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북 스님의 실크로드 답사기 (2)
이번 여행의 핵심은 중국 실크로드의 불교유적을 순례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수(天水)의 맥적산(麥積山) 석굴(石窟)7), 난주(蘭州)의 병령사(炳靈寺) 석굴,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투루판(吐魯蕃)의 베제클리크(Bezekliq) 석굴 등을 통해 믿음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또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일구어낼 수 있는지, 인도 불교 유적에 이어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석굴들은 거대한 암석층에 굴을 파고 사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도의 데칸 고원에 위치한 아잔타 석굴(Ajanta Caves)11)과 엘로라 석굴(Ellora Caves)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천수(天水)의 맥적산(麥積山) 석굴(石窟) 앞에 선 순례자들.
병령사 석굴(石窟)이 있는 바위산 절벽
천수(天水)의 맥적산(麥積山) 석굴(石窟)
난주(蘭州)의 병령사(炳靈寺) 석굴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돈황 막고굴에서 도산 스님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돈황(敦煌) 시내에 세워져 있는 조각품
투루판(吐魯蕃)의 베제클리크(Bezekliq) 석굴
투루판(吐魯蕃)의 베제클리크(Bezekliq) 석굴
투루판(吐魯蕃)의 베제클리크(Bezekliq) 석굴 앞에 선 승가대학원 원장 지안 큰스님
하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인도의 석굴사원은 차이티야(Chaitya)와 비하라(Vihara) 두 가지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차이티야는 스투파(Stupaㆍ佛塔) 또는 불상을 모신 예배공간이며 비하라는 스님들의 수행 공간이면서 불상을 모신 종합사원입니다. 그러므로 차이티야는 깊숙한 터널 형식이며 비하라는 중앙의 넓은 강당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은 방이 주위에 배치된 구조를 갖습니다.
그런데 비해 이번에 보았던 중국 실크로드의 석굴사원은 인도의 그것에 비해 깊지도 크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암석(巖石)의 재질(材質)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석굴이 밀집되어 있는 인도의 데칸 지역은 용암이 분출하여 굳어진, 비교적 단단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실크로드의 석굴은 지역에 따라 퇴적암의 일종인 거친 사암(砂巖)이나 역암(礫巖)으로 이루어져 있어 상당히 무르고 거칩니다. 그러한 영향으로 크고 깊은 굴을 파지 못하고 작은 감실(龕室)형태의 석굴이 발달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대불(大佛)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인도의 석굴사원에는 중국 실크로드와 같은 대불이 없습니다. 인도의 석굴은 B.C. 2세기 말엽 내지 B.C. 1세기 초엽부터 A.D. 9세기까지 조성되었는데 초기에는 불상이 조성되지 않다가 대승불교가 유입된 이후에 비로소 불상이 조성됩니다. 간다라지방에서 일어난 대승불교가 남쪽으로는 데칸고원에 이르고 북쪽으로 중앙아시아에 전해진 뒤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중국으로 향하게 되는데 왜 남쪽에는 대불이 조성되지 않았는지 그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물론 인도에도 큰 불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봄베이(뭄바이) 근처의 칸헤리 석굴 제3굴의 내부에 부조된 불입상이 약 7미터로서 현존하는 최대의 불상입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인도에 대불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10미터를 넘는 대불은 매우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힌두교의 신상(神像)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뭄바이 ‘인도의 관문(Gateway of India)’에서 11Km 떨어진 엘레판타 섬(Elephanta Island)에 있는 힌두 신상들도 그 크기가 10m를 넘지 않습니다.
뭄바이 엘레판타 섬 동굴사원의 조각
거대한 대불은 인도 주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에서 처음 출현하여 중국에서 많이 만들어졌는데 그 대부분은 미륵불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대불은 5세기 초에 법현 스님이 타림 분지에서 파미르 카라코람 산맥 서쪽을 넘어 인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다렐(陀歷國)에서 본 나무로 새긴 미륵대불일 것입니다. 이 지역은 간다라에서 카라코람 산맥 서쪽을 넘어 타클라마칸의 오아시스로 나오는 중요한 고대 교통로로서, 불교가 발생한 갠지스 중류 지역에서 보면 다렐은 변경 지역으로, 인도와 중앙아시아, 중국의 이방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루트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대불이 조성된 지역은 모두 인도와 이방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지점입니다.
