 이전에라도 진상보고서가 마무리되는 대로 국가적 입장을 표명할 것" 입장 표명▲2003년 4월3일 = 고 건 총리 '제55주년 제주 4ㆍ3사건 희생자 범도민 위령제' 참석, '제주 4.3 평화공원' 조성 착공.▲2003년 10월15일 = '제주 4ㆍ3 진상보고서' 확정▲2003년 10월31일 = 노 대통령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4ㆍ3사건 국가차원 사과▲2006년 2월8일 = 제주도 4ㆍ3사건 희생자 유족회, '제58주년 4ㆍ3범도민 위령 제'에 노 대통령 공식 초청▲2006년 3월29일 =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위원회, 4.3 사건 희생자 2천865명 추가 인정함으로써 이날 현재 4.3사건 관련 신고자 1만4천373명중 1만2천725명(88.5%) 희생자 인정.▲2006년 4월3일 = 노 대통령, 4ㆍ3사건 위령제 첫 참석(서울=연합뉴스) 동아닷컴 2006-04-03 11:27
http://news.donga.com/fbin/output?rellink=1&code=a__&n=200604030251
1999 -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 13년 만에 공식활동 종료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의 마지막 승무원 3명이 1999년 8월 28일 지구에 귀환함으로 공식활동을 사실상 마감했다. 러시아 우주비행센터는 빅토르 아파나시예프, 세르게이 아브데예프, 프랑스인 장 피에르 에녜르 등 승무원 3명을 태운 '소유즈 TM 29'가 카자흐스탄 초원지대에 예정대로 무사히 착륙했다고 밝혔다.
미르호는 2001년 3월 23일 대기권에 들어오면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으나 30-40톤으로 추정되는 1,500여개의 파편은 살아 남아 남태평양 해저에 떨어져 수장됐다.
1986년 2월 20일 미국과 우주사업 경쟁을 벌이던 구 소련은 3년 예정으로 미르를 쏘아올렸으나, 미르는 13년 넘게 우주에 머물렀다. 이 기간 중 미르는 지구궤도를 7만7000바퀴 돌면서 무중력 상태의 인체 연구 등 1만6500건의 실험을 수행했다. 또 외국 우주인 62명 등 103명의 우주인이 미르를 거쳐갔으며, 단일 최장 우주체류(737일)와 우주유영(82시간 21분) 등의 기록이 미르에서 작성됐다. 미르호는 '평화' '세계'라는 뜻에 어울리게 활용됐다. 미르호에는 각국 우주비행사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다녀갔다. 27개국에 설치한 수많은 장비를 통해 이뤄진 우주 공간에서의 과학적 실험은 2만3천여건이나 됐다. /조선
1996 -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이혼
찰스 왕세자-다이애나 이혼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6년 오늘 결혼 15년 만에 이혼한다.성격 차이와 불륜 문제로 오랜 갈등을 겪어 온 두 사람은 런던 고등법원 가사부에서 이혼판결을 받은 뒤 6주 간의 이의 제기 기간 경과로 이혼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마무리했다. 다이애나 비는 이혼 후에도 왕위계승서열 2위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캔싱턴 궁에서 산다.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녀 4남매 가운데 세 자녀의 결혼이 실패로 끝나게 됐다.다이애나 비는 이혼 후 대인지뢰 사용금지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이혼 이듬해인 1997년 8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생애를 마감한다. /YTN
- Jim Knopf und Lukas, der Lokomotivführer
1995 - 독일의 작가 미하엘 엔데(Ende, Michael) 사망
엔데 [Ende, Michael, 1929.11.12~1995.8.28]
독일의 청소년문학 작가. 배우, 극작가, 비평가.
