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독후감을 쓰는 패턴을 바꿨다. 책을 읽는 동안 틈틈이 쓴 글을 모아 하나로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 두 번째 글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문화와 관계없는 것인데 올리는 것은 조금 더 생각해보고 하려한다.
<또 하나의 조선>을 읽고
1. 들어가며
요새 <또 하나의 조선>이란 책을 읽고 있다. 얼마 전에 올린 영수합 서씨와 삼의당 김씨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산책이다. 이 책에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52명에 대한 소개가 있다. 그래서 부제도 “시대의 틈에서 ‘나’로 존재했던 52명의 여자들”이다.
500년을 이어온 왕조니 10년에 마다 한 명을 선정해 소개하는 셈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살았겠지만 이렇게 이름을 남긴다는 것도 참 드문 일이다.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기록됐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흔적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문자는 권력이라고 하는가 보다. 누가 무엇을 기록하는가에 따라 이름이 남겨져 후세에 기억할 수 있으니.... 이 책에서는 다양한 삶을 소개하고 있다. 비명에 간 사람도 있고, 영수합 서씨처럼 화려하게 산 사람도 있다.
어떻게 살았던 간에 이렇게 후손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그나마 행복한 것이 아닐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의 생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2. 세종의 승하장소
<또 하나의 조선>을 읽다보니 과거 세종이 왜 영응대군永膺大君(1434:세종16~1467:세조13) 사저에서 승하한 이유를 알게 됐다. 조선왕 중 사저에서 승하한 왕은 세종, 선조 둘 밖에 없다. 따라서 문종과 광해군도 사저에서 승하했다.
선조가 사저에서 승하한 것은 임진란이란 특수 상황 때문이다. 임진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후 궁이 불타 선조가 월산대군사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왕이 머무르면 궁이 된다. 월산대군 사저는 경운궁(현재 덕수궁)으로 바뀐다.
선조가 월산대군 사저에서 승하했기 때문에 사저(경운궁)에서 즉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스스로 영응대군의 사저로 물러나고 물러난 지 13일 만에 사저에서 승하했다. 물론 세종이 승하한 곳을 실록에서는 ‘동별궁’이라 부른다.
그런데 왜 영응대군 사저일까? 이 책에 의하면 세종이 막내인 영응대군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고 한다. 영응대군 부인도 직접 간택하고 영응대군 사저도 이전 대군의 집과는 다른 궁과 비교될 정도로 크고 화려하게 지어줬다.
세종이 사저를 안국동방에 짓기로 하고 민가를 60여 구區를 헐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세종 30년 12월 14일) 세종은 태종처럼 일찍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막내인 영응대군과 살려고 했던 모양이다.
영응대군 집도 그런 목적으로 지었던 것이다. 세종 32년 2월 17일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 영응 대군 집을 지을 때, 명하여 한 궁을 따로 집 동편에 세워서 옮겨 거처할 곳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늘그막에 막내와 함께 보내려했을 정도로 막내 영응대군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 같다.
세종은 18남 7녀를 둘 정도로 많은 자식을 뒀다. 그중 왕비에게서 난 대군만도 8명이다. 그 중 영응대군이 막내다. 영응 후에도 3명의 군을 더 두었다. 그래도 세종이 극진히 사랑했던 正妃인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에서 낳은 영응이 가장 총애를 받았던 것 같다.
아이가 많다보면 장남과 막내가 가장 사랑을 받았다. 요새야 아이를 한 둘 밖에 낳지 않으니 이런 마음을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늦게 난 막내는 늘 사랑을 독차지 했다. 세종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조선에서 기록을 남긴 52명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니 이 책에서 중인공은 세종도, 영응도 아닌 영응대군 부인인 송씨다. 그런데 송씨에 대한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송씨는 세종이 직접 간택한 며느리다.
그런데 세종은 송씨가 병이 있다는 핑계로 이혼시키고 다른 사람을 며느리로 들인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 며느리까지 좌지우지 하려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종 사후에 영응대군은 문종을 설득해 후처와 이혼하고 다시 송씨 부인과 결혼했다.
송씨부인과 이혼은 했지만 이혼 후에도 만나 딸을 둘이나 뒀다고 하니 송씨부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것 같다. 그런데 송씨 부인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부인으로 복귀하고 단종 비로 자기 조카를 들인 것이다.
그런데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왕비인 송씨 부인집안은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때까지 살아남는다. 이 책에서도 그 능력을 높이 보고 있다.
내가 영응대군의 송씨 부인에게 주목하는 것은 조카이자 단종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에 대해선 조선 능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많이 봤다.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思陵, 은퇴한 비빈들이 거처하던 정업원, 정업원이라고 생각했던 동대문 밖 청룡사, 정순왕후가 단종을 그리며 동쪽을 바라봤다는 동망봉, 동묘 옆의 여인시장 등등...
