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이씨 은암공파 17세(固城李氏 隱庵公派17世)송암(松巖)
이노(李魯)의 의병활동
=낙산서원(洛山書院)(17세손 송암(松巖) 이노(李魯)선생(先生)의 독향소(配享所) =의령군 부림면 경산리
가계와 생애(家系와 生涯)
송암(松巖) 이노(李魯: 중종 39년 1544~1598)는 의령현 부곡리(孚谷里)(부림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첨정을 지낸 이한(李翰)이고 아버지는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를 지낸 이효범(李孝範)이고 어머니는 남평문씨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의 현손으로 판관 문은(文垠)의 딸이다. 본관은 고성(古城)으로 고려 호부상서 철령군 이황(李璜)이 시조이고 17세손이며 의령 입향조(入鄕祖)인 은암공(隱菴公) 이백(李伯)의 7세손이다 고려 판우군 총제인 이백(李伯: 10세손)이 국운이 쇠하는 것을 보고 의령 세간촌(世干村)(의령 유곡면)에 은거하여 파조(派祖)로 하는 은암공파의 세계도(世系圖)를 시작하게 된다
※ 고성이씨 은암공파의 세계도
4---5---6---7---8---9---10---11---12---13---14---15---16---17---18---19---20
永年--麟冲
嚴冲 --俊明 -松茂 -應卿 -仁吉
允柱---伯----乙孫
(은암공) 乙寶
覺寶(조계종대선사)
乙芳
乙賢---琚
山命- - 克仁 ---文昌- --翰-- -忠範- -曄
克元 紀 孝範--魯(松巖.)........ ....錫龜-- 亨潤
. . 英潤
曼期, 曼明, 廓再祐
普(畜巖)
旨(伯巖)...曼勝.- -.錫生--景潤
光潤
錫龜--출魯
錫鼉--時 潤
裁潤
위의 세계도에서 보면 적자가 없고 서자인 만기와 만명을 두어 종손인 석구가 사손(祀孫) 봉사(奉祀)하였다. 또한 서녀(庶女)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의 부실(副室)이 되었다. 이로는 16세 되던 1559년(명종 14)에 초계 정씨와 혼인하고 이듬해 거제도에 귀향온 유헌(游軒) 정황(丁潢)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았다. 19세 때인 1562년(명종 17)에 두 동생과 함께 수우당(守愚堂) 최영경(最永慶)을 좇아 배우고, 그 다음해에 아우들과 함께 진주의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1세인 1564년(명종 19)에 진사(進士) 회시(會試)에 입격하고 25세 되던 1568년(선조 1) 봄에 성주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방문하였다. 이듬해에 성균관으로 유학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율곡(栗谷) 이이(李珥), 이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과 친교를 쌓았다. 이때에 을사사화에 피화된 윤임(尹任) 등의 신원(伸寃)을 청한 “청신토을사충간소(請伸討乙巳忠奸疏)”를 올려 그 당시 사람들이 강직하다는 공론이 있었다.
29세에 스승인 남명의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30세초에 집안의 우환이 겹쳐 상례를 치르는데 전염하였다, 30세 되던 1573년(선조 6) 6월에 아우 이보가 죽음을 맞았고 34세에 부친상, 36세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마친 뒤 한동안 단성(丹城) 송암촌(생비랑면)에 머물렀다. 41세(1584년 선조 17)에 비로소 봉선전 참봉에 제수되었고, 별과 초시를 거쳐 47세인 1590년(선조 23) 10월에 증광시 문과에 월사 이정귀, 선원 김상용과 함께 갑과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다. 한 해 앞서서 스승인 최영경이 정여립 모반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에 연루되어 길삼봉(吉三峰)이라는 무함(誣陷)을 쓰고 옥사하였는데, 그 당시의 사류(士類)들이 기를 죽이고 이를 따지고 논변하지도 못하였지만 과거급제 직후였던 이로가 과감하게 신원(伸寃)하는 소를 올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기도 하였다. 1591년에는 직장(直長)이 되어 왜서(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신묘봉사(辛卯封事)를 올려 일본과 담판을 하고 변방을 방비할 계책을 아뢰었다. 또한 외삼촌인 문덕수가 당시의 시사(時事)를 우려하여 아주 극렬한 글로 감영에 고언하였다가 도리어 감사의 비위를 거슬러 체포되자, 이일로 서울에 올라가 사실대로 아뢰고 그의 외삼촌을 구해 내기도 하였다. 이해에 부모의 내외가를 밝히는 『사성강목(四姓綱目)』을 완성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와 함께 창의(倡義)할 것을 약속하고 귀향하여 삼가, 단성으로 나아가 동생 이지(李旨)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여러 고을에 창의통문을 내어 민중의 의분심을 환기시키는 한편,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의 종사관, 소모관, 사저관으로 활약하였다. 7월에 진주성에서 싸우고 10월에는 의령에서 왜적과 싸워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3년(선조 26) 4월에 김성일이 병사하자 염하고 빈소를 마련하였으며 방장산에 임시로 장사지내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이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격문을 보내고 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에게 서계(書啓)를 보내어 화의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그 사이에 형조좌랑 겸 기주관, 거창假守를 역임하였다.
1594년(선조 27) 3월에 아우 이지(李旨)의 상을 당하고 7월에 비안(의성군 비안면)현감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정언을 거쳐 다시 비안현감이 되었다. 1596년(선조 29) 봄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으나 12월에 다시 경상우도 도사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3월, 54세에『용사일기(龍蛇日記)』를 저술하였고 9월에 도체찰사 이원익의 별장으로 창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선조 31) 1월에 55세 나이에 다시 정언이 되어 서울로 가던 중 금산(金山)의 객관(客館)에서 졸하고 4월에 의령현 부곡리 소산(所山)(의령 부림면 입산리)에 장사지냈다.
