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1471
11월28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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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너희가 성전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루카 21장 5-11절)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요즘 우리 사회의 문화 안에서 눈에 띄게 우려되는 측면이 한가지 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저하게도 인간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조직폭력배들의 삶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의리"니 "우정"이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자연스럽게 용인되고 미화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이 시대의 암적인 존재들이지요. 그들에게 찾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오로지 파괴를 일삼으면서 살육을 본업 삼아 무위도식하면서 동물처럼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가정과 공동체, 이 나라를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인간도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런 조폭들의 일상을 미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간도 아닙니다. 그들은 이 시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무릎꿇고 백배 사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9시 뉴스를 보다가 기가 차서 할말을 다 잃었습니다. 현금지급기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는 한 여성을 한 강도가 쇠파이프로 인정사정 없이 휘갈기는 광경이 여과 없이 그대로 방영되더군요. 피해자는 너무도 많이 맞아 혼수상태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고 있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그리도 철저히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구대천의 원수지간도 아닌데 말입니다.
때로 이 사회 안에 버젓이 그리고 당당히,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구조적인 사회악 앞에서 너무도 분노에 찬 나머지 할말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끝도 없이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양상을 더해만 가는 하위 문화의 구조 안에서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슬픈 눈동자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도 가슴아픕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하는 약육강식의 시대, 아비규환의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들의 삶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안에서 빈자와 약자만을 골라 등을 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접대문화 안에서 그저 하루 하루를 동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제 부족한 소견으로도 이런 상황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너무 화가 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디까지 갈려고 이러나?"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귀신은 뭐하나? 저런 *들 데려가지 않고!"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하느님은 도대체 뭐하시나? 저런 *들 벌하시지 않고!"하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끝도 없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타락 앞에 예수님의 마음 역시 저 못지 않게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악도 타락도 어느 정도여야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던 예수님께서는 극약처방으로 "성전파괴"를 예언하십니다. 비통한 심정, 애끓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대재앙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최후의 경고마저 우리 인간을 향한 무한한 예수님의 자비, 아버지로서 애끓는 연민의 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 하느님이시기에 죽어 가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최후의 처방전으로 성전파괴와 이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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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루카 21,5-11)
<'시대의 징표'를 대하는 자세>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 크리스티안 노스럽(Christiane Northrup. M. D.)은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믿게 되고, 믿는 대로 되어간다’라고 말하며 재미있는 실험결과를 제시합니다.
1990년경 엘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30년 전인 1959년에 유행하던 옷을 입었고, 당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또 그 때의 신문과 잡지를 보았으며 그 당시에 사는 것처럼 대화를 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그 당시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박사는 그들에게서 노화와 더불어 퇴화되는 증상들을 측정해보았습니다. 측정의 기준은 근력, 인식력, 지각력, 미각, 청각 등이었습니다.
그러한 증상들은 노인병전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생물학적 지표들입니다. 닷새 동안 그러한 생활을 끝낸 후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청력과 기억력도 개선되었습니다.
랭거 박사는 “노화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간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이렇듯 편협한 정신자세를 떨쳐낼 수만 있다면 노년을 보다 젊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참조: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한문화 2000, 66)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의사로서 자신에게 나타났던 신체적인 증상들을 약물로만 치료하지 않고 그것이 내면 상태의 표현이라고 믿고 내적인 치유를 통해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될 수 있음을 깨달아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란 책을 썼습니다. 그녀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소중히 여기고 몸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귀담아 들을 때 우리는 삶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게 된다. 몸의 지혜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관련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구조를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몸의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니다.
“몸의 징후는 영혼이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겉으로 드러낸 표현”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한 징후를 외적인 ‘치료’만으로 덮어버릴 때 관심과 변화를 요구하는 삶의 치유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p.70)
엘랜 랭거의 실험처럼 우리 마음은 육체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몸이 우리 영혼의 상태를 말해준다면, 어쩌면 자연재해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 인간들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요즘은 전쟁이 일어나도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뭐가 일어나도 대형입니다. 그만큼 마지막 때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징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치료를 해 나가야합니다. 당장 벌어진 일 수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깊은 원인엔 인간이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병에 걸린 것이 내 책임이란 말입니까?”
노스럽 박사가 병에 대한 심리치료를 제한할 때 많이 듣는 말이라고 합니다. 물론 전쟁이나 기아, 자연재해가 완전히 내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바뀌면 전쟁이나 기아도 줄어들고 자연재해도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티안 노스럽은 가까운 친구인 마사의 사례를 듭니다. 마사는 ‘척추의 퇴행성 변화’ 탓으로 목과 어깨의 만성적인 통증으로 고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0대 후반이 되자 어린 시절의 괴로웠던 기억들이 무의식중에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고통을 억제하지 않았고 마음껏 느끼려고 애썼습니다.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시간씩 실컷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한 감정들을 토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밀매업자였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두컴컴한 술집을 들락거리던 시간들을 자세히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술집에 앉아있는 동안 낯선 여자들과 키스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또 어머니가 교도소로 아버지를 면회하러 간 동안 그녀는 숙모와 지내야 했는데, 외눈이었던 숙모가 그녀와 여동생을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골방에 가두어 놓았던 기억도 떠올랐습니다.