그런데 영응대군 부인 송씨와의 관계는 나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다. 영응대군 부인이 정순왕후 간택에 관련됐다면 영흥대군 부인 송씨가 단종이 쫓겨난 후 정순왕후를 음양으로 많이 도와줬을 것이다. 나는 이것에 주목하고 영응대군 부인 송씨에 대해 더 알아보려 한다.
<조선왕조에서의 즉위장소>
https://blog.naver.com/seongho0805/150170143932
3. 장희빈, 인현왕후 그리고 김은애
역사는 역사가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왜곡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볼 때 머리에 세길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 두 번째 모든 것을 기록하지 못한다. 세 번째 행간을 읽어야 한다.
승자가 기록하니 모든 기록은 승자 내지는 기득권세력의 관점일 뿐이다. 그리고 소소한 것은 사라진다. 그러니 전체를 볼 수 없다. 기록한 자의 관점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 시대가 어떠했는지를 제대로 알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인간사도 이해하기 힘든데 하물며 과거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더 알아보려는 노력 없이 그러려니 하고 생각한다. 제대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워낙 공부할 것이 많으니 더욱 그렇다.
이렇게 흘러가는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 읽고 있는 <또 하나의 조선>에 나왔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사극의 단골 주제였다. 이런 사극을 통해 인현왕후는 지고지순한 사람으로 장희빈은 악의 화신으로 각인돼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고 서인庶人 내치면서 비망록을 남겼다. 저자는 이 비망록 내용을 인용하면서 오히려 인현왕후 성품이 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왕비가 말했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숙원淑媛은 전생前生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逆獄 후에 불령不逞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禍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八字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노고勞苦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內殿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宣廟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숙종 15년 5월 2일)
이 비망록을 보면 투기뿐만 아니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 말이라고 지어내기까지 했단다. 비망록을 보면 장희빈에게서 원자가 태어나자 더 심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내용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고지순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오히려 장희빈이 더 순종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며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서인과 남인 간 당파싸움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했다. 나는 장희빈은 악마의 화신으로, 인현왕후는 지고지순한 현모양처로 그려진 것은 서인 집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송시열이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둔갑시켰듯이, 서인은 인현왕후를 현모양처로 만들어야 원자의 어머니인 장희빈을 내친 명분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늘 한번쯤은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볼 내용이 하나 더 있다. 지금 우리 언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내용이다. 정조 때 살인하고도 사형을 면한 김은애(1772~?)라는 여성의 이야기다.
김은애는 결혼 후, 결혼 전 다른 사람과 간통을 저질렀다는 거짓 소문에 시달렸다. 그 소문에 견디다 못한 그녀는 그 소문을 퍼뜨린 매파인 안씨를 살해하고 안씨를 사주한 최정련도 죽이려다 어머니 만류로 관가에 자수했다.
이 사건은 중요성 때문에 결국 정조에게 올라갔다. 대신들 모두 아무리 무고에 시달려 살인을 했지만, 살인은 살인이기 때문에 사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정조 생각을 달랐다. ‘오죽하면 살인 했겠는가’였다. 결국 정조는 사면한다.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덕무는 이 사연을 <은애전>으로 남겼고, 성해응도 <은해전>을 남겼다. 이 이야기가 글로 남겨질 만큼 이 사건은 당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있은 뒤 10년 후 정약용은 이 사건이 일어난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정약용도 이 사건에 관심이 있어 그 곳에 사는 사람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 반응이 의외였다.
“은애가 시집가기 전 최정련과 사통하는 사이였고, 안 여인은 매파가 되어 그들의 통간을 도우며 이익을 취했다는 것이다. 또 ‘김은애가 노파를 죽이기는 했으나 집안 깊숙한 곳의 남녀일을 누가 알겠냐’라는 것이다.”
이를 들은 다산은 “도둑의 누명은 벗을 수 있느나 간음에 대한 모함은 씻기 어렵다.”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실제 그랬다면 기가 죽어 이처럼 통쾌하게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213쪽)
지금도 이런 모습은 다르지 않다. 언론이 계속해서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그것에 세뇌돼 나쁜 사람으로 되고 만다.
4. 군자君子란
역사와 관련된 책을 보다보면 이런저런 사람을 알게 된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저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런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지금 읽고 있느 <또 하나의 조선>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나왔다.
조선을 공부했던 사람이라면 남명과 우암을 안다.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워낙 유명한 분이라 여기저기에서 언급하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송시열이야 워낙 유명해서 이런 저런 글에서 자주 보던 언급된 사람이고 왕릉공부를 하면서 송시열에 대해 조금 알게 됐다.