1929년 독일 남부 알프스 산 아래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가 엔데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의 연극학교를 졸업한 후 배우, 극작가, 연출가, 비평가로서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1960년 《짐크노프와 기관사 루카스》, 1973년 동화소설 《모모》를 발표하여 독일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79년에 발표한 청소년 소설 《끝없는 이야기》도 전세계 언어로 번역되어 나갔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을 겨냥한 이 소설은 환상소설의 붐과 더불어 모험소설에서 문화비판,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색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영역의 작품 내용에 근거한다.어린이와 어른을 동시에 사로잡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전세계에 수천만의 독자를 가진 엔데에 대해 세계의 언론들은 동화와 환상소설을 통해 금전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고발한 철학자로 평가하였다. 1995년에 사망하였다. /네이버
- Irrigation Project, Laborers, Heavy
Equipment, 1991.8.28
1991 -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1차 공사 통수식
단일공사로는 세계최대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공사 1단계 통수식이 1991년 8월 28일 리비아의 벵가지에서 가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리비아 대사막을 가로질러 설치된 수로가 이날 밤 개통되자 벵가지 시민들은 쏟아지는 물속에 뛰어들며 환호했다.
동아건설과 대한통운이 공동 시공한 36억달러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는 지난 1984년 1월 착공, 당초 1992년 12월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일부 구간이 2단계 공사와 병합시공됨에 따라 예정보다 1년 4개월 앞당겨 착공, 7년 7개월 만에 통수식을 갖게 됐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리비아 내륙산맥의 풍부한 지하수(나일강의 2백년간 유수량)를 끌어올려 직경 4m, 길이 7.5m, 총연장 1천8백72km의 송수관을 통해 공급, 리비아 사막을 옥토로 바꾸는 대규모 공사이다. 1단계 공사에는 연인원 1천1백만명의 국내 근로자와 연 5백50만대의 건설 중장비가 투입됐다. 가다피 국가원수는 이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격찬했다. /조선
1990 - 서울평화상 첫 수상자로 IOC 위원장 사마란치 결정
● 앵커: 성공적인 서울 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된 상금 30만달러의 서울 평화상 첫 수상자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결정이 됐습니다.차경호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서울평화상위원회는 오늘 오후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제 1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하고 다음 달 2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시상식을 갖는다고 발표했습니다.서울평화상위원회는 김용식 위원장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지난 80년 IOC 위원장에 취임한 이래 스포츠를 통한 인류화합과 평화분위기 조성에 이바지 해 온 것이 높이 평가됐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습니다.● 김용식 위원장(서울평화상위원회): 서울 올림픽 자체가 인류의 평화와 화합에 대해 이바지 한바가 크기 때문에 물론 거기에 대해서는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마는 어디까지나 세계 평화와 스포츠를 통해서 세계 평화를 갖다가 구축하는데 힘썼다고 하는 그 점을 주로 생각했습니다.● 기자: 서울평화상위원회는 지난 3월 초부터 7월 말까지 국내외 551명의 추천위원으로부터 수상 후보자 추천을 받아 왔는데 마지막까지 2-3명의 수상후보자가 경합을 벌여 15명의 위원들이 기명투표를 한 끝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9표를 얻어 수상자로 결정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그러나 이 상의 첫 수상자가 사만란치 위원장으로 결정됨으로써 앞으로 이 상의 성격이 체육상의 성격만으로 국한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낳고 있습니다.한편 사마란치 위원장은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에서 김응룡 IOC 위원으로부터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수상자로 결정됐다니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MBC 뉴스 차경호입니다.(차경호 기자) /MBC뉴스 19900828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8028_6082.html
1987 - 미국의 영화감독 존 휴스턴(Huston, John) 사망
휴스턴 [Huston, John, 1906.8.5~1987.8.28]
미국의 영화감독.
