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漢誌) (74) 한신의 포부
한신이 남정관을 지나 성(城)안으로 들어와 보니, 그곳의 풍경은 항우가 통치하는 지방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한왕 유방은 선정(善政)을 골고루 베풀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서로 길을 양보하였고, 집집에서는 노랫소리가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논과 밭에는 오곡이 무성하였고, 농부들은 논과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격앙가를 즐겁게 부르고 있었다.
(역시 한왕은 천하에 둘도 없는 명주(明主)로구나 ! )
한신이 감격해 마지않으며 거리를 돌아다녀 보니, 초현관(招賢館)이라는 누각(樓閣)에 커다란 방문(榜文)이 나붙어 있었다.
한신이 다가 가서 내용을 살펴 보니, 그것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람을 널리 구한다>는 내용으로 열세 가지의 조항으로 쓰인 방문이었다.
1. 병법(兵法)에 통달하고 지략(知略)에 능한 사람은, 대장(大將)으로 채용한다.
2. 용맹이 출중하고 적을 위압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선봉장(先鋒將)으로 채용한다.
3. 무예가 뛰어나고 군마(軍馬)를 능숙히 다룰 수 있는 능력자는 산기장(散驥將)으로 채용한다.
4. 천문(天文)에 밝고 풍후(風侯)를 점칠 줄 아는 사람은, 협력자(協力者)로 채용한다.
5. 지리(地理)에 밝고 지세(地勢)를 잘 아는 사람은, 향도자(嚮道者)로 채용한다.
6. 마음이 곧고 행동이 정직한 사람은, 기록자(記錄者)로 채용한다.
7. 임기 응변(臨機應變)의 재주가 있고 모든 일을 능동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의군정자(議軍情者)로 채용한다.
8. 변론(辯論)에 능하고 설득력이 강한 사람은, 유세객(遊說客)으로 채용한다.
9. 산법(算法)에 정통하고 통계학에 능한 사람은, 서기(書記)로 채용한다.
10. 시서(詩書)를 많이 읽어 자문에 도움이 될 사람은, 박사(博士)로 채용한다.
11.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치병술(治病術)이 능한 사람은, 국수(國手)로 채용한다.
12. 행동이 기민하고 남의 기밀을 잘 탐지해 내는 사람은, 세작(細作: 間者-> 간첩)으로 채용한다.
13. 전곡(錢穀)을 다루는데 능하고 출납(出納)에 밝은 사람은, 군수자(軍需者)로 채용한다.
이상과 같이 열세 가지 조항에 의하여 사람을 널리 모집하니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응모하기 바란다.
이 나라의 번영은 오로지 백성 여러분의 협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니, 각자는 분발하여 응모해 주기를 거듭 바란다.
...
한신은 위와 같은 방문을 읽어 보고, 뛸 듯이 기뻤다.
때마침 한 사람이 방문을 열심히 읽고 있기에 한신은 그 사람에게 슬쩍 물어 보았다.
"이 방문을 읽어 보면, 나라에서는 백성들 각자의 재능에 따라 널리 등용한다고 하는데, 대관절 이런 방문을 써붙인 장본인은 누구인지 아시오 ?"
그 사람이 대답한다.
"이 방문을 직접 써붙인 사람은, 이 지방의 태수(太守)인 하후영(夏侯英) 태수 이지요. 그러나 아마도
<이런 방문을 써붙이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한왕이었을 것이오."
"한왕이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당신은 어떻게 아시오 ?"
"어느 고을에서나 이와 똑같은 방문이 나붙어 있으니, 그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 ? 한왕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방문을 전국에 써붙일 수가 있겠소 "
과연 옳은 말이었다.
한신은 한왕의 선정에 또 한 번 감격해 마지 않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 재상 소하를 통해 한왕을 만나 보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이 지방의 태수인 하후영에게 나의 실력을 보여 주어서, 그로 하여금 나의 재주를 한왕에게 알리게 한다면 더욱 효과적이 아닐까?)
한신은 그런 생각이 들자, 공관으로 태수를 찾아가 면회를 신청하였다. 태수 하후영은 <한신(韓信)>이라는 이름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터인지라, 즉시 불러들여 이렇게 물어 본다.
