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변의 시인 시서 김선(金璇)에 대한 考察
글/김용상(金容祥)
1. 개 요
시서 김선은 (1568~1642) 나주 출신의 학자요 시인이며 문인이었다.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냈으며 선조.광해군.인조시대의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전란과 광해의 난정과 반정과 내우.외환 속에서도 명분과 대의를 지킨 유학자였다.
호남의 무등산변의 우뚝선 문학의 풍류가 담양의 식영정 그리고 환벽당과 소쇄원의 원림 속에서 호남의 문학이 발생하여 식영정 앞에는 송강의 가사문학이 산실인 것이다. 면앙 송순에 의하여 호남의 가사문학이 그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송강 정철에 의하여 가사문학의 꽃을 피운다.
담양의 면앙정은 송순이 지은 정자이나 ‘면앙정(俛仰亭)의 가사문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산하 석천 임억령, 서하당 김성원,환벽당 김윤재, 소쇄 양산보 하서 김인후 임진왜란시에 두 아들과 함께 의병장으로 나가 진주성에서 순직한 고경명 나주의 백호 임제등에 의히여 호남의 문학이 꽃을 피운다. 즉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호남의 문학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문학사에 우뚝 솟는다.
시조 문학으로는 유배중 보길도에서 꽃을 피운 고산의 ‘어부사시사’가 남해의 고도에서 어부들의 생활과 살아가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물론 해남에서의 산중신곡 그리고 오우가(五友歌)등이 멋드러진 시문학들을 읊조리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적벽강이 있는 화순에는 적벽풍류가 있고 김삿갓의 적벽풍류에 젖은 김삿갓의
시문학이 그를 대변하여 주고 있으며 그 수 많은 시가 ’물염정‘비롯하여 망향정,송석정 환산정등의 그 주변에 시와 적벽이 어울리는 모습은 가히 중국의 적벽과 견줄만하다.
시서 김선은 그 후대에 나주에서 태어나 금성산변의 죽림(竹林)에 ‘오락정(五樂亭)’을 짓고 당대의 4대 문장가 계곡 장유(張維) 송강 정철의 5째 아드님 정홍명등과 교류를 하였으며 나주의 남간 나해봉, 석천 임서등 많은 시인들과 선비들과 교류를 하며 영산강변의 수 많은 정자에 그의 글이 소장되어 있다.
금성산 산록의 오락정을 짓고 그 기문(記文)에서
“ 아 복(福은 깃털보다도 가벼운데 아무도 그것을 잡을 줄 모르고 화(禍는 땅보다도 무거운데 아무도 그것을 피 할 줄 모르네 .기꺼이 눈에 차지 않는 영광을 쫓으며 스스로 집채 만큼 큰 치욕을 취하는구나!
가난하면서도 즐기고 궁하면서도 의(義)를 잃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무엇을 말함인가?
그의 삶의 철학인 오락(五樂)이라함은
제1락은 형제의 즐거움이요(兄弟樂)
제2락은 처자의 즐거움이요(妻子樂)
제3락은 시와 술의 즐거움이요(詩酒樂)
제4락은 야채와 잡곡밥의 즐거움이요(菜糲樂)
제5락은 빈궁의 즐거움이다(貧窮樂)
오락정 기(記)에서 보듯이 시서 김선은 ‘오락(五樂)’의 삶이란 분수에 맞는 삶이요 빈궁의 철학이 베어 있는 시인이요 학자다. 시서 김선은 도학자이기 전에 시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좋아하여 1.250 여 수의 한시를 남기었다. 첫째는 우국지정(憂國之情)이다. 시대가 난세요 병자호란의 국난의 어려운 시기이다. 둘째는 안빈락도(安貧樂道)이다 시서는 을묘년 그이 나이 48세때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오락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궁하면서도 의를 잃지 않는 그것을 樂道라 여겼다.
한 시대의 문인과 문학작품을 연구한다는 것은 한 개인의 작품 세계와 문학정신을 살펴보는 의미도 있지만 당 시대에 사는 인간체계를 알 수가 있으며,특히 뛰어난 능력과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에 묻혀 그 아쉬움은 더 한다.