먹을 것은 크래커뿐이었고 천장에는 작은 전구 하나만이 달랑 매달려 있었습니다. 55년 동안이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기억들이 떠올랐을 때 마사는 비로소 마음껏 통곡할 수 있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옆에 두고 지칠 때까지 울었습니다. 그 이후 목과 어깨의 만성적인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같은 책, 71-2)
마지막 때 예수님께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인재와 자연재해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몸이나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나에게서 비롯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나부터 변화하려고 노력해봅시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이 세상을 유지하는 데 작은 힘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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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장기적인 목표가 있는 이들에게>
중앙대 경영학과 위정현 교수가 ‘한국이 노벨상을 못 받는 이유’란 글을 썼습니다. 물론 한 사람의 분석이 전적으로 옳을 수는 없을지라도 일리가 있어 소개합니다.
우선 그는 지난 12일 유럽우주국이 혜성 위에 탐사선을 착륙시킨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그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혜성이 움직이는 속도는 초속 18km라고 합니다.
총알의 속도가 초속 1km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총알의 속도보다 18배나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에
탐사로봇을 올려놓는 엄청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사선이 지구를 떠났던 것은 2004년이었다고 합니다. 무려 10년 5개월 동안 유럽우주국은 13억 유로(1조8000억 원)을 투자하며 인내심 있게 기다려왔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익을 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유럽은 이 무모한 도전을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투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10년 전에 어떤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했을까요?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아기 많이 낳기 운동에 전력을 기울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순간적인 이익창출에만 집중하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일본은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하나 빼고는 수상자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이큐도 세계에서 가장 높고 고등학교 때까지는 학교 성적이 전 세계의 탑을 유지하는데도 그 이후엔 어떤 좋은 결과도 나오고 있지 못합니다.
이번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3명의 교수 중 아카사키 이사무는 올해 85세라고 합니다. 그가 마쓰시타 연구소 시절인 1973년부터 청색 발광다이오드(LED) 개발을 시작했으니 40년 만에 성과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아카사키 교수는 수상자 발표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연구를 시작할 때 20세기 중에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연구를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는 조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위정현 교수는 위 두 사례의 공통점이 ‘길고 긴 장기프로젝트’라고 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장기적으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연구 평가 척도는 이공계라면 SCI, 문과계열 교수라면 SSCI라는 미국 민간회사의 논문집에 논문이 얼마나 여러 개 실리느냐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정받기 위해 논문집에 논문이 실리게 하기 위해 대량의 단기적인 논문만을 써 내기 때문에 커다란 목표를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카사키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유행하는 연구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좀처럼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시각을 근시안으로 만들어버려 지금 현재 이익만 바라보고 멀리는 바라보지 않게 만들어버립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이나 영혼구원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지가 없습니다.
남들이 학원을 보내니 나도 보내야 하고 남들이 대학을 보내니 나도 보내야 하며 남들이 결혼을 시키니 나도 시켜야합니다. 단기적인 성과만 생각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구원받는 이들은 정말 많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의 교육들은 이미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구단도 글도 일찍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은 늦더라도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도 나중에는 위대한 수학자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실생활에 아무 쓸모도 없는 미적분을 모든 학생이 공식을 대입해 풀어야만 대학에 들어가는 시스템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독서는 마지막 날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앉으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다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십니다. 그 곡식이 다 익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지막 때까지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리만큼 거룩해지는 것인데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생각하다가 시간을 허비한다면 그분의 기다림도 한계에 다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추수꾼은 다 익어버린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하느님 분노의 확’에다 던져 넣습니다. 그 동안 참고 기다려온 그 인내가 끝나는 시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완전해지지 않은 것들은 이 분노의 확에서 나오는 피처럼 그렇게 짓밟혀지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선인을 구하는 시간이 악인이 벌 받는 시간입니다. 노아가 구출되는 시간이 모든 인간이 파멸하는 시간이었고, 롯과 가족들이 소돔 땅을 빠져나오는 시간이 소돔이 유황불로 멸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진노는 점점 더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잘 살기만을 바라며 장기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힘을 쏟아 부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전력을 다 해도 모자라는 시간인데 어쩌면 우리는 단기적인 세상에서의 기쁨만을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기다려 주시지 않을 시간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구원을 위해 목표를 세워놓고 매일 합당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세례자 요한도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황당한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세례자 요한보다도 더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달려야합니다.
