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자의 믿음
2024.03.24.(사순절제6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2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22/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간청하였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2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나아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하였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2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27/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28/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태 15:21-28)
들어가는 말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셨습니다.(14:13, withdrew) 하지만 이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를 찾아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깊은 연대의 정(compassion)을 느끼면서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어지는 장면은 제자들과 함께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연대의 정에 함께하면서 단순한 기적의 목격자에서 기적의 참여자가 됩니다. 이제 하늘나라 운동은 제자들의 연대의 정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예수님의 외딴 곳으로 물러나심은 그분의 사역에 터닝 포인트가 되는 지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을 온몸으로 익혀갈 것입니다. 그들의 사역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연대의 정을 시대와 장소에 알맞게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의 운동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놀라운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한낮 마술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적은 곧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게네사렛 땅으로 건너갔고 그곳은 곧바로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다시 물러남
하지만 자신들의 권세와 이익만을 추구하는 전문가들과 법치주의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이익추구의 절대적 수단인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 새로운 희망으로 등장한 하늘나라를 훼방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임을 폭로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곳을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다시 한 번 물러나십니다.(withdrew) 이번에는 유대인들의 지역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가십니다. 이 물러남은 그분의 사역에 있어서 또 다른 핵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하늘나라 운동에 필요한 믿음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는 어떤 믿음이 필요할까요?
이방인인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과 제자들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큰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22) 하지만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비를 구하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로써 그녀는 예수님의 주님 되심은 유대인들에게 국한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주님인 이상, 이방인들의 주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이유는 가나안 여자가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연대의 정과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이미 보았던 제자들은 바로 그 연대의 정에 근거해서 예수님에게 간청합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23) 제자들은 연대의 정이 넘치는 예수님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여자의 간절한 호소에 얼마든지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여자는 자신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예수님에겐 그리스도로서 드러내려는 연대의 정에 앞서 해결해야할 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따라옴
이방 땅 두로와 시돈까지 와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적은 이 여인과의 만남 밖에 없습니다. 앞선 물러남이 기도하기 위해서였듯이 이곳에 온 어떤 목적이 있었겠지만, 마태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가 마치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마태는 이방지역에서 일어난 이 유일한 사건을 통해 밝히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가나안 여인의 외침에 정확히 상응하는 대답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왕국 이스라엘을 위해 일할 뿐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대답은 가나안 여자의 외침이 아니라, 제자들의 간청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곧이어 이 대답은 가나안 여인으로 말미암아 부정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규정한 하나님의 ‘파송 명령’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과 법치주의자들이 전통, 즉 자신들의 전문지식에 매여서는 안 되듯이, 제자들은 ‘오직 이스라엘 집’이라는 제한된 명령에 구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파송 명령’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이방 땅에서, 이방인을 통해서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두로와 시돈은 물러난 제자들에게 사역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장소입니다.
뒤따라오던 그녀가 이제 예수님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그녀는 곧바로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올바로 보지 못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25) 가나안 여자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다윗의 아들’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주님’이 됩니다. 이 관계의 변화가 이어지는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제야 비로소 여자에게 말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자에게 비굴함을 느끼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 매달리는 여자에게서 본이 되는 믿음을 찾고자 합니다.
앞에 섬
하지만 이 말씀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했던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지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방 여인인 네가 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차렸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27) 자녀들의 아버지는 동시에 개들의 주인이 아니던가! 여자는 자신을 개로 비하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방인인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했던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24) 라는 대답은 부정됩니다. 이방 여자가 드러낸 믿음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스스로 넘어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누구도 메시야가 이스라엘 집 외에 구원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그저 심판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이 개념을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여자의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유대인들과 제자들의 믿음은 적은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28)
대단한 믿음이란 죽음의 위협과 한없는 모욕을 견뎌내면서, 불굴의 의지와 능력으로 큰일을 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믿음은 바로 그 믿음의 대상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며, 그 존재와 관련된 자기 실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타인의 주님에서 자신의 주님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과거의 여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뒤를 따라오며(after us)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이제 여자는 예수님 앞에(before him)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주님!’ 여자는 자신의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뒤에 있던 여자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앞에 있는 여자와는 대화를 나눕니다.
나가는 말
뒤에 있던 여자는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자에게 자비를 구걸했지만, 앞으로 나온 여자는 자신의 주님에게 믿음을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가나안 여자가 뒤따라오면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말에 반응했습니다. 제자들은 연대의 정을 드러내면서 ‘여자를 떠나보내라(send away)’고 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뒤에서 계속 소리치고 있는 여자가 성가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에 반응하는 대신,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른 여자에게 반응하십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요청에 반응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진정한 믿음이란 무인지 보아야 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6)는 예수의 말씀을 정확히 깨달은 것은 제자들이 아닌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인 외에는 받을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신념이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었으며, 예수를 마주하지 못한 채 뒤따라온 가나안 여자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과 마주하는 순간, 예수님이 진정 자신의 ‘주님’임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여자가 보여준 믿음이며 크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과 우리가 깨달아야 할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