1906년 8월 5일 네바다주에서 출생하였다. 영화배우 W.휴스턴(1884∼1950)의 아들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권투선수·작가를 거쳐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그후 영화감독으로 전향, 1941년 데뷔작 《몰타의 매 The Maltese Falcon》를 내놓았다. 《시에라마드라의 황금》(1948)으로 아카데미상 감독상·각본상을 수상함으로써 일류감독이 되었다. 극한상황에서의 인간 욕망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였다. 《황금》 이후 《키 라고 Key Largo》(1948) 《아스팔트 정글 Asphalt Jungle》(1950) 《아프리카의 여왕 African Queen》(1952) 등 일련의 가작(佳作)에 이어 《백경(白鯨) Moby Dick》(1956)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네이버
1982 - 전두환 대통령 아프리카 4국+캐나다 순방 중 캐나다 공식방문(28~31일)
전두환 대통령은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함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등 아프리카 4개국 대통령과 카나다 총독의 공식 초청을 받고 8월 17일부터 31일까지 이들 5개국을 공식 방문한다. 전 대통령은 5개국을 순방하면서 케냐의 모이 대통령, 나이지리아의 샤가리 대통령, 가봉의 봉고 대통령, 세네갈의 디우프 대통령 및 카나다의 트뤼도 수상과 정상회담을 통해 최근의 국제정세와 지역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관심사와 양국간의 협력 강화 방안에 관해 협의하게 된다. 8월 17일부터 19일까지 케냐, 19일부터 22일까지 나이지리아, 22일부터 24일까지 가봉, 24일부터 26일까지 세네갈의 순서로 아프리카 순방을 끝내고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카나다를 방문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은 아프리카 제국과의 우호 관계 강화를 도모하고 경제적으로도 동 지역에 적극 진출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또한 방문하게 될 4개국이 모두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외교적 행동 반경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체신부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케냐, 나이지리아, 가봉, 세네갈 및 카나다 방문을 기념하면서 이 우표를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65 - 이스라엘의 물리학자, 수학자 줄리오 라카(Racah, Giulio) 사망
라카 [Racah, Giulio (Yoel), 1909~1965.8.28]
Giulio (Yoel) Racah (1909 - August 28, 1965) was an Israeli physicist and mathematician.Born in Florence, Italy, he took his PhD from the University there in 1930, and later studied in Rome with Enrico Fermi. In 1939 Racah immigrated to Palestine, and was appointed Professor of Theoretical Physics at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where he was later Dean of the Faculty of Sciences, and finally Rector and acting President.Racah's research was mainly in the fields of quantum physics and atomic spectroscopy. In 1958 he was awarded the Israel Prize for lifetime contribution to physics.
http://www.biographybase.com/biography/Racah_Giulio.html
1963 - 미국민권운동 워싱턴 행진으로 절정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에서는 미국 내 인종차별정책 폐지를 주장하는 민권운동단체들이 대규모 행진을 벌였다. 미국민권운동은 1950년대말 시작된 대중운동으로서 비폭력 투쟁을 기본으로 삼아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이들은 재건시대 이후 흑인에게 평등권을 부여하는 법률 제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공공시설 및 교육시설을 이용하는 데 있어 백인 전용과 유색인종 전용으로 엄격히 구분하던 남부의 관행을 깨뜨렸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 사는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 안에서 흑인 전용칸 사용을 거부해 체포되자, 흑인들은 하루 동안 버스 이용을 거부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들과 흑인교회 세력을 규합한 인종차별 저항운동을 이끌었다. 끈질긴 이용 거부로 버스의 전용칸 제도는 폐지되었으며, 이후 저항운동은 다른 공동체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각종 공공시설에서 인종차별이 폐지되기 시작했고, 워싱턴 D.C.에서의 대규모 행진으로 저항운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마침내 1964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의회에서 인종차별 철폐와 평등권을 보장하는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1966년 이후 민권운동 내부에 급진적 세력이 등장해 폭력시위가 일기 시작하자, 백인 지지자들이 운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지도층 내부가 분열됨으로써 민권운동은 잠시 붕괴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어제의 오늘]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ㆍ흑인 인권운동의 획기적 전기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연설은 무엇일까. 1963년 오늘,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앞에 운집한 20여만 시민에게 행한 연설을 빼놓기 어렵다.
