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말씀드리고 싶을때 아마 여러분들은 세계의 독재자들을 왜 올릴까? 생각할겁니다.
세종대왕도 아니고..마하트마 간디도 아닌.. 피에 손을 적신 독재자들을요..
그러나 반면교사라고 그들을 통해 현재 위정자들을 유추해볼수 있고 그나라의 역사에서 깜짝놀랄정도로
우리나라와 닮은점이 나온다는겁니다.
나이드신분들이 이러죠..
"박통이 그래 사람도 죽이고 잘못했어..하지만 박통이 있었기에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어제 돌아가신 박태준)
보리고개넘은거야.. 박통없었음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그러는 분들이 허다할겁니다. 나이든 분들중에..
그럼 여러분들 반박하실겁니다.
" 아니에요.장면 민주정부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있었구요."
"그때는 박통의 힘이 아니라 국민들 모두의 노력이라구요."
" 예끼."
자.. 여러분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것은 나이드신 분들에게 꼭 반공독재가 좋은 결과만을 불러오지 않는다는 예를
보여주는 인물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조선일보에서조차 2008년 이양반이 죽었을때 박정희와 여러모로 닮았다고 했지요.
군사쿠데타.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선거 같은 골카르당 투표에 경제성장.
그러나 끝은 IMF와 폭동. 하야.그리고 부정축재자..아들 비리로 아들 조사.그리고 눈감음입니다.
"경제성장에 국가안정을 했지만 결국 IMF를 불러온 대통령이 외국에 있다구요."
"그게 누구냐?"
그럼 여러분들 말씀해주세요.
"수하르토"
수하르토가 죽었을때 평이 두개로 나오죠.
"그가 거둔 경제성장은 국민들에게 행운이었다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
"마피아의 우두머리에게 모든것을 빼았겼다. (제프리 윈터스 노스웨스턴 대 교수)"
이렇게 물과 기름으로 평가되는 수하르토의 죽음에 대한 세계의 유명한 평중에 이렇게 엇갈립니다.
인도네시아 국부 수카르노의 실정을 극복하고 친미 반공 정부를 세웠고 경제성장을 이루었지요.
미국의 지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동티모르를 침공해 동티모르인들을 학살하고 인권탄압..그리고 부정부패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결국 아시아 금융위기인 IMF때 한국과 타이와 함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역설적이고 재밌는 (사실 재밌는게 아니고 비극이지만)것은 우리나라는 IMF가 터지면서 박정희가 있었음 과연 어땠을까?하는
신드롬과 함께 밝근혜 공주께서 정치에 등장하셨고(?) 인도네시아는IMF가 터지면서 수하르토 독재가 무너지고 몇년후 와히드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내용을 길게 쓰고 싶긴 한데.. 제가 전에 제친구가 역사에 대한 내용을 알려달라해서 매번 역사적 이야기를 메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친구도 바쁘고 저도 바쁘고..거기다 미권스 이후 그친구와 이야기를 못해서..
메일을 못보냈지요..
그친구에게 수하르토 관련 메일을 보냈던것을 퍼올까 합니다.
친구에게 보낸 메일을그대로 퍼온거라 반말투여도 이해해주세요..^^
수하르토를 이야기하려면 수카르노부터 먼저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인도네시아 국부 수카르노와..그를 몰아내고 등장한 수하르토 이렇게 연결고리가 됩니다.
메일 내용 시작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평생 열차만 탔다 ? 삐이...답은 NO야.
1965년 4월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였지.
무엇을타고 방문했냐고? 물론 비행기지. 인도네시아를 열차타고갈수야 없지.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김일성 . 사진을 바라 보는 쪽으로는 오른쪽 .사진상에서 김일성 옆에 팔짱을 낀
여인이 수카르노 대통령의 딸이자 제 5대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메가와티 수카르노 프트리로 보이며.
메가와티 옆이 김정일로 보임.>
혹시 고등학교 세계사 현대편이나 그런데 보면 짤막하게 인도네시아 수카르노가 손을 불끈 쥐고 흔드는 모습이 나와.