바오로 서간에서 마지막 날이 바로 임박한 것처럼 말하고 있는 이유는 영혼구원을 위해 달려야 하는 지금 이시간이 너무도 절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세상 단기적인 것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마지막 때가 되었을 때 기쁘게 수확될 수 있도록 모두가 하늘나라 성인이 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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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고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을 당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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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허물어지지 않는 진정한 성전>
기원전 19년 대 헤로데는 건축 자재나 건물 장식물에 쓰일 ‘자원 예물’(2마카 2,13)과 “아름다운 돌”(21,5)로 예루살렘 성전을 증개축하였습니다. 돌 하나의 길이가 약 12.5미터, 높이 4미터, 폭이 5미터 정도였으니 어마어마한 규모였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본 사람들은 경탄합니다(21,5).
이에 예수께서는 찬물을 끼얹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21,6) 삶의 구심점인 성전이 허물어진다는 건 유다인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았을 것입니다. 존재의 위기를 느낀 그들이 예수님께 그런 참변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묻습니다(21,7).
그러자 예수께서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하는 이들을 뒤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21,8). 이어 말씀하십니다.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21,9)
주님의 궁전인 우리는 하느님을 품고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만의 성을 모래 위에 짓고 있는지 모릅니다. 부와 권세, 명예, 튼튼한 인맥, 세속의 힘을 얻기 위한 능력 등으로 하느님의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은 영혼에 독이 될뿐이지요.
하느님과 무관한 화려한 성전이 파괴되듯 주님을 잊고 제뜻대로 살아가는 우리도 순식간에 파멸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영을 지니지 않은 채 눈에 보이는 돌쌓기와 장식에 눈이 멀지 않도록 깨어 일어나야겠습니다. 긴박한 상황이나 절박한 필요 앞에서도 세상의 헛된 소리와 우상에 매달리지 말아야겠지요.
오늘 한국교회들 또한 복음의 본질을 담아내지도 살아내지도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개신교에서는 대형화와 세습문제, 그리고 돈과 권력에 터잡은 기업화가 큰 문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가톨릭 또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는 데 상당히 소극적입니다. 교계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수직의 질서는 신앙을 경직되게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성전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일치되기보다는 힘이 있고 화려한 탑쌓기에 쏠려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눈에 웅장하고 화려하며 돈많고 힘 있는 교회를 가차없이 허물어버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워야 할 성전은 자비와 정의의 성전이요, 하느님의 얼이 숨쉬는 생명과 희망의 성전입니다. 부자들과 힘 있는 기득권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로 채워지는 가난한 교회가 바로 참 성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전을 짓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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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복음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감탄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성전이 허물어지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이어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참혹한 시련을 경고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현세와 내세로 나누었습니다. 현세는 점점 악으로 물들어 가다 망하리라고 단정합니다. 그 뒤, 내세가 오면 이스라엘이 군림하게 되리라 믿었지요. 내세, 곧 새로운 세계를 맞으려면 진통의 시간이 필요한데, 이 시간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곁들여 천재지변과 같은 공포의 날처럼 갑자기 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한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리라고 확신하며, 새로운 세계를 맞기 위한 진통의 시기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함께 묶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두려운 일들이 일어난다고 여긴 것이지요.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상한 자연 현상만 겪어도 일부 사람들은 이를 세상 종말과 하느님의 심판으로 연결하지요. 그러다 보니 오늘 복음처럼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치는 사람들마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대의 징표를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겪어야 할 핍박입니다.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처지에 놓이든지 결코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되며, 어려운 고비마다 주님께 더욱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처장/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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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밤송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주님의 품으로!>
몇 달에 한 번 신학생들의 신문인 ‘애솔’지가 본당으로 배달 됩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글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신입생이 쓴 글인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제가 신학생이 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냉담을 풀고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냉담을 풀게 된 데에는 조금 기이한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한참 미사와는 담을 쌓고 살던 시절, 어머니께서 도대체 제가 왜 성당에 다니질 않는지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미사보다 노는 게 더 좋았던 것이 이유였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분명히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저는 되는대로 "신부님들이 너무 고루해서 싫어요."라고 답을 했었습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당시 신부님이 어느 분인지도 몰랐으니까요.
그러자 어머니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어떤 신부님이 오시면 네가 성당에 다시 가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저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던 저는 대충 생각나는 대로 아무 신부님이나 어머니께 설명 드렸습니다.
"아 왜 그 있잖아.. 예전에 보좌 신부님으로 오셨던 그 밝으신 분."
그리고 저는 이 대화를 이내 까맣게 잊고 다시금 냉담한 채로 살았습니다. 얼마 뒤 본당이 분당을 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어느 새 저의 교적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사실 교적이 어디로 바뀌든 말든, 어머니께서 그 사실을 말씀해 주실 때도 그저 건성건성,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다음 말씀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오셨다. 네가 말하던 그 신부님..."
그랬습니다. 제가 별 생각없이 어머니께 설명드렸던 신부님이 바로 분당된 본당 초대 주임신부님으로 오신 겁니다, 그것도 보좌가 아닌 주임신부님으로요. 무심코 내뱉은 말이기는 하지만, 제가 말했던 상황이 백 퍼센트 실제로 이루어지고 나니 더 이상 댈 핑계가 없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 결국 냉담을 풀고 신앙생활을 다시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4년 후, 저는 신학생이 되어 강화도에 살게 되었습니다.】
기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그 신학생을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했던 거 같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그러한 체험을 종종 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예를 들면 무신론자들은 어느 순간 ‘하느님이 살아계신 거 아니야..’ 하고 뒤로 물러서게 되는 때가 있고, 냉담자들도 순간적으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겁니다.
