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독립을 맞은 후 분단이 되었고 남한은 미군이 북한은 소련군이 억압아닌 업악을 하였다. 1947년 1월 7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미군 4명이 열차 안의 승객들을 다 내쫓고 조선여자 3명을 간강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3명중 2명은 젓먹이까지 있던 가정주부였다. 이 사건만이 아니라 광주에서 새를 쫓던 농부가 미군한테 총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신문사들은 취재를 하러 광주에 내려갔지만 미군이 이미 동네를 버티고 서서 정당방위이니 돌아가라고 했다. 신문사들은 그러니 확인해보겠다며 뚫고 들어가서 시체를 보니 총알이 몸 앞쪽이 나닌 뒤 쪽에 박혀 있었다. 이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트루먼 독트린' 으로 불리는 선언을 했다. 내용은 미국의 목적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 침략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이 선언을 환영하였고 트루먼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면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하도록 권하였다. 이승만은 흡족한 기분으로 4월 5일 귀국길에 올랐다. 1945년 10월 27일 이승만은 해방경축대회에서 "젊은이들이여, 세계 대회에서 우승하여 태극기를 휘날려달라. 35년간 세계를 다니며 도와달라고 호소하였지만 코리아를 아는 나라가 없었다." 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었다. 이승만이 한국에 도착할때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이 신기록으로 우승을 하였고 스포츠 외교적가치를 잘 알고 있던 이승만은 서윤복의 우승 이후 46일간 서윤복 선수 일행을 이끌고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코리아의 이름을 빛냈고 자신의 명성을 알리는 외교전을 펼쳤다. 이 이외에 정부는 나름대로의 개혁을 시도한다. 그런 시도 중 하나가 47년 3월 13일 본회의에서 상정된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전볌,간상배처단 특별법' 이었다. 사실 친일파처벌법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는 46년부터 나오고 있었지만 친일파처벌법은 6월 29일 보통선거법이 통과된 이후 본격화 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는 미국의 결의안 채택에 따라 호주,캐나다,엘사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 등 8개국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1월 7일 한국에 입국해 업무를 시작했다. 1월 12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군중대회에서 인도 유엔위원단인 메논은 "독립으로 충분하지 않다. 단절이 되어야 한다." 라면서 독립이후 북과 남이 통일이 되어야 하나라는 포부를 밝혔지만 이것을 실천하지는 못 했다. 소련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에 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유엔위원단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을 뿐더라 한국에 있는동안 미국의 철저한 통제 아래 지내야 했다.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2권은 1권에 이어 독립 후 분단까지의 내용을 알려준다. 2권에서는 분단 이후 남한과 북한을 통치했던 미국과 소련이 어떤 정책을 펼쳤으며 조선에 모슨 일이 저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이승만이 남한의 첫 지도자로써 어떤 정책을 펼쳐나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읽으면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이 다른 국가에 의해 억압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왜 조선이 좌파 우파로 나뉘어야만 했고 나중에는 그것을 토대로 북과 남으로 나뉘어져야만 했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당연히 역사적으로도 그떄의 시대상으로도 갈라져야만 했던 이유가 있던 것을 알지만 나로써는 그냥 한 국가가 2개의 조그만한 국가로 또 나뉘어진 것이 속상하고 아쉽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다시는 한국이힘이 없어 다른 국가의 의존해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도 느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후손들에게 우리 민족의 아픔과 역사를 잘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학교다닐때 시험기간이면 역사시간에 외워야 하는 시대별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많이 불평하고 심지어 역사책을 누가 만든 것이냐고 짜증을 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떄 내 행동을 생각해보면 그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선조분들께 죄송스럽다. 지금 이 시대를 살면서 내가 배울 수 있는 최대한으로 그 떄의 아픔과 역사를 배우고 그것을 또 후손에게 물려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