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의 비극은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신비와 궁금속에 가두어 두었다.
비록 제3국을 통하여서만이 갈수가 있는 산이지만 “백두산구경을 하러가자” 라는 동요 의 노랫말대로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4박5일의 백두산 구경을 직장 산악회 에서 계흭한 산행에 참석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한다.
출정 첫날 ( 6월 25일 )
날씨도 좋고 인천공항 으로 향하는 버스 창가의 풍경도 새로움을 느끼며 공항에 도착 하였다.
공항에서 만난 일행들 의 배낭이 야영 스케즐 관계로 두터운 옷에 침낭, 메트리스, 텐트 등 장비 때문에 묵직해 보인다.
기대감에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를 기다렸지만 12:45분에 출발 한다는 중국민항은 사과 한마디도 없이 4시간여 가까이 지나서야 출발하게 되었다.
드디어 16시2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 는 서해바다 를 건너 두어시간 남짓지나 심양공항 에 도착한다.
요녕성 의 성도인 심양 의 옛 이름은 귀에도 낮 익은 만주국 의 봉천으로 심양공항 은 우리나라 지방공항보다 규모도 작고 시설도 훨씬 낙후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시간보다 1시간이 늣고 주변에 산하나 없이 탁트인 넓은 대륙이 중국땅에 온것을 실감케 한다.
마중을 나온 20대중반 의 조선족 출신 여자가이드 안내에 따라 관광버스에 올라 심양시내를 향하였다.
공항에서 시내에 들어서는 길은 간간이 아파트 가 늘어서 있는것 외에는 한적 하였으며 도중에 있는 부르하통하 라는 강풍경이 한강을 쪽 빼다놓은 것같이 눈에 익는다. 고수부지에 다리까지도 한강의 다리와 모양이 똑같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중국관리가 한국의 발전에 대한 견학을 와서 한강을 보고 똑같이 꾸며 놓았다 한다.
부르하통하 라는 어감이 아마도 심양이 청나라의 발상지인 것으로 보아 여진족 의 말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음식점에서 된장국을 저녁으로 먹고 버스로 시내를 한바퀴 돌았다.,
코리아타운 이라는 서탑거리 에는 한국간판이 주를 이루고 북한정부에서 운영 한다는 제법 큰 식당들도 눈에 띄었다.
심양의 특징은 교차로에서 차량들이 신호를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이다.
웃통을 벗고 거니는 사람에 무단횡단자 에 너무나 무질서하다.
사회주의국가에서 이러한면이 있다는것에 놀랐고 꾸미지 않고 세련되지 않은 이사회가 아이로니 하게도 사람사는 숨결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행기연착 때문에 시간이 없어 버스로 시내를 한바퀴 도는 것으로 관광을 마치고 20:50분경 연길행비행기에 올랐다.
길림성 에 속해있는 연길시 인구는 약 30여만 명 정도로 주민의 약 56%가 조선족 인데 요즘은 한국바람 을 타고 한국 등 외지로 많이 빠져나가 훨씬 못 미친다한다.
관광버스로 30분정도 걸려 연길시내에 있는 백산호텔 에 도착 하였다.
호텔까지 의 시내풍경이 온통 한국적이다.
길림성 중 우리나라의 시,군에 해당하는 연길, 용정, 화룡, 훈춘, 도문, 안도, 왕청 을 합쳐 조선족자치주로 관리하는데 노래방 등 한국에 있는 업소가 거의 다있고 화폐도 우리돈이 그대로 통용된다.
무엇보다도 간판들이 한글이 위에있고 밑에는 한문으로 되어 있있으며 조선족 자치주에서 한글을 안쓰면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그래서 한족을 포함한 다른 민족들도 심지어 조그만 이발소까지도 한글간판을 달았는데 간판이름도 앞뒤가 맞지 않는것도 많았지만 도시가 온통 한국색 이어 우리나라 에 온 기분이다.
방을 배정받고 짐정리를 하니 맛사지 받을 사람은 로비로 나오라고 한다.