또 오늘 복음에 내용들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 일들을 대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순간적으로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공동체가 필요한 거 아닌가.." 하고 가던 길을 멈추어 서는 순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진리의 길을 함께 걸어 갈.. 또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만들어 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러한 순간에 보게 되는 메시지를 외면하지 말고 주님께 돌아오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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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의 표징이 아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영원히 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은(루카 19,46), 영원히 서 있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물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언젠가는 모두 허물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건물들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무엇이든 간에 하느님 나라에서 계속 존재할 자격이 없는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의 아름다운 겉모습만 보고 감탄할 것이 아니라, 성전 구실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루카 21,7)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때가 곧 종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는 “종말의 날이 언제입니까?”라는 뜻입니다.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는 “종말의 표징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나이신 분인데(요한 10,30), 어떻게 예수님도 모르실 수 있는가?” 당신도 모르신다는 말씀은, 아마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이 그 날이 언제인지 미리 아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알려 줄 수 없다는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것이 인간들에게 더 유익합니다. 그날을 미리 알게 되면, 그 순간 인간 세상은 정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8-9)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루카 21,10-11)
이 말씀들은 ‘종말의 표징’을 설명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종말의 표징이 아닌 일들을 표징이라고 생각하지 마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언급되어 있는 재난들은 인류 역사에서 늘 일어났던 일들이고, 종말과는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자칭하는 자들과 종말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옛날에도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사는 것이 힘든 시기에는 더 많이 나타나는데, 그런 자들이 많이 나타는 것이 종말의 표징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도 인류 역사에서 늘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혹시 종말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일들 자체가 종말은 아니고, 종말의 표징도 아닙니다.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종말이 오기 전에 그런 일들이 벌어지긴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말은, 그런 일들이 꼭 일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일들을 종말의 표징이라고 생각하지 마라.”입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이상한 천문학적 현상들”로 해석됩니다. 그런 일들도 인류 역사에서 자주 있었던 일들이고, 예수님의 재림 때 나타날 표징들과는(루카 21,25)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종말의 표징은 무엇인가? 실제로 그 날이 되었을 때, 종말이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루카 17,24)
이 말씀은, “번개가 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그날이 왔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 24,3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 순간 온 세상 모든 민족들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날이 종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르 13,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날을 미리 알아내서 대비하여라.”가 아니라, “그날이 오늘일 수도 있으니 지금 준비하고 있어라.”입니다.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2베드 3,10)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마치 도난당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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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이여>
루카 21,5-11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다, 재난의 시작)
그때에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민족과 민족이 맞서 일어나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이 발생하고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다.”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에게>
살아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조차 느낄 수 없는 미미함에서
천지가 개벽할 듯한 격렬함까지
오직 쉼 없이 변함으로써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음을 드러냅니다
질서를 깨뜨리는 혼란이
새로운 질서로 이어지고
생명을 다한 죽음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누리는
빼앗길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벗이여
그러니 진정 살고자 하는 벗이여
혼돈을 피하지 맙시다
혁명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대로 있으라고
움직이지 말라고
죽음을 강요하는 무리들의
검은 속삭임에 결코 현혹되지 맙시다
느슨해진 몸과 마음 곧추세워
부딪히고 깨뜨리고 새로 세웁시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겠지만
죽어야만 부활을 살 수 있으리니
죽음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보다
영원한 삶에 대한 더욱 강렬한 희망으로
살고자 하는 살아있는 벗이여
우리 힘차게 또 한 걸음 내딛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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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고흥 도화성당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답게 살자>
새들은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습니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나뭇가지가 꺾였으면 꺾였지 새들의 집이 부서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그런데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지으려면 새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바람이 고요히 그치기를 기다려 집을 지으면 집짓기가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나뭇가지를 물어오는 일도, 부리로 흙을 이기는 일도 훨씬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좋지 않을 것입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지은 집은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겠지만, 바람이 불지 않은 날 지은 집은 약한 바람에도 허물어져 버릴 것입니다.
만약 그런 집에 알을 낳는다면 알이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새끼가 태어난다면 새끼 또한 떨어져 다치거나 죽고 말 것입니다.
새들이 나무에 집을 짓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마치 새들이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 것은 인간이 집을 지을 때 땅을 깊게 파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파괴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름다운 돌과 예물로 꾸며진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전이 자기 자리에서 충실하지 않는 이상, 성전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자리에서 충실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갈 때, 나의 몸과 마음을 마음의 성전은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이 자신에게나 가정에 닥치더라도... 주님의 뜻에 맞게 자기 자리를 충실하게 지켜나아가야 합니다. 혹독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 답게 살아갑시다." 사제는 사제답게... 수도자는 수도자답게... 평신도답게... 아버지답게... 어머니답게... 자녀답게... 자기 자리를 충실하게 지켜나아가야 합니다.
