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광주 대인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15. 1:20
국내 시장백과 - 광주 대인시장
2023.11.08. 07:41조회 11
광주 대인시장
요약 대인시장은 광주의 중심지인 대인동에 자리한 전통시장으로, 문화와 예술이 접목된 시장으로 유명하다. 대인시장 내에 예술가들이 입주해 있으며, 야시장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1. 광주 대인시장 개요
광주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1896년 전라도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뉘고, 전라남도 도청이 광주에 설치된 이후였다. 광주는 호남 1번지로 불리며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했고, 그 중심지는 전라남도 도청이 있던 오늘날의 동구였다.
광주를 대표하던 읍내장이 일제의 억압과 광주천 직강 공사로 이전한 뒤 동구에는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명치정공설시장이 개설되었다. 해방으로 일본이 물러난 뒤 명치정공설시장은 중앙시장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리고 중앙시장이 폐시한 뒤로는 대인시장이 광주 동구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떠올랐다.
대인시장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침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2008년 광주비엔날레의 ‘복덕방프로젝트’로 비어 있던 점포에 예술 작품이 전시되고, 그를 기화로 예술이 동거하는 시장으로 거듭났다. 2013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면서 예술과 시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현재 광주 대인시장은 예술가와 상인들이 함께 거주하는 공간이 되어 예술야시장 등을 개최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광주 대인시장의 내부
2. 광주 대인시장의 어원
광주는 백제 때 노지현으로 불렸고, 이후 무진군이라 불리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진주가 되었다가 757년에 무주라고 불렸다. 892년에는 견훤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웠다. 광주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고려 때인 940년이었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지만 광주와 광산이 중심이었다. 광주와 광산 모두 빛과 관련되어 있다. 광주 대인시장의 이름은 이러한 지역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대인은 광주 대인동에서 나온 것이다.
3. 광주 지역의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전라도가 남북으로 분할되어 전라남도가 생긴 것은 1896년의 일이다. 광주에 전라남도의 행정 중심인 전라남도 도청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그 덕분에 전라남도 도청이 위치한 광주 동구 지역은 구한말 이후 늘 호남 1번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광주 동구는 광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예부터 무등산 아래에 펼쳐진 넓은 공간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광주는 광주 동구를 중심으로 파문을 그리듯 확장해 왔다. 시장 또한 광주 동구의 변화에 발을 맞춰 왔다.
광주에 시장이 언제 처음 개설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간양록》을 쓴 것으로 유명한 강항이 남긴 〈광주향교상량문〉에 시장이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개설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글에는 향교가 시장과 가까워 노랫소리가 시끄럽고, 여자들의 머릿기름이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말과 함께 시장의 위치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를 통해 이미 시장이 읍내의 북문 안쪽에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위의 이유로 장터를 이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를 보면 당시 광주 지역에는 6곳에서 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크고 작은 2개의 읍내장(2, 7일)과 서창장(5, 10일), 대치장(3, 8일), 신장장(5, 10일), 선암장(3, 8일)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광주향교상량문〉에 언급된 시장은 읍내장이었는데 《동국문헌비고》에 큰 장과 작은 장 2개로 나뉘어 개설되었다고 하는 점이 흥미롭다. 그만큼 광주 읍내장의 규모가 컸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큰 장, 작은 장이라고 불렸던 광주의 크고 작은 2개의 읍내장은 1875년에 제작된 〈광주읍지도〉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광주의 두 읍내장이 섰던 것은 광주천 천변이었다.
광주천은 영산강의 지류로 광주의 중심지를 흐르는 강이다. 예전에는 배롱나무가 많은 개천이라고 해서 자미탄(紫薇灘)으로 불리기도 했다. 담양소쇄원, 환벽당, 취가장, 식영정 등 호남을 대표하는 정자들이 이 광주천을 따라 하늘의 별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큰 장과 작은 장이 서던 당시의 광주천은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폭이 넓었다고 한다. 그래서 물이 빠지는 갈수기에는 넓은 공지가 조성되었다. 큰 장과 작은 장을 비롯해 당시 광주에 개설되었던 장들은 모두 이 넓은 공지에서 장이 섰다.
