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법(마태복음 7장 12절)
지난주에 예수님의 황금률과 일반적인 황금률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일반적인 황금률은 “네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쉽습니다. 안 하면 그만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대부분의 윤리적 가르침이 여기에서 그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말라. 너에게 고통이 되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안 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이렇게만 되어도 세상은 지금보다는 사건사고 없는 안전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더 좋은 세상, 더 나은 세상을 생각하면 하지 않는 정도로는 어렵습니다. 고독사나 도시빈곤 문제가 그렇습니다. 지난 2월 있었던 송파구 세 모녀의 자살 사건의 경우를 떠올려 보십시오. 고령의 어머니와 젊은 두 딸,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법의 기준에서도 그들은 기초수급 대상자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고령의 어머니가 식당일을 해서 받는 돈 150만원이 수입으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 사정은 다릅니다. 두 딸도 고혈압과 당뇨가 있어 외부 출입이 어렵고, 어머니 수입 중 50만원은 매달 방세로, 나머지는 생활비로 들어가지만 세 모녀가 먹고 살기에는 지극히 부족한 액수입니다. 더구나 두 딸은 카드빚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신용불량자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병원비로 인한 빚이 아니었을까요. 실 사정은 그들은 스스로 설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약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사회나 주변의 적극적인 관심과 돌봄, 그리고 지원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듭니다. 그들을 놓고 ‘난 그들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그들에게 시킨 적이 없어.’는 안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 더 선한 일을 서로서로 상대방에게 해주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나 자신이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겪기 마련입니다. 몸이 매우 건강해서 평소 남의 도움 없이도 잘 살던 건강한 사람도, 돈과 권세가 많은 사람들도 건강이 나빠지고 쓰러지면 최소한 병원 의사와 간호사의 도움은 받아야 합니다. 그도 없이 끝까지 건강하게 또 부유하게 살던 이들도 죽으면 장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토록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남의 입장에서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황금률과 다른 황금률을 자세히 보면,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자신의 입장과 내가 대접을 해줘야 할 남의 입장에 관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입장과 남의 입장을 어떤 수준에 놓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황금률은 자신의 입장을 최소의 수준으로 가정합니다. 자신이 당할 최소의 입장을 가정해 놓고, 그것을 남에게 대입을 합니다. ‘자신에게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자신에게 고통이 되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자신에게 피해가 되고 손해가 되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 누구라도 내가 도둑맞거나 얻어맞는 일을 싫어합니다. 이런 일들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입니다. 내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을 가정하고 그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 이렇게만 해도 꽤 괜찮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이보다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최선의, 최고의 입장을 가정하고 그것을 남에게 대입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고 싶은 최고의 대우, 자신이 경험하고 싶은 가장 좋은 것, 가장 행복한 대우’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제가 사이판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검색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항공사 직원이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당시는 911테러로 인해 공항 검색이 강화되었을 때였습니다. 해서 저는 뭔가 잘못되어 저를 부르나 싶어 순간 긴장을 하며 직원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직원은 저의 티켓을 받아들더니 가장 먼저 저를 비즈니스 석으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교회의 어느 장로님이 아시아나 항공사 지사장이었습니다. 멀리 고국에서 목사가 설교하러 왔다니까, 배려로 저의 비행기 좌석을 업그레이드 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저를 다른 승객들은 ‘저 사람이 뭔가 대단한 사람인가보다’하며 부러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덩달아 우쭐한 기분이 들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비즈니스 석은 승객을 대하는 승무원들의 태도 자체가 달랐습니다. 음식이며, 좌석 모두 최상급이어서, 무슨 왕이라도 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왕처럼 대접받는 것, 대단한 재벌 총수처럼 대접받는 것, 아마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최상의 상태로 가정을 하고서는, 남에게 대할 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황금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황금률은 일반적인 황금률보다는 매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이 최고의 대접을 받고 싶어 하지, 남을 그렇게 대접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어쩌면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남에게 피해를 주고, 남이 싫은 일을 마구 하고, 남에게 고통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법으로 하지 말라고 금지하고 감시하고 어기면 처벌을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도 안 되니까 ‘자신에게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라’고 윤리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황금률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의 결과요, 새로 창조된 자들의 마땅한 삶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에베소서 2:8~10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선하게 지으셨듯이, 예수님의 구원으로 죄인이었던 우리를 다시 지으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선한 존재로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런데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산속이나 사막 혹은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선하고 악하고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누군가 상대방이 있어야 선과 악을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하고 악하고는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즉 남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남에게 해를 가하고 손해를 끼치는 자가 악한 자이듯이, 남에게 유익을 끼치고 좋은 일, 도움을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선한 사람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싫은 일을 요구하지 않는 정도로도 선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편안한 생활을 야기했다는 점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에게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하지 않는’ 정도의 황금률은 매우 소극적이고 자기중심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선한 일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디도서 2:14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교회의 모토가 되는 성구인 베드로전서 2:9~12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긍휼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유는 ‘선한 행실을 가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고 합니다. 우리만 선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지요. 이방인 중에서 선한 행실을 하는 자로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희 선한 일을 보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끼리도 선한 행실로 대해야겠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선한 행실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 이유입니다. 선한 행실, 선한 존재는 혼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항상 대상으로 하는 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한 행실을 예수님은 정확하게 설명하셨지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자신이 최상으로 대접받고, 최고의 존재로 대접받는 것을 가정하여, 그것을 남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바로 선한 행실입니다.