새들이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듯이 우리도 고통이 가장 혹독할 때 집을 지여야 합니다.
어렵게 지은 그 집에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자기 자리를 충실히 지키며 살아낼 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성령으로 충만한 은총을 지켜낼 것입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의 어렵고 힘든 시련이 내일에 좋은 열매를 내어 주심을 믿고 행복하게 기도하면서 견디어 내시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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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부산본원 김종오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의말씀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21,5-6)
속이 아름다운 사람은 겉도 아름답습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아름다움을 간직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확이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은근히 풍기는 매력 하나쯤은 모두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꾸며진 것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합니다. 아무리 잘 꾸며도 뭔지 모를 부자연스러움은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꾸밀 때 최대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꾸며도 고유한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은 없습니다.
나만의 아름다움이 가장 잘 드러날 때는 우리가 기도 할 때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존재와 마주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자신을 만나고 드러내게 됩니다. 꾸밈이 없는 순수를 만나기에 아름답습니다.
성전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미더라도 기도의 향이 피어오르지 않으면 공허합니다. 성전은 꾸며서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 아름답고 화려하게 됩니다. 홀로 촛불 켜고 정성껏 기도하는 사람이 사는 쪽방촌의 단칸집이 어디보다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장사꾼의 소굴로 되었던 화려한 성전은 교회가 권력과 부유함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지배하며 소외시켰던 아픈 역사입니다. ‘허물어질 때’가 오는 화려한 성전보다 기도하는 집을 만들라고 예수님과 역사는 말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화려한 성전을 꾸미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성전보다, ‘나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기도의 집’을 지어야 겉치레에 살고 죽는 오늘날 진정한 주님의 성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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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 이선희 씨의 노래 ‘알고 싶어요.’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 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얘기를 해주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은 애절함이 담겨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앞날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몸이 조금 불편했습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욕심을 부려서 너무 많이 걸었던 것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에 어울려서 이야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음주를 하는 횟수도 많았습니다. 다행이 며칠 쉬었더니 몸이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 왔습니다. 몸이 불편했을 때는 조금 걱정도 되었고, 혹시 병원에 가야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도 하였습니다. 저도 제 몸의 상태를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핸드폰은 충전상태를 표시하기 때문에 방전이 되기 전에 다시금 충전을 합니다. 저의 몸도 그런 표시가 있다면 좋을 뻔 했습니다. 하지만 굳이 제 몸의 상태를 매일 표시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루를 감사드리면서 지내고, 규칙적으로 지내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책을 가까이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만 꾸준히 한다면 몸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함께 할 것입니다.
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 기도한다면, 손에 스마트 폰 대신, 묵주를 들고 버스를 탄다면 우리는 앞날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 이해받으려 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앞날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에서도, 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앞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1년간 일정표에 기록된 일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올해는 성소후원회 본당 방문이 많았습니다. 식사 약속, 강의, 미사, 운동, 여행 등과 같은 일정들이 많았습니다. 주어진 일들이 잘 마쳐졌을 때는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함이 있을 때는 다음에는 더 잘하려는 다짐을 합니다. 어떤 일들은 생각지 못한 결과를 얻기도 합니다. 어떤 일들은 기대한 것만큼 성과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진 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미사와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사제직을 허락해 주심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이른 새벽을 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축복입니다. 그것은 매일 부활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빛이 밝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른 아침에 1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하루를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아무런 조건 없이 아침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을 봅니다. 기꺼이 비울 수만 있다면, 나눌 수 만 있다면 하루의 끝이 아쉬울 것 없습니다. 삶의 끝도 걱정될 것이 없습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될,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기쁜 마음을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별로 없으니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다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 기억 될 것입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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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정주定住의 영성-
참 재미있습니다. 오늘 새벽 옛 강론집을 펴보던중 22년전인 제 나이 47세 때, 1995년 11월28일 강론에 눈길이 멎었습니다. 역시 최선을 다한 강론이었고 오늘 날자와 독서 복음도 그대로 일치했습니다. 하여 수도원 미사때는 이 강론을 다시 나누고 오늘 새강론만 수도원 홈페이지에 올리기로 했습니다.
제 사랑하는 영성이 정주의 영성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뿌린 내린 삶입니다. 마치 땅의 현실에 깊이 뿌리 내리고 하늘 향해 높이 가지들 뻗은 나무같은 삶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있어도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나무들이야말로 제 영원한 삶의 스승입니다.