왜 대불을 조성하였는가? 일본의 미야지 아키라(宮治 昭)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변경의 불교도들이 불교의 중심인 중인도를 의식해 그것에 대항하는 새로운 불교 세계의 상징으로서 미륵의 거대한 상을 만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하고 그 증거로 이 대불로부터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졌다고 하는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미야지 교수는 또 대불 조성의 배경에 대해서 바미안 대불을 예로 들면서 “이곳을 통과하는 여행객과 상인들이 남긴 돈과 동서 교류의 지배권에 의한 부의 축적이 있었고, 강력한 왕권의 존재가 상상된다. 또한 그 왕권은 단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왕 자신이 불교세계관에 몰두된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왕권과 불교사상 자체의 관계가 문제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중국불교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의 동양불교사 권위자인 카마타 시게오(鎌田茂雄) 교수는 중국불교가 이룩한 최대의 역사적인 유산을 ‘국가불교, 곧 국가권력에 봉사하는 불교교단이나 불교교리를 성립시킨 것’으로 보았습니다. “불교가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여 이용가치가 있으면 존속을 허용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겁니다. 불교를 인민지배의 도구로 이용한, 이러한 전통은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미야지 교수가 말한 ‘왕권과 불교사상의 관계’라는 것은 카마타 교수가 말한 ‘국가불교’와 동일한 것으로 전륜성왕사상(轉輪聖王思想)과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을 말합니다. 전륜성왕사상이라는 것은 미륵불이 올 때 전륜성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인데 ≪전륜성왕수행경(轉輪聖王修行經)≫과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니 이름이 미륵(彌勒)이라 하고, … 그때 왕이 있어 이름이 양가(儴伽)라 할 것이다. 머리에 물을 붓는 찰제리 종족인 전륜성왕으로 사천하(四天下)를 맡아 바른 법으로 다스리어 항복하지 않는 악마가 없고 칠보를 구족할 것이다. … 능히 외적을 물리치고 사방은 공경하고 순종하여 무기를 쓰지 않아도 자연히 태평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미륵대불을 조성하게 됩니다. 미륵불을 조성함으로써 당시 지배자 자신이 전륜성왕의 위상을 갖게 되고 천하를 평정하여 태평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에 대해서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인도에서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아우르는 정법(正法ㆍdharma)이라는 관념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체의 인간생활의 기준을 이루는 것이어서 크게는 국가의 정치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교단은 정법의 전승자(傳承者)로서, 국가는 정법의 활용자로서,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왕법(王法)과 공존하면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중국불교에서는 왕법과 불법이 전래초기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고, 오랜 기간 동안 대립항쟁과정을 거쳐 마침내 불법이 왕법 아래에 굴복하게 됩니다. 이때가 남북조시대였는데, 북조에서는 왕법과 불법의 대립을 자각하지 못하고 불교도는 그대로 지배자와 결합하여 상호 이용하는 관계를 형성했고 각종 불사가 그대로 황제와 국가의 융성과 안정에 직결되었습니다. 이처럼 종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불타(부처)와 지배권력자인 황제를 동일시하는 경향은 승조(僧肇ㆍ374~414) 스님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군주를 부처에 비유하였고, 중국불교 최초의 승관(僧官)인 법과(法果) 스님은 북위(北魏)의 도무제(道武帝ㆍ386~409 재위)를 여래라고 칭하고 승려들에게 예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북위 문성제(文成帝ㆍ452~465 재위)는 오급대사(五級大寺)에 태조부터 자신까지 다섯 황제의 모습으로 5구의 적금(赤金) 석가여래불상을 조성하였고, 사문통(沙門統ㆍ종교장관에 해당) 담요(曇曜) 스님은 운강(雲岡) 석굴을 조성하면서 태조부터 당시 황제 문성제까지 모습으로 조각함으로써 황제가 곧 여래라는 북조불교의 왕즉불사상을 그대로 나타내주었습니다.