위키 피디아에 나온 수카르노에 대한 소개야.
수카르노(Sukarno, 1901년 6월 6일 ~ 1970년 6월 21일)는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이다. 수라바야에서 출생하였고, 반둥 공과 대학 재학 시절부터 급진적인 학생 단체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1927년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조직하여 민족독립운동에서 활약하였으며, 1933년 네덜란드군에 잡혀 10년간 유형생활을 하였다. 1942년 일본군에 의해 석방되어 일본군의 군정에 협력, 1945년에 네덜란드군이 복귀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6년에서 49년까지 네덜란드 군과 계속 독립 운동을 벌이다가 헤이그 협정으로, 1949년 독립이 되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55년에는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열고 반식민주의를 주장, 신생국가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9년이후에는 ‘교도민주주의’를 주장, 1963년 국민 협의회에 의하여 종신 국가 원수로 지명되었다. 중립주의 정치가로서 아시아·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기대를 받았으나 친중국적인 경향으로 흘러 1965년 9월 30일 군부 쿠데타 이후 실각되었다.
5대 대통령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그의 딸이다.
이런 일화가 있대. 소련을 방문한 수카르노에게 소련 KGB가 금발미녀를 방에 들여보내고 정사하는 그것을 찍었대.
그리고 우리편을 들라 하니까 수카르노가 이렇게 대꾸했지 " 몇부 더 복사해달라. 우리국민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면 지도자가
정력이 매우 좋다는것을 알고 매우 기뻐할것" 이렇게 말이지.
미국에도 치우치지 않고 소련에도 치우지지 않는 수카르노는 친중,친북한 노선을 택해.
그래서 그 유명한 1965년 9.30 쿠데타로 실각하지.
1965년 9.30 쿠데타의 전말은 아래와 같아.
다음은 수카르노의 몰락 과정이야.
수카르노가 소련,중국으로부터 얻어낸 원조는 민생이나 경제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립경기장 건설 등 상징 조작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수카르노가 중국 의료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도네시아의 친공·친중국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당수 아이디트는 1962년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했다.
공산당의 대두는 군부(軍部)와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가져왔다.
유일신(神) 알라를 섬기는 이슬람의 입장에서 공산주의의 무신론(無神論)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300만명의 당원을 일컫는 비 공산권 최대의 공산당인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친중 노선은 인도네시아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華僑(화교)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인도네시아인들의 민족감정에 배치되는 것이었다.
건국 초기부터 공산당과 앙숙이었던 군부, 특히 육군은 수카르노가 1965년 5월 기존의 육·해·공·경찰 군 외에 제5군으로서 「노농 勞農민병대」 창설 방안을 내놓자 격렬히 반대했다.
군부(軍部)·이슬람·공산당 세력들은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서로 다른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었다. 대체로 군부(軍部)는 우익(右翼 )국민당과 관료기업가층을, 이슬람 세력은 상공업자·지주(地主)·부농(富農)층을, 공산당은 노동자 계층을 대변하고 있었다.
1965년 9월30일 밤 대통령 친위대 제1대대장 운퉁 중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카르타 인근의 두 개 대대와 할림 공군기지의 공군병력, 그리고 무장 공산주의자 등 2000여 명이 이 쿠데타에 참가했다. 이들은 군부(軍部) 내 강경 반공(反共)주의자인 나수티온 국방치안 장관 등 7명의 군(軍) 고위 장성들을 습격했다.
야니 육군장관 등 세 명의 육군 장성들이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다른 세 명의 육군 장성은 쿠데타군(軍)의 본거지 할림 공군기지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기지 내에 있던 여성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으며, 토막난 이들의 시체는 기지 내 연못에 던져졌다. 나수티온은 가까스로 자택에서 탈출했지만, 그의 부관과 딸이 쿠데타군(軍)에게 목숨을 잃었다.
