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은평구 구산동 예일초등학교는 최근 들어 교내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전국 초등학교 사상 처음으로 장애를 가진 학생이 전교어린이회장에 뽑혔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겉모습이 아닌 후보들의 공약과 소신에 대해 올바른 한표를 던졌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어른들의 총선에 앞서 모범적으로 시험을 치른 것처럼.
지난달 15일 전교어린이회장에 당선된 조태민군(13·6학년 4반). 그는 제대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2급 청각장애아다. 그러나 선거 운동중 어느 후보도 그런 약점을 잡지 않았다. 후보는 5명이나 되었지만 불법이나 탈법시비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 초등학교 회장 선거는 어른들 정치 선거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피켓과 포스터 제작을 전문회사에 맡기고 유세 원고도 대필해주는 곳에 맡기는 것이 다반사다. 이런 실정을 잘 아는 태민군의 어머니 백현정씨(40)는 아들이 회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반대했다. 그러나 학급 아이들은 달랐다. “힘들면 저희들이 도울 테니 그냥 하게 두세요. 우리가 뽑은 회장 후보를 왜 어른들이 바꾸려 하세요”라며 지지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선거운동에 나선 태민군은 피켓과 포스터도, 매끄러운 연설문도 없었다. 단지 학생들의 일꾼으로 열심히 일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3분도 안되는 짧은 연설문뿐이었다. 선거공약은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어린이가 되자. 짧지만 진솔한 그의 선거공약은 모든 어린이들에게 신뢰를 심어 주었다.
반 아이들은 “태민이는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돕는 일에 항상 앞장서 왔다”며 “평소에도 책임감이 강해 인기가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학급친구 박순재군은 “태민이가 청각장애아로 힘들고 불편한 점이 많을텐데 오히려 학교와 친구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지지했다”고 밝혔다.
담임 교사인 황연성 선생님(44)도 “아이들이 사람의 겉을 보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소신을 평가한 것에 크게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런 태민군은 태어날 때 울음을 터뜨리지 않아 엄마의 가슴이 새카맣게 타도록 애를 태웠다.
“청각장애를 발견하고 참담한 심경이었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백씨는 보청기를 착용하게 해 전화벨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등 세상에 ‘소리’라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이는 엄마의 피나는 헌신 덕분에 다소 어눌하긴 하나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상태이다. 그러면서도 반에서 5등을 벗어난 적이 없다.
“사실 태민이 아빠(조맹효·43·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와 저는 아이가 어린이회장에 출마한 용기가 더 대견스러웠다”는 백씨는 “태민이를 회장으로 뽑아준 아이들의 순수함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출처:경향신문 김윤숙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