1802년(순조 2)에 의령현 경산리에 경덕사(景德祠)가 건립되고 그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낙산서원이라 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시호는 정의(貞義)이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낙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돌이켜보면 그의 삶은 좋은 날 보다는 힘든 날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10~20대는 스승을 쫓아 학문을 익혔고 또한 진사시에 같이 합격한 사람들과 당대의 석학으로 학문과 문학을 교류한 것이 관직활동과 의병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49~졸(卒: 55세)할 때까지 임진왜란의 전란을 맞았고 그 자신도 의병으로 항전(抗戰)했던 업적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대대로칭송하고 있다.
※송암공 이노의 약력(松菴公 李魯의 略歷)
연 도 | 왕 력 | 간지 | 연령 | 내 용 |
1544 | 중종 39 | 갑진 | 1 | 3월 의령현 부곡리(부림면)에서 출생 |
1559 | 명종 14 | 기미 | 16 | 초계정씨와 혼인 |
1560 | 명종 15 | 경신 | 17 | 거제도에서 游軒 丁潢을 배알함 |
1562 | 명종 17 | 임술 | 19 | 두 동생과 함께 守愚堂 崔永慶을 찾아봄 |
1563 | 명종 18 | 계해 | 20 | 두 동생과 함께 진주의 南冥 曺植에게 수학하다(남명 63세) |
1564 | 명종 19 | 갑자 | 21 | 진사 會試에 합격 |
1568 | 선조 1 | 무진 | 25 | 봄, 성주의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를 방문 |
1569 | 선조 2 | 기사 | 26 | 여름, 성균관에 유학, 상소하여 乙巳忠賢의 伸寃을 청함 |
1572 | 선조 5 | 임신 | 29 | 4월 남명 조식의 장례식에 참여 |
1573 | 선조 6 | 계유 | 30 | 봄, 덕계 오건을 배알함, 6월 동생 이보의 상을 당함 |
1577 | 선조 10 | 정축 | 34 | 8월, 부친상 |
1579 | 선조 12 | 기묘 | 36 | 8월, 모친상 |
1583 | 선조 16 | 계미 | 40 | 단성 송암촌(산청군 생비랑면)에 머물다 |
1584 | 선조 17 | 갑신 | 41 | 봉선전 참판임명, 별과 초시에 입격 |
1590 | 선조 23 | 경인 | 47 | 10월, 增廣文科에 갑과로 급제, 상소하여 守愚堂 崔永慶의 伸寃을 청함 |
1591 | 선조 24 | 신묘 | 48 | 直長임명, 3월 倭書에 답하는 문제로 辛卯封事를 올림, 四姓綱目 완성 |
1592 | 선조 25 | 임진 | 49 | 4월 임진왜란, 5월 초유사 김성일과 함양에서 만남, 삼가와 단성에서 의병시작, 촉석류에서 김성일과 합류, 7월 왜적과 전투에서 승리. 성균관 典籍임명, 10월 김성일과 의령전투 대성함 |
1593 | 선조 26 | 계사 | 50 | 3월 호남곡 2만석을 수송하여 邑에 나누어줌, 4월 김성일의 상을 치룸, 가을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거창 假守됨, 왜장 가등청정에게 격문을 보냄, 제독 이여송에게 화의의 잘못을 논함, 11월 신광필, 안대진, 이춘영, 유몽인과 함께 製述文官임명 |
1594 | 선조 27 | 갑오 | 51 | 3월 동생 이지의 상,7월 비안(의성군 비안면) 현감, 11월 正言이 되었다가 체차되어 다시 비안 현감 임명 |
1595 | 선조 28 | 을미 | 52 | 여름 합천의 객사로 摠兵 劉綎을 방문 |
1596 | 선조 29 | 병신 | 53 | 봄 관직을 버리고 귀향, 12월 경상도都事임명 |
1597 | 선조 30 | 정유 | 54 | 3월 龍蛇日記를 저술, 9월 都體察使 이원익의 別將으로 창원 등지에서 활약함 |
1598 | 선조 31 | 무술 | 55 | 1월 正言에 임명되어한양(서울)로 가다가 금산 객관에서 졸함. 4월 의령 부곡리 소산에서 장사 |
1802 | 순조 2 | 임술 |
| 의령 경산에 경덕사 건립하여 위패 봉안하고 낙산서원 명명함 |
1812 | 순조 12 | 임신 |
| 嘉善大夫 吏曹參判 에 증직 |
1817 | 순조 17 | 정축 |
| 資憲大夫 吏曹判書 에 증직 |
1852 | 철종 | 임자 |
| 후손 李賢俊 등이 문집을 간행(李彙寧의 跋) |
낙산서원 (의령 부림면 경산리)
함휘각 (의령 정곡면 오방리)[용사일기 보관소]
17세조 송암공 이노의 묘지(의령 부림면 입산리 설미)
※ 참고문헌
제 목 | 출 판 사 | 저 자 | 출판일자 | 주 소 | 전 화 |
고성이씨 가문의 인물과 활동 | 일지사 | 박홍갑 외 | 2010. 10. 20 |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1-169 | 02) 732-9320 |
松巖 李魯와 來菴 鄭仁弘의 학문과 사상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李九義(경북대) 全丙哲(경상대) | 2014. 10. 31 | 경남 진주시 진주대로 501 | 055)772-2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