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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량 이바구길을 따라서 거북이 걸음으로 걷는다.
나는 애초에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그렇게 부산엘 왔고, 그렇게 부산역을 찾았고,
그렇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느닷없이 들어선 길이
초량동의 "초량 이바구길" 이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지나가는 길에 무심히 안내판을 보고
사진으로 담아 두고 그 길을 그저 따라
가봐야겠다고 갑작스레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길을 따라 가보자고 마음을 정하고는
안내판에 나온대로 핸드폰 사진을 수시로 보면서 길을 걷는다.
하기야 딱히 어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지하철 부산역에서 내렸었으니....
그렇게 만난 이 길의 매력에 흠뻑빠진 하루였다.
10km도 안되는 길을 하루 온종일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 중국거리.
부산역앞 대로와 뒷골목으로 나란히 조성된 중국거리.
중국을 상징하는 빨강색이 온통 칠되어있는 거리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글자들이 눈에 많이 띈다.
어제의 기억이 오늘의 이야기로 피어나는 곳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라는 뜻의 ‘이바구’, 그리고 부산 근현대 역사의 씨앗이
동구 곳곳에서 이야기꽃으로 피어난 ‘이바구길.’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던 ‘
남선창고’부터 층계마다 피란민들의 설움이 밴 ‘168계단’, 영화 한 편으로
울고 웃게 했던 ‘범일동 극장트리오’, 가냘픈 어깨로 부산의 경제를 지탱했던
신발공장 여공들의 발길이 오가던 ‘누나의 길’까지 이바구길은 근현대
부산의 옛 기억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자, 역동적인 세월을 깊이 받아들인
동구의 상징적인 자취입니다. 뿐만 아니라 낯선 여행객들의 정감 있는 쉼터
‘이바구충전소’와 ‘까꼬막’, 막걸리 한잔과 따스한 국밥 한 그릇으로 애환의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6·25 막걸리’와 ‘168도시락국’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의 가교’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지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의 과거를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바구길입니다.
이바구길에서 오래된 미래를 만나다.
사람냄새가 가득한 포근한 쉼터입니다.
근대개항 150주년을 바라보며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북항재개발’ 사업과
부산역 일대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키는 ‘창조경제플랫폼 구축’ 사업, 자연의 숨길을
되살리는 ‘초량천 생태하천 복원’ 사업 등은 동구에 새로운 활력과 창조의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이바구길의 즐거움과 가치를 더욱 부각시켜 줄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풍경과 장소의 기능은 달라지지만, 이바구길에
간직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점점 더 또렷이 각인돼 사람들 가슴 속에서 영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매순간 이곳 이바구길에서 오래된 미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르락내리락, 지나온 세월만큼 굴곡진 길을 걷는 동안 어느덧
이바구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출발해 보세요. 길 위에서 만나는 이야기와 이웃들을 통해
진정한 동구 여행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이바구길 홈페이지
부산 구 백제병원.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의 상가 건물로 등록문화재 제647호이다.
등록문화재 지정번호 등록문화재 제 647호
지정일 2014.12.26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구 중앙대로209번길 16
건축크기 1동 측량면적 385.5㎡
본문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소재한 건물이다. 1927년 최용해(崔鏞海. 1894년경~?)가
백제병원을 개업하면서 세웠던 건물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 병원이었다.
최용해는 당시 일본 오카야마현에 있는 오카야마의학전문대학(岡山醫學專門大學)을
졸업한 30대 의사였다. 백제병원은 독일인 및 일본인 의사와 30여명의 간호사가
근무하였으며 40여개의 병상이 구비되어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를 갖춘
병원으로 부산부립병원 및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의 3대 병원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용해가 실제 인체 표본을 병원에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병원의 경영도 악화되었다.
1932년 최용해는 일본인 부인과 함께 39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야반도주하였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연혁
1933년에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백제 병원 건물을 중국인 양모민(楊牟民)에게 팔았다.
양모민은 건물 내부를 수리하여 봉래각(蓬萊閣)이라는 고급 중화요리점을 개업하였다.
