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6일 숙소 - 호텔 가조엔 도쿄(ホテル雅叙園東京)
메구로 가조엔(目黒雅叙園)은 도쿄도 메구로구(東京都目黒区)에 있는 결혼식장, 호텔, 레스토랑 등의 복합시설로, 2017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이시카와 현(石川県) 하쿠이군(羽咋郡) 시모아마다무라(下甘田村) 출신 창업자 호소카와 리키조우(細川力蔵, 1889-1945)가 1928년 도쿄 시바우라(芝浦)의 자택을 개축하여 일식 요정 시바우라가조엔(芝浦雅叙園)을 운영했는데, 증개축을 거쳐 1931년 메구로(目黒)에 메구로가조엔(目黒雅叙園)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는데, 일설에는 일본 최초의 종합결혼식장이기도 했다.
1945년 패전일 당일 정오, 오니시 타키지로(大西瀧治郎, 1891-1945) 중장이 일왕의 패전 방송을 듣고, 당시 해군병원 분실로 쓰이고 있었던 가조엔(雅叙園)을 들러 동기였던 타다(多田武雄, 1890-1953) 해군차관을 문병하고, 밤늦게 시부야 구(渋谷区) 난페이다이(南平台)의 관사로 귀가해 다음날 패전의 책임을 지고 유서를 남기고 할복자결했던 일은 유명하다.
구관(旧館)인 목조건물의 메구로 가조엔(目黒雅叙園)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1909-1948)의 소설 '길일(佳日)'에도 등장한다. 화려한 실내 장식으로 쇼와의 용궁성(昭和の竜宮城)라고 불리며, 느티나무로 만들어진 목조건축물 백단계단(百段階段, 실제는 99단)은 그 계단 길 옆으로 연결되어 있는 7개의 연회장, 짓포노마(十畝の間), 교쇼우노마(漁樵の間), 소우큐우노마(草丘の間), 세이스이노마(静水の間), 세이코우노마(星光の間), 키요카타노마(清方の間), 쵸우죠우노마(頂上の間) 중 4동은 도쿄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의 욕탕의 모델로 알려져 있는데, 수령 백년의 기둥, 천정, 벽면, 유리창에 이르기까지 쇼와 연간 초기의 예술가들의 추구했던 호화로움과 고도의 목공 기술이 한데 어우러진 장식으로 가득하다. 특히, 이차대전 패전직전까지 처참했던 일반시민에게 사치금지령까지 내렸던 전세와는 달리, 유명화가, 조각가 등이 머물거나 출입하면서방마다 몇년에 걸쳐 인테리어나 회화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문전( 文展), 제전(帝展) 출품작 수천점이 관내에 장식되었는데, 구관 철거 당시 액자 보존된 천정화, 난간 그림과 함께, 신관 부속 미술관(目黒雅叙園美術館)에 정기적으로 전시되었지만, 이후 폐쇄되면서, 소재는 불분명하다.
현재의 부지는 1991년 총 공사비 850억엔에 대대적으로 개수한 것으로, 노후한 구관 개축 및 인접한 메구로 강 수해 대책의 일환을 겸한 것이었다. 창업자인 호소카와 리키조우(細川力蔵, 1889-1945) 사후, 부침을 겪으면서 호텔 및 결혼식장으로 운영을 지속해왔다. 2017년 호텔 가조엔 도쿄(ホテル雅叙園東京)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6.7 석식 - 아사쿠사 나카세이(浅草 中清)
1870년 창업의 에도마에(江戸前) 덴뿌라(天婦羅)를 내놓는 노포 식당으로 스키야 양식의 민가 내 아담한 일본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에도막부 말기, 1대 나카가와 테츠조우(中川鉄蔵)가 쓰루가(駿河)에서 나와 히로코지도오리(広小路通り)에 포장마차 영업을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1870년 아사쿠사공회당(浅草公会堂) 앞에 점포를 열었다. 현재의 당주는 고다이메(五代目) 나카가와 노부코(中川信子)이고, 이어서 나카가와 요시노리(中川 敬規)가 현재 가업을 잇고 있다. 대학 재학중 부친의 타계로 급히 가업을 이었고, 니혼바시와 요코하마에서의 수련을 거쳐 국내는 물론 홍콩까지 음식공부를 하면서 경험을 쌓아 현재 로쿠다이메(五代目)로 이어가고 있다. 에도마에 의 어패류만을 참기름으로 튀겨내는 에도마에 방식의 덴뿌라를 내어놓는 레시피를 고집하고 있다.
