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03.日. 모처럼 일요법회에 다녀온 생각 많고 말 많았던 날
08월24일, 오늘의 이름은 木요일 2.
거 좀 헷갈리는데 그러니까 문화야, 사상이야, 진화하는 생명체야.
Bacon Egg Cheese Biscuit과 카페라떼 한 잔으로 아침을 먹은 뒤 닭장 같은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나서는 아무래도 첫날은 여유 있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딸아이와의 오전10시 약속을 조금 뒤로 늦추고 호텔 주변을 간단하게 산책이라도 하려고 서울보살님과 함께 호텔 현관을 나섰다. 새벽에는 오른편 방향인 2nd Ave로 가보았으니 이번에는 왼편 방향의 3rd Ave 쪽으로 걸어보고 싶었다. The Pod51 호텔 앞을 지나는 길로서 맨해튼 가로줄인 East 51번가를 따라 왼쪽으로 걸어 나가면 차례대로 맨해튼 세로줄인 3rd Ave와 Lexington Ave와 Park Ave와 Madison Ave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만나는 세로줄로는 유명한 5th Ave가 나오게 된다. 그렇게 가로줄인 Street와 세로줄인 Avenue가 서로 만나 형성하는 사거리를 하나씩 건널 때마다 비슷하지만 무언가 차이가 있는 풍경과 분위기를 접하게 된다. 어쩌다 이렇게 여행 중의 한가로운 산책을 즐기면서도 우리들은 적극적으로 낯섦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 내딛는 발걸음 따라 눈앞으로 밀려드는 풍경들을 시각에만 의지한 채 지나쳐버리지 않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고, 피부에 스치는 감촉과 발바닥의 울림을 느껴가면서 온 감각을 통해 풍경들을 걸러내어 내가 지금 진정으로 원하는 느낌의 대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색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Madison Ave를 지나고 5th Ave가 보이는 지점에서 왼편으로 길을 따라 서있는 웅장하고 멋진 회색의 화강암 석조건물을 만나게 되었다.
수없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크고 작은 뾰족 지붕으로 인해 성당건축물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눈을 호사시키기에 만족할 만큼의 대성당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ST. PATRICK’S CATHEDRAL이었다.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풍광風光을 모아 단숨에 시각적으로 압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생각보다는 훨씬 강력하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그렇고,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렇고, 로마의 판테온 신전이 그런 것처럼 그런 시각적 압도는 사람들의 외경심畏敬心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열려있는 문을 통해 드나드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붉은 벽돌 건축물인 명동성당에 비해 그 규모와 웅장함이 배가되고 있는 성 패트릭 성당은 목요일 아침시간에는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더 붐비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 형식적인 가방 검사를 받은 뒤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대성당은 근래에 보수공사를 대부분 마쳤다고 했는데 저 안쪽의 레이디 채플의 내부 공사는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한 사오십 분가량 머물러있으면서 성당 안을 차분히 돌아보았는데 꼭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 웅장한 공간 안에서 울려오는 파이프오르간의 깊은 소리와 스테인드글라스의 영롱한 색과 성상聖像들의 부조물浮彫物이나 조각으로 인해 신앙을 갈구하는 믿음의 대상이나 구원받아야할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런 장엄莊嚴과 신비神祕와 헌신獻身 등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종교성宗敎性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종교성이란 인간들의 가슴 깊은 곳에 숨어있는 외경심畏敬心 곧 두려움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신앙심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인 종교로 이끌고 인도하는 방법은 자비나 사랑이겠지만 종교성의 시작은 바로 거룩하거나 신성함을 동반한 외경심畏敬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죽음 뒤의 문제들인 천국이나 지옥 혹은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총체적 두려움인 내세來世를 종교에서 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압도적壓倒的 외경심畏敬心의 강화强化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거 좀 헷갈리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종교宗敎란 주의主義야, 문화文化야, 사상思想이야, 진화하는 생명체生命體야.
불교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신神에게 자신을 귀속시키거나 신과의 합일을 통해 영혼을 구원받거나 영원한 안식처로 이끌림을 받는 종교들은 모두 기복적祈福的인 혹은 구복적인求福的인 종교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불교는 인간 자아의 완성 혹은 깨달음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자각의 종교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들과 불교와는 무엇이 확연하게 다른 점일까 하는 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싯닫타 태자의 출가동기를 ‘붓다짜리타 5장’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왕자는 환희에 차서 왕궁으로 돌아와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왕에게 출가를 허락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부왕의 완강한 반대에 왕자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내 목숨이 죽지 않는다면, 내가 질병으로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늙음이 나의 젊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불행이 나의 행복을 앗아가지 않는다면, 나는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을 보면 싯닫타 태자의 처음 출가 동기는 당시 인도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병사老病死를 넘어서 낙樂과 영생永生을 추구하는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출가를 한 뒤 여러 스승을 통해 배움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윤회의 소멸을 의미하고 있는 다시 태어나지 않음 즉, 생生의 문제를 통찰함으로써 지혜와 열반을 성취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연기緣起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대목에서 확인을 할 수가 있다.
- 늙음과 죽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진리를 온전히 꿰뚫어 사유한 후에 그것은 태어남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 - 그러면 태어남은 어디서 오는가? 업의 결과인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원인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 - 그러면 존재는 어디서 오는가? 집착에서 온다. - 그러면 집착은 어디서 오는가? 갈애에서 온다. - 그러면 갈애는 어디서 오는가? 느낌에서 온다. - 그러면 느낌은 어디서 오는가? 접촉에서 온다. - 그러면 접촉은 어디서 오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온다. - 그러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어디서 오는가? 이름과 모양에서 온다. - 그러면 이름과 모양은 어디서 오는가? 의식작용에서 온다. - 그러면 의식작용은 어디서 오는가? 형성에서 온다. - 그러면 형성은 어디서 오는가? 어리석음에서 온다. -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원인이 된다. 이어서 이런 진리를 거꾸로 관찰하였다.
- 어리석음에서 형성이 생긴다.
- 형성에서 의식이 생기며
- 의식에서 이름과 모양이 생기며
- 이름과 모양에서 여섯 감각기관이 생기며
- 여섯 감각기관에서 접촉이 생기며
- 접촉에서 느낌이 생기며
- 느낌에서 갈애가 생기며
- 갈애에서 집착이 생기며
- 집착에서 존재가 생기며
- 존재에서 태어남이 생기며
- 태어남에서 늙고 죽음이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모든 것이 소멸하는 가를 관찰하였다.
-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과 죽음이 없다.
- 존재가 없으면 태어남이 없다.
- 집착이 없으면 존재가 없다.
-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다.
- 느낌이 없으면 갈애가 없다.
- 접촉이 없으면 느낌이 없다.
- 여섯 감각기관이 없으면 접촉이 없다.
- 이름과 모양이 없으면 여섯 감각기관이 없다.
- 의식작용이 없으면 이름과 모양이 없다.
- 형성이 없으면 의식작용이 없다.
- 어리석음이 없으면 형성이 없다.
- 어리석음은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의 실상實相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안온인 열반을 구하셨다. 그리고 나의 해탈은 움직일 수 없이 견고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