우리팀 들은 주당들이 많아 팀웍도 다질겸 술을 마시기로 의견일치를 봐 첫날부터 술에 젖었다.
발맛사지 는 우리 돈으로 1만원 전신맛사지는 2만원인데 연변에는 우리나라 돈으로 가격을 흥정하며 오히려 우리돈 쓰기가 편리하다.
술취한 힘으로 중국에서 의 첫날밤 에 빠졌다.
둘쨋날 (6월26일)
4시간정도 자고 아침6시에 기상이다.
호텔 아침식이 부폐식인데 음식 가지수가 무지하게 많다.
한두점씩 접시에 담았는데도 반도 못가서 접시가 차 그냥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중국 음식들이 향내가나서 도저히 하나도 입맛에 안맞다.
먹다만 접시를 물린 후 된장국에 밥말아 먹고 대략 식사를 때웠다.
맛없는 음식이 더부룩함 을 느끼며 07시경 연길시를 떠나 백두산의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로 약 4시간 거리의 이도백하 를 향하며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이곳부터 는 조선족 교포 3세인 현지가이드 2명이 안내를 하였는데 김철 과 이호남씨 로 모두가 30살 안팍으로 그중 한명은 연변방송국 에 출연한다는 미남형 으로 모두가 성의가 있고 지식도 해박하여 맘에 들었다.
차창에 비치는 풍경이 우리네 시골풍경 과 거의 흡사하다.
우리네시골 뒷동산 이 있고 논에 심은 벼와 밭에 자라는 감자, 옥수수 등 작물들이 고향에온 기분이다..
특이한점 은 주거형태가 창고같이 길쭉하고 굴뚝이 두세개 되는 집도 있다.
굴뚝 하나에 한세대 라니 한지붕밑에 여러 세대가 살고있고 상하수도 가 없어 마침 내린 비로 동네 길이 질퍽거린다.
똑같은 집구조가 사회주의국가 임을 쉽게 연상할 수가 있었고 주거 환경만 보아도 한눈에 연변사람들의 생활수준을 알수가있었는데 연변과 가까운 북한 사람들은 연변사람들은 모두 부자들이라고 생각한다니 북한 사람들 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수있을것 같았다.
이도백하 로 가는 길옆으로 백두산 의 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해 설치한 철길이 나있는데 백두산 의 산림이 얼마나 울창한지 짐작이 간다.
산들은 백두산으로부터 뻗어내린 분지이기 때문에 높지않고 밋밋하였으며 산이나 구릉을 수없이 지났음에도 묘지가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 말로는 중국인구가 13억이니 산사람 살기도 어려운데 죽은 사람들이 모두 묘를 쓰게되면 먹고사는 땅이 잠식을 당하니까 등소평 과 주운래가 솔선수범 하여 스스로 화장을 택하였고 아예 법을 만들어 화장을 의무화 하도록 했는데 화장장이 없는곳은 매장이 허용되며 기필코 매장이 하고 싶으면 그곳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길가의 논밭 크기가 너무나 작다.
논의 경우 10평도 안되는 것도 많았는데 중국에는 개방정책 후 농지 모두를 농민들 에게 분배했다고 한다.
그런데 분배 과정에서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의 차이 때문에 획일적으로 분배를 못하고 좋은땅은 좋은땅대로 메마른땅은 그 나름대로 배분을 하다보니 하는수없이 그리됐다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이도백하 로 가는도중 명월호 라는 커다란 관개용 저수지 가 나온다.
인천공항에서 연길직항 노선을 타고 가다보면 명월호 상공을 날아가는데 승객들이 백두산 천지로 착각들 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명월호 가 2만여명의 한족과 조선족이 동원 되어 곡괭이 와 삽으로 직접파서 만들었다 하니 중국의 노동력만큼은 알아 줄만하다.
버스가 중간에 용변도볼겸 휴게소에 들른다.
휴게소라야 상하수도 시설이 없다보니 화장실도 냄새가 진동하는 푸세식 으로 그나마 남.녀칸도 거적으로 막았던것을 판자로 막아 업그레이드 했다고 한다.