1900년대 말기에 작은 장이 서던 자리는 오늘날의 적십자병원 주변이었고, 장터 앞에는 흙과 나무로 만든 운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당시 지도군 군수였던 오횡목은 광주에 들렸다가 작은 장을 목격하고 “인파가 바다와 같고 장옥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라는 말을 남겼다.
큰 장은 작은 장보다 강의 아래쪽, 즉 하류인 오늘날의 광주교 주변에서 장이 섰다. 오횡목은 큰 장이 공북루(현 광주제일고 주변) 앞 일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광주천에서 공북루까지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대략 시장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광주 읍내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거래 품목은 면화였다. 조선 후기 전남 지역의 대표 작물 또한 면화였다. 1904년 광주 큰 장에서 거래한 면화는 3,000근 정도였다. 당시 큰 규모였던 전주나 대구의 읍내장에서 거래한 면화의 양이 1,500~1,600근이었음을 생각하면 거래량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광주 읍내장은 일제강점기에 들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3·1운동이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일제의 반감을 샀다. 먼저 장터에 변화가 찾아왔다.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광주읍성이 무너지고, 정문인 황화루 또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철거되었다. 일제는 장터를 폐쇄하고, 그 자리를 군대를 주둔하는 병영으로 바꾸려고 했다.
또 하나 읍내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광주천의 직강 공사였다. 구불구불한 하천의 흐름을 곧게 펴는 것으로, 곡류하는 하천 때문에 자주 발생하는 홍수로 인한 피해를 줄이겠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그러나 직강 공사로 인해 물의 흐름이 빨라져 여울이나 둔치가 사라지고, 그에 따라 강폭이 좁아진다는 단점도 있다.
일제는 직강 공사를 하기 위해 광주천변에서 열리는 읍내장을 이전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해 1914년 제정된 법령에 따라 천변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냈다. 이들은 대부분 수백 년 동안 이어온 광주장과 삶을 함께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1926년 직강 공사를 시작했다.
광주 읍내장은 직강 공사가 끝나고, 그 때문에 생긴 매립지에 사동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장이 개설되었다. 사동시장은 인근에 개설된 땔감과 가축을 주로 취급하는 구동시장과 함께 유지되다가 인근에 신사가 있다는 핑계로 1940년 일제에 의해 지금의 양동으로 이전되었다. 그 이후 오늘날의 양동시장으로 변모했다.
한편 1936년에 사동시장과 별도로 광주 동구에 새로운 시장이 개설되었다. 시장 이름은 명치정공설시장이었다. 시장의 위치는 금남로2가의 옛 동구청 자리에 있었다. 이 시장을 이용한 것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구한말 이후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계속 늘어나 그들을 상대하는 시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 광주로 유입된 일본인들은 의병 진압을 하는 일본군과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일본 상인들이었다. 그러다가 광주가 행정 중심지가 되면서 거주 목적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명치정공설시장이 개설될 무렵 광주에는 일본인 거주자가 무려 8,000명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들을 위해 개설된 명치정공설시장에서 거래하는 품목은 대체로 일본인들이 필요로 식재료인 채소, 단무지, 어묵, 절임 식품 같은 품목들이었다. 1938년 그해에 기록한 연 거래액은 21만 원이었다. 황금동에는 명치정공설시장 이외에도 광주어채시장도 있었다. 이 시장에서 주로 취급한 것은 역시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 음식점과 유흥가에서 식재료로 사용하던 생선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설과 같은 명절 때의 사동시장과 명치정공설시장의 풍경이었다. 그것은 음력설을 쇠는 한국인과 양력설을 쇠는 일본인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주로 다녔던 사동시장은 음력설 이전이 대목이었기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이 혼잡했고, 설 이후에는 며칠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고 명치정공설시장이 있던 충장로는 양력 1월 1일을 기점으로 쉬었고, 이 거리에서 음력설을 쇤 것은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상점이었다.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해방 이후 일본이 물러간 뒤 명치정공설시장과 광주어채시장이 이름을 바꾸어 새로 개설한 것이 중앙시장이다. 명치정공설시장이 있던 지명도 명치정에서 금남로로 바뀌었다.
