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백과 - 생거진천전통시장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1. 16. 4:47
국내 시장백과 - 생거진천전통시장
2023.11.08. 08:05조회 16
생거진천전통시장
요약 생거진천전통시장은 조선시대에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진천의 읍내장에서 기원한 시장이다. 상설시장과 함께 5일장이 활발하게 열리고 있으며 2015년 새로 건물을 지어 장터를 이전해서 오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1. 생거진천전통시장 개요
진천은 서울과 멀지 않고 교통이 편리하면서도 산과 물이 좋아서 예부터 양반이나 부자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이다. 또한 땅이 비옥해서 시장이 성장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과거에 진천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상업 활동이 일어났던 곳은 광혜원이었다. 그곳은 삼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차령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대부분 광혜원에서 하룻밤 묵어야 했기에 늘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같은 교통의 변화에 따라 점차 광혜원은 지리적인 이점을 잃고 쇠퇴했고 진천 읍내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진천 읍내장의 명맥을 이은 진천전통시장은 해방 이후 인근 지역의 상권을 주도해 왔다. 1976년에 흩어져 있는 노점들을 하나로 모아 백곡천 인근에 장터를 개설했고, 2015년에는 현대식 설비를 갖춘 장터로 이전하며 생거진천전통시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생거진천전통시장은 상설 점포 70개, 노점 350개를 갖추고 있다.
2015년 새롭게 개장한 생거진천전통시장 입구
2. 생거진천전통시장의 어원
진천(鎭川)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조선 태종 13년의 일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금물노군이라 불렸고, 신라 때는 만노군이라 불렸다. 그 이후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진천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는 것은 고려 때에 진주(鎭州)라고 불린 것이다. 진주라는 말에 진천 지역에 풍부한 개천이 더해져 진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조선 초기에는 경기도에 속했고, 오늘날처럼 충청도에 속하게 된 것은 중종 때의 일이었다.
생거진천전통시장은 진천이라는 지명에 더해 기존에 부르던 진천시장에서 지역적 특성을 살린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면서 생긴 이름이다. 시장 이름에 사용한 ‘생거진천’이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용인에 살던 젊은 남자가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위에서 굴러 떨어진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했던 젊은 남자는 저승에서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다시 이승으로 돌려보내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젊은 남자의 영혼은 이승으로 돌아왔지만 바위 밑에 깔린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없는 영혼은 유령에 불과했다. 그는 몸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다가 막 세상을 떠난 진천 땅의 부잣집 아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젊은 남자는 용인의 아내와 진천의 아내에게서 각각 삼형제를 두었고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정작 문제가 생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그의 혼백을 두고 용인과 진천의 아들들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그 송사를 맡은 진천군수는 살아서는 진천에 있었으니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살아 진천 죽어 용인’라는 말의 유래이다.
위의 고사에서 보듯 ‘살아 진천’, 즉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는 말은 그저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살기에 좋은 진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며 쓰이게 되었다.
진천의 마을 풍경
들판과 주택들이 어우러져 있다.
3. 진천 지역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조선의 이중환은 자신이 쓴 책 《택리지》에서 진천은 인근의 충주에 비해 평야가 적고 산이 많으며 큰 개천이 많다고 표현하면서 땅이 매우 비옥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진천은 예언서 등에서 전란 때에 몸을 피하기 좋은 10여 곳의 장소, 즉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히는 곳이었고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거점 지역으로 꼽힐 정도로 지리적인 위치 또한 뛰어난 곳이었다.
진천은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살기 좋은 땅으로도 유명했다.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주변에 산과 개천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명승지가 많았던 탓이다. 그래서 오늘날 진천에는 고택이나 정자, 사당, 비석 등 조선의 양반 문화가 잘 드러난 문화유산이 많다.
이처럼 지리적 이점과 비옥한 땅의 장점을 가진 진천은 예부터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는 시장이 발달했다. 확인이 가능한 가장 오랜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에 따르면 당시 진천에는 읍내장(2, 7일), 장양장(5, 10일), 광혜원장(3, 8일), 한천장(1, 6일) 등 4개의 시장이 개설되어 있었다.