그런데 남명 조식에 대해서는 사실 그리 깊게 알지 못한다. 조식은 제자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바람에 동국 18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우암은 고집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조선 국장에서 송시열의 고집 때문에 국장을 망칠 뻔한 적도 있다. 우암이란 호도 그의 고집과 관련이 있다. (아래 링크 참조)
그런데 이 책에서 보이는 조식과 송시열은 이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조식은 헛소문을 퍼뜨려 그 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죽이겠다고 쫓아다니고, 송시열은 환향녀를 비난하는 글을 쓴다. 조식은 입이 쌌고, 송시열은 원칙에 매달려 넓은 아량으로 사람을 감싸주지 못했다.
남명과 우암의 경우만은 아니다. 이 책에 나온 이문건, 김인후 등도 마찬가지였다.
유교에서는 사람을 성인, 군자, 소인으로 나눈다. 성인이야 모든 것을 이뤄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군자들은 학문을 하면서 수양을 쌓은 사람을 칭한다. 그래서 행동도 겸손하고 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 본 남명과 우암 그리고 이문건, 김인후도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어쩌면 소인배나 다름없었다.
유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기지학’이란 자기 수양을 위한 학문이란 것이다. 송시열은 송자宋子라고 불릴 만큼 주자학에서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그 학문이 자신을 키우는데 일조를 했을까?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단지 송시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남자 그중에서도 당대에 방구께나 뀌던 사람들 모습이 다 그렇다. 인간사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한계인지... 하여간 그렇다.
<조선시대 상례변경-꼬리가 머리를 흔들다.>
https://blog.naver.com/seongho0805/220374493356
5. 마무리
<또 하나의 조선> 다 읽었다. 처음 영수합 서씨와 삼의당 김씨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샀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이란 시대를 살아간 여성들과 피지배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조선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이다.
조선 역사는 518년의 역사다. 500년이란 시간을 우리는 ‘조선’이란 단어하나에 응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한사람의 7,80년 삶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500년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조선을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불교에 관련된 내용이 선조이후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선조 이후 불교는 완전히 마이너가 됐다는 뜻이다. 여성에 대한 것도 비슷하다. 초기에는 남녀가 상간相姦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런 내용을 찾기 힘들다.
전기에는 양반가 여인으로 여러 남자를 후린 어울우동(어우동), 낙안 김씨 그리고 남자들을 농락한 황진이가 있었다. 사임당 신씨나 난설헌 허씨 등은 자기 이름으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후기 여성들은 유교적 규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후기에는 남자를 후리는 여성은 없다. 설사 있었어도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기생이라도 황진이처럼 자유로웠던 기생은 없었다. 물론 사임당 신씨처럼 자기 이름을 걸고 그리거나 시를 쓴 사람도 거의 없다.
우리가 귀에 익은 대단한 여성은 대부부분 조선 전기 여성들이다.
조선후기 여성은 유교적 규범에 맞춰진 여성이다. 사임당 신씨의 모습도 송시열에 의해 각색됐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문열이가 그렇게 자랑하는 <음식디미방>을 쓴 안동 장씨(1598~1680)다. 이 책에 의하면 안동 장씨도 대단한 지식인이었다.
이때는 남녀재산균분에서 남자 쪽으로만 재산이 분배가 되기 시작하는 과도기적 상황이었다. 그래서 안동 장씨는 슬하에 남자가 없었던 아버지를 위해 출가 후 돌아와 3년간 모실 수 있었다. 한마디로 유교적 규범이 자리 잡는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때 사람이다.
그러나 유교적 규범이 자리 잡은 이후에는 이런 여성이 없다. 종종 어렸을 때 운좋게 글을 배운 여성들은 나름 자기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것 역시 유교적 규범 안에서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영수합 서씨와 삼의당 김씨다.
어쨌든 어려운 과정에서도 자기를 찾아가는 여인들이 있었다. 지금 와 돌아보면 그때 참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았다. 잘났다고 떠들던 남자들 보다는 그들이 더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은 개인으로 끝났을 뿐이다.
이 책에 이름이 오른 몇몇은 지금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남성들과 다름없는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에선 주류는커녕 비주류도 못되고 그냥 이름이 남아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나 있는가?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단한 인물임을 알겠다.
이 책에 소개된 사람 중에는 일기 속 인물이 많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문건, 김인후 등이 쓴 일기는 다른 단행본을 통해 봤다. 그러나 그때 읽은 느낌과 이 책에 소개된 느낌은 사뭇 다르다. 아마도 관심사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일기라도 여성과 노비등과 같은 피 압제자 입장에서 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보는 입장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다. 어쨌든 사람들 판단 근거는 자기 경험이다. 그렇기에 직접경험이든 아니면 책을 통해 얻은 간접경험이든 경험이 많은 것이 좋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사고 폭과 깊이를 더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그런 사람 찾기 쉽지 않다. 정말 많지 않다. 그러니 세상
첫댓글 남명은 올곧은 말만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