국민들의 반공(反共)궐기
쿠데타 소식을 접한 수카르노는 유사시 탈출에 용이하다는 생각에서 할림 공군 기지로 달려갔다. 여기서 쿠데타 주모자인 다니 공군 장관과 수파르조 육군 준장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수카르노는 『혁명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면서 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고 한다.
이런 행적 때문에 수카르노는 9·30친공( 親共) 쿠데타를 배후 조종했거나, 최소한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치명적인 혐의를 받게 되었다 (물론 수카르노는 후일 그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연루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면서 「9·30 사건은 자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아침 운퉁 중령은 방송을 통해 자신들의 조직을 「9·30운동」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들의 거사는 美 CIA의 조종을 받아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시키려던 「장군 평의회」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혁명평의회」 설치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후 1978년 인도네시아 국군 치안질서회복작전사령부에서 발간한 보고서에는 9·30 사건은 수카르노 사후(死後) 육군에 의해 공산당이 제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공산당이군 (軍)에 대해 선제(先制) 공격을 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운퉁 중령의 방송을 들은 자카르타 주둔 전략예비군 사령관 수하르토 소장(少將)은 직감적으로 이 사건이 공산당의 음모라고 판단했다.
그는 먼저 자카르타 시내 주요 거점들을 점거한 두 개 대대의 지휘관들을 설득, 이들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튿날 수하르토가 『할림 기지로 진압부대를 투입하겠다』고 위협하자, 할림 기지의 쿠데타군(軍)도 투항, 쿠데타는 사흘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쿠데타는 아주 간단하게 진압되었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군(軍)장성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0월4일부터 이슬람청년조직들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반공(反共) 궐기가 일어났다.
이들은 공산당 해체를 요구하면서 군.경(軍·警)과 함께 전국적인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
공산당 서기장 아이디트를 비롯해 25만∼100만명의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악바르 탄중 인도네시아 국회의장 겸 골카르당 당수는 이때 활약했던 이슬람 학생 조직의 멤버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事變(사변) 속에서도 수카르노는 자신이 기존에 취해 오던 정책들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민족주의·종교·공산주의의 나사콤 체제를 나사소스(NASASOS:민족주의·종교·사회주의)체제로 살짝 바꿔 존속시키려 했다.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정부內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라는 대중들의 요구도 외면했다.
1966년 3월 개각에서는 나수티온 국방치안 장관 등 군부내(軍部 內) 반공주의자 두 명을 해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반(反)말레이시아 정책과 교도(敎導)민주주의를 되풀이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더 이상 주술(呪術)을 발휘할 수 없었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그가 발버둥칠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그에게서 떠났다.
수카르노의 측근들이 부패혐의로 체포되어 사법처리되었다. 1950년대 후반 이후 억압당했던 언론들이 비판 기능을 회복하면서 수카르노의 실정(失政)과 성격상의 결함, 여성편력 등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 사이 군부(軍部)의 실권(實權)을 장악한 수하르토는 한동안 군인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그는 변화를 갈망하는 청년 세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新질서」를 제창하면서 조금씩 수카르노 체제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가 권좌에 있는 동안은 물론 수카르노가 하야(下野)한 후에도 그의 권위를 존중해 주는 자세를 견지했다.
수하르토는 9·30 사건과 관련하여 수카르노를 직접 조사하고도 그 내용을 공표하지 않았으며, 수카르노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았다. 1967년 3월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고 나서도 수하르토는 수카르노가 계속 대통령 관저를 이용하도록 허용했다.
수카르노는 1966년 3월11일 군부(軍部)의 압력을 받고 수하르토에게 「정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안전·평화·안정을 확보하고 대통령의 안전과 권한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처를 취할 것을 명령한다」는 명령서를 내주었다.