휴게소에 각종 약재와 농산물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역시 산삼과 장뇌삼이 제일먼저 눈에 들어온다.
중국 산삼을 밀수 해다가 뇌두를 본드로 붙인 후 고가로 판다고하여 우리 TV에 보도된바있어 중국 산삼을 본적이 있는데 산삼임 은 틀림없음을 알수있었다.
장뇌삼 도 진품은 맞으나 뇌두를 본드로 붙여 수령을 속이는 경우가 있어 어차피 먹을려면 뇌두를 떼어내고 먹으라한다.
처음에는 산삼의 경우 50만원부터 값을 부르고 장뇌삼의 경우 5만원부터 값이 흥정이 되는데 장뇌삼의 경우 10분도 안돼 값이 2만원 까지 내려간다.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되자 1만원까지 값이 내려가니 이놈의 값을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장뇌삼의 경우 같은자리서 누구는 3만원에 먹고 누구는 1만원에도 사먹었으니 같은 자리서 비싸게 먹은 사람들은 벌레씹은 얼굴 들이다.
그런데 현지가이드 말이 더 있으면 5천원까지도 값이 내려간다고 하니 중국사회가 아직 시장경제로 자리가 잡히지 못하였음을 알수있었다.
그나마 그전에는 관광객들 에게 겁을주고 바가지를 씌웠었다고 한다.
하여간 장뇌삼의 경우 는 내가봐도 싼 것은 틀림이 없어 선물용으로 몇 뿌리사오고 싶었지만 가이드 말이 공항에서 통과가 않된다고 하니 퇴직하여 보따리 삼장사나 해볼까 하는 생각을 접어버렸다.
현지 가이드 이호남 씨가 노래를 잘한다 하여 시켰는데 노래가 수준급 이며 “경상도어머니” 란 노래가 슬프게 울렸다.
간도에 사는 우리 실향민들의 고향 그리는 애환이 서린듯하여 숙연해 진다.
김철씨 가 일행 전체를 위하여 아이스크림 을 쏘겠다고 하여 길가의 조그만 동네 상점에 들렀다.
우리나라 면소재지 정도의 동네였는데 길거리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길가에 그냥 버려도 양심 찔리지 않을정도 이니 알만 하다.
그러나 영악한 휴게실에서 의 장사치들 보다 순진한 사람들이라 정겹다.
미용실에서 손님 머리하는 옆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고 법석을 떨어도 그냥 씩 웃고 마는 것을 보고 오히려 우리행동이 부끄러웠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김철 씨가 값이 얼마인지 알아 맞추라는데 구구각각 값이 나온다.
최종적으로 우리 37명이 먹은 값이 우리돈 으로 1040원 이었으니 시골농촌 의 경제수준을 짐작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나 연변 조선족들도 한국에서 살면서 씀씀이 가 커져 연길시의 경우 일단 쓰고보자 는 풍조가 들어 큰일 이란다.
연변 동포 들이 제일로 가고 싶어 하는 곳 은 한국으로 입국하기위하여 드는 비용이 중국돈 5만원 정도라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는 650만원 이다.
중국에서 웬만한 아파트 는 3천만원정도면 산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3년정도 일하면 아파트1채 나 가게하나 정도를 낼수가 있기에 이런 거금을 들여서라도 한국에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불법체류를 한다고 한다.
버스가 이도백하 에 도착하였다.
백두산을 관할하는 길림성 안도현 안의 조그만 마을로 고려식당 이라는 한국음식 전문식당 앞에 한국 관광객을 실은 버스들이 여러대 서있다.
닭백숙으로 점심을 한후 백두산 등정이 시작되는 산문으로 향한다.
길 양옆으로 민가는 전혀없이 백두산 원시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데 거의가 자작나무와 낙옆송이 주를이루며 유명하다는 미인송은 볼수가없었고 반달곰과 고라니가 많이 서식하며 백두산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한다.
13시경, 천지라고 씌여있는 해발 1920미터 지점의 산문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가 여러대 늘어서있다.