연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100년 전, 우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위대한 미국인(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서에 서명했습니다. … 하지만 100년 후 흑인은 아직 자유롭지 않습니다. 100년 후 흑인의 삶은 아직 차별의 족쇄와 격리의 수갑에 묶여 있습니다. 100년 후 흑인은 물질적 풍요의 바다 한가운데 뜬 빈곤의 섬에 갇혀 있습니다.”법적으로 해방됐지만 실질적으로 구속된 흑인의 삶을 토로하던 킹 목사는 곧 ‘정의’의 약속을 떠올린다. “지금은 인종차별의 음침한 계곡에서 벗어나 정의의 양지 바른 길로 걸어나갈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불의의 모래밭에서 건져 동포애의 반석 위로 올릴 때입니다.”훗날 가장 많이 인용된 종반부 구절은 킹 목사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보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과 주인의 후손이 동포애의 탁자 앞에 나란히 앉는 꿈이.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4명의 내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사는 꿈이.”성경에 근거한 유려한 비유, 반복적이고 알기 쉬운 구문으로 이루어진 연설문은 킹 목사 특유의 리듬감 있는 어조로 인해 효과가 배가됐다. 킹 목사는 인종차별이 미국의 건국이념에 위배된다는 점을 설득시킴으로써 인권 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킹 목사의 연설은 이듬해 공공장소에서의 차별을 철폐한 공민권법 제정의 기틀이 됐다. 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킹 목사는 4년 뒤 39세의 나이로 암살당했다.킹 목사가 세상을 뜬 지 40년이 지난 뒤, 미국에서는 첫 흑인 대통령이 나왔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 체제 아래서도 백인 경찰관이 자신의 집에 들어가던 흑인 교수를 체포해 논란이 되는 등, 미국 사회에서 인종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경향신문 2009-08-27 17:56:5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8271756515&code=100100&s_code=ap005
1959 - 체코의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Martinů, Bohuslav) 사망
마르티누 [Martinů, Bohuslav, 1890.12.8~1959.8.28]
보후슬라프 마르티누(Bohuslav Martinů듣기 (도움말·정보), 1890년12월 8일 ~ 1959년8월 28일)는 체코의 작곡가이다.
마르티누는 프라하 콘소바토리를 다녔지만 ‘학습 태만’을 이유로 퇴학당한 이후 독학했다. 1923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남부 프랑스로, 그리고 1941년에는 미국으로 떠나서 뉴욕에 정착했다. 후에 그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르티누는 다작을 남겼는데, 그 수가 400여개에 이른다. 그는 같은 나라 작곡가인 레오시 야나체크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연주·녹음된다. 그의 작품으로는 합창곡인 《길가메시 서사시》(1955), 여섯 개의 교향곡과 첼로 협주곡, 오보 협주곡, 다섯 개의 피아노 협주곡, 실내악곡 등이 있다.
마르티누의 곡은 많은 곳에서 받은 영향을 보여 준다. 《La Revue de Cuisine》(1927)같은 작품은 재즈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두 개의 현악 오케스트라, 피아노와 팀파니를 위한 《Double Concerto》는 바로크 시대 합주 협주곡의 경향을 띤다. 다른 작품 중에서는 체코 민요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 그는 클로드 드뷔시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존경했다.
마르티누의 작품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에 Lucie Bigelow Rosen의 위촉으로 작곡된 테라민을 위한 곡이 있다. 그는 1944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10월 1일에 테라민, 오보에, 현악 사중주와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아》를 작곡해서 테라민 연주자인 Rosen에게 헌정했다. 그녀는 1945년 11월 3일 뉴욕에서 Robert Boom과 Koutzen Quartet과 함께 그 곡을 초연했다. /위키백과
1953 - 일본 최초의 민간상업방송 니혼 TV 방송 개시
일본의 TV 방송원년은 1953년. 그해 2월1일 NHK 도쿄TV가 막을 열었다. 이어 8월28일 최초의 민간상업방송 니혼TV가 방송을 개시했다.