세상의 법이 인간의 악함을 제한하고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금지와 감시와 처벌의 기능을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법을 정하셨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법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법, 하나님의 법, 하나님 나라의 법, 사랑의 법, 은혜의 법. 예수님의 법은 하지 말라는 법이 아니라, 하라는 법입니다. 나에게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법이 아니라,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하라는 법입니다. 법은 왜 있습니까? 지키라고 있습니다. 지키지 않으면 처벌이 내려집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주님의 법인 사랑의 법에 따라 마지막 심판을 행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무엇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결론을 이렇게 끝맺으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법이지요. 예수님께서 그 법을 한마디로 말씀하신 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바로 우리가 행해야 할 선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너무 종교적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은 법을 뜻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법을 의미합니다. 정해진 법이 있고, 그 법은 지켜야 합니다. 법은 누가 정합니까? 법을 정하는 이는 법이 필요한 사회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법을 정하고 집행하는 이는 그 사회의 지배자라는 말입니다. 지배를 받는 백성이나 힘없는 계층이 법을 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민주국가라고 해도 법을 정하는 데에는 힘과 권력과 재력이 있는 자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을 합니다. 그 법은 법을 정하는 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정합니다.
예수께서 정하신 법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을 해보죠. 예수님의 법인 황금률, 즉 사랑의 법, 은혜의 법도 누군가 그 법을 집행하는 권위와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를 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법이라고 하셨을 때에는 법이라는 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법은 누군가 힘과 권력을 가진 어떤 권위적인 존재가 그것을 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법이 그런 것과 똑같은 의미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 법을 정한 권위자가 어떤 권위자냐, 그리고 그 힘과 권위를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느냐 하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법을 정한 권위자와는 완전히 다른 정반대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을 정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권위와 힘을 말해주는 것인지는 법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법이 가장 강력한 때는 바로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지배층이 절대 권력을 휘두를 때입니다. 쉽게 말하면 황제 한 사람이 절대 권력을 쥐고서 제국을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이때는 모두가 납득할 만한 기준으로 법을 정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말이 곧 법입니다. 황제의 생각과 기준, 특히 황제의 기분에 따라 법이 정해집니다. 이런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일까요? 이런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 한 사람의 기분에 따라, 오직 황제 한 사람의 생각에 따라 세워진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백성들이 행복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는 무시무시한 공포와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지배자 한 사람의 기분에 따라 감옥에 쳐 넣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지배합니다.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 명나라, 당나라, 청나라가 대표적인 나라들입니다. 황제의 절대 권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상이 중국의 법가사상입니다. 중국 역사에 네 가지 대표적인 사상이 있습니다. 공자의 유학을 중심으로 한 유가,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노가, 묵자로 대표되는 묵가, 그리고 법가입니다. 법가 사상은 어떤 대표적인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된 사상이 아니라 오랜 시간 여러 사람에 의해 완성된 일종의 정치사상입니다. 앞에 세 개의 사상을 주도한 인물들은 모두 학자들입니다. 그러나 법가전통을 이어온 이들은 모두 당시에 고위급 관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관포지교의 관중은 제나라의 재상이었고, 그 유명한 한비자를 쓴 한비는 한(韓)나라의 재상이요, 가장 강력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전제국가인 진시황의 진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상앙과 이사는 법가 사상을 체계적으로 적용했던 인물들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기는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패권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키던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나라마다 자신의 나라를 보다 힘 있고 강력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법가는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자와 강력한 법을 세워서 집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결국 혼란스러운 중국을 통일한 나라는 바로 가장 강력한 절대 권력을 가진 진시황의 진나라였습니다. 이들은 법을 백성이 살기 좋도록 정하지 않고, 오직 황제가 백성을 잘 통제하도록 그것을 위반한 자들에게 무서운 형벌을 내리고 금지와 감시를 행했습니다. 백성을 강압하고 착취하는 것이 법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법을 주장하는 이들은 공공의 이익을 자주 핑계로 댑니다. 