요식 사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42년 태평양 전쟁이
극렬해지면서 불안을 느낀 양모민은 돌연 봉래각을 폐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이 건물은 부산에 주둔한 아까즈끼[赤月] 부대의 장교 숙소로 이용되었으며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부산치안대 사령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50년에는 대만의 임시 영사관 및 대사관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개인에게 불하되어
1953년에 신세계 예식장이 되었다. 1972년에 일어난 화재로 건물 내부가
불에 타 건물의 외부 골조만 남게 되자 부산시는 건물 일부의 철거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5층을 해체하고 내부를 수리하였으며
현재는 4층 건물의 일반 상가로 유지되고 있다.
형태
1927년 신축 당시에는 2월과 12월에 각각 건물 두 동이 올려졌다.
이 두 동의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완공 시 내부까지 하나로 합쳐진
형태가 되었다. 건물의 내부 평면은 사각형과 마름모 형태의 다양한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처음 건축되었던 1, 2, 3층에 있는 목조 계단과 목재 마감 장식은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5층을 철거한 채로 406.61㎡(123평)
규모의 4층 벽돌 건물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내부는 중국인
양모민이 개수한 중화요리 음식점 봉래각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구조는 복도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방을 둔 형태이며 외부에는 위아래로
내리 닫는 창문이 달려 있다. 건물의 남쪽 출입구 상부에는 아치형으로 벽돌
장식이 부착되었으며 건물의 꼭대기에는 역사다리꼴 형태의 화강암 장식이
달려 있다. 건물의 3층과 4층의 창 사이에는 색을 달리한 벽돌 3종으로 이중
다이아몬드 모양을 연출하였다. 현재는 본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수리가 되어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가치 및 의의
본 건축물은 부산에서 건립된 최초의 개인 종합 병원이다.
그동안 오랜 역사를 거치며 수차례 수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벽돌 및 목재 등의 마감 재료도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 있어 일제 강점기 건축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구부러진 골목-산복도로·76’
강영환
눈 선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살았다.
바다도 더 많이 찾아와 주고
진하게 놀다가는 별이 있는 하늘동네
갈라섰다 다시 만나는 사람 일처럼
만났다 갈라지는 것이 골목이 할 일이다.
오르막은 하늘로 가는 길을 내어 놓고
곧장 가서 짠한 바닷길을 숨겨놓아
가끔은 외로워 보일 때도 있다.
고깃배 타는 신랑을 물 끝으로 보낸 뒤
식당일로 밤늦게 귀가하는 기장댁
길 끝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고
아랫동네에서 사업하다 부도 만난 박씨가
막다른 골목 셋방에 몸 부지해 살았다
왼 길에는 항운노조 간부를 들먹이다 힘에 겨워
스스로 생을 포기한 이씨가 남긴
어린 두 아이가 아버지도 없이 떠돌았다.
사람 하나 겨우 빠져 나가는 샛골목은
어찌 보면 질러가는 길 같으면서도
몇 번을 아프게 굽이쳐 돌고 난 뒤에야
처음 길과 만났다 늙은 골목은
갈라졌다 다시 만나는 일로 환해지지만
담벽에 해를 그린 아이들이 떠난 뒤
구부정해지는 줄도 모르고 허허대며
숨어간 뒤에는 걸핏하면 나오지 않았다.
초량 교회.
1892년 11월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裵偉良)에 의하여
부산 지역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다. 영서현(英署峴)에 있던 서당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삼았으며 초창기 교인은 정준환 등 4명이었다.
1910년한득룡(韓得龍) 목사가 초대 한인목회자로 시무하였으며,
1913년에는 김주관(金周寬)이 장로로 장립되어 당회가 조직되었다.
1914년에는 예배당 신축이 시작되어 1917년정덕생(鄭德生) 목사가
부임하면서 70여 평의 건물을 준공시켰다.
김관호·반제상·김성국 등이 잇달아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1925년에는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부임하여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삼일유치원(三一幼稚園)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 뒤, 이약신(李約信)·김만일(金萬一) 목사로 이어지다가
1946년한상동(韓相東) 목사가 시무하였다.