입장표를 끊고 배낭을 간단히 꾸린후 나머지짐은 찝차로 올려 보내고 본격적인등산에 올랐다.
빽빽한 수림 속의 맑은 공기가 폐를 파고드니 기분이 상쾌하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피를 빠는 파리종류 와 모기떼, 응애, 진드기까지 달려드니 연신 팔을 휘두르며 올랐다.
한참 올라가니 중국 국가대표들이 연습한다는 스키장이 보인다. 혹시나 파리떼 가 덜할까싶어 리프트 밑을따라 올랐으나 마찮가지다.
울창했던 수림이 사라지고 살아서천년 죽어서도 천년 간다는 주목들이 죽은 나무와 산나무 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준다.
서늘한 기운을 느끼는 순간 주위의 나무들이 간곳이 없고 탁트인 대평원 이 펼쳐진다.
멀리 능선끝으로 산정상이 보이고 땅에는 땅바닦에 납작 엎드린 이름을 알수없는 수많은 야생화 들이 울긋불긋 피어난다.
어떤놈 들은 바람에 하늘거리는가 하면 거의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이런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수가 있을까, 7월이되면 더 화려해진다하는데 지금도 천국에온 기분이다.
골짜기마다에는 아직 녹지않은 눈과 얼음이 깔려있고 1키로 정도 떨어진 발아래로 장백폭포 가 보인다.
커다란 물기둥이 보이고 그 소리가 멀리서도 들리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 가면 웅장할것 같다.
장백폭포 훨씬 아래쪽 산기슭에 아담한 연못같은 소천지가 보인다..
가을날씨 같은 선선한 날씨에 죽자사자 덤벼들던 해충들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고 자켓을 꺼내 입어도 더운줄 몰랐다.
산행을시작한지 4시간좀 않돼서 중국쪽 에서 천지를 볼수있는 해발 2670미터의 천문봉 에 도착하였다.
중국에서 천문봉 바로밑 까지 자동차길을 닦아놓아 자동차로 올라오면 걸어서 10분이면 천문봉에 오를수있다.
개발에 묻쳐 자연을 너무나 훼손한느낌이다.
분화구 가 거의 직벽에 가까울정도로 경사가져서 아찔하다.
분화구아래에서 피어난 안개에 가려서 천지의 일부분만 내려다보이는데
수면까지는 약 400미터가량의 분화구가 깍아지른듯한 절벽으로 입을쩍 벌리고 있으니 너무나 아찔하다.
곧이어 안개만 끼고 아무것도 안보여 숙소인 백두산산장으로 들어섰다.
백두산산장은 백두산을 관할하는 안도현 의 기상 관측소겸 ,백두산 관리소겸 산장으로 시설이 낙후되어있고 규모도 작았으며 산장운영은 민간이운영하고 있었다.
산장 부근에 우물이 있는데 물이 꽤 고여있고 그 물을 두레박으로 퍼서 허드렛물 로 사용한다고 한다.
산정상에도 얼음녹은물이솟아 흐르는데 백두산에는 눈비가 자주내려 아주 가물을때 를 제외하고는 물이 흐른다 한다.
산장에서 준비한 송아지고기구이로 술판이 벌어 졌다.
모두들 피곤한 몸이지만 분위기가 익어 취할정도로 마셨다.
배부르고 술취하자 잠이 쏟아졌지만 바깥은 을씨년스러워 밤바람 쏘일일도 없고 잠잘곳을 찾았으나 마땅치가 않다.
좁은 방에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잠잘 생각을하니 평소 잠을 잘못이루는 나로서는 용기가 않난다.
나와 같은 심정인지 몇몇사람들 끼리 산장건물을 의지하여 비박을 하기로 하였다.
바람이 덜 부는 곳에 메트리스를 깔고 옷을 껴입은후 침낭속으로 들어가니 술기운에서 그런지 포근함을 느끼며 잠에 빠진다.
얼마정도 잦는가, 바람이 몹시불어 잠을깨니 겨우 새벽2시경인데 캄캄한 어둠속에 바람이 세차게 불며 빗방울도 후두둑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도 몸을 뒤채이며 하나둘 산장 안으로 들어가는데 잠자는 방이 너무 좁아서 누울곳이 없다.