명치정공설시장을 그대로 물려받은 중앙시장은 고급 일식 요리를 파는 식당가로도 유명했다. 중앙시장을 이루는 대부분의 점포는 일본식 요리를 파는 음식점들이었다.
그것은 해방 전에 일본인들에게 생선 다루는 방법을 배운 한국인들이 중앙시장에 잇달아 음식점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앙시장은 일본식 음식점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였다. 중앙시장에서 생활용품을 파는 점포는 몇 군데에 불과했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중앙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식당가가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광주 사람들과 인근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후 광주 곳곳에 식당가가 생겨나고, 몇몇 관공서들이 이전하면서 일식 음식점이 특색이던 중앙시장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부터 중앙시장에는 일식 음식점 대신 채소와 생선 같은 식재료, 일용 잡화, 공산품, 가공식품 등을 파는 점포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시장의 모습을 갖춰 갔다.
중앙시장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금남로의 확장이었다. 1968년부터 12m이던 금남로를 30m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앙시장이 철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중앙시장은 일본인이 지은 건물이었는데, 한국의 건물과 구조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한국의 장옥들은 넓은 자리 곳곳에 장옥이 배치되는 반면 일본의 시장 건물은 큰 지붕이 있고 그 아래에 모여 있는 형태였다. 그러니까 한국의 장옥이 각각 독립적이라면 일본의 경우는 하나의 장옥에 여러 점포가 배치되어 있는 형태인 셈이다.
금남로의 확장 공사로 중앙시장은 일시적으로 금남로3가로 이전했다가 1971년에 건물을 신축해서 다시 시장 문을 열었다. 새로 지은 건물에는 동구청이 입주하고 인근 골목에 식당가가 형성되었다.
중앙시장을 주로 이용한 사람들은 광주의 부유층이었고, 그로 인해 시장에서 다룬 주요 품목은 고급 식료품이었다. 그러나 신축한 중앙시장은 임대료 상승과 인근 금남상가의 신설, 인구 감소 등으로 장세가 약화되었고, 결국 1978년 문을 닫았다.
시장의 오래된 가게
굴비 두름을 겹겹이 매달아놓은 시장골목
1) 대인시장
중앙시장이 폐시한 다음에 동구의 중심으로 우뚝 선 것이 대인동에 자리한 대인시장이었다. 대인시장은 과거 광주역이 있던 곳에 개설되었다. 광주역은 1922년 송정리와 광주를 잇는 철도가 부설되면서 생겼다.
여기에 1930년에 밀양 삼랑진과 광주를 잇는 경전선이 개통되면서 대인동은 광주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전선은 남광주역으로 이어져 훗날 그곳에 금동시장과 남광주시장이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오늘날 대인동에는 철도가 지나지 않는다. 경전선의 광주역이 1969년에 북구 중흥동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광주역의 등장이 곧바로 시장의 개설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대인시장이 등장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었다. 광주역 주변에 있던 전남방직공장 등의 건물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한동안 그곳은 빈 공터였다.
이 공터를 활용한 것은 인근 계수동과 산수동 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직접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물론이고, 식료품도 부족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장사는 잘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형성된 시장은 1959년에 87개의 점포를 가진 시장으로 변모했다. 시장에는 양품점, 포목비단점, 식료품점, 양은 그릇점, 술집, 미곡상, 젓갈집 등 다양한 물건을 파는 점포들로 채워졌다. 또한 시장 내에 콩나물공장도 하나 입주해 있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지나면서 대인시장의 규모는 계속 확대되었다. 1965년에는 시장에 농협공판장이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농협공판장을 중심으로 광주에서 유일한 청과물 도매시장으로 발돋움했고, 이를 토대로 농산물의 유입과 거래량도 덩달아 늘어났다.