NHK 방송개시 당시 TV 수신 계약건수는 866건에 불과했다. 모두 생방송으로 진행됐으며, 방영시간은 아침 점심 저녁 각 시간대에 조금씩 수시간에 불과했다. 당시 TV수상기 1대 값이 월급의 10배에 해당했던 탓이다. 이듬해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프로레슬링 중계를 하면서 수상기 보급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현재의 NHK 니혼 후지 TBS 아사히 등 5대 방송 체제가 갖춰진 것은 1959년 말. 이때 전국의 시청세대는 346만으로 불어났다. 1960년 9월부터 전 방송사가 컬러방송을 실시했다. 1962년엔 계약세대가 1000만을 돌파했다. 이때의 TV 보급률은 48.5%. 고도성장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1961∼62년에 모든 방송국이 전일방송 체제로 들어간다. (발췌)
[해외 리포트] 일본열도 뒤흔드는 ‘NHK 왕국’ 비리 /신동아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0/26/200410260500049/200410260500049_5.html
1950 - 6.25발발로 제1차 화폐개혁 단행
제1차 화폐개혁이 단행됐다. 화폐개혁은 1950년 8월 28일부터 1953년 1월 16일까지 6.25기간 동안 5번에 걸쳐 기존의 조선은행 1백원권을 한국은행 1백원권으로 바꿔주는 식으로 진행됐다. 제1차 화폐개혁은 6.25전쟁의 산물이었다. 한국은행이 일제시대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을 대체할 새로운 '한국은행권'을 발행하기도 전에 발발한 6.25전쟁은 화폐개혁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한국은행은 전쟁 발발 13일전인 6월12일 설립됐다. 6.25전쟁이 터진 날은 일요일. 월요일인 26일부터 군대와 경찰, 기업과 시민들이 돈(조선은행권)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은행은 26일과 27일 이틀새 화폐발행액(6월24일 현재 5백58억원)의 7분의 1이나 되는 돈(76억8천만원)을 국고금과 은행예금 지급용으로 지급해야 했다.
정부가 남하하면서, 한국은행도 피란 행렬에 끼였다. 문제는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된 지금은(地金銀·금은 덩어리)과 현금들. 하지만 철도를 통한 수송작전이 불가능해 구용서 초대 총재가 국방부를 방문, 군의 지원을 받게 됐다. 6월27일 오후 2시, 군에서 제공한 트럭 1대에 순금 1천70㎏, 은 2천5백13㎏ 등 89상자를 싣고 극비리의 수송작전이 시작됐다. 이 금은덩어리는 이틀 뒤인 29일 진해 해군통제부에 도착했다가 8월1일 부산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미처 옮기지 못한 순금 2백60㎏과 은 1만5천9백70㎏, 미 발행 조선은행권 등은 6월28일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북한군에 접수되면서 전부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 정부가 갖고 있는 미 발행 은행권은 40억원뿐이었고, 새로 돈을 찍을래야 조폐공장마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국은행은 동경 지점에 1백원권과 1천원권을 일본에서 인쇄하도록 긴급 지시했다.
1950년 7월13일, 군용기편에 실려 김해비행장에 도착한 1천원권 60억원이 최초의 한국은행권이다. 다음날 1천원권 92억원, 1백원권 2억3천만원이 더 도착했다. 이 당시 1천원짜리 앞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1백원짜리에는 광화문이 들어 있었다. 북한군이 약탈한 조선은행권을 남발하고, 인민권도 강제 유통시키는 바람에 엉망이 된 경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는 1차 화폐개혁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 Token money in the ghetto with Rumkowski's signature
1944 - 폴란드의 유대인 평의회 의장 모르데카이 하임 룸코프스키 (Rumkowski, Mordechai Chaim) 사망
룸코프스키 [Rumkowski, Mordechai Chaim, 1877.2.27~1944.8.28]
Mordechai Chaim Rumkowski (February 27, 1877 - August 28, 1944) was a Polish Jew and functioned as the German Nazi-nominated head of the Ältestenrat ("Council of Elders"), or Jewish authorities in the Łódź Ghetto. Before the Nazi German invasion of Poland, Rumkowski was a businessman and director of an orphanage. on October 13, 1939, the Nazi occupation authorities appointed him the Judenälteste ("Elder of the Jews"), or head of the Ältestenrat, in Łódź. In all other ghettos, the head of the Jewish council was known as the Judenrat. In this position he reported directly to the Nazi ghetto administration headed by Hans Biebow and had direct responsibility for providing heat, work, food, housing, and health and welfare services to the ghetto population. He performed marriages when rabbis had to stop working, his name came to serve in the nickname of the ghetto's money, the Rumki, sometimes Chaimki, and his face appeared on the ghetto postage stamps.