앉아서 긴 밤을 새우니 집생각이 간절하다.
셋째날 ( 6월 27일 )
아침에 일어나는대로 천문봉 에 올랐다.
날씨가 흐린데도 다행히 천지전체가 열려 있다.
사진에서 보아 느낀 것 보다 생각밖 으로 호수가 웅장하고 넓었다.
평균수심이 213.3미터 최고수심이 384미터 에 제일 긴곳의 넓이가 3.6키로미터 라니 천지괴물이 살고도 남을 만하다.
가물거나 비가와도 거의 같은수량이 달문을 거쳐 장백폭포로 흘러내리는데 달문쪽 에는 아직 얼음이 녹지않고 수면위에 둥둥 떠 있었다.
16개 봉우리 중 건너편 북한지역에는 아직 눈이 쌓여있고 백두산의 정상인 장군봉이 우뚝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가운데 그 아래 물가로 북한군 초소가 있고 초소에서 뒤쪽 산정상 까지 모노레일이 깔려 있다.
북한과 경계지점인 비류봉 아래로는 바닥이 평탄하여 물가에 야생화가 피어있는것이 멋지게 목격된다.
백두산 은 누구나 천지를 보러오는 것인데 그 순간 느끼는 희열감은 이루 말 할수 없었고 역시 잘왔다 생각함에 충분하였다.
힘들여 백두산에왔다가 천지를 못보고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천지라고 하는데 70% 가량에 해당하는 천지가 되지 않았음을 행운이라 생각했다.
흔히 알기로는 천지물이 흘러 압록강과 두만강을 이루는 줄로 알았으나 사실은 달문으로 빠진물은 장백폭포를 거쳐 이도백하 를 지나 송화강의 지류를 이룬다 한다.
천지를 뒤로한채 북한과 경계지역인 해발 2527미터 인 비류봉으로 향한다..
지역 관리하는 사람의 안내를 받아 비류봉 으로 향하는 길은 깍아지른 절벽위로 길이 나있는데 우측으로 는 천지물을끼고 분화구가 입을 딱 벌리고있고 세찬 바람이 절벽쪽으로 불어 아찔아찔하였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갔지만 바람에 날리면 곧바로 죽음이다.
비로봉 정상에서 북한과경계인 6호경계비 로 내려가는 곳은 평탄하며 야생화가 만발하게 피었다.
경계비라는 것이 달랑 표석하나 세운것이 국경인데 같은 민족끼리는 남북한이 철책을 치고 삼엄한 경계를 하는데 비하여 중국과 북한은 우방이어서 그런지 양쪽모두 경비병을 볼수가 없었다.
아마도 북한쪽 에서는 멀리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경계비에서의 기념촬영 후 속히 철수하여 왔던길을 되돌아오는데 비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숙소로 돌아와 꿀맛같은 라면으로 점심을한후 계흭한대로 천지물가로 야영을하고 산천어도 잡아 맛보기로 했다.
백두산 산장에 중국 지방 관리들의 회의실이 있는데 이친구들 오기만하면 천지산천어를 내놓으라고 하여 그때마다 산장관리인들이 천지에서 산천어를잡는다 한다.
천지에는 그동안 어류가 전혀 살지 않았었는데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시로 12종의 어류를 방류하였으나 오직 산천어만 살아남아 번식이 많이 되었고 나머지고기는 적응 못하고 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천지의 산천어를 보호하고 있고 이쪽에서 산천어를 잡으면 보트를 타고와서 그물을 걷어간다고 한다.
우리 일행들이 짐을 꾸리고 막 나서는데 먼저 현지를 답사한 가이드 말이 천지 안에서 안개가 피어오르고 쏟아지는 빗속에 도저히 앞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천지로 내려가는 길도 단 하나로 앞사람도 못볼 정도의 시야로 천지를 내려가는 것은 너무 위험해 야영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천지물 로 밥해 먹고 달문 물줄기 를 따라 64미터 높이의 장백폭포 옆으로 내려오려는 계??이이 무산되어 너무 아쉬웠다.