"당신은 항왕의 사람인 줄로 알고 있는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 오셨소 ?"
한신이 대답한다.
"나는 며칠 전까지는 분명히 항왕의 사람이었소. 그러나 항왕은 나를 제대로 써주지 않기에, 나는 항우의 그늘을 벗어나 명주인 한왕을 찾아오는 길이오."
"침주에서 왔다면 모든 길이 끊겨져 있어서 올 수가 없었을 텐데, 무슨 재주로 여기까지 오셨소 ?"
"한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첩첩 태산을 돌고 돌아 오느라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하후영은 한신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다시 물었다.
"우리는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하느라고 초현관에 구현(求賢)방문을 크게 써붙였는데, 그 방문은 읽어 보셨는지요 ?"
"조금 전에 그 방문을 읽어 보고, 태수 영감을 찾아온 길이오."
"방문을 읽어 보았다면 아시겠지만, 그 방문에는 열세 가지의 조항이 열기(列記)되어 있소. 당신은 그중에 어느 조항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
하후영으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
그러나 한신은 아무 대답도 아니 하고,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그러자 ,태수 하후영은 한신의 미소를 못마땅하게 여겼는지,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나의 질문에 대답은 아니 하고, 왜 웃기만 하시오 ?"
이에 한신도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나라에서는 열세 항목에 걸쳐 한 가지씩 재주를 가진 사람만을 뽑는다고 했는데, 나의 경우는 어느 항목에도 해당하지 않아서 그러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오 ?"
"그렇게 물으시니, 나의 재능과 포부를 솔직히 말씀드리겠소이다. 나로 말하면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고, 고금의 시서(詩書)에도 통달한 사람이오.
출장 입상(出將入相)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싸움에 있어서도 백전 백승(百戰百勝)할 자신이 있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천하를 평정할 포부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오.
이러한 나를 방문에 써있는 열세 가지의 한 항목으로 ,단순한 재주꾼으로 쓰겠다고 한다면, 누가 그런 요구에 응하겠소이까 ?"
이처럼 호언 장담을 하는 한신의 얼굴에는 패기와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하후영은 약간 어떨떨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장군의 선성은 진작부터 들어 왔지만, 이처럼 경륜이 투철하신 분인지는 미처 몰랐소이다. 장군이 우리를 찾아와 주신 것은 다시 없는 기쁨이오. 이왕이면 시세(時勢)에 대한 견해도 들어 봅시다."
한신은 위연히 대답한다.
"지금 천하의 명장이라고 자처하는 장수들은 허다하지만, 그들은 병법만 알고, 용병술은 거의 모르는 사람들이오.
제아무리 병법에 정통하더라도 용병술을 몰라가지고서야 어찌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겠소. 장수가 군사를 다루는 것은 마치 명의(名醫)가 환자에게 약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이오.
똑같은 병에 똑같은 약을 쓰더라도, 환자의 체질을 감안하여 약을 잘 쓰면 명약(名藥)이 되지만, 약을 잘못 쓰게 되면 독약이 되는 것이오."
한신이 장강 유수처럼 변론을 펴나가자, 하후영은 매우 아니꼬운 듯 비꼬는 어조로 다시 묻는다.
"그처럼 유능한 분이라면 초나라에서는 어찌하여 높이 등용되지 못했소 ?"
한신은 태연 자약하게 대답한다.
"군주가 사람을 못 알아 보면 그럴 수도 있는 법이오. 그 옛날 백리해(百里奚)는 명장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虞)나라에서는 빛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오.
그러나 우나라를 등지고 진나라로 갔을 때에는 진왕이 그의 재능을 알고 그를 대장군으로 등용한 덕택에,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오.
결국 아랫사람이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통치자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오. 초나라에서는 아무리 좋은 계략을 상주(上奏)하여도 항왕은 그것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초나라를 떠나 한왕을 찾아오게 된 것이오."
하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장군은 항우가 높이 써주지 않아서 공을 세우지 못했다고 하는데, 만약 한왕께서 장군을 높이 써주신다면 어떠한 공을 세울 수가 있겠소 ?"