Some remember him for his haunting and tragic speech, Give Me Your Children.
Rumkowski and his family voluntarily joined the last transport to Auschwitz, and were murdered there August 28, 1944. A family friend (in 1944 a teenaged resident of Łódź ghetto) suggests the possibility that Jewish inmates murdered him.
Background and history
http://en.wikipedia.org/wiki/Mordechai_Chaim_Rumkowski
1943 - 마운트배튼 동남아연합군 사령관 취임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오늘,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제독이 동남아시아 연합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영국 해군에 입대한 지 30년 만이다.마운트배튼은 사령관이 된 뒤 일본군에 점령됐던 미얀마 탈환작전을 성공시킨다. 1947년에는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마지막 총독으로 부임해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실현시킨다. 이후 계속해서 군인으로 여생을 보내다 1965년 퇴임한다.마운트배튼은 1979년 아일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다 IRA가 배에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YTN
- Angola, 50000 Kwanzas (1991. Banknote) (dos Santos and A. A. Neto)
1942 - 앙골라의 대통령 두스 산투스(dos Santos, José Eduardo) 출생
두스 산투스 [dos Santos, José Eduardo, 1942.8.28~ ]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 (José Eduardo dos Santos, 1942년 8월 28일 ~) 는 앙골라의 제2대 대통령으로, 동시에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MPLA)의 의장이다. 1979년에 아고스티뉴 네투 초대 대통령의 뒤를 이어 앙골라 대통령이 되었다.
생애
조제는 앙골라의 루안다에서 건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생 시절이었던 1956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MPLA) 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 정부의 탄압으로 프랑스를 거쳐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로 망명하였다. 그는 망명지에서 MPLA의 부의장이 되었고, 망명 생활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있었지만, 소비에트 연방으로 자리를 옮겨 아제르바이잔 석유화학 대학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석유 아카데미) 에서 석유 화학을 전공해 학위를 취득하였다.
1970년, 앙골라에 귀국해 MPLA의 군사 조직 앙골라 해방 인민군에 들어갔고, 1974년에는 MPLA의 대외 정책 담당자에 올랐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75년, 앙골라는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어냈지만, 좌익과 우익 세력 간 충돌로 내전에 돌입하면서 조제는 MPLA의 총재가 되었다. 1979년 9월에는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아고스티뉴 네투가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자, MPLA 선거를 통해 후임 대통령, 국회의장, 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위키백과
1919 - 영국의 전기공학자 고드프리 하운스필드(Hounsfield, Godfrey) 출생
하운스필드 [Hounsfield, Godfrey Newbold, 1919.8.28~2004.8.12]
영국의 전기공학자.
영국 잉글랜드의 노팅엄셔주 뉴어크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으로 복무하였다. 런던의 패러데이 하우스 전기공학 칼리지에서 전자공학과 전파탐지기를 공부한 뒤, 1951년 레코드 및 음향기기 생산을 주업종으로 하던 EMI의 연구원이 되었다. 1958∼1959년에 걸쳐 영국 최초로 트랜지스터 컴퓨터 에미덱(EMIDEC)1100을 제작한 설계팀을 지도하였다. 이후 컴퓨터단층촬영(CT) 진단 기법을 개발하여 1972년에 주사를 이용한 임상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79년 미국의 앨런 M. 코맥과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물리학을 전공한 코맥은 한 병원의 방사선과에서 비상근 직원으로 일하면서 X선 기술이 부족하여 정밀한 영상을 얻지 못함으로써 진단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신체 부위를 각기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다음 그것들을 종합해서 단일한 영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1963∼1964년에 1차원 투영상으로부터 2차원 화상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코맥의 연구는 컴퓨터 제어에 의한 X선 단층촬영의 이론적 기초를 구축한 것이었으나, 연구 결과를 증명해줄 단층촬영기를 만들지 못했으므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하운스필드가 CT를 고안하고 EMI가 상품화함으로써 코맥의 연구도 재조명받았으며, 1979년 두 사람은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하운스필드는 역대 노벨 의학상 수상자 가운데 유일한 공학자로서 그가 고안한 컴퓨터단층촬영은 물리학·전자공학 등 인접 학문이 질병 치료에 접목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CT의 등장으로 칼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체 내부의 질병을 쉽게 찾아낼 수 있게 되어, 그 동안 내과 의사들의 경험에 의존했던 질병 진단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으며 2004년 8월 12일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1914 - 러시아의 작곡가 아나톨리 랴도프(Lyadov, Anatoly) 사망
랴도프(리아도프) [Lyadov, Anatoly Konstantinovich, 1855.5.11~1914.8.28]
Liadov라고도 함. 러시아의 작곡가.