어느 곳을 방문해도 우선 찾아 보는 것이 노목들입니다. 불가 사찰의 두 자산은 노목老木과 노승老僧이란 말도 있습니다. ‘요셉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감사제(2012.9.15.)’때 낭송했던 제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 첫 연도 정주 영성의 모범인 나무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25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수도공동체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 바로 분도회수도자들의 첫째 서원인 정주입니다. 하여 오늘 강론 제목도 ‘삶의 중심-정주의 영성’으로 정했습니다. 정주영성에 충실하고 항구할 때 한결같은 삶입니다. 온갖 혼란스런 외적 삶에도 내적안정과 평화가 있습니다. 정주의 뿌리가 빈약해 두려움과 불안, 혼란과 방황입니다. 분도 규칙 머리말도 정주로 끝맺습니다.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아멘.”(성규;머리50)
어제 11.28일은 위 ‘분도규칙서’를 내셨던 이형우 시몬 아빠스의 선종 1주기날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측 못한 아빠스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제행무상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뿌리내린 이들만이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정주의 렌즈로 보면 그 의미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누구보다도 복음의 예수님이나 다니엘서의 다니엘은 정주영성의 대가입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진 대성전의 외관에 넋이 빠진 이들과 달리 본질을 직시한 예수님은 언젠가 사라질 성전을 내다보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통찰 역시 정주영성의 열매입니다. 보이는 외관이 아닌 영원한 하느님께 마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또 주변의 혼란하고 시끄러운 상황에도 경거망동, 부화뇌동하지 말고 제 삶의 자리에 충실히 정주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
바로 정주영성이 답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인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릴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요 세상 유혹에 현혹되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인류역사상 영원할 것 같던 대제국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오늘 다니엘의 꿈 해몽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만은 하느님의 나라만은 영원하심을 역시 다니엘이 그 옛날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임금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그 왕권이 다른 민족에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앞의 모든 나라를 부수어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
바로 연중 마지막 전 주일 우리는 온 세상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바로 다니엘서가 말하는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세상 제국들은 다 사라졌지만 가톨릭교회는 2천년이상 지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의 왕권만이 영원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안에서 정주의 삶에 항구한 이들은 이미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을 삽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정주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 정주영성에 충실한 자들에게 생명의 화관을 약속하십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묵시2,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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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인터넷 안에서 경품 사이트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각종 쇼핑몰에서는 행하는 경품에 자동적으로 응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지요. ‘공짜’라는 말에, 그리고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에 열심히 이 경품 사이트를 이용했습니다. 실제로 몇 개의 경품에 당첨되어서 물건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글쎄 엄청난 광고 메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었지요. 실제로 이 광고 메일이 너무 많아서 메일을 확인하지 않다보니 반드시 봐야 할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지 못해서 낭패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좋은 물건도 아니고, 제게 필요한 물건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공짜로 얻으니 이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은 이득이 아니라 손해만 가져왔습니다. 사소한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드 심리학과 교수 대니얼 길버트는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로또가 주는 행복의 효과가 평균 3개월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출세의 꿈을 이룬 사람 역시 평균 3개월이 지나면 예전과 똑같은 크기만큼 행복하거나 불행해지며,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평균 3개월이 지나면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쾌락의 쳇바퀴’라고 이름 붙였지요.
행복의 길을 찾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행복을 위해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놓치면서 잠시만의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몇몇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을 가리키면서 그 영광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시지요. 사실 이 세상의 것 중에서 무엇을 영원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재산, 지위, 명예 등등 절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것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주님만이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이 세상의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각종 표징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나 각종 자연재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표징들로 통해 우리는 이 세상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항상 그 다음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있으며, 이로써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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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와 까뮤}
프랑스에는 ‘알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한 명은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이고, 다른 하나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입니다. 두 분 모두 아주 유명한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우선 까뮈는 ‘이방인’, ‘시지프스의 신화’ ‘반항적인 인간’ ‘오해’ ‘계엄령’ 등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인 가봉에 건너가서 원시림 속에 병원을 세우고 그곳 원주민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봉사로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남긴 것은 아주 달랐습니다.
까뮈는 노벨 문학상 상금으로 파리 근교에 좋은 별장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즐기며 편안히 살던 중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었지요. 슈바이처는 노벨 평화상 상금으로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과 수용소를 세우고 그곳에서 일생을 봉사하며 살았습니다.