한신은 자신 만만하게 대답한다.
"만약 한왕께서 나에게 병권(兵權)을 맡겨 주신다면, 나는 인의(仁義)로 군사들을 양성해 가지고, 동으로 초나라를 치기로 하겠소."
"지금 항우는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소. 그런데 항우를 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시오 ?"
"그야 물론 항우를 대번에 거꾸러뜨리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러나 계략을 세워 가지고 세 단계로 나눠 공략하면, 제아무리 항우라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오."
"세 단계란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것이오 ?"
"첫단계는, 한왕의 동방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삼진왕들을 먼저 쳐부수어야 하오."
"두 번째의 단계는 ?"
"두 번째로는 , 항우를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에 있는 여섯 나라를 먼저 손에 넣어야 하오."
"그리고 세 번째의 단계는 ?"
"마지막으로 항우만 남게되는데, 그때에 가서는 항우와 직접 싸우려 할 게 아니라, 항우와 범증간에 이간책(離間策)을 써야 하오.
왜냐하면 범증은 불세출의 전략가(戰略家)인 까닭에, 이간질을 시켜 항우의 손으로 범증을 죽이도록 만들어 놓아야만 ,우리가 손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오."
하후영은 그 말을 듣고 입을 삐쭉거렸다.
"이론상으로 보면 과연 그럴 듯한 계략이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언제든지 괴리(乖離)가 있는 법이오. 항우는 집권한 지 3년이 넘어서, 지금 그의 휘하에는 용장들이 기라성같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들이 장군을 가만히 내버려둘 것 같소이까 ?"
그러자 한신은 얼굴에 노기를 띠며, 하후영을 꾸짖듯이 말한다.
"태수는 나를 한낱 과대 망상가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만한 자신이 없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생사를 걸고 여기까지 찾아왔겠소 ? 도대체 당신네들은 항우라는 사람을 왜 이다지도 두려워하시오.
그래 가지고서야 천하 대사를 어떻게 도모할 수 있단 말이오. 실례의 말이지만, 태수와 같이 소심병 환자가 되어 가지고는 아무 일도 못 해낼 것이오. 이렇게나 적을 두려워해서야 ,무슨 일을 해낼 수가 있겠느냐 말이오 !"
한신은 마치 부하에게 호령하듯 말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 하후영도 반발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보자보자 하니, 당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가 보구려. 도대체 당신은 육도 삼략(六韜三略)이라는 병서(兵書)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고 나서 큰소리를 치는 것이오 ?"
"하하하...., 육도 삼략이나 읽어 보고 나서 큰소리를 치느냐구요 ?"
한신은 별안간 통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태수 영감께서 나를 이처럼 우습게 여기시니, 그야말로 섭섭한 일이오. 나라는 인간을 이렇게나 몰라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
하후영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말투였다.
하후영은 한신의 기개(氣槪)에 눌릴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큰소리 그만 치고, 육도 삼략을 정말로 읽었거든 강론(講論)을 한번 해보시오."
한신은 여유 만만하게 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강론은 고사하고, 육도 삼략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暗誦)으로 들려 드리기로 하리다. 그러면 설마 육도 삼략을 안 읽어 보았다고는 못 하실게 아니오 ?"
그리고 한신은 육도 삼략을 암송하기 시작하는데, 도도하게 읽어 내려가는 그의 암송에는 글자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자 하후영은 탄복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자세를 바로 하고,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다시 말한다.
"장군께서 육도 삼략을 이처럼 통달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한신은 유쾌하게 웃으면서,
"이왕 시험을 치르는 판이니, 음양서(陰陽書)와 점성서(占星書)도 한 번씩 암송해 보기로 하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음양서와 점성서도 장강 유수처럼 좔좔 암송해 내려가는데, 그 역시 글자 하나의 착오도 없는 것이었다.
하후영은 거듭 탄복하며, 다시 묻는다.
"군사를 지휘하려면 무구(武具)와 병기(兵器)에도 정통해야 하는데, 그 점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한신은 수 많은 무구와 병기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가면서, 제각기의 기능을 소상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만들어지게 된 기원까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후영은 두 손을 반짝 들 수밖에 없었다.