수하르토는 이 명령서에 기초하여 이튿날 공산당을 해산했다. 수카르노는 『수하르토에게 치안유지상의 결정권만을 부여했을 뿐, 정치적인 결정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고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수하르토는 1967년 3월 대통령 권한 대행을 거쳐, 1968년 3월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것은 「개발」을 내세운 새로운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수카르노는 1970년 6월21일 軟禁(연금) 상태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미국대통령 닉슨은 그의 저서 「지도자들」에서 수카르노에 대해 『내가 알고 있던 혁명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사회체제를 해체시키는 데는 전문가였으나, 그것을 재건할 줄 몰랐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고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수카르노는 지도력에 관한 불행한 사실 하나를 보여 주었다. 이는 국민들의 감정을 사로잡는 데 가장 유능한 지도자는 때때로 가장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이다.
민중 선동은 효과가 있다. 책임감을 결여하였던 수카르노는 선동으로 가장 충동적인 힘을 만들어 그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호소를 교묘하게 꾸밀 수 있었다. 두려움과 미움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선동은 이러한 감정들을 움직일 수 있다. 희망도 강력한 힘을 가지며, 선동은 그릇된 희망을 높인다>
수카르노를 실각시키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된 수하르토 .
얼마전 Daum 포털사이트에 인도가 영국자본에서 완전 독립하겠다면서 진정한 60년만에 독립이다..
라는 기사가 나오자..
어떤 사람이 "그런 인도가 동티모르를 침공해서 먹었냐?" 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바보야. 그 인도인줄 아냐..인도네시아야..인도와 인도네시아도 구분못하는놈"
이렇게 쓴 글을 본적이 있어. ㅠ.ㅠ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을 능가하는 동남아시아 독재자로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를 빼놓을수 없지.
마르코스가 1965년부터 86년까지.
수하르토가 1967년부터 1998년이니 수하르토가 동남아 독재자중에서는 가장긴 통치기간이었지.
실질적으로 수카르노 실각부터 치면 1965년부터 봐야하지.
캄보디아 시아누크공등이 있으나 이사람은 왕이었고 중간 망명기간도 있었으니..
이사람통치기간중 인도네시아 경제발전도 있었지만..동티모르 침공. 인권탄압은 악명높았고..
결정적인것은 1997년 후반에 몰려온 IMF에 인도네시아가 직격탄을 맞았지.
IMF는 우리나라만 타격을 입은게 아니라 인도네시아도 타격을 입어 결국 수하르토 하야를 몰고 온
계기가 되었어.
수하르토는 한국입장에서는 친북노선이던 인도네시아를 친한노선으로 만든 사람이지..
우리나라도 인도네시아와 수교에 기뻐했지.여의도 KBS 맞은편에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있어.
미국대사관을 제외하고 그렇게 큰 주한 대사관은 내가 알기로 인도네시아 대사관이 그다음이었지.
요즘 주한중국 대사관과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엄청 커졌다고는 하니 러,중과 수교직전까지
미국제외하고 가장 큰 주한 대사관이야.
친북노선인 인도네시아가 우리 노력보다도 인도네시아 내분으로 바로 수교를 했으니.
역설적이게도 인도네시아와 한국이 가까워진것은 수하르토때부터였어.
뭐. 초대대통령인 수카르노도 독재자이긴 하지만..뒤를 이어 등장한 수하르토때문에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이사람 독재는 독재도 아닌정도가 됬지.우리나라와 흡사하지.
이승만도 독재자이지만 뒤에 잠시 이은 윤보선-장면 정부를 뒤집은 박정희가
더 독재자였던거처럼..
수하르토가 본격적으로 등장한것은 1965년 9.30 쿠데타였어.
세계에서 이슬람교도가 제일 많은 나라는 ?
터키?사우디? 땡. 답은 "인도네시아"지
한때 세계3위의 공산당이 있던 나라는?
답이 인도네시아야.
한때 인도네시아는 수카르노의 공산당 우대정책으로 아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무려 중국공산당 다음으로 많았지.
전세계적으로는 소련 공산당 다음으로 3위였고...
이런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작살 난것이 1965년 9.30 쿠데타. 이야.
수하르토
수하르토의 악명이 높았던거는 동티모르야.
포르투갈에 식민지에서 독립한 동티모르를 독립6일만에 침공해 합병하였지.