그러나 한상동은 1952년 장로교의 분열이 일어나 고려파(高麗派)로
갈라져 나갈 때 300여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삼일교회(三一敎會)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교세가 약화되었으며 6·25전쟁 중에는 남대문교회와 합동으로 예배를 보았다.
1967년 예배당이 400여 평으로 증축되었으며 1972년 교회설립 80주년을 맞아
『초량교회80년사』를 발간하고 교육관을 신축하였다.
그 동안 반송교회·초락교회·반여동교회 등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브라질·나이지리아·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92년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이한 초량교회는 1992년 케냐에 나쿠루북장로교회의 설립,
1994년『초량교회 100년사』발간 등의 기념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역사자료 전시관을 개관하여,
초기 당회록, 주기철 목사의 강대상 등 총 120여 점의 교회 유물을 보관 전시하였다.
이 교회는 일찍이 항일민족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민족정신과 신앙의 융합을
이루었으며 또한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진원지 구실을 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168도시락국"이 이 식당의 이름이다.
나는 시락국밥에 삶은 달걀 1개와 커피 한잔으로
고프진 않았지만 점심 한끼 식사를 한다.
아웃테리어와 인테리어 그리고 간략하지만
정갈한 음식이 이 동네를 상징하는듯 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의 사랑방처럼 식사하는 동안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이바구를 즐기는 모습이 좋다.
"가게 문을 연 지 근 두 달 정도 되었네요. 어르신들 활동상은 어느 정도
자리 잡아 가는 중입니다만 매출 증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지역 어르신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노력 일환으로 지난 4월 3일 부산 동구
이바구길에서 문을 연 동네 밥집 '168 도시락(樂)국'. 그곳에서 만난 부산동구
노인종합복지관 정해선 팀장이 내린 그동안의 경과에 대한 설명이자 간단한 평가다.
'168 도시락국'은 60세 이상 건강한 어르신들이 4명씩(바리스타 1명 포함)
한 팀을 이뤄 5개 조로 일을 하면서 수익금을 나누는 구조이지만
운영 주체는 동구노인종합복지관. 복지관은 '168 도시락국' 외에도
'6·25 막걸리', 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충전소'도 위탁 운영 중이다.
대부분 70대가 주축이지만 60대와 80대도 포함됐다.
■ 동구 '168 도시락(樂)국'
60세 이상 어르신들이 운영
달걀·소시지 반찬에 추억이
"복지관에서 도와주고는 있지만 메뉴 개발은 어르신들이 직접 하셨습니다.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분에 따라서 맛이 들쑥날쑥한 게 단점이긴 하지만
취지 자체는 어르신들의 여가 시간을 활용하고 소득증대 차원에서 꾸려지는
식당인 만큼 음식 가격도 저렴하게 책정됐습니다. 아직은 어르신들 용돈
챙겨 드리는 정도입니다만 앞으로 차차 나아질 걸로 생각합니다."
'168 도시락국' 멤버 중 한 사람으로, 개중 젊은 축에 속한다는 김선이(64) 어르신은
"하루 5시간, 격일제 근무를 하면서 용돈벌이 정도 하는데 삶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면서 "여든 넘은 나이에 일하시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60대에겐 또 다른 자극이 된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 어르신은 바리스타 과정도 수료했다.
'168 도시락국'의 식사 메뉴는 '추억의 도시락', '시락국밥', 콩나물국밥 등 3종류.
그리고 사이드 메뉴로 삶은 달걀이 있고 음료로 커피, 녹차, 팥빙수 등이 준비된다.
'추억의 도시락'을 주문했다. 도시락 위에 올려진 달걀 프라이와 소시지 달걀부침,
콩나물 무침, 겉절이 등 각종 나물 반찬 등 소박한 밥상이 차려졌다.
그 옛날, 할머니가 차려 주시던 손맛이 떠올랐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168계단을 걸어서 김민부 전망대까지 갔다가
부산항 일대 전경을 내려다보고 다시 걸어 내려왔다.