이런 급성장의 배경에는 철도를 이용한 물류가 한몫했다. 광주역과 인접한 대인시장은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광주 읍내장을 계승한 양동시장과 함께 광주의 양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광주역이 1969년 북구 중흥동으로 이전했다. 대인시장에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비게 된 광주역 부지를 불하받아 오히려 시장을 확대했다.
그 배경에는 1960년대 중반부터 광주역 주변에 이미 여러 노선의 버스 차고지와 정류장이 있었다. 그리고 1976년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공영버스터미널(현 롯데백화점 자리)이 대인시장 인근에 조성되면서 인근의 유동 인구가 늘면서 광주역 이전으로 인한 충격을 흡수했다. 그 덕분에 그해 대인시장의 점포는 118개로 늘어났다.
이런 전후 배경을 토대로 대인시장은 1973년에 시설을 개선해서 시장을 등록했다. 대인시장은 오랫동안 광주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를 잡고 번영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공용버스터미널이 그 자리를 지켰고, 전국체육대회(1977)를 개최하면서 형성된 숙박촌이 있어 꾸준하게 장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1996년 공용버스터미널이 이전하면서 조금씩 쇠퇴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94년부터 인근에 상가들이 생겨나고, 1998년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크게 추락했다. 호황기 때에는 서로 입주하려고 했던 점포들이 비기 시작했다. 대인시장은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이점을 누렸다가 다시 교통의 변화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대인시장이 활기를 되찾는 계기를 만든 것은 문화와 예술이었다. 2008년 11월에 광주에서 개최된 광주비엔날레는 대인시장의 비어 있는 점포를 전시 공간으로 이용하는 ‘복덕방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야말로 시장과 예술의 만남이었다.
이렇게 전시되었던 작품 가운데 일부는 광주비엔날레가 끝난 뒤에도 철거하지 않았고, 점포를 임대해 계속 전시되었다. 대인시장은 자연스럽게 대인예술시장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대인시장의 빈 점포를 전시 공간으로만 두지 않고, 작업실로도 활용했다. 그리고 대인시장을 예술시장으로 꾸미는 프로젝트를 진행, 2009년에는 많은 행사들이 시장 내에서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예술가들의 시장에서의 예술 실험은 2009년으로 끝이 났다. 그 뒤를 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2013년에 선정된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이었다. 이를 계기로 2015년까지 격주로 진행된 야시장이 2016년부터 매주 토요일 예술야시장으로 개설되어 예술과 시장의 만남은 계속되고 있다.
대인시장 안에 있는 미술 갤러리
대인시장에는 전시실을 겸한 작업실이 여럿 있다.
대인시장 주차장 벽에 그려진 벽화
어물전이 모여 있는 시장골목
2) 남광주시장과 금동시장
남광주시장과 금동시장은 남광주역 주변에 개설되었던 시장들이다. 남광주역은 1930년 12월 광주와 여수 사이를 잇는 광려선이 개통되면서 생겼다. 남광주역 주변은 오랫동안 황량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광주의 상권이 주로 광주읍성의 북문과 서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남문 쪽은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광주역 주변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남문로가 확장되고, 화순과 보성, 순천 등지에서 철도를 이용해 사람들이 찾기 시작할 무렵이다.
새벽 열차를 타고 온 화순과 보성, 순천 사람들이 역 주변의 넓은 광장에 싱싱한 채소와 어패류를 파는 노점을 열면서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74년에 철도청으로부터 땅을 불하받아 시장 부지를 확보하고, 1974년에 시장을 개설하고 등록했다.