시적이고 아름답고 세련된 피아노 소품과 관현악곡들로 러시아 낭만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랴도프는 황실 오페라단 지휘자의 아들로 태어나 1870년 음악원에 들어가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1876년 학업을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가 1878년 다시 입학했고, 후일 이 음악원과 황실 예배당에서 여러 직책을 맡게 되었다. 1897년부터 줄곧 황실 지리학회가 수집한 민요의 편곡에 몰두했다. 1900년까지 주로 피아노곡들을 작곡하다가 관현악곡으로 전향해서 성공적인 〈키키모라 Kikimora〉·〈마법에 걸린 호수 The Enchanted Lake〉를 작곡했는데, 이 두 곡은 환상적 내용의 미완성 오페라의 초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1913 - 미국의 오페라 가수 리처드 터커(Tucker, Richard) 출생
터커 [Tucker, Richard, 1913.8.28~1975.1.8]
젊은시절 유대교 집회 성가대의 일원으로 노래를 불렀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폴 올트호스에게 성악을 배웠고 1945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 La Gioconda〉 중 엔초 역으로 데뷔했다. 1947년 베로나 무대에서 같은 작품을 마리아 칼라스의 상대역으로 유럽 데뷔 공연을 가졌다.
런던·밀라노·빈·바르셀로나·피렌체 등 유럽 각지의 오페라와 연주회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주된 활동지는 미국이었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에 연주자로 출연하여 인기를 모았고, 수많은 훌륭한 음반들을 냈다. 미국의 대부분의 오페단들과 관현악단에서 노래를 불렀고 칸토르로도 명성을 날렸다. 순회공연중 갑자기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4 -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카를 뵘(Böhm, Karl) 출생
뵘 [Böhm, Karl, 1894.8.28~1981.8.14]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모차르트 등의 작품연주와 음반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빈에서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와 구어도 아들러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17년 그라츠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으며, 3년 후 이곳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21년에는 뮌헨 오페라로 갔으며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931년에는 함부르크, 그리고 1934년에는 드레스덴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36년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데뷔했다. 당시 그는 드레스덴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은 것 때문에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 자리가 나치의 압력으로 사퇴한 프리츠 부슈의 후임이었기 때문이었다. 1938년 브루노 발터를 대신하여 잘츠부르크로 간 것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1943년까지 드레스덴에서 지휘봉을 잡은 이후 1943~45년, 1954~56년 빈 국립 오페라를 지휘했다. 1957년에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Don Giovanni〉를 지휘함으로써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데뷔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지휘를 통해 바그너 작품에 가장 뛰어난 해석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뵘은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음반으로 발표했다. 그의 연주와 음반은 감탄할 만한 온화함과 섬세함, 그리고 서정성을 이끌어낸다. /브리태니커
- Charles Rolls, Henry Royce
1877 - 영국의 자동차 생산업자 찰스 롤스(Rolls, Charles) 출생
롤스 [Rolls, Charles Stewart, 1877.8.28~1910.7.12]
영국의 자동차 경주가, 비행사, 자동차 생산업자.
롤스로이스사의 창업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1910년 6월 사상 최초로 영국 해협을 가로지르는 논스톱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였다.