단순한 밥 한 끼였지만 추억이 깃든 밥상이었다.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출처 부산일보)
위는 "이바구 충전소"인데, 쉬운 말로 게스트하우스이다.
숙소 일정이 따로 없었다면 여기에 짐을 풀었을 것이다.
부산역을 중심으로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방에도 2인용 2층 침대가 하나 밖에 없어서 아늑하고 좋다.
단체실이 하나가 있었고, 그야말로 옛날식 건물이지만
내부는 다시 꾸며서 쉬기에 편안하 장소를 탈바꿈하였다.
다음 언젠가는 여기서 하루 머물 시간을 가질 것이다.
이 동네를 지날때면 한 동지를 생각한다.
나는 살면서 부산을 아마도 100회 이상은 방문
혹은 여행하지 않았나 추측을 해본다.
그만큼 일과 여행과 등으로 만난 부산은 무던히도
많이 다닌 도시 중에 하나다.
내 생활의 대부분을 보낸 서울을 중심으로 극에 있는
부산을 왜 그리도 자주 다녔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초기 20대에 만났던 부산은 초량동 그 옆 좌천동의
어느 언덕배기 좁다란 골목길을 구불구불 지나 쪽문처럼의
문을 열고 들어간 그 동지의 집이 명확하게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때 그 시절 도시민들의 대다수 삶이 그러했다.
그리고 한 켠에 있었던 뒷간의 이야기를 방안에서
밥먹듯이 하면서 웃음지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동지와 동지와 함께..
오늘 이 길을 걸으면서 그 때의 그 기억을 살려서
그 동지의 집을 꼭 찾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지만
단서가 될만한 뭔가가 아무것도 없으니 한강에서 김서방찾기다.
편지를 써서 보낼때 좌천 4동이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자주 걷는 길 - 산복도로. 100
강영환
날 추락시키지 않고
산복도로 높은 위치를 유지해준것 고맙다.
아침저녁 걸었어도 물리지 않던 길
북항을 툭터서 가슴 높이로 보여 주었고
멧비둘기 머리 위로 가끔 지나
까치 노래에 배시시 웃음띠던 출근길
오륙도 동 터오는 아침을 만나며
두 다리를 받들어 너를 걸었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내 꽁무니
말없이 감춰주던 순종하는 아내처럼
미소로 구부러져 앞서가던
길비 오던날 젖은 발로 새겨 넣던 몸
쿵쾅거리는 소리로 너를 불렀지만
그 때도 흔들리지 않고 너는 새 신부
처음 얼굴로 날 받아주었다 고맙다.
내려다보며 목이 메던 길.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구부러진 골목-산복도로·76’
얼핏 보기에 막힌 길이지 싶다. 되돌아나갈 마음먹고 끝까지 들어가면 기역자 골목이
다시 열린다. 화랑들이 모여 있는 서울의 북촌, 서촌을 찾아갈 때마다 197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번쩍거리는 가게들이 늘어선 큰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릴 때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한옥들 사이로 조붓한 골목길이 이어진다.
제멋대로 뻗은 미로 같은데 나무 잎맥처럼 조화롭고 자연스럽다.
나라 곳곳을 갈아엎은 도시 재개발 광풍 수십 년에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골목
풍경은 이제 쉽게 보기 힘들다. 공동체의 정겨운 소통공간을 쓸어내고 위압적
아파트를 세우는 것이 발전이고 성장이라 굳게 믿은 탓이다. 한데 변화가 시작됐다.
최근 서울 삼선동 장수마을은 낡은 집을 고치고 비탈진 골목을 재정비하는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동네가 산뜻하게 변했다. 주민들이 재개발의 이익을 포기하고
추억과 역사를 보전하는 도시 재생의 길을 선택한 덕이다.