이것은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석가여래가 삼매(三昧)에 들면 법신불(法身佛)인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일체(一體)가 되면서 광명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불상을 조성할 때 석가불과 노사나불은 동일한 것이지요. 막고굴 대불 가운데 한 구(軀)가 측천무후의 얼굴을 한 석가모니불상이고 시대는 다소 떨어지지만 일본 동대사(東大寺) 대불이 노사나불인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석가여래와 노사나불과 광명은 셋이면서 하나로서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에 있게 되는데, 여기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타나는 법신(法身)의 광명이 곧 신통변화의 주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왕이 곧 불타의 화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전륜성왕사상에서는 거대한 미륵불을 조성함으로써 군주 자신이 바로 전륜성왕이라는 위상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데 비해 왕즉불사상에서는 석가대불이나 노사나대불을 조성하고 군주 자신이 위대한 불타의 화신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더 직접적으로 부처님의 권능을 배경삼아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실크로드의 대불은 전륜성왕사상과 왕즉불사상을 배경으로 조성된 독특한 문화입니다.
인도 석굴 사원과 중국 석굴 사원의 또 다른 차이점은 불상의 재질입니다. 인도 데칸 지역 석굴의 불상은 암석을 파고 들어가 그 암석 자체에 불상을 조성한 것이므로 현무암이지만 실크로드 석굴의 불상은 흙으로 이겨 만든 소조상(塑造像)입니다. 우리가 보았던 이 지역은 역암층으로 석질이 매우 거칠어서 조각의 재료로는 부적당하기 때문에 흙을 이용한 소조상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소조상(塑造像)에 대해 최완수 선생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꽃피기 시작하여 사막을 따라 전파되어 왔다고 하면서 “굴실을 파낸 다음 소조상을 만들어 안치하고 그 거친 벽면에는 진흙으로 맥질한 위에 벽화를 그려 장식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소조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나 갈대 묶음으로 형태를 만든 뒤 흙과 물을 섞어 돌로 갈아서 만든 점토를 부착하는 과정을 거쳤을 겁니다. 저는 남인도를 여행하다가 함피(Hampi) 크리슈나 템플에서 고뿌람 보수공사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공사장 한켠에서는 아낙네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모래를 갈아 진흙으로 만들고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진흙으로 고뿌람에서는 신상(神像)을 조성하고 있었습니다. 남인도식 힌두문화권에만 있는 독특한 건축 형태인 고뿌람은 힌두 사원의 문으로, 옛날 인도의 천민들은 힌두사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밖에서 힌두신전을 향해 예배하도록 했답니다. 그러므로 이 고뿌람에는 힌두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이 조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이렇게 조성된 소조상입니다.
소조상을 만들기 위해 흙을 갈아 진흙으로 만들고 있는 여성들
인도 트리치에 있는 스리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의 고뿌람
인도 깐치뿌람 까막쉬 암만 사원 고뿌람의 조각
실크로드 지역의 대불은 부조(浮彫)이기 때문에 동굴내에 안치된 환조(丸彫) 소조불상과는 다릅니다. 암석에 불상의 골격을 조각한 뒤 그 위에 진흙을 입혀서 완성한 것이지요.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석불의 표면에 뭔가를 바르고 마무리한 이런 형식은 우리나라에서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석불은 단단한 화강암이 주된 소재이므로 조각된 표면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습니다. 인도 사르나트 박물관의 초전법륜상(初轉法輪像)과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의 고행상(苦行像)과 같은 불상은 백색 사암이나 청흑색 편암으로 이루어져 돌이 무르고 부드러운 것과는 대조적이지요. 이런 인도 불상들은 표면을 매끄럽게 마무리하여 사람의 피부처럼 만들 수 있으므로 별도로 표면처리를 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나라 석불은 조개껍질을 갈아 만든 호분이나 석회 처리를 해야만 개금(蓋金)을 할 수 있습니다.