이 야영계?? 때문에 짐들이 많아 얼마나 고생들을 했는데...
하는수 없이 하산을 한후 장백폭포 못미쳐 백두산온천으로 갔다.
온천물은 아직 용암의 뜨거운 기운이 남아있어 바위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데 집수관을 통하여 온천으로 가고 일부 물길을 만들어 그물에 계란을 삶아 현지에서 판다.
1,000원에 3개씩으로 계란 흰자는 익었는데 노른자는 반숙정도이다.
계란을 사먹고 백두산온천으로 향하였다.
온천시설은 동네 목욕탕 정도로 시설이 낙후 되어 있지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뜨거운 노천탕에서 온천하는 기분이 피로를 가시게 한다.
목욕 후 가벼운 마음으로 천지호텔 에 투숙하였다.
호텔이라 는 것이 민박집 구조로서 취사를 조별로 각자의 방에서 하였는데 오랜만에 우리 음식을 만들어 먹으니 꿀맛같으며 느긋한 시간을 가져본다.
저녁식사 후 호텔측에서 급조한 야외테이블에서 라이브 로 노래를 부르며 흥을 돋우고 소주와,호골주, 들쭉술, 옥미주, 로 술파티가 벌어졌는데 역시 소주가 인기다.
연변의 노래방은 옛날 우리나라의 스텐드빠 식으로 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르며 술과 아가씨까지 조달이 된다.
가이드가 우리 37명 인원에 맥주와 노래를 무한정으로 부르기로 하고 20만원에 계약을 했다고하여 2차로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약간의 팁으로 아가씨들 까지 조달하여 홀을 완전히 점령 하다시피하며 신나게 먹고 놀았으니 국내 같으면 술값이 상당히 많이 나왔을 것이다.
우리나라 돈이 이곳에서 위력을 보인다.
넷째날 (6월 28일)
술주량이 남보다 뒤지는편이 아님에도 정신없이 숙소에 들어왔는데 눈을 떠보니 어제의 비가 완전히개인 맑고 상쾌한 아침이었다.
간밤에 먹은 짬뽕술이 장뇌삼과 호골주를 먹은 덕분인지 몰라도 몸이 거뜬하고 상쾌하다.
무엇보다도 공기가좋은 덕분일것이다.
08:30경 아침을 해먹고 버스에 올라 두만간 발원지로 향한다.
버스가 민가가 전혀없는 군사도로 들어선다. 중국 공안차량 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쭉 뻗은 비포장 도로를 따라 가는데 길가의 우거진 삼림이 인상적이다.
버스가 두만강 발원지 에 이르른다.
두만강 발원지 는 중국과 북한 의 공동 경비구역 안에 있으며 그곳도 역시 국경이 경계비로 구분되어 있었다.
두만강 발원지 는 직경이 약 3미터 정도 되는 웅덩이로 땅에서 샘이 펑펑 솟아올랐다.
물을 뜨려고 막상 페트병을 준비 하였지만 북한군인 이 나올 것 같아 겁들을낸다.
중국쪽은 경계를 않서는데 북한군인 은 경계를 선다고 하며 만일 북한군인 이 나타나면 연변조선족 이라고하고 아무말도하지 말라고 한다.
현지가이드 는 북한을 다녀온적이 있다고하여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도둑질 하는 기분으로 발원지물을 뜬후 황급히 빠져나왔다.
버스에 승차하여 얼마 안간것 같음에도 길가로 나있는 두만강 의 시발지 가 제법 작은 개울이 되어 흐른다. 간밤 에 비가 온 이유도 있지만 연중 강수량 이 많아 물이 항상 풍부하다고 한다.
버스 가 국경인 두만강 줄기를 따라 계속 내려간다.
한참 후 바리케이트 가 쳐지고 중국군인들이 경계를 하는 군작전지역 으로 들어섰는데 군인 들이 제지를 한다.