"장군이야 말로 천하의 기재(奇才)이시오. 제가 내일은 장군을 포증으로 모시고 가서, 한왕을 직접 배알하시도록 전력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한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맙소이다. 그러나 한왕보다도 소하 재상을 먼저 만나보고 싶소이다."
"재상보다도 한왕을 직접 만나 뵙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텐데, 어째서 재상을 먼저 만나시겠다는 말씀이오 ?"
"매사에는 순서라는 것이 필요하오. 재상을 먼저 만나 의견을 충분히 교환한 연후에 한왕을 만나야만, 한왕이 나의 재능을 인정해 주실 게 아니겠소 ?"
"말씀을 들어 보니, 그도 그렇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포증으로 함께 떠나기로 하십시다."
두 사람은 내일을 기약하며, 환담으로 밤을 새웠다.
...
초한지(楚漢誌) (75) 한신의 능력(能力)
다음날.
하후영은 한신과 더불어 포중에 도착하자 , 한신을 여사(旅舍)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기만 승상부(丞相府)로 소하를 찾아 갔다.
"승상 각하 ! 제가 명장 한 분을 모시고 왔사옵니다."
"명장을 모시고 오다니 ... ? 이름을 뭐라고 하는 사람이오 ?"
"한신이라는 사람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더니 소스라칠 듯 반가워하며 반문한다.
"뭐요 ? 한신을 모시고 왔다고 ?"
"예, 그러하옵니다. 그 사람이 우연히 저를 찾아왔기에, 제가 몇가지 시험을 해보았사온데, 그런 큰인물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후영은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소하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다.
그러자 소하는 한신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대답한다.
"태수는 사람을 옳게 보았소. 한신은 본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거지 노릇도 하였고, 남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나가는 설움도 당한 사람이오.
후일에 항우를 섬겼지만, 항우가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여 겨우 집극랑의 벼슬밖에 주지 않았다오. 범증은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항우에게 여러 번 등용해 주도록 천거했지만, 항우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들었소.
한신은 그러한 냉대를 참고 견디다 못해, 결국 항우를 등지고 우리를 찾아 온 모양이구려."
"그러면 ,제가 내일 한신을 데리고 들어올 테니, 한 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
"여부가 있겠소 ! 그런 인물을 안 만나면 내가 누구를 만나 보겠소. 기다릴 테니, 내일 아침에 한신을 꼭 데리고 들어 오시오. 솔직히 말하거니와, 나는 한신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오."
다음날 아침, 한신은 하후영과 함께 승상부로 소하를 찾아 들어 왔다.
그러나 소하는 한신의 인물됨을 시험해 보기 위해 자리를 일부러 피했고, 손님을 맞을 좌석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 놓고 이렇게 소홀하게 맞을 수 있을까 ? 이는 필시 나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니, 이처럼 냉대를 받아서야 무슨 기대를 할 수가 있겠나 ! )
한신은 매우 불쾌하여, 아무 의자에나 털썩 걸터 앉아 있었다.
실상인즉 한신은, 장량의 소개장도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맞아 들이는 소하의 태도가 비위에 거슬려 소개장 같은 것은 아예 내보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왜냐하면, 소개장에 의하여 우대를 받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승상 소하는 한신을 한참 동안이나 기다리게 하고 나서야 안에서 나오더니, 반갑게 말을 걸어 온다.
"어제 하후영 태수를 통해 귀공의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그러자 한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만 약간 수그려 보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하는 한신을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귀공을 만나게 되어 무척 기쁜데, 귀공은 어찌하여 대답이 없으시오 ?"
한신은 그제서야 입을 열어 말한다.
"저는 초나라에 있을 때, 한왕도 영명하지만 승상은 현사(賢士)를 예우로써 대해 주실 줄 아는 어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었기에, 천리 길도 멀다 않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승상을 직접 만나 뵙고 보니, 제가 기대했던 어른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이제는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지어먹을 생각입니다."
예우를 갖추어 영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신랄한 항변이었다.