1988년에는 기존 슬레이트 시장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철근 콘크리트로 4층짜리 건물을 지어 시장을 신축했다. 2~3층에는 의류 상가, 4층에는 음식점들이 입주했다. 1980년대에 광주순환도로가 개통되면서 시장을 둘러싼 교통의 편리성이 더해져 1995년까지 광주를 대표하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시장 부근에 청과물 공판장이 개설되고, 막 잡은 생선을 팔기 위해 고흥과 목포 등지의 상인들이 찾아오면서 새벽부터 시장이 붐볐다. 그에 따라 횟집과 국밥집도 덩달아 늘어났으며, 그로 인해 남광주시장은 수산물로 대표되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공판장들이 이전하고, 대형마트와 백화점이 등장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2001년에는 남광주역마저 폐쇄되면서 시장은 크게 활력을 잃고 말았다.
금동시장은 남광주시장보다 역사가 오래된 시장이다. 금동시장이 위치한 자리는 1930년대부터 서민들이 대거 모여 사는 달동네였다. 금동시장이 형성된 것은 정확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40년대로 추정된다.
당시 전시체제 아래에서 물자의 공급이 악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어 서로 필요한 물건들을 주고받았다. 해방 이후 금동시장은 일본인들이 떠난 뒤에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들을 사고파는 중고품 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에는 군수물자가 거래되었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시장으로 성장하는 데 유리했다. 금동시장은 1950년대 말부터 채소와 땔감 등을 팔다가 1970년대에 인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 시장으로 변신했다.
금동시장이 시장으로 등록한 것은 1972년으로, 공식 명칭은 남부시장이었다. 그러나 광주천의 축대 작업으로 시장 확대가 어렵게 되면서 금동시장의 많은 상인들이 양동시장으로 이전했고, 이 무렵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남광주시장에 밀려 크게 위축되었다. 금동시장은 1992년 시장 건물이 헐리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3) 도내기시장과 계림시장
도내기시장과 계림시장은 대인시장과 멀지 않은 곳에 개설된 시장이다. 도내기시장의 도내기는 뜨내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고, 돌 틈에서 솟는 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다.
도내기시장은 조선대학교 주변에서 하나둘씩 노점이 생기다가 1965년에 형성된 시장이다. 주로 조선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을 취급하며 장사하다가 1970년대 초반에 생활밀착형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87년 조선대 입구 쪽으로 순환도로가 개설되면서 시장 점포의 5분의 4가 도로에 포함되어 시장이 크게 위축되었다. 오늘날 도내기시장은 골목형 시장으로, 취급하는 물품은 식재료와 반찬이 중심이다.
계림시장은 동구 계림동에 있던 시장으로, 역사는 멀리 나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원래 땔감으로 유명했다. 1930년대 광주와 화순 일대의 주민들이 잣고개를 넘어와 이곳에서 땔감을 팔면서 자연스럽게 나무전이 형성되었다. 1937년의 기록에 따르면 땔감의 가격은 1관(3.75kg)에 4원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주변 인구의 증가와 맞물려 땔감 외에 농산물이나 생활필수품을 파는 작은 장이 개설되었고, 차츰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1957년 3월 공설시장이 개설되었다.
1969년에 화재로 점포 211개가 불타고, 다음해에 건물을 신축해서 시장 등록을 했다. 1980년대에 지금의 장터로 이전한 계림시장은 주변 인구의 증가 때문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990년대 주변 상권에 침식되면서 1991년에 폐쇄되고 말았다.
이 지역은 1980년대까지 나무문이나 창틀을 만드는 점포가 많아 문짝거리라고 불렸고, 2000년대까지 건축자재와 주방용품을 파는 점포들이 많았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대인시장은 동구 대인동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롯데백화점을 비롯해 여러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금남로4가역에 내려서 조금 걸어야 한다. 4번 출구로 나와서 큰 길을 따라가면 사거리가 나오고 왼쪽에 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대인시장에서는 농산물과 건어물, 수산물, 의류, 약재 등 다양한 물품들을 거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