특히 이 식당의 자랑거리는, 불문학자로 유명한 유타카 타츠노(辰野隆, 1888-1964)가 이름붙였던 라이진아게(雷神揚げ)이다. 일찌기 고관대작이 즐겨찾았고, 문호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1879-1959)의 작품 곳곳에 이 식당을 들르는 장면이 있기도 하다. 최근에는 문화예술계 뿐만아니라, 외국 귀빈의 방문이 많다. 쿠라즈쿠리(蔵造り)의 현관을 들어서면, 번화가에 있으면서도 연못이 있는 정원을 둘러싼 스키야즈쿠리(数寄屋造り)의 호젓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주 메뉴인 덴뿌라 모듬(天麩羅盛り合わせ)에서는 생선을 자르지 않고 통으로 조리하는 에도마에 조리법에 따라 튀김옷을 두껍게 입힌 메뉴를 내놓으며, 대대로 한 명씩 전수되어온 튀김 비법으로 튀겨 나오는 라이진아게(雷神揚げ)가 일품이다. 현재 조리장은 나카가와 유우타(中川優太, 1988-)로 전무겸 요리장으로 부친의 대를 잇고 있으며, 대학 졸업 후 아사쿠사의 교료리 에모리(京料理 江森)에서 요리를 배우면서, 핫토리 영양전문학교(服部栄養専門学校)를 다녔고, 졸업후, 가이세키 츠지토메(懐石 辻留)에서 요리 수업을 받았다. 2015년부터는 가업을 잇기 위해 덴뿌라 나카세이(天麩羅 中清)에서 수업을 받았고, 현재 전무 경 요리장을 맡고 있다.
6월 7일 숙소 - 호텔 뉴 오타니 도쿄 가든타워(ホテルニューオータニ)
일본정원은 너비 약 40,000 평방미터의 부지에 조성되어 있으며, 에도 초기 구마모토번(熊本藩)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의 시모야시키(下屋敷) 이후, 2대 타다히로(忠広, 1601-1653)에 이르러 개역(改易)되면서, 이후 히코네번(彦根藩) 이이 가(井伊家)의 나카야시키(中屋敷)가 되어 400여년간 다이묘 정원(大名庭園)이 조성되었다. 주위에는 기슈번(紀州藩), 오와리번(尾張藩)의 시모야시키(下屋敷)가 있어 여기에서 기오이쵸(紀尾井町)라는 지명이 유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후시미노미야 저택(伏見宮邸宅)이 되었고, 전후 일반에 매각하면서, 외국인에 팔리는 것을 걱정한 스모선수 출신 사업가이자 오오타니중공업을 이끌었던 오오타니 요네타로(大谷米太郎, 1881-1968)가 1951년 저택부지로 구입하여 일본정원(日本庭園)이 조성되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숙소 부족을 걱정했던 정부의 요청에 부응하여 호텔 뉴오타니(ホテルニューオータニ)를 건설하면서, 라이벌이기도 했던 다이세이 건설( 大成建設)의 창업자인 오쿠라 키하치로(大倉喜八郎, 1837-1928)의 아들이면서 당시 호텔 오쿠라(ホテルオークラ)를 짓기도 했던 오쿠라 키시치로(大倉喜七郎, 1882-1963)에게 의논하여, 키시치로는 호텔 경영에 관해 조언하기도 하고, 호텔 설계를 맡았던 시바타 요우조우(柴田陽三, 1927-2003) 팀을 소개하기도 했다. 정부시책 등의 요인으로 건설된 호텔은 당시 이 호텔 이외에 호텔 뉴 저팬, 팔레스호텔, 호텔 오쿠라, 도쿄 힐튼 호텔, 도쿄프린스호텔 등이 있었다.