공안이 나가 뭐라 말하니 중국군인이 바로 옆에 있는 김일성 낙시터 로 안내하며 경계 를 서준다.
북한과 10미터 정도폭 의 개울 인데 개울가 에 북한쪽으로 약 1평정도 넓이의 바위가 있고 양국 간에 목재로 구조물을 해 놓았는데 김일성 이 소위 말하는 통일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바위에 걸터앉아 낚시를 하며 전쟁구상 을 했다는 장소로 바위 주변에 20여 쎈티가량 돼 보이는 산천어 가 노니는 것으로 보아 고기가 무지하게 많은 것 같다.
버스가 계속 하류로 내려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많아지는데 아직 강다움은 없고 큰 개울 정도이다.
버스를 대놓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은 근처 마을 식당에 주문을 했다는데 자동차로 싣고 와 숫불에 석쇠를 얹고 고기를 구워 들쭉술로 한잔하니 새로운 기분이다.
식당에서 온 여자들 중 서울 가리봉에서 일하다가 7개월 만에 강제출국 당하여 빗만졌다는 아줌마를 만났는데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무지 반긴다.
가리봉에서의 짧은생활이 나름대로 추억이 된가보다.
화룡 이라는 곳에 이르자 오랜만에 중국과 북한의 민가 가 나온다.
50여 미터 의 개울 폭 건너 강뚝 에 북한인 들이 소달구지를 몰고 가고 뚝방에 나와앉아 담배를 피우며 밭에서 일들을 하는 것이 목격되며 떠드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밤에는 아이우는 소리도 서로 들린다하는데 그러고도 남을 만큼 개울하나 사이로 동네가 있다.
개울을 가로질러 시멘트 콘크리트다리가 놓여있고 양쪽에 세관이 있으며 다리 건너편으로 인공기가 높이 날리는 것이 목격된다.
물깊이도 비가온 후 인데도 무릎도 차지 않고 지키는 사람도 없으니 뛰어서 건너면 1분도 채 안되어 건널수 있는 거리이니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탈북을 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현지가이드 말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탈북주민을 신고하면 우리 돈으로 50만원의 상금이 나와 한족들은 상금 때문에 거의 신고를 하며 이곳 화룡도 연변자치주 이지만 두만강 상류는 한족들이 많이 살고있어 막상 건너온다해도 숨겨줄 사람이 없어 거의 붙잡힌다한다.
그런데 두만강 하류쪽인 훈춘 등지에는 거의 조선족들이 살고있고 같은 동포라서 쉬쉬하며 숨겨 주기도하고 말씨가 같아 표시가나지 않기 때문에 탈북 주민들은 하류를 통하여 탈북 한다고 한다.
버스가 한참 달린 후에야 제법 강다워 진다.
차창으로 보아도 수심이 제법 깊어진 것 을 느낄수 있으며 수량도 많아졋는데 아무리보아도 배도 보이지않고 노젖는 사공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 합창 한 두만강 뱃사공 노래만 허공으로 사라진다.
용정시로 들어서니 2008년 뻬이징 하계올림픽 대비로 도로확장공사를 하느라 야단이다.
연속극 토지에 나오는 서희 와 길상이를 떠올리며 상상했던 용정시와는 전혀 딴판이고 멀리 지평선이 보일정도로 넓은 벌판 이라는것 외에는 논이많이있고 밭에는 감자, 옥수수, 참깨 등 우리나라의 농촌풍경과 너무나 흡사하다.
연변 조선족들 은 조선자치주 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고있어 학교에서 중국어를 따로 배우는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중국어를 전혀 못한다고한다.
그래도 우리나라 와 중국과 축구를 하면 중국편을 들고 우리와 북한과 경기를 하면 북한편을 든다고한다.
왜냐하면 연변쪽 사람들은 거의가 북쪽지방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이 많고 북한 사람들이 너무 못살아서 불쌍하다 는 동정심리에서 그렇다고 한다.
특히 용정쌀을 가리켜 평강거리 쌀이라 하는데 그 맛이 일품이며 청나라 마지막 임금 부이가 이곳의 쌀을 먹었다한다.
