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비너스는 박달재한테 약간 실망감은 들었다. 당연히 큰 기대는 안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비너스 원장이 직접 잡아 주겠다는데도 용기를 못 내주는 게 못내 아쉬웠다. 이번 무도회를 대비해서 그녀가 나름대로 그에게 공을 들여서 특별 레슨까지 했기에 더 그랬다.
사실 그는 백장미 댄스 학원에서 백장미 원장 즉 닉네임 비너스 원장한테서 왈츠를 개인 레슨 받고 있었다. 그런데도 실전 경험에서는 용기를 못내는 그에게 실망스러운 건 솔직한 그녀의 심정이었다.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시도조차 못 하는 게 지도강사인 비너스로서는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연미복 복장에 어울리지 않게 박달재는 기가 너무 죽어 있었다. 다른 테이블의 엘리트클럽 회원들이 볼 때는 꼭 프로 선수처럼 보였다. 연미복을 입은 자태며 곧게 쭉 뻗은 자세가 모르는 사람한테 댄스 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비너스 원장도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자기가 데리고 온 제자들이 모두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풀이 죽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죄스럽게 여겨져서였다. 참석 티켓 값도 만만치 않게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너스 원장은 여러 번 신사들에게 춤을 신청 받았으나 가볍게 거절했다. 조금 전에 턱시도에 빨간색 나비 타이를 매고 키가 늘씬하게 큰 조커 삐에로 가면을 쓴 신사의 신청을 받고 플로어에 나가기는 했었다. 그러나 춤이 너무 맞지 않아서 곧바로 되돌아 온 뒤로는 더 이상 출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늑대 가면의 신사가 비너스에게 춤을 신청했다. 그녀는 또 거절하고 플로어에서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만 했다.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들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춤을 추는 모습과 자태만 보고서도 그들의 춤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다.
비너스는 와인 잔을 들고서 홀짝이면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중에도 계속해서 춤 신청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눈부시게 흰 고급 댄스 드레스에는 반짝이는 보석 장식붙이가 박혀 있어서 더욱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비너스 얼굴 모양의 가면에다 머리에는 예쁘고 깜직한 반달 모양의 티아라 공주 왕관을 앞머리 쪽으로 꽂았다. 그 아름다운 자태가 무도회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신사들의 댄스 신청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지만 비너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개를 까닥하며 목례로 거절하기 바빴다. 이번 무도회는 가면을 써야 참석할 수 있어서 누구도 직접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댄스 마니아들은 춤추는 모습을 보고서 호감이 가는 상대를 선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춤을 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되는 신사들의 춤 신청을 무시하고 꿈쩍도 않았다. 가면무도회가 아닐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인사치레라도 해야 했다. 이번처럼 줄기차게 거절만 할 수 없었다.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거절해도 상대방에게 덜 미안했고 표정을 감출 수 있어서 좋았다.
비너스는 죽은 파트너 생각이 간절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애인이었고 파트너였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한편으론 자기를 속이고 다른 여성과 차를 타고 가다가 당한 사고여서 밉고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얼마나 행복할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작년 이 무도회에서는 죽은 파트너와 화려한 시범을 보였었다. 그녀의 가면 속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연거푸 와인을 홀짝이며 춤추는 광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악단이 잠시 휴식 시간인 모양이었다. 생음악 연주 대신에 음향기기로 녹음된 음악이 흘러 나왔다. 룸바 곡으로 수잔 잭슨의 [에버그린]이 나오자 플로어의 사람들은 몸을 비틀면서 룸바에 빠져 들기도 했다. 라틴 댄스를 출 수 있는 몇 곡이 끝났다.
계속해서 왈츠와 탱고 슬로우 폭스트롯 같은 모던 댄스를 할 수 있는 곡들이 연속적으로 흘러 나왔다. 폭스트롯 곡으로 B.J토마스의 [레인드롭스](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 : 내일을 향해 쏴라 영화 주제곡)가 나올 때 그녀는 무릎에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콧노래로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백장미 학원에서도 왈츠 수업 시간에 가끔씩 틀어주는 곡들이 무도회장을 가득 울려 퍼졌다. 심수봉의 [겨울나그네]가 애절하게 흘렀다. 왈츠 곡들은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심금을 파고들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 곁에 앉아 있던 해골 가면의 박달재가 언제 일어났는지 그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그가 그렇게 강력한 힘으로 그녀를 잡아 당겼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몇 번이나 그에게 댄스를 먼저 신청했지만 완강히 거부 했었다. 박달재 그 이외에 다른 사람은 그녀 근처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박달재가 정중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댄스를 신청했다. "비너스님 저랑 왈츠 한 곡 추실까요?" 그는 깍듯이 허리를 굽히며 정중하게 말했다. 더군다나 평소에는 호칭하지 않던 비너스란 그녀의 닉네임을 사용했다. "...?!"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행동이 의아했고 또한 당황스러웠다. "플리즈...!" 그녀가 의아해 하며 선뜻 응하지 않자 그는 다시 한 번 더 허리를 살짝 굽히며 오른쪽 팔을 90도로 꺾어서 내밀었다. 해골 가면을 쓰고 있어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면 속의 입가에는 미소까지 번지는 여유를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같은 테이블의 숙녀들은 물론 회원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부추겼다. "원장님 나가세요! 와, 박달재님 화이팅!" 회원들의 응원에 못 이기는 척 비너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못 이기는 척 일어선 게 아니라 이미 거부할 수 없는 그의 강력한 힘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내민 박달재의 오른팔에 자신의 왼팔로 팔짱을 꼈다. "박달재 화이팅!" 다시 한 번 테이블의 회원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조금 전 박달재는 팬더곰 인형 가면을 쓴 팬지의 권유에 못 이겨 그녀의 언니인 데이지와 플로어에 나가기는 했었다. 하지만 안방인 자기 학원에서 조차도 시범 때 발도 못 뗐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런 낯설고 처음 겪어 보는 분위기에서 댄스를 하기란 불가능 했다. 춤추는 시늉도 못한 채 자리에 돌아온 그는 완전히 맥이 풀려서 시무룩해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졸음이 쏟아졌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졸기에는 좋았다. 그가 비몽사몽으로 졸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잡아 당겨서 일으켰다. 잡아 당겨서 일으킨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긴 했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일어난 느낌이었다.
그 이후엔 모든 동작이나 행동이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어어 왜 이래?' 싶었지만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도 행동할 수도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의한 무선으로 원격 조종을 당하는 느낌이랄까
첫댓글
왜 가면을 쓸까??
[가면무도회]니까요...~^^
@청노루 그니까요
왜 ?
호기심 자극ㆍ자기 은폐 등이겠지요
파티장에서 발도 못떼고 자리로 돌아온 박달재가 어떤 힘에 이끌리는 모습에서 과연 어떤일이??
댄스를 어떻게 할지 궁금하네요. ~
몇 년씩 왈츠 공부를 해도 현실에서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죠.
특히 남성들은 더...ㅎㅎ
흥미진진합니다.
압권!
이런 대목에서 청노루님다운 장인 솜씨가 빛을 발합니다.
박달재가 그녀를 상기시키며 춤을 신청하는 모습에 전율을 금치 못합니다 .
댄스파티에서만 즐길 수 있는 상황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