다이세이 건설(大成建設)의 시미즈 하지메(清水一, 1902-1972)가 설계의 주축으로, 2차대전 전에는 샌프란시스코 박람회 일본관, 전후에는 호텔 오쿠라(ホテルオークラ), 호텔 뉴오타니(ホテルニューオータニ) 등의 설계를 맡았다. 실제 설계부터 17개월에 걸쳐 건물까지 완공되었던 것은, 앞서 호텔 오쿠라를 통해 설계가 어느정도 검증되었던 것에 더해, 기존 경관의 중심이 될 정원에 대해 중심 건물을 먼저 짓고, 이후 시공해가면서 부속 건물을 채워가는 진행 방식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호텔 주위에 조성된 일본정원에는 총 42기의 석등이 있는데, 간에이지(寛永寺) 석등, 누레사기(ぬれさぎ) 석등, 카스가(春日) 석등, 모모야마(桃山) 석등, 야마도로(山灯籠), 중국 석등 등 다양한 형식이다. 사잔카소우(山茶花荘)는 호텔 개업전의 창업자의 자택에 있었던 건물로 고민가를 유명 건축가인 무라노 도고(村野藤吾, 1891-1984)가 스기야 양식(数奇屋風)으로 개축한 것이다. 와카쿠안(和楽庵)은 1953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대관식을 참석했던 당시 왕세자의 귀국 축하 다회를 위해, 니혼바시(日本橋) 시로키야(白木屋) 백화점에 스기야(数奇屋) 건축 장인 산다이메 기무라 세이베이(三代目 木村清兵衛, 1871-1955)가 지은 다실을 이축해온 건물이다.
6.8 중식 - 이케가미혼몬지(池上本門寺) 쇼토엔(松涛園)
이케가미혼몬지의 북쪽에 위치한 쇼토엔은 본전 뒤쪽, 로우호우 회관(朗峰会館) 북쪽에 위치한 도쿄 인근의 대표적인 사찰정원이다. 오보리 엔슈(小堀遠州)의 작품으로, 1868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와 카츠카이 후나(勝海舟, 1823-1899)가 에도성 무혈입성 회견을 한 장소로 유명하다. 원내에는 곤안(根庵), 돈안(鈍庵), 소우게츠테이(松月亭), 죠안(浄庵) 등의 다실이 있다. 곤안(根庵)은 미츠이 그룹의 창업자 마스다 돈노우(益田鈍翁, 1848-1938)의 후원이 두터웠던 도예가 오노돈나(大野鈍阿, 1885-1951)이 머물렀던 곳이다. 이 건물과 돈안(鈍庵)은 우라센케(裏千家)로부터 기증받아 이축한 것이다. 소우게츠테이(松月亭)는 정원 서쪽의 나즈막한 언덕배기에 세운 아즈마야(四阿)이다. 죠안(浄庵)은 정원 내 가장 높은 언덕에 2014년 세운 다실이다.
6.8 석식 - 아자부 쥬반(麻布十番) 사라시나 호리이(総本家 更科堀井)
1789년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徳川 家斉, 1773-1841) 때, 신슈(信州) 출신의 신슈 특산 시나노누노(信濃布) 호시나 마츠다이라 가문(保科松平家) 어용 포목점이었는데, 누노자라시(晒布)를 가문의 에도야시키(江戸屋敷)에 납품했다. 시나노노쿠니(信濃の国)는 예전부터 참피나무(科の木)가 많은 곳으로 유명했었고, 이 나무의 껍질을 벗겨 줄을 만들거나, 천을 짜기도 했으며, 튼튼한 것은 나무통의 테를 만들 때도 사용했었다.