천막이 빼곡하게 들어선 오늘날의 진천 장날 풍경
1) 광혜원장의 발달과 쇠퇴
이들 시장 가운데 지리적 이점이 가장 뛰어난 시장은 오늘날의 진천군 광혜원면에 있는 광혜원장이었다. 광혜원은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가는 길목에 있어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세 지방을 통틀어 이름) 지방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꼭 들러야 했던 곳이라 관리들의 숙소가 있었음을 의미하는 원(院)이 개설되어 있을 정도였다. 광혜원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기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차령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험하기도 하고 산짐승이나 도적들이 많아 늦은 시간에는 넘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광혜원에서 쉬고 다음날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광혜원에서 고개를 넘으면 경기도 죽산이었고, 그곳에서 백암과 용인, 광주를 지나 송파로 가는 게 일반적인 행로였다. 또한 소몰이꾼들의 경우 안성을 지나 여주 이천으로 가거나 우시장이 큰 평택이나 수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광혜원에 시장과 주막이 성행했던 것은 이러한 지리적 배경 때문이다. 광혜원에 이르러 한 숨을 돌리고 경기도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였기에 광혜원에는 늘 사람들로 넘쳤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주막이 즐비하고 장이 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광혜원장의 융성은 1905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오래된 양초처럼 빛을 잃기 시작했다. 교통의 편의 때문에 발전한 광혜원장은 교통수단의 변화로 인해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시장》(1924)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경성가도에 위치해 있어 여행자들의 왕래가 빈번해서 150년 전 여행자를 위한 여인숙업자 등이 주창을 해서 행상인 등과 함께 이 시장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곡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 시장은 철도 부설에 따라 조치원, 천안 방법으로 대부분 물자를 빼앗기고 안성과 장호원 방면으로 소량의 곡물을 취급할 뿐이다.”
《조선의 시장》(1924)에는 1910년대의 광혜원장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기록에 따르면 4, 9일에 광혜원장이 개시된 후 상인의 수가 많게는 200명에서 적게는 50명 정도가 장을 찾았으며, 방문객은 많게는 700명에서 적게는 100명이 다녀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소는 15전에서 20전, 곡물은 1두 1전의 중개수수료가 정해져 있고 이를 넘겨서 청구하면 고발을 당한다는 내용도 있어서 당시 시장의 중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이미 철도를 중심한 물류 수송 방법의 변화로 광혜원장은 연 거래액이 5만 5,000엔에 불과할 정도로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하고 쇠퇴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했던 광혜원장은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다. 1964년에는 지명에 따라 만승장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가 2000년 만승면이 광혜원면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장의 이름 또한 자연스럽게 광혜원장으로 부르게 되었다.
광혜원장은 1970년대에 55개 안팎의 점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1976년의 기록을 보면 점포를 가진 고정 상인이 70여 명,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이동 상인이 140여 명, 시장 이용객이 430여 명이었다고 전한다. 당시 광혜원장에서 거래된 하루의 판매액은 291만 2,000원이었다.
1976년의 모습과 수치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0년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모습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의 전반적인 경제 활성화와 맞물려 점포가 83개로 늘어나고 장을 찾는 손님의 숫자도 크게 늘어서 7,000~8,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크게 확대되었다. 다만 점포의 숫자는 이동 상인의 그것을 더한 것이어서 상권 자체가 활성화되었다고 보기에는 힘들고 일시적인 변화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것은 1990년대에 들면서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한국의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갔고, 그런 사정은 광혜원장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2010년 광혜원장을 찾은 이동 상인은 평균 5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인근에 농공단지와 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최근 광혜원장을 찾는 상인과 손님의 수가 계속 늘고 있다는 점이다.
광혜원장에서는 주로 각종 채소와 과일, 곡물류, 육류, 잡화 등이 거래되고 있다. 특히 참외나 고추 등의 농산물을 비롯해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관상어와 장미는 광혜원장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손꼽힌다.
5일장에 자리 잡은 어물전
오징어
색이 선명하고 살이 탱탱하다.
2) 진천 읍내장의 변화
1920년대에 진천에는 3개의 시장이 개시되었다. 《동국문헌비고》에 등장했던 4개의 시장 가운데 장양장이 사라지고 읍내장 광혜원장, 한천장이 유지되고 있었다. 1925년의 기록인 《시가지의 상권》(1925)을 보면 진천 읍내에서 열리는 읍내장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5, 10일 장인 진천의 읍내장은 1년에 73번의 장이 열렸고, 거래가 가장 많은 상품은 농산물과 직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기록인 문정창의 《조선의 시장》(1941)에도 진천의 시장이 소개되어 있다. 읍내장의 경우 조사를 한 해에 72번의 장이 개시되었고 농산물과 직물, 축산물의 순서로 판매액이 높았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듯, 전체 거래액은 광혜원장이 가장 높았다. 읍내장의 연 거래액이 25만 9,177원이며 진천군 덕산면에 있는 한천장이 7만 9,200원인 것에 비해 광혜원장은 44만 3,010원의 거래액을 기록했다.