그리고 알다시피 동티모르에서 벌인 인도네시아 군의 학살은 유명했어.
배경이 된 영화야.
그리고 그 호주인이 묵던 호텔에서 만났던 한 아이...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동족과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호주인 할아버지를 살해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나중에 그 아이가 아줌마가 되서 과거의 기억을 인터뷰 하는 내용이다.
근데 전쟁중인 국가에 가서 암호스트렐리안(나는 호주인이요)~ 이라고 외쳐봐짜...
사진이 잘못겹쳤구나..
앞에 메일은 당시 침공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 호주영화야.
나중에 동티모르 관련 참고차 볼일이 있음 추천하는 영화야..
아래 역사에서 인도네시아 침공 합병부분만 발췌한거야.
1974년 아프리카 식민지들을 대상으로 곤혹스러운 전쟁을 수행하도록 강요받던 포르투갈의 군부 지도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우익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포르투갈 신정부는 이듬해 7월, 자신의 식민 제국을 해체하기로 결정하고 동티모르에 대한 식민 통치를 1978년에 종식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인들의 독립 열기가 고조된 가운데 친포르투갈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 간에 소규모 내전이 일어났다. 내전이 독립운동 조직인 프레틸린의 승리로 기우는 가운데 포르투갈은 같은 해 8월 동티모르에서 철수했다. 프레틸린은 동티모르 전역을 장악한 뒤 같은 해 11월 28일 마침내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새 나라를 수립한 지 불과 9일 만인 같은 해 12월 7일 수하르토 정권하의 인도네시아에 무력으로 강점되었고,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티모르티무르 주)로 강제 합병되었다. 이는 국제 사회의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와 총회는 인도네시아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고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합병 철회를 요구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를 제외하고는 어느 국가도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강점을 용인하지 않았다(오스트레일리아는 1978년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공식 인정함).
프레틸린 게릴라들은 산악지대에 은거하며 기나긴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이미 무력 침공 2개월 만에 동티모르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는 6만여 명을 학살한 인도네시아군은 이들의 저항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1만 7,000~3만 5,000명의 군인이 상주하며 대규모 진압작전과 강제이주, 초토화 작전을 펼쳤는데, 이 와중에 납치·고문·강간·즉결처분 등의 반인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1991년 11월 12일, 2주 전 시위에 가담했다가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살해된 세바스티앙 고메스를 추모하기 위해 산타크루스 공동묘지에 모인 군중들이 평화시위를 벌이던 중 인도네시아군의 계획적인 무차별 발포로 271명이 죽고 382명이 부상하고 250명 이상이 실종된 이른바 '딜리 대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동티모르 전역으로 확산되자 인도네시아군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인도네시아 강점기의 대표적인 집단학살 사건으로 꼽히는 딜리 대학살사건은, 여느 사건과 달리 마침 학살 현장에 있던 미국 언론인 에이미 굿먼과 앨런 네이른에 의해 몰래 녹화·반출된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딜리 대학살사건을 계기로 '동티모르 행동연대'(East Timor Action Network/ETAN)와 같은 비정부기구들이 결성되어 동티모르인들의 저항운동을 측면 지원했다. 그러나 동티모르인들의 저항운동은 남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과 유착된 미국 등 강대국들의 침묵과, 국제 사회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비전투원이나 항공기를 목표로 한 테러·납치 등의 과격 행위를 일체 삼간 프레틸린의 온건한 투쟁 노선에 가려져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이윽고 1996년 동티모르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카를로스 펠리페 시메네스 벨로 주교와 주세 라모스 오르타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동티모르 사태는 비로소 국제 사회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되었다.
