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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9월3일 주일 [(녹) 연중 제22주일]
[수도회] 고통 중에 드리는 사랑의 제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예레 20,7-9
○ 제2독서 로마 12,1-2
† 복음 마태 16,21-27
◈ 오늘의 묵상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단호함이 엿보입니다. 맺고 푸는 열쇠까지 받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인간적인 유혹과
욕망을 철저하게 단죄하는 예수님의 결연함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현실의 처지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조롱과 놀림을
받고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세상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뼛속’에 그 말씀을
가두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시면서 예언자의 길이
세상과 맞서는 험난한 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수차례 전도 여행에서
칭송과 존경보다는 반대와 박해를 받았지만,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의 전부로 여길 만큼 복음의 기쁨 속에 살았기에 역경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리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하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날마다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내 삶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2017년 가해 9월3일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치욕만 되었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7-9
제2독서
<여러분의 몸을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2,1-2
복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1-27
제가 있는 성지에 봄이 되면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들레입니다. 민들레가 꽃을 피운 후에 홀씨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는데, 이 씨앗들이 뿌리를 내리면 잔디밭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민들레는 생명력이 뛰어나서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그 자리에 계속 자라기에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그분께서는 웃으면서 이런
말씀하시더군요.
“신부님, 모든 홀씨들이 다 뿌리를 내리면 아마 민들레가 세상을 다
덮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주 일부만 뿌리를 내리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의 민들레에 붙어있는 홀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든 홀씨들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니 뽑으면서
민들레를 제거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인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는 평생 500여개의 난자를
만들지만, 남자의 정자 수는 수억 개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남자의
정자가 다 아이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지구는 사람들로 꽉
차서 발 디딜 곳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보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행인 상황을 바라보기 보다는
부정적인 상황만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숨을 내쉬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합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수난과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오늘 복음의 직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런 베드로였지만 곧바로 ‘사탄’이라는
말까지 듣게 된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바로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함께 할 때에는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의 기준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데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집니다. 즉,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워서 주님의
뜻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상황이라면서 거부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으면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뒤를 진정으로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
(오쇼 라즈니쉬).
민들레 홀씨...
친구가 나더러 이렇게 살아보라 하네.(‘좋은 글’ 중에서)
말이 많으면
말을 많이 하면 반드시 필요 없는 말이 섞여 나온다. 귀는 닫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입은 언제나 닫을 수 있게 되어 있다.
허허허
잘 웃는 것을 연습하라. 세상에는 정답을 말하거나 답변하기에
난처한 일이 많다. 그때에는 허허허!~웃어 보라. 뜻밖에 문제가
풀리는 것을 보게 된다.
화를 내면
화내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급하게 열을 내고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대개 싸움에서 지며 좌절감에 빠지기 쉽다.
미소의 힘
미소 짓는 얼굴은 결코 밉지 않다. 아무리 곱고 멋지게 생겨도
찡그리면 흉하다. 미소를 연습하고 그 힘이 얼마나 큰 지를
경험하라.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하는 말을 잘 사용하라. 모든 갈등과 다툼이 어느새
가라앉게 한다.
노래
힘들 때 짜증내면 더 힘들게 느껴지지만 노래를 들으면 새 힘이
솟는다.
훌륭한 대화
남의 말을 듣는 것을 잘하라. 사람들은 입으로 자기를 다 들어내기
쉽기 때문에 잘 듣기만 해도 훌륭한 대화가 된다.
욕
욕은 어떤 것이든지 하지 말라. 장난삼아 하는 욕설이 습관이 되면
많은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목소리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이 이긴다. 빈 그릇은 부딪히는 소리가
심하고 열등의식이 강한 사람은 목소리라도 높여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한다.