1대는 누노야타헤에(布屋太兵衛) 혹은 호리이 세이스케(堀井清助)라고 불렸는데, 에도의 호시나 가문의 나가야(長屋)에 체재할 수 있었고, 실제로 1693년 여기서 죽었다. 하치다이메(八代目) 세이에몬(清右衛門) 대에 이르러 영주로부터 소바를 권유받아 호시나 가문(保科家)의 에도야시키(江戸屋) 근처 아자부나가사카쵸(麻布永坂町)에 '신슈 사라시나 소바도코로 누노야타헤에(信州更科蕎麦所 布屋太兵衛)'이란 간판으로 국수집을 낸 것이 시초이다. 원래는 다이묘 야시키(大名屋敷)나 사찰으로부터 손님이 많았으나, 메이지 연간 번성했을 때는 왕가나 궁가의 출입도 잦았다. 여러 차례 소바 맛집 리스트에 언급되었을 정도로 인기있었고, 1899년에는 후카가와 사가쵸(深川佐賀町)에 첫 지점을 냈다. 1941년 이차대전 공습등의 영향으로 일시 폐업했다가, 패전 후 1948년 바바시게타로우(馬場繁太郎)에서 아자부쥬반이치(麻布十番一) 다리 밑에 '나가사카 사라시나 본점(永坂更科本店)'의 이름으로 개업했다. 시치다이메 호리이 마츠노스케(七代目堀井松之助)와 바바시게타로우(馬場繁太郎) 간의 상호 사용에 계약에 의한 개업이었고, 당시 가조엔(雅叙園)에서 일하고 있던 시치다이메 호리이 마츠노스케(七代目堀井松之助)를 고용했다. 이후 1960년에는 하치다이메 호리이 료우조우(八代目 堀井良造)가 대학졸업 후 입사했다. 1984년에는 유사 상호 사용금지 소송에 승소하여 상표권 사용이 가능해져, 당시 전무였던 하치다이메 호리이 료우조우(八代目 堀井良造)가 현재의 위치에 '신슈 사라시나 누노야 총본점(信州更科 布屋総本店)'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다. 이후 상표권 문제로 누노야를 상호에서 빼고, 현재의 '사라시나 호리이(更科堀井)'로 개명하였다. 2016년부터는 큐다이메 호리이 요시노리(九代目 堀井良教), 호리이 타헤에(堀井太兵衛)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에도소바(江戸そば)로 노포로 내려오는 세 곳의 식당, '노렌고산케(のれん御三家)'가 있는데, 각각 사라시나(更科), 스나바(砂場), 야부(藪)가 있으며, 사라시나 이외에 스나바(砂場)는 오사카에서 시작된 국수집 (1584년의 유래가 전해지지만, 불분명하며, 1798년에 몇 곳의 국수집이 언급되고 있음.)이며, 야부(藪)는 1735년부터 언급되어온 오래된 국수집으로 문헌상으로는 간다야부소바을 총본산으로 하여 1880년 창업하여 운영하다가 2013년 화재로 소실돼어 2014년 다시 문을 열었다.
사라시나소바(更科そば)는 메밀의 껍질을 빼고 만들어 면의 빛깔이 하얀 것이 특징으로 마치 소면과 같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특징이 있으며, 야부소바는, 면을 뽑을 때, 밀가루와 메밀의 비율이 2:8이며 껍질과 함께 갈아 만들어 약간 연두색 빛을 내며, 야부소바의 특징은 간장의 맛이 강해 조금만 찍어먹으며, 전체적인 음식 맛이 깔끔하고 맛있으면서도 메밀 특유의 향과 질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스나바 소바의 경우, 열매의 중심부만 사용하여 뽑은 가늘고 하얀 면발이 특징이다.
6.8 숙소 - 그랜드 프린스 호텔 신타카나와
더 프린스 사쿠라 타워 도쿄(ザ・プリンス さくらタワー東京), 그랜드 프린스 호텔 타카나와(グランドプリンスホテル高輪), 그랜드 프린스 호텔 신 타카나와(グランドプリンスホテル新高輪) 등 3개의 호텔이 둘러싸혹 있는 일본 정원은, 1971년 구 타카나와 프린스 호텔(旧高輪プリンスホテル)의 신축에 따라, 호텔의 야외 수영장 자리에 조성되었는데, 당시 고쿄 신 큐덴(皇居新宮殿) 건축에도 참여했었던 쿠스오카 테이지(楠岡悌二)에 의해 조성되었고, 20,397 평방미터의 부지에는 정원 외에도, 키힌칸(貴賓館) 개축, 그랜드 프린스호텔 신 타카나와 설계 등을 맡았던 유명 건축가, 무라노 도고(村野藤吾, 1891-1984)의 최만년의 작품 사료우 에안(茶寮恵庵) 뿐 만 아니라, 산문(山門), 청동 등롱(青銅灯篭) 등, 다양한 일본 전통 건축물이 점재해 있는데, 청동 등롱(青銅灯篭) 에도시대 도쿠가와 쇼군 가(徳川将軍家)의 영지(霊の地, 현재의 도쿄 프린스호텔 자리)에 있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종루(鐘楼)는 1656년 건립한 것으로, 1959년 나라현(奈良県) 나라시(奈良市) 넨부츠지(念仏寺)에서 이축한 것인데, 메이지 연간에, 범종의 장인으로 시치다이메 오이고지에몬((7代目 老子次右衛門)이 만들었으며, '사쿠라자카(さくら坂の鐘)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칸논도(観音堂)는 나라현(奈良県) 이코마시(生駒市) 쵸큐지(長弓寺)에 있었던 삼층목탑의 일부를 옮겨온 것으로, 대부분은 부재를 교체하였지만, 공포 일부는 옛 부재가 남아 있다. 