산허리를 겹겹이 가로지른 부산의 산복(山腹)도로 주변도 개발 대신 지역 특색을
되살려 도시의 명물로 변했다. 6·25전쟁 이후 바다가 보이는 산동네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산복도로엔 궁핍한 삶의 애환이 스며들었다. 반세기 전 밤바다로
입항한 외국인들은 암흑 속에 산 하나를 통째로 밝힌 불빛의 향연에,
홍콩보다 웅대 장려한 해변 아파트가 한국에 있나보다 하고 잠시나마 놀랐다
전한다. 1977년 동아신춘문예 시 부문으로 등단한 강영환 시인은 40여 년
그곳에 터 잡고 살면서 ‘산복도로’ 연작을 썼다. “정 많은 사람들이 정이
그리워 떠나지 못하는 공간”이라 그가 말하는 ‘하늘동네’의 짠한 아름다움이
그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사진가 강홍구 씨는 올해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그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줬다. 화면 가득 다닥다닥 붙은 집들, 가파른 골목,
아득하게 뻗은 계단에 치열한 삶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살풍경한 도시에 간혹 남아 있는 구부러진 골목길. 굴곡진 인생살이를
상징하듯 삐뚤빼뚤 이어진 길은 살갑게 다가와 도시의 삭막함을 잊게 만든다.
사람냄새 묻어나는 그런 풍경이 우리 곁에서 더는 사라지지 않기를….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출처 동아일보
부산의 산복도로와 168계단
산복도로(山腹道路).
‘산의 꼭대기와 기슭 중앙의 비탈진 곳에 터를 내고 닦은 길’을 뜻한다.
산복도로는 산허리와 산 꼭대기까지 뻗쳐 올라간 서민삶터의 편의를 위해
사람이나 우마차가 다닐 수 있게 연결해 둔 도로이다.
물론 이 길들은 산아래 도심지와의 연결을 위한 중간 길들,
주로 계단길들과 연계되어 있어야 한다. 부산의 산복도로는 송도에서
남부민동으로 이어진 암남공원로와 아미동의 대티고개에 이르는 천마로,
대티고개에서 꽃마을에 이르는 시약로, 동대신동에서 시작하여 영주동과
초량동 · 수정동 · 범일동에 이르는 망양로를 우선 들 수 있겠다.
그리고 가야와 개금을 잇는 가야산복도로, 영도 청학고개에서 시작하여
청학동 · 신선동 · 영선동의 신선동 산복도로들이 있고, 전포동 산복도로,
주례산복도로, 남산동 산복도로 들도 산복도로 범주에 든다 하겠다.
특히 부산은 해방과 더불어 귀환동포와 6·25사변으로 인한 피난민의
무분별한 유입으로 급속도로 팽창한 도시이다. 해방된 해 28만명에
불과했던 부산인구가 불과 10년 만에 140만명에 육박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6·25로 인하여 전국에서 몰려드는 피난민을 더 이상 시가지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산허리 산간지대로 분산 수용해야 했다.
아니 피난민들이 그들의 거처를 찾아 산으로 파고 들었다고 얘기해야 한다.
이로 인해 산허리마다 산간마을(산동네)이 생겨났다. 전기, 수도 등의
편의시설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런 열악한 주거환경에,
도시에 수용되어 있던 귀환동포들이 올라왔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20만명의 귀환동포(당시 부산 인구의
1/4에 이르렀다)와 40만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시내와 외곽지 40 여곳에
분산수용되지만 수용소의 수용시설은 고작 7만명 정도였다 하니,
나머지 피란민들은 초량 · 영주동 · 수정산 자락에다 삶의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으니 고지대 판자촌이란 말도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그래도 용두산 공원이나 초량동 철로변, 영도 대평동 등지에 비집고 들어선
이들의 집은 야전식량 볼박스나 골판지 종이상자 등으로 얼기설기 바람과
비만 피할 수 있는 판자집을 지을 수 있었다. 통조림 깡통을 두들겨 펴서 엮어
만든 벽체에 콜타르 바른 군용 루핑지붕을 이어면 고급스런 깡통판자집이었다
(당시 미제 빈깡통을 펴서 생철지붕을 만드는 ‘깡깡이업’이 신종직업으로 등장한다).