인도 사르나트 박물관의 초전법륜상(初轉法輪像)
파키스탄 라호르 박물관의 고행상(苦行像)
대불은 이처럼 흙을 이겨 소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적인 마멸이 심하고 잘 부서져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았던 불상 가운데 맥적산 석굴의 대불과 병령사 대불을 예로 들 수 있는데, 맥적산 대불의 삼존불 가운데 오른쪽 문수보살상은 최근에 무너져 내렸고, 또 다른 의좌상(倚坐像)을 하고 있는 삼존불의 본존불은 다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암석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또한 병령사 대불은 손과 코 등의 소조부분이 마멸되어 있는데, 이 대불의 코 부위는 이겨 붙인 진흙을 고정시키기 위해 뚫었던 구멍과 그 구멍에 남아 있는 나무가 드러나 있어 외형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맥적산 대불 삼존불. 본존불의 다리 부분이 떨어져 나가 암석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맥적산 대불의 삼존불. 오른쪽 문수보살상은 최근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병령사 대불은 손과 코 등의 소조부분이 마멸되어 있는데, 이 대불의 코 부위는 이겨 붙인 진흙을 고정시키기 위해 뚫었던 구멍과 그 구멍에 남아 있는 나무가 드러나 있어 외형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병령사 대불 앞에서 예불 중인 순례자들
이번 여행을 통해 가슴 아픈 일도 적잖게 보았는데 그것은 모두 문화유산 파괴와 관련된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문화재를 헐값에 사가거나 약탈ㆍ절취해 가는 것, 그리고 파괴는 다릅니다. 하지만 원상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파괴의 범주에 넣어도 큰 잘못은 아닐 것입니다.
실크로드 지역 석굴들에 대한 1차적인 파괴는 1900년대 초 강대국의 약탈자에 의해 저질러졌습니다. 당시 돈황 막고굴에는 왕원록(王圓籙)이라는 도사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행단 단장이신 승가대학원장 지안(志安) 큰스님께서는 “왕원록이 도교 수행자이면서도 불교에 심취한 인물이었는데 특히 현장 스님을 추앙(推仰)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왕도사 앞에 러시아의 지질학자 오브루체프,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 일본의 탐험가 오타니, 러시아의 고고학자 올덴부르그, 미국의 고고학자 워너 등이 차례로 나타났고, 이들은 돈과 선물로 왕원록을 매수해 귀중한 보물들을 헐값에 사갔습니다.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의 경우 앞의 인물들과 함께 독일의 불교미술 연구가인 그륀베델과 탐험가 르콕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편취해 간 유물은 베를린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일부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약탈된 중앙아시아 유물 가운데 일부는 한국으로도 흘러들어왔습니다. 일본인 오타니가 타림분지의 미란, 호탄, 쿠차, 투루판, 돈황 등지에서 가져온 유물 가운데 벽화 60점과 공예품 1700여점이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곳 유물에 대한 2차 파괴는 이슬람교도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슬람교의 율법에는 알라만이 유일신으로서 다른 어떠한 형상도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다른 종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오로지 알라의 유일성과 창조성, 전지전능함과 자비함을 믿고 알라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에 따라 이 지역에 들어온 이슬람교도들은 석굴사원을 찾아다니며 불상을 파괴하고 불화를 심하게 훼손하였습니다. 특히 불상의 눈을 흉안(凶眼)이라 하여 불상의 눈을 집중적으로 파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3차 파괴는 홍위병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인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紅衛兵)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여 문화(文化)ㆍ사상(思想)ㆍ풍속(風俗)ㆍ습관(習慣) 등 네 가지 구악을 타파하고[破四舊] 새로운 네 가지를 수립한다[立四新]는 기치 아래 일체의 문화유산과 현대문화사조를 부정하였는데 낡은 문화를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오래된 서적ㆍ족보 · 귀중한 예술품 등을 수색하여 몰수하거나 파괴하였고 전문가와 학자ㆍ존경할 만한 스승ㆍ예술가 등을 부르주아로 몰아붙여 내쫓았습니다. 