백성에게 더 큰 이익을 주기 위해서는 황제가 사사로운 감정이나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법가, 절대 권력의 기술/ 94쪽) 신하나 백성이 잘못을 저지르면 절대로 자비를 베풀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남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와 도덕주의자들은 황제의 통치를 방해하는 좀벌레로 여깁니다.(법가, 128) 가난한 자에게 덕을 베풀고, 다른 이의 죄를 감싸 주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모두 국가의 간섭을 피하는 자들로 강력한 탄압으로 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법가, 129) 심지어 어질고 현명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는 사람은 황제 일인 독재에 가장 해가 되는 자로, 그는 제거 대상이 됩니다. 한비가 저술한 <한비자> “팔경”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살려 두면 군주에게 해롭고 또 죽이면 군주의 평판이 나빠지는 그런 사람은 음식에 독을 넣어 독살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원수에게 넘겨 줘 죽이게 한다.” 한비는 또 신하가 반역을 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금지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그 중에 ‘전 재신을 기부해 명망을 얻는 것, 죄인을 용서하여 권위를 갖는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법을 주장했던 법가 사상에게 정치권력의 성격은 강압입니다. 강압이란 법을 어긴 자들에게 내리는 무서운 형벌을 기초로 합니다.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그 법을 정한 황제 한 사람의 권력을 더 강하게 하기 위해 더 무서운 형벌과 감시와 지배가 필요한 것입니다. 강력한 군주와 강력한 법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백성이 똑똑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나라의 진시황이 나라의 모든 책을 불로 태우고 400여명이 넘는 유학자들을 산채로 매장한 분서갱유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아닙니까. 또한 중국 모택동의 문화혁명도 중국내 지식인들을 탄압한 비슷한 사건입니다.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가 강력한 법으로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공포입니다. 공포로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야만 통치하기가 쉽다는 것이지요. 법을 황제나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유리하게 정해놓고 그것을 어기면 무시무시한 형벌을 가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본 사람들을 공포에 떨며 무서운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백성을 강압하고 공포에 빠뜨려야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이지요. 히틀러의 나치 독일, 무서운 숙청을 자행하고 집단 수용소를 세운 레닌과 스탈린의 구소련 공산당, 그리고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폴 포츠 정권, 무서운 독재로 유명한 김일성, 그리고 모든 국가의 독재정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부려먹고, 남에게 시키고, 남을 지배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법이 강력한 전제군주 시대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법가 사상이 그렸던 국가는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가장 최고의 대우로 자기가 다 대접을 받은” 가장 극단적인 예입니다. 모두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시킨다면 세상은 이런 모양이 될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이렇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사랑을 법이라 말씀하신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겠지요. 그 법을 정하신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지배자보다, 그 어떤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보다도 높고 힘과 권위가 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왕과 통치자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시는 왕 중의 왕이요, 통치자 중의 통치자입니다. 세상의 법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해 다스립니다. 꽁꽁 묶어 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담대함과 평화와 자유를 줍니다. 요일 4:17-18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그분이 세운 법이 사랑입니다. 은혜입니다. 정확하게 세상의 법과 세상의 권력자의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가장 강력한 왕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셔서 그분의 나라를 전파하셨고, 또 그 나라의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어떻게요? 강압이 아닌 섬김으로, 형벌이 아닌 용서와 사랑으로, 죄인을 처벌하시기 보다는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희생으로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 따라, 우리의 모습 그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모습 그대로, 우리의 죄악에 따라, 우리의 못나고 이기적인 모습 그대로 처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셨고, 사랑으로 대하셨으며,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대우하셨습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최고의 법에 따라 가장 무서운 형벌을 내릴 수 있는 분이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까지 대우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 하십니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를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 은혜의 법,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하늘 아버지의 자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처럼 온전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선한 일을 하는 친 백성,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선한 행실로 열매 맺는 아버지의 자녀가 되라 하십니다. 남에게 최고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최고로 대접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