소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반문한다.
"나를 만나자마자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짓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시오 ?"
한신이 다시 대답한다.
"어진 사람을 구하려면, 예우를 갖추어 영접해 주셔야 하는 법이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저를 예우로써 대해 주시지 않으시니, 제가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
"현사를 구하려면 초대면(初對面) 부터 그래야만 하는 법인가요 ?"
"물론입니다. 그 옛날 제왕(齊王)은 거문고를 무척 좋아했는데, 조(趙)나라에 거문고의 명인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제왕은 그사람의 거문고 소리를 들어 보고 싶어서 여러 차례 초대를 했더니, 거문고의 명인이 한참만에야 , 제나라에 오게되었습니다.
그러나 명인을 맞은 제왕은 용상에 높이 올라 앉아 거문고를 타라고 하니, 거문고의 명인은 매우 불쾌해 하면서, <대왕은 저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자 하신다면, 먼저 향불을 피워 놓고 좌석을 따로 마련하는 예우를 갖추어 주시옵소서.
저를 불러다 놓고 하인처럼 홀대하시니, 제가 어찌 흥에 겨워 거문고를 타겠나이까 ? >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늦게나마 예의를 갖춤으로써 명인의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고사(故事)가 있사옵니다."
"음 ......"
소하는 자신의 실수를 그제야 깨닫고 무심중에 신음하였다.
그러자 한신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한다.
"그 옛날 주왕(周王)은 나라를 번영시키고자 하는 일념에서, 현사가 찾아왔다는 말만 들으면 밥을 먹다가도 입 안의 밥을 뱉어 버리고 달려나왔고, 목욕을 하다가도 머리를 움켜잡은 채 달려나와, 현사를 융숭하게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지금 한나라에서는 현사를 하늘처럼 소중히 여겨야 할 형편이온데, 승상께서는 저를 굴러온 말뼈다귀처럼 대해 주시니, 저는 이제, 고향에나 돌아가 농사나 지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소하에 대한 한신의 공격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소하는 한신의 항의를 받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한신을 몸소 상좌(上座)로 모셔 올렸다. 그리하여 대등한 위치에서 두 번씩이나 절을 거듭하며 말했다.
"내가 불민한 탓으로 장군에게 실례가 많았으니 용서하소서."
한신은 그제서야 흔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승상께서 나라를 위해 현사를 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한왕을 도와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오기를 부려 본 것이오니,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라옵니다."
소하도 흔쾌히 웃으며 말한다.
"내 장군을 만난 것은 백년 지기(百年知己)를 만나 듯이 기쁜데 어찌 오해가 있으오리까.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천하 평정(天下平定)의 대경륜을 솔직히 가르쳐 주소서."
소하가 이렇게 나오니, 한신도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포부를 아낌없이 털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함양에는 102개의 산하(山河)가 있어서, 옛날부터 제왕이라면 도읍해야 할 천부(天府)의 도읍지이옵니다.
그런데도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침주에 도읍하였다가, 그나마도 버리고 팽성으로 도읍을 옮겨 갔으니, 항우는 그것으로서 이미 천하의 형세를 잃어버린 셈이옵니다.
한왕은 비록 파촉으로 좌천되어 오셨다고는 하지만, 힘만 제대로 기르면 마치 호랑이가 산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천하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가 있는 것이옵니다.
항우는 지금 천하의 제후들에게 호령을 하고 있어서 그의 위세가 자못 막강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후들은 힘에 눌려서 겉으로는 복종하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모두들 반심을 품고 있는 형편입니다.
더구나 항우는 의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대역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지방의 백성들은 의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언제 들고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한신이 마치 천하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바라보는 듯 천하 대세를 도도하게 말하는 바람에, 소하는 자기를 잊고 연신 감탄의 고개를 끄덕였다.
한신은 다시 입을 열어, 경륜을 말한다.
"천하의 대세가 이미 이처럼 기울었건만, 항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아직도 자기 도취에 빠져 있으니, 그야말로 필부(匹夫)의 만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한왕은 그와 반대로 <약법삼장>으로 천하의 인심을 독점하고 계시니, 비록 파촉으로 좌천되어 오셨다고는 하지만, 한왕께서 관중왕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한왕은 힘만 기르시면 언제든지 천하의 주인이 되실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소하는 크게 감탄하며 한신에게 묻는다.