다행히 2003년 나주시청과 나주의 동신대학교의 중어국문학과 김종섭 교수에
의해 한역으로 ‘시서유고집(市西遺稿集)‘번역이 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지금도’초당한람‘이라는 책은 고스란히 보존만 되고 있다. 그 이후에 국립목포대학교 정일교수애 의해 논문이 발표 되었고 나주의 동신대 김귀석교수에 의해 논문이 발표 된 바가 있다.그가 지은 1.250 여 수의 한시 작품을 내용별로 살펴 보면 가족관계가 61수,불교관계 72수애 .이별시 64수 애국 85수 지인,친구 239,인생의삶 315,풍물286 기타 80수로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라를 걱정하는 것과 궁하면서 안분자족 하는 삶(憂國 과 安貧樂道)‘는 그의 문학사상에 주류이며, 어려웠던 시국에 국가와 나라를 걱정하는 모습과 인생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며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2. 시서 김선(金璇)의 생애와 문학의 유적지를 따라서
가) 시서 김선의 생애
시서 김선의 나주은 나주의 선비로 금성산변의 ’장원봉;아래 ‘오락정’을 짓고 나주의 목사도 지낸바 있는 계곡 장유,평양감사를 한 바 있는‘석촌 임서 그 토록 출사를 원했던 송강의 5째 아들 정홍명과 나주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 교류하며 시대를 한탄하고 걱정을 하고 때로는 인생의 무상을 느끼면서 인생을 노래 하였다. 시서 김선 조선 중기 선조때 태어 나시고 임진왜란을 겪으시고 광해군,인조의 반정으로 병자호란을 겪게 되며 어려운 전란에 휘말리는 시기를 몸소 겪으셨으며,1608년 선조가 승하 하시고 광해군이 즉위 한 후에 ’대북파‘가 정권을 잡고 이이첨. 정인홍등이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자 이를 비판하다 과거를 정지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1610년에는 유생들의 상소를 앞 장 서서 주장하여 다섯 현인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고 광해군 6년 1614년 인목대비의 페모론에 반기를 들어 호남의 유생들을 이끌고 상경하려다 저지를 당하고,그로 인해 성균관에서 4개 관서에 주관하는 과거를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의와 명분이 함몰된 세상에 분개한 시서는 과거를 포기하고 세상에 등을 지고 작별하는 하는 것이 자신의 분수라 여기고 나주의 장원봉의 죽림(竹林)에 ‘오락정(五樂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과 시문에 전념을 하였다.
나) 영산강변의 “영모정(永慕亭)”에서
영산강변에서 제일 풍광이 수려 한 곳은 아마도 영모정(永慕亭)이 아닌가 한다. 동쪽에서는 아침이면 가야산 앙암바위의 비경속에 붉은 햇볕이 떠 오르며 영산강변의 유유히 흐르는 물결 위를 비추면서 영모정으로 향한다. 약 5백 년된 회나무들이 바람결에 나브끼며 고즈넉한 풍호언덕을 향하여 불어오고 백사장의 위로는 백구들이 장천을 나르며 북으로 나르고 있다.또한 석양에는 석양의 노을들이 서해안에서 석양빛을 발하여 비추며 그 풍광은 과히 신선들이나 노는 명소 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들까 조선중기때 나주의 선비 11인 *금강11수계(錦江11修禊)의 돚단배에 선유를 하기도 하고 낚시를 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그 지근 거리에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백호 임제의 문학관이 아담히 건립되어 문학의 거리이기도 하다.
‘영모정(永慕亭)‘은 귀래정 임붕(林鵬)의 자녀들이 시묘살이를 끝내고 이 자리에 영모당이라는 이름을 짓고 부모님을 영원히 사모한다는 자녀들의 효성이 지극한 마음에 그의 자녀 임복(林復)과 4째 아들 임진(林晉 백호공 부친)들이 앞장을 서서 건립을 하여 그 이름에서도 보듯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모하는 뜻에서 영원히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이 나타나고 있다.
원운은 풍암공 임복이 제시 하였으며
詩 (原韻)
永慕先親處 : 지난 엣날 어버이를 그지없이 사모하며
流傳指一臺 :그 당시 논닌 곳에 이 정자를 지었도다
堂存依昔賞 : 때도 없이 올라가서 이곳 저곳 살펴보며
思邈幾時廻 :그지 없는 감상으로 오랜시간 보냈도다
------------- 이하생략-------
여기에 차운으로 시서 김선,설강 안현.석천 임서. 상노.창암 박사해등이
차운을 하여 지금도 그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정유재란시 (15978년)이 정자가 불에 타서 가문에서 전해 오는 서적들과 선친의 추모지적(追慕之跡)이 모두 병화의 불에 타 버리어 모든 자료들이 소실되고 말았다.
풍암공의 원운에 차운을 시서 김선은
不任終身慕 : 종신토록 추모하는 그지 없는 마음으로
重營舊日臺 : 지난 옛날 그 자리에 이정자를 지었도다.
歲從流水逝 : 그침없는 빠른세월 유수처럼 흘러가고
江帶夕陽廻 : 아름다운 저녁노을 강물 위에 비쳤도다.
高臥成長往 : 속세 아닌 맑은 땅에 높이 누워 은거하여
浮名愧倘來 : 이 세상의 모든 부초와 같은 명예는 다 버렸도다.
秋霜春雨露 : 가을서리 봄이슬을 바라보는 그때마다
僾僾若爲裁 :흐느끼는 그 마음이 한 없이 깊었도다
위와 같이 화답을 하고 있으나, 귀래공 자녀들의 효심과 난세에 모든 부귀 공명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깨끗한 선비와 학자로 또는 시인으로 그심경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 그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풍암공의 장자 석촌 임서(林㥠 백호 임제 사촌)와 수 많은 시문을 교류하고 있으며 몽탄의 식영정의 주인 승지공 임연하고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으며, 특히 석촌 임서의 제문과 후지공(백호 임제 아들)의 제문으로 생과 사의 헤어짐의 가슴 아픔을 글로써 나타나고 있다.