그는 1900년도의 1,000마일 경주에서 12마력의 팬하드 차를 몰았고 전통적인 유럽장거리경주대회의 초창기 시합에도 여러 번 참가했다.
1902년 자동차 판매업자가 되었고, 1906년에는 헨리 로이스 경의 회사와 자신의 회사를 합병시켜 롤스로이스사를 만들었다. 그는 비행사고로 죽었는데, 영국인 비행사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브리태니커
1861 - 조선 후기의 화가 안중식(安中植) 출생
안중식 [安中植, 1861.8.28~1919.9.10]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 순흥(順興). 호 심전(心田). 벼슬은 도화서 화원(圖畵署畵員)을 거쳐 양천(陽川)·통진(通津) 군수를 지냈다. 일찍이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과 함께 관비생(官費生)으로 중국에 유학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산수·인물·화조(花鳥)를 잘 그렸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시(詩)에도 능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 《낙지론도(樂志論圖)》 《산수도(山水圖)》 《성재임간도(聲在林間圖)》 《군작도(群雀圖)》 등이 있다. /naver
- Alfred Tennyson and 'The - Stained-glass Window,
Beguiling of Merlin St. Bernabas Chapel
1833 - 영국의 화가, 디자이너 번 존스(Burne-Jones, Edward) 출생
번 존스 [Burne-Jones, Edward Coley, 1833.8.28~1898.6.17]
본명은 에드워드 콜리 번 존스(Edward Coley Burne Jones)이다. 1833년 버밍엄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의 엑시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만났다. 1856년 라파엘 전파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를 만남으로써 삶의 전기를 맞이한 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채 옥스퍼드를 떠났다. 그후 런던에 정착하여 로세티의 지도 아래 작업을 진행하였다.로세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형태와 표현 양식의 순수성, 그리고 중세 미술의 고양된 도덕성을 미술에서 회복하고자 하였다. 주제를 성서나 고금의 문학작품에서 취하고, 유려한 선묘(線描), 단정한 구도, 풍요한 색채로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장식적인 경향이 강했다. 작품으로 《창조의 날들 Days of Creation》 《비너스의 거울 The Mirror of Venus》 《멀린과 니무에 Merlin and Nimue》(1858~1959)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King Cophetua and the Beggar Maid》(1884) 등이 있는데 이러한 작품은 중세와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들, 그리고 성서에 바탕을 둔 주제 의식에서 주요한 영감을 얻은 것들로서 풍부한 감정과 낭만적인 스타일이 두드러진 것들이며 일반적으로 라파엘전파의 화가들 작품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의 친구인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중세 응용 미술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모리스가 경영하는 상점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태피스트리 등을 직접 디자인했던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창문은 옥스퍼드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나 버밍엄 성당을 포함해서 영국의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윌리엄 모리스의 켈름스코트 출판사에서 일러스트 작업도 하였다. 1894년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naver
- Germany DDR, 20 Mark (1975. Banknote)
1749 - 독일의 문호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출생
괴테 [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8.28~1832.3.22]
독일의 시인·비평가·언론인·화가·무대연출가·정치가·교육가·과학자.
세계 문학사의 거인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로 유럽인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를 정도로 그가 쓴 방대한 량의 저술과 그 다양성은 놀랄 만하다. 서정성 짙은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빌헬름 마이스터 Wilhelm Meister〉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無韻詩 blank verse)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 Faust〉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경지의 예지를 터득했으면서도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존재를 내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사랑·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그에게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한 〈파우스트〉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二行聯句 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올린다"는 말은 인간 존재의 양극성(兩極性)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다. 여성은 그에게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삶이란 그에게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브리태니커
- 이순신의 한산대첩, 1592
1597 -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 이억기 전사
1597년 8월 28일(음력 7월 16일) - 칠천량 해전(거제도 인근 칠천량) - 원균, 이억기, 배설/도도 다카토라, 와키사카 야스하루, 고니시 유키나가 - 조선군의 유일한 패배. 원균, 이억기 전사 /위키백과
430 - 로마시대 가톨릭 성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사망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Aurelius, 354.11.13~430.8.28]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 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naver
(끝)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첫댓글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