시내 가운데로 흐르는 해란강은 가물때는 물이 마른다하는데 강가의 미루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해란강 건너편으로 비얌산이 보이고 비얌산위로 일송정 정자가 보이는데 옆에있는 소나무는 말라 죽었다 한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다는 현재의 용문고인 대성중학교에 들어서니 마침 학생들이 하학길이다.
학교 분위기가 우리나라의 어느 고등학교에온 기분이다.
기념관 앞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기를 로 시작되는 별을혜는 밤 의 윤동주 시인의 詩碑 가 세워져있으며 안에서는 안내원이 학교소개를 하는데 이학교 출신들이 남북한의 유명인사들이 꽤 많다는것을 느꼈고 특히 우리나라 의 문익환 목사도 이학교 출신임을 알았다.
역시 명문임에 틀림없었다.
용문고를 나와 연변동방곰락원 이란 곰사육장에 들렀다.
우리 안에서 자연번식을 하며 3천5백여 마리를 기르는데 한살부터 4살 이상까지 구분하여 기르며 4살이 넘으면 웅담을 채취한다고 한다.
웅담을 채취하는 곳을 보니 곰을 수평진 좁은 철창 안으로 몰아넣고 납작 엎드리게 한후 사람이 밑으로 들어가 1주일에 한번정도 꼴로 채취를 하는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고통도 없이 한다지만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땅거미 지는 들녘을 지나 다시 연길시내에 들어서 북한에서 운영한다는 해당화식당 에 저녁을 먹으러갔다.
식당종업원 들이 모두 예쁜 한복을 입었는데 얼굴들이 모두 미인들이었으며
음식은 떡과 산천어회, 송이요리, 등 여러 음식이 나왔고 모두가 입맛에 맞아 좋았다.
술은 빽알 종류였으며 공연단의 공연이 흥을 돋운다.
식당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가는데 식당에 들어갈 때 나에게 동냥통을 내밀던 아기를 안은 거지가 하필이면 또 동냥통을 나에게 내민다.
마침 1,000원짜리가 쥐켜지기에 좋은 일 한답시고 줬다니 어느새 다른 거지가 달려든다.
싫은 표정을 하였으나 버스문 앞에 드러누우며 막무가내다.
도망 치다시피 버스에 올랐으나 좋은일 하고도 후회스러웠다.
곧바로 연길 공항으로 가니 용정에서 주문한 참깨가 공항에 도착하였다.
남방 지역 과 달리 연변은 우리나라 북쪽으로 우리와 기후차이가 별로 없어 참깨가 좋다 한다.
1인당 10키로까지 반출이된다지만 짐이될것 같아 5키로에 우리돈으로 18,000원 샀으니 싸긴 싸다고 생각 되었다.
장춘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백두산과 연변의 여행을 접었다.
밤늣게 장춘에 도착 하였다.
장춘은 인구 700만의 도시로 이곳에는 도시의 질서가 잘 잡혀있음을 느꼈다.
호텔에 도착한후 연길에서 맛사지 못받은것이 아쉬워 깡맥주 2개를 시켜먹으며 느긋하게 즐길려 하였지만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못해 이내 잠이 들었는지 흔드는 기운에 잠을깨니 이미 끝났단다.
허망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와 골아 떨어졌다.
다섯째날 ( 6월29일 )
아침 호텔식이 연길에서와 같이 맛없는 부폐식 이다.
먹는둥 마는둥 하고 비행기에 오르니 마음은 벌써 집에가 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역시 시설이나 써비스 가 중국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멋지다.
그동안 정도 들었던 일행들 과 헤어져 버스에 오르니 고독함이 밀려오며 잠이 쏟아진다.
집을 떠난지 5일뿐이 않되었는데도 한 열흘은 지난것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꿈만같다.
첫댓글 꼼꼼히 쓰신 후기 잘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한편의 서사시네요..차분하신 솔바람님의 얼굴이 그대로 묻어있네요..여행기 감사합니다~! 멋진 추억 담으신것 축하드리고요 ^^
좋은곳 다녀오셨네요~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