지금 모두 이 세상을 떠난 인물이지만, 이들의 별장과 병원은 아직도 남아있지요. 그렇다면 어떤 곳이 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존경의 마음을 갖게 할까요? 이 점을 생각하면서 과연 내 자신이 이 세상에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남긴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할 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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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다음, 어느 날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면 그 존재의미를 잃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21,6)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이미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진술된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기원전 515년에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루카21,8)
남을 속이는 일은 당연히 말아야 하겠지만, 남에게 속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 대체, 우리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속고 있는가?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정신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하신 신자유주의 정신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남에게도 속지 말아야 하겠지만, 또한 자신에게도 속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을 속이기도 하고, 자신에게 속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에 속습니다.스스로를 기만하고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뜻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4,16)
또한, <로마 신지들에게는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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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신부의 복음 묵상
<휘둘리지 않는 삶>
예루살렘 성전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세워지고, 세 번 무너졌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가장 화려한 왕권을 누린 솔로몬 왕 때 건축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게 되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성전은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노예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기원전 538년 바빌론을 제압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황제에 의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환 이후 제일 먼저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제2의 성전 또한 기원전 170년 경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점령되고 맙니다. 시리아왕은 유다인을 말살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유다교를 핍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 한가운데 제우스 신의 제단을 세우고 유다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시리아가 멸망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로마의 헤로데 왕은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화려하게 증축합니다. 이 성전이 다시 폐허로 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예언을 하셨는데 오늘 복음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35년경 전후이고 기원 후 70년경 성전은 또다시 로마에 의해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전체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스라엘로 정착하기까지 유다인들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그 자리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성지로써 의미 깊은 땅이 되어 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충만하였지만 하느님을 외면하고 은총을 담을 그릇을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도 감사하지 못하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언제 그런 재앙을 맞게 될지 모릅니다. 깨어 준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예루살렘이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의 길을 걸었더라면 멸망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앞서 겪게 될 환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헛된 예언자가 나타나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는 자가 등장하며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나며 큰 지진과 기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종말은 결국 혼란을 겪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결코 헛된 예언에 속는 일이 없도록 하고 큰 표징들에 무서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사실 마음이 추우면 몸도 춥고 남도 추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정을 지키고 있으면 바깥바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진대 어떤 표징이 일어나면 어떻고, 종말이 오면 어떻습니까? 그저 오늘을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불은 바람 앞에서 쉽게 꺼지지만 큰 불은 바람 앞에서 활활 탑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큰 사람은 환난 앞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런 저런 소문으로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문의 사실과 진실을 살핍니다. 이렇쿵 저러쿵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지으며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 종말에 앞선 외적인 혼란을 두려워 말고 오히려 마음 안에 평온이 없음을 염려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어떻게 오느냐를 걱정하기보다 현재의 내 삶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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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그러면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그 일이 벌어지려고 할 때에 어떤 표징이 나타나겠습니까?" (루카21,7)
'표징!'
'시대적 징표!'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나 행동들을 통해 심오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할 때 그를 위해 사용된 것들을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표징은 어떤 본질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의 방식이고, 따라서 표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표징 자체가 아니라 표징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등장한 다양한 형태의 표징들이 있습니다.
기적적인 일, 해와 달과 무지개,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현상들, 즉 전쟁과 반란과 각종 재난 등과 같은 것들이 바로 하나의 표징들입니다.
이러한 표징들이 세상 종말의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표징들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표징들을 사용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많은 표징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우리의 회개를 위한 표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표징은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촉구이며, 우리 모두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1베드3,9)
우리의 여정은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여정이며, 우리는 두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이 두 끝이 언제 일지 모르기에 우리는 깨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아름다운 끝을 위해 오늘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회개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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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은?>
어제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동전 두 닢이라는 과부의 헌금(루카 21,1-4)이 과연 자신의 가진 것 모두를 바친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당장은 알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다. 그 ‘언제’란 바로 종말 때의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종말까지 갈 필요는 없다.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동기(動機, motive)와 지향(志向, intention)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바치는 헌금의 가치는 헌금하는 자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늘 제3자의 시각과 판단이다. 부자가 넉넉한 가운데서 많이 바치고 자랑스럽게 뽐내는 행동과, 과부의 경우처럼 가난한 사람이 어려운 가운데서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도 부끄러워 미안해하는 행동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3자의 인식이다.
그러나 부자와 가난한 자의 그 속마음과 사정을 제3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따라서 제3자의 인식에는 분명히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 불일치(不一致, discrepancy)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종말의 공심판이 필요한 셈이다.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화~토요일)에 들려주는 매일미사의 독서와 복음말씀은 모두 세상종말에 관한 내용이다.
독서는 홀수 해의 경우, 다니엘서(1-7장)의 말씀을 듣고, 짝수 해의 경우에는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부터 34주간 토요일까지 요한 묵시록(1-22장)의 말씀을 듣게 되며, 복음으로는 루카복음 21장을 듣는다.
모든 내용이 종말론적이고 묵시(黙示) 문학적인 성격을 아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종말과 묵시적 성격이란 세상이 이제 그 마지막에 직면하여 드러내거나 맞이하게 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말한다.
계시(啓示, revelation)라는 개념이 ‘시작’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과 감추어져 있던 것을 드러내는 단어라면, ‘종말’과 ‘묵시’와 관련하여 드러나거나 맞이하게 될 일들을 대표하는 개념은 현현(顯現, epiphany)과 폭로(暴露, apocalypse)라는 단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종말을 선언하는 대변화, 죽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 생자(生者)와 사자(死者)에 대한 그분의 심판, 그리고 종말 후의 내세(來世)에 관한 일 등이다.
성서(聖書)상 종말과 묵시문학적 유형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BC 160년경)와 신약의 요한묵시록(AD 100년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약시대 말기에 편집된 묵시문학적 작품들은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희년서’, ‘시빌라의 신탁’, ‘열두 족장의 유언’, ‘모세의 승천기’, ‘솔로몬의 시편’, ‘제2 에즈라서’, ‘시리아의 바룩서’ 등 그 규모가 실로 방대하다.
