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1.金. 깊고 또 푸른 밤
08월24일, 오늘의 이름은 木요일.
햄버거, 커피, USA TODAY, 그리고 코크와 맥도날드.
어떤 경우에는 머리나 가슴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는 듯 했다. 나는 12월초 겨울의 첫추위가 몰려오면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손톱 끝 골 부분의 살이 0.3cm쯤 벌어지고는 했다. 그 첫 시작이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벌어진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대략 일주일가량 걸리는데 그 동안에는 그 부분이 조금만 스쳐도 다시 상처부위가 벌어져서 쓰라리고 아파 꼭 장갑을 끼고 다녀야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끼고 다니는 장갑은 습관처럼 겨울이 다 지나가는 다음해 3월까지 착용을 하고 있었다. 그런 기간이 적어도 십 몇 년 동안은 계속되었던 것 같았다. 겨울 첫추위만 되면 벌어지곤 헸던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상처는 당연한 듯한 생각이 들어 어느 날 그런 상처가 생겨 통증이 느껴지면 아, 이제 겨울이 찾아왔구나.라고 할 정도로 몸에 익숙한 감각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것이 지난 4년 전부터는 첫 겨울의 추위를 맞은 뒤의 손톱 끝 골 부분 상처가 생겨나지 않아 장갑을 끼지 않고 한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래서 거의 이십여 년 동안은 겨울 필수품이었던 가죽장갑이 최근 몇 년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장식품처럼 되어 겨울 장갑의 효용이 뚝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다소 특별한 것이어서 왜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기이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마찬가지 경우로 나는 여행을 떠나면 도착한 첫날부터 현지 숙소에서 꼭 새벽에 눈이 떠지고는 했었다. 그래서 보통 새벽 다섯 시 경이면 숙소를 나와 시내나 인근지역을 두세 시간가량 새벽 탐방이나 새벽 조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하고는 했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독특한 바가 있어서 새벽 기행을 글로 써서 그 감상과 느낌들을 남겨놓으면 그 누구도 체험할 수 없었던 나만의 새벽 여행기가 되어 주었다. 이를 테면 그 도시나 그 고장의 현지 주민들이 아니라면 여행자는 절대 볼 수 없는 가려진 민낯들을 마주치게 되는 강렬한 인상이나 소중한 체험들을 두 발과 두 눈을 통해 가슴속에 품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길 위에는 아무도 없어서 아직 사위四圍가 고요한 채로 깊은 어둠속에서 낯선 풍경과의 환상적인 만남, 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조용한 발걸음을 옮기는 현지인들과의 만남은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이거나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항상 새벽 기행紀行은 이렇게 세상에서 나 홀로 즐겨볼 수 있는 여행의 숨어있는 각별한 묘미妙味였던 것이다.
무언가 어떤 민감한 변화에 몸을 꿈틀하고는 서서히 눈을 떴다. 아직 어두웠지만 점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이곳이 뉴욕 맨해튼의 호텔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으로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 몇 시나 되었을까. 오늘 새벽3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몇 시에나 일어날 것인지를 예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오랜 여행의 습관을 몸이 기억하고 있다가 나를 잠에서 깨워 불러일으켜버린 것이었다. 머리맡 탁자에 놓아두었던 스마트폰을 열어보았더니 아침6시를 지나고 있었다. 대략 두 시간 반 정도 잠을 잤던 것 같은데 지금 일어나면 낮 동안 힘들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그저 잠깐 오랜 버릇대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조용조용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등 뒤로 무거운 호텔 방문이 철컥, 하는 소리를 짧게 내면서 열렸던 상태에서 다시 닫혔다. 내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철컥! 하는 호텔 방문 닫히는 소리를 나는 아주 좋아했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는 복도를 돌아나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1층 로비로 내려갔더니 프런트데스크에 직원이 한 사람 서 있다가 손을 들면서 굿모닝!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호텔에 머무는 동안 객실 담당 홈메이드를 제외한 직원에게 받아보았던 유일한 인사였다. 나도 손을 마주 들어 보이면서 굿모닝! 하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호텔 현관 밖으로 나서자 입고 있던 반팔 티가 약간 아쉽게 느낄 만큼 서늘한 기운이 팔등에 밀려왔다. 하지만 이 정도의 날씨라면 잠시 걷다보면 이내 몸이 훈훈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왼편의 3rd Ave와 오른편의 2nd Ave 중 어느 쪽으로 갈까하다가 2nd Ave를 걸어보기로 했다. 우측으로 잠깐 걸었더니 사거리가 나오고 푸른색 길표지판에는 E.51st라고 적혀있었다. 그러니까 이 사거리는 맨해튼 세로줄의 2nd Ave와 가로줄의 E.51번가가 만나는 장소라는 뜻이었다. 여기는 뉴욕 맨해튼의 미드타운인데 위쪽으로 곧장 올라가면 업 타운이 되고, 아래쪽으로 쭉 바로 내려가면 다운타운이 되는 셈이다. 