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생
김광균
1
향료(香料)를 뿌린 듯 곱다란 노을 위에
전신주 하나하나 기울어지고
머언 고가선(高架線) 위에 밤이 켜진다.
2
구름은
보랏빛 색지(色紙)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薔薇)
목장(牧場)의 깃발도, 능금나무도
부을면 꺼질 듯이 외로운 들길
[어휘풀이]
-고가선 : 땅위에 높게 난 선로. 고가철도(高架鐵道)
[작품해설]
1930년대 이미지즘 시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는 이 작품은 「데생」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느낌을 준다. 지성과 이미지를 중시하는 모더니즘의 경향으로 감정은 지성에 의해 극도로 억제되었으며, 객관적인 태도와 회화적 수법에 의해 산뜻한 감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1은 황혼녘의 지평선을 배경으로 한 모습이고, 2는 그 시각에 보는 하늘과 구름과 땅 위의 풍경이다. ‘데생’을 하고 있는 시인은 먼저 초점을 멀리 두고서 화면을 크게 잡아 노을의 마지막 잔광(殘光)이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향료(香料)가 뿌린 듯’ 곱게 깔린 노을 아래의 전신주가 서서히 어둠속에 파묻혀 가고, 마침내 멀리 보이는 고가선위에 별이 하나 둘 떠오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다음에는 화면을 축소하여 하늘과 땅 위의 인상적인 부분들만 묘사하고 있다. 어둠이 구름에 섞인 풍경은 마치 보랏빛 색종이에 한 다발 장미꽃을 그려 놓은 것처럼 붉게 타오른다. 이렇게 해서 그림의 윗부분을 완성시킨 후,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이동시켜 지상의 사물을 감각적으로 관찰한 다음, 다시 붓을 들어 아랫부분의 여백에 어두워 가는 목장과 주위의 능금나무와 깃발을 그리고 있다. 잠시 후, 그 아래의 아름다운 사물들이 이내 어둠 속에 묻힐 것이 안타깝고, 황혼녘의 풍경들이 못내 쓸쓸하다고 느끼는 시인은 외로운 감정이 되어 들길을 마저 그려넣으면서 그림을 완성시킨다.
[작가소개]
김광균(金光均)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송도상업고등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시 「가는 누님」 발표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 당선
1950년 이후실업계에 투신
1990년 제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3년 사망
시집 :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 『황혼가(黃昏歌)』(1969)
『추풍귀우』(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