진천 읍내장은 행정의 중심인 진천 읍내에 있는 진천의 중심 시장이었다. 도로에 장이 서던 진천장이 장터거리에 개설된 것은 1911년 9월이었다. 진천장은 일제강점기에 장이 서는 날에 변화가 있었는데, 1920년대에는 5, 10일에 개시되었고, 1930년대에는 3, 8일에 개시되다가 다시 5, 10일장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당시 읍내리에는 쇠전거리에 우시장도 함께 있었는데 군내를 대표하는 우시장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4년 12월에 폐지되었다.
신발, 양말 등의 잡화를 파는 노점들
약초 비수리
야관문이라고도 불린다.
가을의 홍시
초석잠
항노화 식품으로 혈액 순환을 돕는다고 알려져 있다.
* 한천장 또는 구말장
한천장은 진천군 덕산면 한천리에서 장이 섰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한천장은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을 이어온 정기시장으로 그 역사의 흔적이 이름에 남아 있다. 이름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33년의 일이었다. 그해에 큰 홍수가 나서 장터가 유실된 이후에 지금의 장소인 덕산면으로 옮겼고 그 이후 덕산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들 한천장과 덕산장은 구말장이라고도 불렸는데, 구말은 꿈말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꿈말은 꿈마을의 줄임말로 한자로 쓰면 몽촌(夢村)이 된다. 거기에는 이런 유래가 전한다.
과거 이 마을은 시장 다리 어귀에 있었는데 1611년에 홍수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할지 난감해 하자 당시 선비였던 채진형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꿈속에서 본 곳에 마을을 만들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꿈마을, 즉 구말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열리는 장 또한 구말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지닌 구말장은 4, 9일에 열리는 정기시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2010년 현재 점포 수는 70개이며, 이동 상인이 평균 30명 정도가 찾아올 뿐이다. 여기에 시장 인근에 덕산농업경영인직판장이 생긴 이후 장을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구말장에서 만날 수 있는 특산품으로 거봉포도, 꿀수박, 생거진천쌀, 진천 장미, 덕산약주라고도 불리는 천년주가 있다.
* 장양장
1590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신잡이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에 머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로 인해 진천이나 청주에서 출발해 한양으로 가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송림리에서 발길을 멈추고 쉬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1913년에 이월면사무소가 송림리로 이전하면서 시장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이때 장날은 5, 10일이었다.
장양장은 이후 1964년에 이월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장날도 1, 6일로 변경했다. 이름의 변화는 지명에 따른 것이다. 이월장은 1976년에 상설 점포를 가진 상인이 78명, 외지에서 오는 이동 상인이 155명에 이르고, 이용객이 600명에 이르며, 일 판매액이 586만 원을 넘을 정도로 활기를 띤 시장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하게 발전해서 방문객이 2,000~3,000명에 이르고 상설 점포와 이동 점포를 합쳐서 66개로 늘어날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면서 교통의 발달과 인근 상권이 강해지면서 점점 약화되었다.
2010년 현재 부지 면적은 3,117m2이며 고정 점포는 90개에 이동 상인이 평균 50여 명이 찾고 있으며 고추, 참깨, 쌀, 참외 등이 이 지역의 특산품으로 꼽힌다.
4. 생거진천전통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진천을 대표하는 시장은 광혜원장이었지만 해방 이후가 되면 진천전통시장이 그 바통을 이어받아 진천의 중심 상권을 형성했다.
진천전통시장이 정식 시장으로 등록한 것은 2008년 4월이다. 그러나 기존의 노점상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농산물과 생활필수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1976년 3월의 일이었다. 위치는 읍내리 120-4번지 일대였다.
진전전통시장은 해방 이후에 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1964년의 현황을 보면 고정적인 점포를 가진 상인이 210명에 이르고 이동상인 420명 정도가 있었다. 이 무렵 시장을 찾은 손님은 하루 3,980명이며, 일 판매액이 1,037만 원에 이를 정도로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진천전통시장은 이후에도 발전을 거듭해서 1970년대가 되면 장날에 펼쳐진 점포가 378개, 1980년대에는 하루 방문객이 3만 명, 점포 수는 454개에 이를 정도로 크게 확대되었다. 당시 시장의 면적은 약 290m2이었고, 정기시장의 특성상 전체 점포 가운데 이동 점포의 비율이 84% 정도였다.
당시 진천전통시장에서 팔리는 것은 진천에서 생산된 쌀과 백곡저수지에서 잡히는 잉어, 보련골 호도 등과 같은 지역 특산물도 있었지만 여느 시장들이 그렇듯이 대체로 보통 사람들에게 필요한 곡류와 생활필수품이 주를 이루었다.