"함양으로 쳐들어가려면 삼진왕의 저항에 부딪치게 될 텐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
"한신이 대답한다.
"장한, 동예, 사마흔 등의 삼진왕이 항우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항우에게 항복했을 때, 항우는 무지막지하게도 그들의 부하 20만 명을 생매장한 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내심으로는 항우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우가 그들을 방패로 삼아 한왕의 공격을 막아내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략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만약 한왕이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가기만 하면, 백성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고, 삼진왕들도 한왕께서 친서 한 통만 보내시면 만사는 그것으로 원만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소하는 한신의 말을 듣고, 3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뚫리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그러면 장군은 당장이라도 군사를 일으켜, 초(楚)나라로 쳐들어 가자는 말씀이오 ?"
" 항우는 백성들을 버려둔 채 제멋대로 팽성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남아 있는 백성들은 인자하신 군주를 갈망하고 있는 중입니다.
게다가 삼진왕들도 항우와 멀리 떨어져 있게 된 관계로 국경에 대한 경계가 매우 소홀해졌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기회에 한(漢)나라가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제(齊), 위(魏), 조(趙), 연(燕)의 네 나라중에 어느 누군가가 군사를 일으켜 함양을 먼저 점령해 버릴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파촉으로 옮겨 온 한나라 군사들은 고향에 돌아갈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옵니다."
소하는 그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는 안 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동진(東進)하고 싶어도 길이 죄다 끊겨 버렸으니, 그 일은 어찌하면 좋겠소 ?"
그러자 한신은 웃으면서 소하를 나무란다.
"승상께서는 왜 저까지 속이려 하시옵니까 ? 승상께서는 어떤 분과 상의하여 잔도를 모두 끊어 버린 것은 동진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기 때문에, 항우의 경계심을 늦춰 놓으려고 계획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옵니까 ?
그런 계략으로 항우를 속일 수는 있어도, 저만은 못 속이시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나는 오래 전부터 현사를 널리 구해 왔지만, 장군처럼 뛰어난 어른은 처음 만났소이다.
장군의 계략을 들어 보면, 천하의 평정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구려 .... 가만 있자 , 우리 이렇게 맨숭맨숭 앉아서 이럴 게 아니라, 내 집에 가셔서 술이라도 한잔씩 나누면서 애기를 계속합시다."
소하는 한신을 집으로 초대하여 주효(酒肴)를 베풀며, 다시 묻는다.
"전쟁의 승패는 총사령관의 정신 자세로 결정된다고 들었소. 총사령관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장군의 견해를 한번 들어 보고 싶소이다."
한신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
"일국의 총사령관은 <오재 십과(五才十過)>의 조건에 통과한 사람이어야 하는 법이옵니다. <오재>란 다섯 가지의 재능을 말한 것이옵고, <십과>란 열 가지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다섯 가지의 재능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
"오재란 지 (智), 인 (仁), 신 (信), 용 (勇), 충 (忠), 의 다섯 가지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지(智)가 있어야만 혼란을 막아낼 수가 있고, 인(仁)이 있어야만 장병들을 사랑할 줄 알고, 신(信)이 있어야만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되고, 용(勇)이 있어야만 배반자들을 막아낼 수가 있고, 충(忠)이 있어야만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옵니다.
적어도 대원수가 되려면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재능을 반드시 몸에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탄복하며 다시 묻는다.
"그러면 십과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오 ?"