묵시문학의 발생원인은 이스라엘이 외세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해 주권(主權)을 잃고(BC 721년 북왕조 멸망, BC 587년 남왕조 멸망과 유배생활, BC 33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희랍의 지배, BC 63년부터 로마제국의 지배) 의기소침한 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주권회복을 야훼 하느님이나 그분의 사자(使者) 또는 메시아에 의탁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천지창조부터 세상종말까지의 환란과 난세의 역사를 다루면서 종말사건과 내세를 통한 통렬한 개벽(開闢)과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염원하던 개벽과 역전은 없었고, 한 가닥 독립전쟁(AD 66-70)의 시도마저 여지없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대가로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이스라엘 자존심의 상징인 성전까지 불타고 말았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도 공생활 마지막 시점에서 세상종말과 관련하여 묵시문학적 가르침을 주셨다.(마태 24,1-25,46; 마르 13,1-37; 루카 21,5-36)
그러나 예수님의 종말교훈은 이스라엘의 염원이나 묵시문학자들의 생각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것은 구약의 묵시문학적 염원과 예언의 성취자로 예수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도래는 단지 ‘사람의 눈으로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뿐’(루카 17,20)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임재(臨在)하여 있는 하느님 나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이나 반란과 전쟁, 기근과 전염병이나 지진과 우주적 징조로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공관복음들이 제각기 예루살렘성전의 파괴, 종말의 시작, 큰 재난의 예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후 만찬을 앞둔 시점에 배치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마태 24장; 마르 13장; 루카 21장)
예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파스카의 성삼일)을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당신의 몸으로 이루어질 신약(新約)의 새로운 성전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돌과 사람들이 갖다 바친 예물로 인해 겉으로만 화려한 성전을 보고 넋 나간 듯이 감탄하지 말고, 그 성전 안을 맑은 눈과 마음으로 들여다보며, 자신의 성전을 내적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결과만 놓고 땅을 치며 통곡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침착하며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헛되고 표면적인 가치나 사상, 특히 부(副)나 재물이나 돈 같은 맘몬(Mammon)이나 우상을 따르지 말고,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의 말씀과 가르침을 귀 기울여 듣고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종말보다 오늘 내 삶의 동기와 지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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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이재화 안셀모 신부님]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광고는 이것 이것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좋은 환경의 아파트, 성능 좋은 자동차, 외모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고 젊음을 유지해 주는 화장품, 맛좋고 건강을 보장해 주는 음식, 각종 가전제품과 미래를 보장해 주는 다양한 금융상품과 보험, 좋은 성적을 보장하는 교육방법 등 참으로 많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이것들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런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것들이 진정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줄까요?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루카 21,8)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많겠지만 사라지지 않고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작품인 아름다운 건물은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세주라고 자처하며 다가오는 각종 우상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슬기롭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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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전동기 유스티노 신부님]
교회의 전례는 이제 한 해를 마무리 지으면서, 세상의 종말을 계속 이야기하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 기도하고, 그리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것을 간절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번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반성하게 하고, 참회하도록 해서, 뱀이 허물을 벗듯이, 우리도 우리의 좋지못한 행실의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옷을 입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 21장 이하의 내용을 통해서, 다가올 세상 종말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에 감탄해 하니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철저히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전이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기원 후 70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었는데, 포위공격으로 110만 명이 죽고, 9만 7천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고 할 정도로, 참으로 예루살렘은 철저히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흔히 예루살렘하면은, 성도(聖都) 즉 거룩한 도시,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 등으로 불리워질 정도로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고, 그래서 이곳에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는, 하느님의 궤를 성전 안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어떻게 보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독하는 듯한 표현을 쓰셨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그것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지도급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지 않다 보니, 당시 예루살렘이 온갖 부패와 불의의 온상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아무리 하느님의 도시라 하더라도, 참회하지 않는 삶,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경우,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시라면 다른데 보다도 오히려 더욱더 모범을 보여서 봉사하며 하느님다운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들이 기득권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 죄는 오히려 더 크다는 것,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을 때,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을 때, 그들을 꾸짖으신다는 교훈을 오늘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믿는 자는 하느님을 믿는 자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다워야 하고, 수도자는 수도자다워야 하고, 평신도는 평신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워야’ 한다는 말은, 권리도 당연히 주장해야겠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책임을,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때, 그럴 때 ‘답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요즈음,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고,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간직한 바를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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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허물어짐 또한
은총입니다.
허물어져야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 없는
부실한 우리의
삶입니다.
주님의 뜻에는
허물어지는 아픔의
시간까지
포함되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허물어져야
거짓의 시간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예수님의 삶에서
구원을 향한 가장
뜨거운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허물어짐은
또 다른 창조입니다.
우리의 종말이
허물어질 우리의
자아를 기쁘게 내려놓는
은총의 때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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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010-3284-9295(문자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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