나는 아래쪽 길로 내려가 보자고 생각을 했다. 이제는 완연히 밝아진 거리에 사람들이 이른 출근길을 나서고 있던지 하는 등 걸음을 재촉하면서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 발걸음은 특별하게 어디로 혹은 어디까지라고 정해진 예정이 없었으니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앞에 펼쳐지는 풍경들을 보면서 발길 나가는 방향으로 순순히 걸어 내려갔다. 2nd Ave 길을 따라 E.51번가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E.50번가, E.49번가, E.48번가... 등등 순서대로 숫자를 줄여가면서 길을 따라 걸어갔다. 뉴욕 맨해튼은 이번이 ‘13년, ’14년에 이어 세 번째 여행길이라 대략 둘러본 곳들이 많기는 했지만 세세한 모습들을 다 알 수가 없으면 없는 대로 전체적인 맨해튼의 도시 분위기는 다소간 느낄 수가 있었다. 하늘에는 밝은 기운이, 도로에는 차량이, 길에는 사람들이 부쩍부쩍 늘어나기 시작을 했다. 이 도시가 한국의 도시가 아니라 미국의 도시라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시작은 길을 따라 서있는 건물이나 빌딩의 생김새와 도로 위를 달려가는 차량들의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드러내고 있는 미국스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 미국스러움의 정체란 다양多樣하고, 실용實用적이고, 힘을 담고 있는 강건强健함 같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게 걷다보니 E.30번가까지 걸어 내려왔다. 물론 여기까지는 여전히 미드타운이지만 계속 걸어가서 E.20번가까지 내려가게 되면 그곳부터는 다운타운이 될 것이다. 벌써 아침7시가 한참 지나 있었다. 이제는 도로와 길이 본격적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방향을 바꾸어 2nd Ave에서 3rd Ave로 한 칸을 건너가 이제까지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며 걷기로 했다. 맨해튼 길은 세로줄인 Ave에 따라 길의 모양이나 풍경이 달라지고 분위기도 또한 차이가 있다. 물론 시세나 가격의 차이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뉴욕 맨해튼 중앙에 보물섬처럼 자리 잡고 있는 센트럴 파크Central Park 바로 옆을 지나고 있는 5th Ave에는 고급아파트와 각국 문화원들이 많이 있어서 가격이 가장 비싼 도로이고, 그 옆의 메디슨 Ave나 파크 Ave는 길이 참 아름답다는 등이다.
3rd Ave를 따라 위쪽으로 길을 걷고 있는데 생김새나 규모가 종류별로 참 많은 레스토랑이나 자그마한 카페에 사람들이 모여앉아 가벼운 아침식사나 커피 한 잔에 베이글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도 그런 장면들을 자주 대하자 슬그머니 식욕食慾이 동動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오전10시에 딸아이와 호텔 로비에서 만나 차이나타운으로 이동을 해서 브런치로 딤섬點心을 먹기로 약속을 해두었던 터라 아침은 간단하게 해결을 해두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서울보살님은 배가 약간 고프다는 말을 한 걸로 미루어보아 아침에 일어나면 무언가를 먹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는데 딩동! 하는 문자 들어오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래서 스마트폰을 꺼내 열어보았더니 여보, 들어오실 때 먹을 거 사오세요. 라는 문자가 찍혀있었다. 어찌 이리도 먹는 대목에서는 부부가 마음이 잘 통하는지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나도 즉시 답 문자를 보냈다. ‘먹을 거, 암만요.’ 그러고 나자 저 앞에 24시 맥도날드 레스토랑이 보였다. 미쿡에 왔으니 아침식사 한 점이야 간단한 맥도날드 햄버거와 커피로 하면 되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에 맥도날드 레스토랑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꽤 많은 사람들이 탁자에 앉아 햄버거나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아침 일찍 문을 여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클래식 정장이나 고급 캐주얼 분위기에 비해서 역시 허름한 일상복의 흑인들이 많이 보였다. 주문 줄 옆에 엉거주춤 서서 메뉴판을 쳐다보았더니 구미를 당기는 품목이 하나 보였다. Bacon Egg Cheese Biscuit이라는 다소 긴 이름의 햄버거인 모양인데, 안에 들을 것은 다 들어있고 이름이나 사진을 보아도 간단한 아침 요기療飢로는 딱 안성맞춤일 듯이 보였다. 그래서 B E C B 두 개와 라지 사이즈 카페라떼 두 잔을 시켜 누런 맥도날드 종이봉지에 싸주는 대로 계산을 마친 뒤 흔들흔들 들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로비에서 벽에 기대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프런트데스크 쪽을 쳐다보았더니 데스크 위에 신문을 쌓아놓은 것이 보였다. 프런트데스크 위에 쌓여있는 신문은 미국 5대 신문중의 하나로 미국에서 유일하게 전국지로 발행되는 부당 2$짜리 USA TODAY였다. 내가 이 신문을 다 읽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부를 챙겨들고 의기양양하게 객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울보살님의 기대에 찬 시선을 풍성하게 느끼면서 막상 누런 맥도날드 종이봉지에서 B E C B를 꺼내보았더니 크기가 작고 아담한 듯했으나 라지 사이즈 카페라떼가 압도적으로 양이 많은데다가 B E C B도 그런대로 맛이 있어서 훌륭한 아침 요기가 되어주었다. 한국에서나 미쿡에서나 역시 음식을 먹는 시간이란 사람의 마음을 봄바람처럼 눅여주고 분위기를 신혼처럼 돌려주는 마법의 주문이 들어있는 것만 같았다. 암만! 햄버거, 커피, USA TODAY, 그리고 코크와 맥도날드가 함께 하는 미국의 첫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