"십과란, 대원수가 될 수없는 열 가지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첫째, 용기가 있어도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안 되고,
둘째, 급한 때를 당하여 행동을 서두르는 사람은 안 되고,
셋째, 이재(理財)에 눈이 어두워 재물을 탐내는 사람은 안 되고,
넷째, 인(仁)을 갖추고 있어도 사람을 죽일 용기가 없는 사람은 안 되고,
다섯째, 지(智)를 갖추고 있어도 적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안 되고,
여섯째, 신(信)을 갖추고 있어도 남을 덮어놓고 믿기만 하는 사람은 안 되고,
일곱째, 아무리 청렴 결백해도 남을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안 되고,
여덞째, 지략에 밝아도 결단력이 없는 사람은 안 되고,
아홉째, 강직한 것은 좋으나 자기 고집만 부리는사람은 안 되고,
열번째, 성품이 나약하여 모든 일을 남에게만 맡기려 하는 사람은 안되는 것이옵니다. 이상과 같은 열 가지 중에서 어느 한 가지의 허물만 있어도, 그런 사람은 대원수를 시켜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감탄하였다.
"지금 여러 나라에는 장군들이 많은데, 귀공은 그들을 어떻게 보시오 ?"
"지금 각국에는 대장급 인물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은 지략은 있어도 용기가 부족하고 어떤 사람은 용기는 있어도 지략이 부족하고, 어떤 사람은 재능이 있어도 군사를 지휘할 줄 모르고,
어떤 사람은 실력도 없으면서 교만하기만 하고, 어떤 사람은 부하들의 공로를 가로채기 일쑤이고.... 진실로 , 존경할 만한 명장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귀공을 이 나라의 대원수로 임명한다면, 귀공은 어떻게 하시겠소 ?"
소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단도 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어 보았다."
한신은 가슴속에 이미 원대한 계획을 품고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만약 저를 대원수로 써주신다면, 저는 조금도 뽐내지 아니하고, 모든 군무(軍務)를 병법대로 수행해 나가겠습니다."
"병법대로 수행해 나가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오 ?"
"평소에 군사들을 대할 때에는 부드럽게 대해 주고, 훈련을 사킬 때에는 엄격하게 실시하고, 평시(平時)에는 조용함을 위주로 하되, 일단 군사 행동을 개시하게 되면 동적(動的)으로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평시에는 무예를 연마해 나가며 산악(山岳)과 같이 위연한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일단 유사시에는 산하(山河)와 같이 전진해 나가되,
그 변화는 천지와 같이 무궁 무진하게 하고, 군영은 뇌성 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듯 하게 하고, 상벌(賞罰)은 공평 무사하게 하고, 계략은 귀신같이 운영해 나갈 것이옵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각오함으로써 생(生)을 도모해 나가고, 약한 듯이 보이면서 강함을 제압하고, 위태로운 듯이 보이면서도 안전을 도모하여, 10만 군사로써 백만 적군을 능히 제압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소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지난날 무정(武丁) 싸움에서는 이윤(伊尹)이라는 명장이 있었고, 위수(渭水) 싸움에서는 태공(太公)이라는 명장이 있었고, 연산(燕山) 싸움에서는 악의(樂毅)라는 명장이 있었소. 귀공 자신은 그들과 견줄 수 있는 명장으로 자부한다는 말씀인가요 ?"
그러자 한신이 대답한다.
"지금 승상께서 말씀하신 세 분은, 모두가 제게는 은사(恩師)이시옵니다."
그 말에 소하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 그 분들은 이미 여러 백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인데, 그들을 <은사>라고 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
한신을 천하의 <대포꾼>으로 여기는 반문이었다.
그러나 한신은 눈썹 하나 까딱않고, 태연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은 여러 백 년 전에 돌아가신 장군들이십니다. 그러나 맹자(孟子)는 공자(孔子)께서 돌아 가신 지 백여 년 후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공자의 학문을 숭상해 가면서 평생을 두고 공자를 은사로 모셔 왔던 것이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전사(戰史)를 통하여, 나는 이윤 장군에게서는 병법의 기본을 배웠고, 태공 장군에게는 전략(戰略)을 배웠고, 악의 장군에게서는 전술(戰術)을 배웠으니,
비록 같은 시대에 살지는 못했더라도, 그분들을 어찌 <은사>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
그러자 소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던 자기 자신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며,
(이 사람이야말로 대원수가 되고도 남을 기재(奇才)로구나 ! )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날부터 한신을 자기 집 귀객(貴客)으로 모셔 놓고, 그의 경륜을 좀더 상세하게 들어 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