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불교 성지는 절강성의 관음보살 보타산, 사천성의 보현보살 아미산, 산서성의 문수보살 오대산, 안휘성의 지장보살 구화산입니다.
구화산(九華山)은 중국 안휘성 지주시 청양현(安徽省池州市靑陽縣)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구화산에 지장신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곳이 신라 왕족 출신인 김교각(金喬覺) 스님이 수행하시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김교각 스님은 99세에 좌탈 입적하였는데, 기이하게도 3년이 지나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하자면, 일반인이 수행자를 평가하는 것이 무례할 수 있으나, 좌탈은 아무나 할 수 없고 한평생 수행한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물론 좌탈은 할 수 있으나 조용히 혼자 수행하던 수행자는 좀 더 편안하게 누워서 입적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느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수행자는 물구나무 서서 입적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화장을 했을 때 사리가 많이 나온다고 해서 수행 정도가 높다고 할 수 없고, 일반인도 사리가 간혹 나오는데 평소에 금욕적 생활을 했던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김지장(金地藏)(696~794) 당나라 (신라 新羅)
구화산 제 1대 육신보살인 김지장(金地藏) 스님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존칭과 이야기가 추가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시대 구분없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덕호: 김교각(金喬覺), 법명: 김지장(金地藏), 석지장(釋地藏) 본명: 미상(분명하지 않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라(新羅) 왕족 출신이라고 합니다.
서기 696년에 출생하여 794년 99세에 좌탈 입적하셨는데, 시대는 당(唐)나라 때입니다.
구화산 화성사기(九华山化城寺记)에는 유지에 따라 제자들이 석함에 3년간 모시고, 다시 탑에 모시고자 석함을 열어보니,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마치 살아 계실 때와 같았다고 합니다.
시신을 옮기자 뼈마디 골절이 움직여 쇠사슬 소리가 났는데, 경전에 이르기를 보살의 몸은 쇠사슬과 같아서 뼈에서 울림이 난다(經云:菩薩鉤鎖,百骸鳴矣)고 되어 있어 그를 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한 불자(佛者)들은 지장십륜경(地藏十輪經) 구절에 안인부동유여대지, 정려심밀유여비장(安忍不動猶如大地, 靜慮深密猶如祕藏)이라 하여, 마음을 안정하고 인내하여 움직이지 않음이 대지(大地)와 같고, 고요한 사색(禪定)과 심오한 깊이는 마치 비밀창고 안 보물과 같다. 라고 되어 있는 것을 떠올리면서, 3년이 지나도 가부좌한 시신이 부패하지 않는 것은 마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된 것이라 생각하여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보고 그때부터 앞에 김씨 성을 붙여 김지장(金地藏)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육신탑(肉身塔)을 세워 공양했다고 합니다.
김교각 스님의 키는 당나라 기준 7척으로 현재 기준 약 212 cm입니다.
구화산에 있는 고배경대(古拜经台)에 가면 일반 성인 보다 약 2배 큰 김교각 스님의 발자국이 아직도 바위에 남아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 발자국과 큰 키는 서로 어울리는 크기가 됩니다.
구화산 화성사기(九华山化城寺记)에는 김교각 스님의 골격이 비범하고 힘이 장사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실제 일반사람들 보다 컸을 수 있습니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에 왕자로 있을 때 이미 화랑(花郞)교육을 받아 심신수행을 했는데, 왕태자 책봉과 왕위계승 문제로 자신 때문에 주변 왕자들과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아, 719년 24세에 자신을 보호해 줄 개 한 마리와 차(茶)씨와 볍씨 등을 가지고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장왕보살을 지키는 신수 체청
지장보살 옆에는 체청(諦聽)이라는 신수(神獸)가 있는데, 원형은 신라에서 같이 데리고 갔던 삽살개라고 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삽살개는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 개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구화산에는 스님들이 녹차를 재배하여 지장차(地藏茶) 혹은 구화불차(九華佛茶)란 이름으로 판매하는데, 중국에서는 지역 특산차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구화산 지장차의 특징은 목에 좋으며, 기관지나 폐에 좋은 성분이 있다고 합니다.
황산에서 자라는 차나무로 만든 황산모봉(黃山毛峰)도 지장차와 비슷하여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김교각 스님이 처음 구화산에 도착한 후, 동애암(東崖岩)에 굴을 파고 수행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756년 김교각 스님이 61세가 되셨을 때입니다.
구화산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산에 올라 굴 안을 보니, 김교각 스님이 눈을 감고 수행하고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흰 흙(관음토)에 쌀을 조금 넣어 죽을 끓여 먹으면서도 용맹정진 고행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곳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주하여 절을 세웠는데, 지금의 화성사(化城寺)가 됩니다.
이후에 김교각 스님의 명성은 본국 신라(新羅)에도 전해져 여러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위해 바다를 건너왔는데, 그와 제자들은 양식이 부족할 때면 여름에는 흰 흙에 나물을 섞어 먹고, 겨울에는 땔감을 아끼고자 불을 조금 피우고 옷만으로 추위를 버텼다고 합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 밭을 일구고 땔나무를 캐서 자급자족하였습니다. 김교각 스님은 1명의 종자(從者)스님과 남대(南臺) (남대南臺는 육신보전 자리)에 거주하였는데, 스스로 무게 약 18 kg의 마의(麻衣)을 지어 입고, 낮에는 옷으로 밤에는 바닥에 깔고 잠을 청했다고 합니다.
또한 화성사 방생지(放生池) 곁에 대(臺)를 세우고, 온 종일 향을 피우며 사부경(四部經)을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794년 여름 99세에 김교각 스님은 제자들과 고별하고 좌탈 입적하게 됩니다.
유언에 따라 석함에 3년 간을 모셨다가 석함을 개봉하니 기이하게도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지장보살의 화신(化身)이라 숭앙(崇仰)하며 육신탑(肉身塔)을 세워 공양하였고, 현재는 육신보전(肉身宝殿) 건물 안 지하에 모셔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