또한 유교ㆍ기독교ㆍ이슬람교 등의 종교를 공격의 목표로 삼았을 때 불교 또한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승려들이 대규모로 강제환속되는 등 정부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불교유적이 세계에 과시할 만한 중국의 문화라는 점, 아시아 국가를 결속하는 정신적인 수단이라는 점, 국가를 장엄해서 인민의 이익을 도모한다[莊嚴國土 利樂有情]는 불교의 이상이 중국의 이상과 일치한다는 점으로 인해 이후에 체계적으로 복원되었다는 사실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투루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불화 가운데 일부는 위에 덧바른 진흙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는데, 이것을 두고 조선족 가이드는 “홍위병이 악의적인 훼손으로부터 벽화를 보호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라는 설과 일일이 훼손하는 것이 힘들어 진흙을 바름으로써 손쉽게 망가뜨린 것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든 관계없이 현재의 기술로는 복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렇게 문화재를 훼손ㆍ파괴하거나 절취ㆍ약탈하는 것을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뜰에 줄지어 앉아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이 바로 대표적인 것이지요. 분황사에서 발굴된 이 불상들은 어느 땐가 우물에 넣어져 있던 것을 발굴해 낸 것인데, 조선시대 유생들의 소행인지 아니면 한국전쟁 당시에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근래에 벌어진 외국의 일로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 집단인 탈레반이 바미안 석굴의 대불(大佛)을 탱크와 로켓포를 동원해 파괴한 일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훼손된 문화재는 영원히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순례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행은 너무나 짧고 담담하게 끝났습니다. 우려했던 살인적인 더위도, 강한 돌풍도 우리 앞에는 닥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막의 언저리에서 비를 맞는 행운(?)까지 누렸습니다. 혜초 스님과 현장 스님을 위시한 구법승ㆍ전법승들이 목숨을 걸고 다녔던 길을 저는 에어컨이 켜진 비행기와 자동차ㆍ기차 속에서 느긋하게 바라보며 덤덤하게 지나쳤습니다. 우리 후손들은 더 짧고 편리하게 이 길을 지나치겠지요.
이번 여행에서 제 개인적으로는 인도와 한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감탄스러운’ 실크로드의 불교문화와 함께 인간승리의 감동적인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카레즈를 보았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비록 낙타몰이꾼과 함께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지는 못했지만 모래사막도 밟아보았고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찬란한 석양 아래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문화재 약탈자들에 의해 훼손된 유물을 보면서 분노하기도 했었고, 이젠 흔적만 겨우 남은 옛 성터를 보며 무상(無常)에 몸을 떨기도 했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의 독창성이 가까이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멀리는 인도와 서구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불교미술의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불상과 불화 등의 불교미술을 조망해 보는 시각도 길러야 함을 느꼈습니다. 아울러 유형의 문화유산은 무형의 철학을 표현한 것이므로 불교사상사(佛敎思想史) 연구도 겸비해야만 제대로 된 안목을 갖출 수 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역사적인 사실의 이해와 함께 자신의 부족한 점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점이 저로서는 가장 큰 성과입니다.
투루판 포도 농장을 방문했을 때 마중 나온 꼬맹이 아가씨
첫댓글 사라나트 박물관의 초전법륜상의 저 미소는
가히 국보급, 우주급 보물입니다.
연꽃이 피어나듯 열반의 언덕에서 법향을 날리시네요.
문화유산 관련된 이야기라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천수와 난주는 못가봐서 가보고 싶습니다
문화유산 파괴의 지난한 역사는 가슴 아픕니다
베제클리크 석굴의 유산은 러시아에 많다고도 들었습니다
소지로의 '대황하'연주가 또오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oUgLzYtlHw
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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