진천전통시장이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976년이다. 백곡천 고수부지 주변과 진천 시가지 동쪽 공터에 시장터가 생기면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노점상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80년대 진천 전통시장을 찾아온 이동 상인들의 경로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5, 10일 장날인 진천을 중심으로 해서 1, 6일에 장이 서는 가까운 증평장이나 소규모인 이월장으로 이동했다가 중심 시장인 음성장(2, 7일)에 모여들었고, 3, 8일이 장날인 괴산장을 거쳐 장호원장(4, 9일)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그것이다. 장날에 따라 이동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였다.
두 번째 유형은 중심 시장인 진천장에서 증평장(1, 6일)으로 이동해 5일간 휴식하고 오창장(5, 10일)과 옥산장(4, 9일) 등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조치원장(5, 10일)으로 이동하는 유형이다. 세 번째 유형은 중심 시장인 진천장에서 중간 시장인 성환장(1, 6일)으로 이동하고 다시 중심 시장인 안성장(2, 7일)로 이동했다가 소규모 시장인 광혜원장(3, 8일)과 덕산장(4, 9일), 장호원장으로 연이어 이동하는 것이다.
진천전통시장은 2000년대에 들어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2002년 이후 시장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했고 2007년 경영혁신 등이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꾸준히 상인과 방문객의 숫자가 증가했다. 2009년에는 장날에 500~600여 명의 상인이 좌판을 펼쳤고 4,000~5,000명이 시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차츰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기존의 시장이 자리가 협소하고 고객에 대한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에 2014년 백곡천 건너편에 있는 성석리로 이전을 결정했다.
그리고 2015년 6월 27일에 기존의 진천전통시장과 가까운 곳에 생거진천전통시장이 현대식 건물의 편의성을 갖추고 개장했다. 70개의 상설 점포와 350개의 노점이 들어선 생거진천전통시장의 새 건물은 버스와 택시 등 대중교통의 이용이 편리할 뿐 아니라 지하와 지상을 아우르는 넓은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주차장과 상점을 오갈 때 무빙워크를 이용하는 점, 모든 상점에서 카드 결제가 가능한 점 등 이용자의 편의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기도 했다.
한편 진천 읍내 중심가에는 진천중앙시장이 자리하고 있어서 도시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데 편리하다.
현대적 설비를 갖춘 생거진천전통시장의 내부 모습
생거진천전통시장은 화장실을 비롯해 편의 시설을 잘 갖추어놓았다
5. 생거진천전통시장의 위치와 구성
진천 읍내로 들어가면 읍내를 가로질러 흘러가는 백곡천이 나오고, 백곡천 위를 지나는 진천대교가 보인다. 백곡천 천변에 자리한 주차장을 지나면 강둑 안쪽에 있는 예전의 진천전통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서 백곡천을 건너가면 곧바로 새롭게 단장한 생거진천전통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 진천전통시장에서 주로 거래되었던 품목은 주로 쌀, 고추, 마늘 등의 농산물과 잡화, 생선 등이다. 토속음식들과 주전부리 음식들을 파는 먹을거리 장터도 성시를 이루었다.
진천중앙시장은 진천 종합버스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읍내에 위치해 있다. 벽암사거리에서 터미널을 지나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진천중앙시장이 보인다. 진천중앙시장은 식자재를 비롯해 도시인들의 생활필수품을 거래한다.
진천에서 17번 국도를 타고 곧장 북쪽으로 향하면 광혜원에 이른다. 통영대전중부고속도로 대소IC에서 나오면 곧바로 광혜원에 닿는다. 광혜저수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광혜원을 지나고 만곡을 이루는 곳에 광혜원면이 있다. 광혜원장은 광혜원삼거리에서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면 나타난다. 따로 상설시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인근에 있는 상가나 점포들 앞에 3, 8일에 장이 선다.
주로 주요 도로 주변에 있는 개천을 따라 나 있는 좁은 길에 장이 섰는데, 근래에 장이 활성화되면서 광혜원을 지나는 주요 도로를 따라 여기저기에 이동 상인들이 물건을 펼쳐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이동 상인들은 다양한 먹을거리를 비롯해서 의류, 농산물, 해산물 등 다른 정기시장에서 볼 수 있는 품목들을 주로 판매한다.
생거진천전통시장의 건물 밖에도 여기저기 노점이 펼쳐져 있다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진천군은 동쪽으로 음성과 괴산, 남쪽은 청주, 서쪽은 천안시, 북쪽으로는 경기도 안성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진천은 충청북도에 속하지만 충청남도와 경기도와 인접하고 있다.
지형은 북서쪽에 차령산맥의 봉우리들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솟아 있기에 비교적 높고 가파른 산지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이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남서쪽으로도 여러 산들이 솟아 있어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