다) 푸른 솔밭의 벽류정(碧流亭)에서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제184호호 지정된 정자로써 좌측으로는 성덕산 앞쪽에 성자산 우측에 양달산 뒷쪽에 자리를 한 이정자는 명산이 감싸 안은 천혜의 들녘 가운데 자그마한 동산에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는 아름다운 벽류(碧流)는 수령이 수 백년을 헤아리는 교목(喬木)의 우람한 노송들이 빽빽이 둘러 쌓인 그늘속에 자리하여 여름철이면 더위를 씻는 남양의
터로 예로부터 문인 묵객들의 발소리가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정자이다. 원운은 이 정자의 주인공의 후손인 김순택이 제시 하였고 감찰공 임연 남간 나해봉 시서 김선등이 화답을 하며 노래하고 있다.
시서 김선은
松水今猶在 : 맑은 시냇물의 푸른솔에 오늘까지 있건만은
二兄何處歸 : 우리二兄 그 모습은 다시 보기 어렵도다.
村林總漢漢 : 마을가의 맑은 수풀 변함없이 푸르르고
郊樹尙依依 : 교외밖의 높은 나무 그지없이 자랐도다
景物無全異 : 이 가운데 모든 풍경은 지난날과 다르지 않으나
存亡有半非 : 죽고 사는 그 이치를 옛날 주인 잃었도다
名區屬勝主 : 아름다운 이 지역이 옳은 주인 만난지라
留醉莫沾衣 : 나의 윗옷을 벗어 놓고 취하도록 마셨도다
풍광이 아름답고 주위의 경관이 빼어난 이 정자에서 모든 일상을 잊고
자연과 인생을 논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며 문인으로
또는 학자로 시인으로 그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도 다시면의 영산강변의 소요정, 칠두정에도 그의 작품을 찾아 볼 수가 있으며. 시서 김선은 ‘칠두정’의 정자안을 걸으면서 이미 먼저 간 문우들을 그리워하며 한 마리의 노학(老鶴)을 자신에 비유하여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내고 있다.이미 소실 되어 버린 ‘능허정(凌虛亭)’에도,쌍병정(雙碧亭)에도 정자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으나 그의 시문은 영원히 영산강의 물결과 함께 흐르고 있다.
칠두정(七頭亭)에서
舊 日 同 樽 醉 此 亭 : 지난 옛날 말술 먹고 이 정자에서 취하였는데
白 頭 唯 我 獨 伶 打 : 유독 나만 백발이 되고 홀로 서니 외롭구나
雨過 沙 洲 地 水 暮 : 비 지나니 웅덩이 속 모레톱에 날 저물고
多 情 老 鶴 步 苔 庭 : 다정하던 늙은 학이 이끼 낀 뜰 홀로 걷고 있네
3. 마지막정리
상기 위에서 무등산에서부터 담양의 정자를 찾아 문학의 향기를 찾아 보았으며 특히 ‘가사문학’의 꽃을 피우게 되었으며 무등산의 식영정의 주변의 정자에서 호남의 문학을 최고의 경지에 올려 놓았다. 화순에는 적벽풍류로 적벽강의 위로는 백구들이 한가로히 나르며 그 주변에는 물염정, 망향정, 송석정,환산정들이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특히 김삿갓등의 시비(詩碑)들이 즐비하게 있어 시향의 맛을 더 느낄 수 있다. 무등산 줄기 따라 지석천 상류인 화순 그리고 황룡강 따라 담양 ,장성 그리고 영산강 따라 나주의 영산강변의 풍광이 아름다운 요소요소에 정자들이 자리를 잡고 옛 어른들의난세를 피하며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어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과 시문을 나누는 그 정취는 역사는 흘렀어도 그 공간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으며, 신걸산의 중턱에 자리 잡은 백호 임제나 지근에 용머리 산록에 자리 잡고 영산강을 바라보고 계시는 시서 김선님들을 생각할 때 옛 어른들의 도타운 정이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지고 있다. 끝
& 註釋:1. “영산강변의 시인 시서 김선의고찰 ”의 제1회 12행 고경명과 고인후는 금산사에서 순직하 였으며 고용후는 진주성에서 김천일 부자 최경회등과 순직하였음을 정정합니다
2. “금강 11인 수계“ 조선중기때 기묘사화때 나주의 사림세력으로 성균관 유생으로 중종에게 정암 조광조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려지지 않자 한양에서 나주까지 200 여명 의 유생들 이 도보로 시위를 한 역사적인 사건(왕곡면의 금사정과 5백년 된 동백나무가 그 흔적을 남 기고 있음(승지 임붕.직장 나일손.생원 정일손.진사 김두.생원 김식.생원 정 호.우후 김구.진사 진이손 진삼손 11분)
參考文獻. 1.市西遺稿 2003나주시청.동신대학교 공동번역
2.樓亭題詠 2002 나주향토 문학 연구회
3. 慕 亭 1999 영산강 유역18 연혁기 모정회
4,和順 樓亭紀行 2013 화순문화원
5 古典詩歌講讀 2022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부
6.古典詩歌論 2010 한국방송통신대 출판부
7.시서 김선 문학연구논문 정일 목포대 교수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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