안치되어 있는 십일면 관음보살하상(十一面観音踏下像)은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보살상이다. 쵸큐지(長弓寺) 삼층목탑은 본당(本堂)과 같은 시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어, 당시 초층만 남아 퇴락한 모습이었지만, 1935년 본당 수리 당시 비용충당을 위해, 카마쿠라(鎌倉) 마에야마 히사키치(前山久吉, 1872-1937)에게 팔렸다가, 이차대전 후, 마에야마 사망 후에 세이부 철도(西武鉄道) 츠츠미 야스지로(堤康次郎, 1889-1964)에게 매각되어 이후 타카나와 프린스호텔(高輪プリンスホテル)에 이건되었다.
코마이누(狛犬) 상은 중국 건륭제 때의 것으로, 1990년 시나가와 프린스 호텔(品川プリンスホテル)에서 옮겨온 것이며, 구슬을 희롱하는 사자가 수컷, 새끼와 놀고 있는 것이 암컷이다.
구 다케다노미야 저택(旧竹田宮邸)은 궁정건축가인 가타야마 도쿠마(片山東熊, 1854-1917)에 의해 1911년 준공된 양관으로,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오우(竹田宮恒久, 1882-1919)의 저택으로 이용되었으며, 이차대전 후 상공대신, 통상산업대신 공관으로 활용되었다가, 타카나와 프린스 호텔의 소유가 되면서, 1972년 무라노 도코(村野藤吾, 1891-1984)에 의해 개축, 복원되어 현재 키힌칸(貴賓館)으로 각종 회의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카사카 게힌칸(赤坂迎賓館)을 설계한 건축가의 작품인 것이 곳곳에 느껴지는, 호화로운 1층 장식, 차분한 억제된 색조의 2층 장식이 특징이다.
6.9 중식 - 가츠키치 스이도바시점(かつ吉 水道橋店)
1962년 창업하여 반세기 이상 이어온 맛집으로 인근 유도관이나 고라쿠엔 홀을 찾는 격투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맛집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나 격투기 애호가였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창업자인 요시다 요시노스케(吉田吉之助)는 정재계에 꽤 밝은 편이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돼지고기에 밝아서 담배왕으로 불릴 정도로 담배로 모든 돈으로 양돈에 손을 댄 사츠마 출신 부친의 영향으로 결국 50대에 이르러 가츠키치(かつ吉)를 개업했다. 당시부터 돼지고기 조리시 저온 숙성을 고집하여, 지금도 20분 이상 오랫동안 튀겨내어 젓가락으로 잘릴 정도로 부드럽게 조리 후 녹은 돼지고기 지방분의 고소하고 깔끔한 식당이 특징이다.
가계에서는 스테이크도 제공하는데, 이와 관련해서 미시마와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어느날 보디빌더들이 집결하곤 했던 고라쿠엔 체육관에 다니고 있던 미시마는, 가계에 스테이크를 주문하면서, '스테이크를 간장과 함께 먹는게 제일 맛있다.'는 말을 하면서 요리해줄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데미글라스 소스를 곁들여왔던 식당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간장소스로 음식을 내어왔는데, 의외로 맛이 좋아 이후, 간장맛으로 메뉴가 바뀌었다고도 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와는 생전에 창업자와 각별해서, 마침 야스나리가 돼지띠인데다가, 조상이 멧돼지인 점에 착안하여 '亥' 자를 공작 깃털 붓으로 써쭸다고 전해집니다. 각자하여 시부야점과 히비야점에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