시내에 들어선 피란민들의 판자집은 그래도 격을 갖춘 고급 판자집이었다.
아미동 산의 19번지와 초량동 · 영주동 산비탈과 수정동 산비탈에 들어선
피란민들의 주거는 차라리 움막이라야 옳았다. 천막 한 장, 담요 한 장이라도
배급받을 수 있다면 행운이었다. 이들 중 에는 가덕도와 거제도 멀리는
제주도로 분산 수용돼 있던 피란민들도 섞여 있었다.
출처 : 이바구 공작소 홈페이지
아래는 이바구 공작소 구조이다.(출처 : 이바구 공작소 홈페이지)
소재지 : 부산시 동구 초량4동 843번지
창건 일시 : 17세기 창건(1910년 동호스님 재 창건)
금수사는 문화재청에서 지정한 전통사찰이다. 17세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 오지만,
폐사된 절터 위에 1910년에 새롭게 조성된 사찰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7세기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와의
일화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상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재청에서는 17세기 창건 사찰로 분류하고 있다. 17세기 창건을 주장하고 싶은
이유는 불교가 억압되었던 조선시대를 가진 역사적 토대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시대를 거치면서 폐사되었거나, 움막 상태로 영위된 많은 사찰들이
임진왜란 이후나 근대에 들어 새로 사찰터를 복원하면서 법등이 꺼져 버린 옛 사명(寺名)을
다시 사용하는 것은 사찰 역사의 이음이지, 새로운 창건이 아니라 할 것이다.
이런 형태의 사찰을 창건이라고 주장한다면 많은 역사적인 사실을 묻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런 연유로 금수사는 17세기에 창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수사에 전하는 역사의 한 토막을 알아보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의 귀환을 위해 선조대왕이 1604년(선조 37) 6월에 강화교섭을
위하여 사명대사가 강화사로 가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조정을 대표하여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 때 대사가 부산 구계산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곳의
물맛과 주위를 둘러보고는 실로 수도할만한 자리라고 감탄하였다.
“이 물이 과연 감로금정수(甘露金井水)이니 수도승이 머물만한 곳이구나”
이 때 대사를 따르던 한 제자가 그로부터 얼마 후 초암을 짓고 금수암(金水庵)이라
명하니 이것이 바로 지금 금수사(金水寺)의 전신이었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 폐사되어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몇몇 문헌에서 금수사의 창건을 16세기 말이나 1596년 등으로 전하고 있으나
사명대사가 선조대왕의 청으로 일본에 강화사로 건너간 연대는 분명 1604년(선조 37년)
이었으니 금수사의 초창을 17세기 초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금수가 경내에 있는 ‘금수사사적비’를 통하여 보면 근대 사찰 건립에 대한 역사가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1910년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의 동호 수홍(東湖 銖洪)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옛 사적을 추모하여 몇 동의 전각을 짓고 금수정사(金水精舍)라는
이름으로 중건하였다. 그 후 동호선사가 입적하자 그의 제자인 석봉(石峰)스님이
1923년부터 주석하며 사세를 유지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4 후퇴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혜은(慧隱)스님이 피난 와 이곳에 머물렀는데 함께 내려온 피난민
10여 세대가 금수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석봉스님은 합천 해인사에 있던
법홍스님에게 주지를 위임하였으며, 법홍스님은 이곳에다 난민수용소를 설치하여
이주시키고 이들의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1952년 대방을 중수하고
장성 백양사 설호스님을 초청, 1백일 화엄법회를 베풀어 부산지역 시민들과
피난민들에게 전쟁 후의 고단함을 불법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출처 : 이바구 공작소 홈페이지
나는 이 길을 걸으며 걸음이 더디다.
오르막 길이지만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아예 뒤로 돌아 주변을 뱅글뱅글 몇바퀴 돌기도 한다.
그렇게 거리의 길이는 걸음만큼 길지는 않고
걸음수는 늘기만 한다.
그게 내 걸음의 근본이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무작정 떠난 그 길에서 만난
새로운 길과의 인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이 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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