1998년 5월 철옹성 같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이 경제위기와 대규모 반정부시위에 밀려 마침내 붕괴하고 바차루딘 주수프 하비비 대통령이 이끄는 신정부가 출범함으로써, 1975년 이후 인도네시아군의 잔학행위와 기근·질병으로 전체 인구의 1/4에 이르는 20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땅 동티모르에 희망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비비 정권은 이듬해 1월 국제 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동티모르의 장래를 결정할 주민투표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8월 30일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의 집요한 투표 방해로 2차례 연기되었던 주민투표가 UN 주관하에 실시되었다. 개표 결과 유권자의 78.5%가 인도네시아가 제안한 특별자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택했다. 그러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는 주민들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닥치는 대로 살인·납치·방화 행위를 자행하는 한편 주민들을 서티모르로 대거 강제 소개했다. 이들의 난동으로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가운데 마침내 같은 해 9월 말 오스트레일리아군을 주축으로 한 UN 평화유지군이 민병대를 진압하기 위해 딜리에 입성했다. 다음 달 20일 인도네시아 의회가 동티모르 주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여 합병을 포기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24년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UN 관리하의 비자치 지역이 되었다.
동티모르의 역사를 알아야 겠지.
수하르토의 철권통치는 밖에서도 잘알려져있었지만 세계에서 무시할수 없는 국가에 석유수출국인 인도네시아를 미국뿐아니라
일본, 한국등이 다 눈을 감아주었지.
특히 1975년 인도차이나 3국 공산화는 수하르토(인도네시아)와 마르코스(필리핀)에 힘을 주는격이었어.
그나마 직선제였던 마르코스와 달리 수하르토 대통령선출은 우리나라 박정희대통령때 유신이나 전두환때 통일주체국민회의나 대통령선거인단때 거수기식 선출을 생각하면 돼.
골카르당이 집권당이자 부정을 할수 없는 권력이었지.
1981년에는 전두환대통령이 아세안 5개국 (지금은 베트남이나 미얀마도 포함되어있으니 5개국이 아니지만)방문차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였고. 수하르토도 답방형식으로 1982년 한국을 방문하였지.
수하르토의 몰락을 불러온거는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였어. 수하르토는 외국자본이 인도네시아를 해친다했지만 결국 캉드시 IMF총재앞에서 싸인하는 신세가 되었고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하르토 집권때나 하야때나 폭동에는 동남아 자본을 가진 화교들이 타겟이 되었고 수하르토가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긴 했지.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로 번지고 결국 이 시위는 그가 부통령인 하비비에게
자리를 물려주는걸로 끝나. 2008년 1월28일 기사...
32년간 인도네시아 개발 독재의 상징이었던 수하르토(사진) 전 대통령이 27일 86세로 숨을 거뒀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그는 심장·신장·폐 기능 이상에 따른 빈혈과 저혈압 증상을 보여 4일부터 자카르타의 페르타미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199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하야한 뒤 자카르타의 자택에서 은둔 생활을 해 왔다. 수하르토는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1921년 자바섬의 하급관리인 아버지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군→일본군→독립군’을 거쳐 인도네시아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65년 군부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67년에는 병석의 수카르노 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아 대통령이 됐다. 그는 천연가스·석유 등 풍부한 자원을 기반으로 국가 주도 경제개발을 추진했다. 집권 20년 만에 인도네시아의 1인당 국민소득(GDP)은 70달러에서 1000달러로 크게 늘었다. 연평균 6%를 넘는 고속 성장을 이끌며 ‘개발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러나 친미·반공 노선을 내세운 무자비한 독재 정치로 많은 국민들의 원성도 샀다. 반대 정당은 허용되지 않았고, 수십만 명이 살상당했다.언론자유를 외치는 수많은 언론인들이 거리로 내쫓겼다.
그러면서 그의 가족·측근들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해졌다. 그의 부인과 자녀들(3남3녀)은 자원개발·자동차·석유화학·은행 등 국가 기간 산업을 장악해 국부를 가로챘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주식회사’라는 말까지 나왔다. 유엔과 세계은행은 수하르토 일가가 150억~350억 달러(약 14조~33조원)의 검은돈을 축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철옹성 같던 그의 권력도 97년 외환위기로 인해 무너졌다. 경제난에 따른 폭동과 반정부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자 98년 물러났다. 그러나 다른 국가의 독재자와는 달리 처벌받지 않고 ‘평온한’ 말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