나이
늙어서는 젊은 사람과 대화에서 이겨서는 안 된다. 설령 이겼다
해도 젊은 사람들은 절대 수긍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만류하는 베드로.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고통 중에 드리는 사랑의 제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9월3일 연중 제22주일
예레 20,7-9; 로마 12,1-2; 마태 16,21-2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마태 16,24)
고통 중에 드리는 사랑의 제물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그분께서는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였고 지금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드러내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수난예고를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반박합니다. 그는
의인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모욕을 견뎌내고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에 반발한 것이지요. 그러자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16,23)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데에
걸림돌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고백을 하여 축복을 받았던(16,17) 베드로는 예수님의 매정한
거절 앞에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말로
고백할 줄을 알았지만 아직은 하느님의 관점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의 반박과 거절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적 사고가 문제였습니다. 그런 사고에서 그는 현실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 추종의 길은 그분처럼 섬기고 희생하고 목숨마저
기꺼이 넘겨주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그런데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신앙을 유혹하고 뒤흔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하며, 고통 받는 이들과 늘
함께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6,24-25) 이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주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참으며 짐을 지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짐을 지고 참음”으로써 희망이 솟아나며, 고통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하지는 못하리라는 확신을 지닐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의 성장과 변화를 위한 디딤돌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고통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상의 삶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로마 12,1) 바치는 참다운 예배가
되도록 해야겠지요.
우리 모두 고통과 시련 중에도 자신을 존재의 중심으로 여기지
않아야겠습니다. 자신을 중심에 둘 때 이미 모든 것을 잃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 중에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의
삶이 실패한 듯 보일지라도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네 삶이
자신의 소유와 동일시될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거든 “자기를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야”겠지요. 죄에 묶인 나, 탐욕과 이기주의로 물든 나로
어두워진 껍데기 나를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중심에 두는 착각과
교만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야만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생명을 호흡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 자신의 목숨, 곧 육체적 생명만을 돌보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길이며 의미 없는 삶이라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영적 생명에 이르기 위해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고,
내 안에 잠든 나를 깨워 그분의 사랑의 길을 따르며 ‘사랑의 제물’을
봉헌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9월3일 연중 제22주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 23)
산다는 것은 늘 쉽지 않은 힘겨움입니다.
사람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 무기력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코 반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통해 진정한 자기자신을 보게됩니다.
보게될 때 버릴 수 있고 따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발전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을 찾게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하느님께로
귀결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사람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서 삶의 의미를 찾게합니다.
삶의 의미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거기에서 우리의 목숨은 평화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올려드립니다.
일어나야 할 십자가의 일이 우리에게서 그냥 일어나게 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22주일
2017년 가해 9월3일 연중 제22주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 마태 16,21-27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나뭇잎은 가만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불면 여지없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현명한
나뭇잎은 바람과 다투거나 싸우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을 맡길 것입니다. 흔들리는 나뭇잎은 바람을 느낄 것이고,
살아 있음을 또한 느낄 것입니다. 나뭇잎이 바람과 맞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하면 무척이나 힘들 것입니다. 예전에 영화 대사가
생각납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다.’
예전에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데리고
시장엘 갔습니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를 말에 태우고 걸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네요. 이번에는 아들이 타고 아버지가 걸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저 아들은 효성이 없네요. 이번에는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 당나귀를 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야기
합니다. 저 사람들은 당나귀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봅니다. 할 수
없이 아들과 아버지는 힘들지만 당나귀를 메고 갔습니다. 시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이 미쳤다고 비웃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비단 동화책에만 있을까요? 우리의 삶에도 참 많은
바람이 불어옵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친구의 말이 며칠 동안 내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업무 때문에 벌어진
논쟁인데, 나의 인격을 무시한 것 같아서 화가 납니다. 교구에
있으면 당연히 알아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교구에 있으면서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살아서 숨을 쉬는 동안, 우리는 바람을 만날 것입니다. 그
바람에 맞서거나, 그 바람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다듬고, 나의 내면을 키워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일관되게 이야기합니다. 바로 나의 내면을
키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을 하여도 뼛속까지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의 어떤
바람이 불어도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니 견딜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주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의 바람이 되었습니다. 고통과 수난을 피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세상을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님께서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전해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마십시오.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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