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 방학중에는 계간지 인터뷰 하기 위해 알트루사 가는 날 한번 휴가내었다.
방학이 약 4주 정도인데 매주마다 일이 많았다. 아이들과 요리교실, 연극 한편 보았고, 가정방문으로 네군데를 다녀왔다.
그리고 뭐 했더라... 바빴던거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들과 움직일때 한명 한명 만나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한다. 요리교실을 하거나 연극 한편 보기 위해, 가정방문 가기 위해 내가 미리 계획하고 행정으로 준비한 일도 있지만, 아이들이 나의 선택을 믿고(?) 나온다는게 얼마나 큰 결정인지 느낀다. 나는 중학교때 선생님들 따라서 다녔던 곳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명동성당, 그리고 대학로... 그때는 그게 나의 선택인줄 알았다. 어느 선생님이 여기 가자고 하며 준비물로 오백원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오백원은 아마도 좌석버스 비용이었던 거 같다. 그게 나름 큰 돈이어서 약간 망설였었다. 그렇게 따라갔는데 버스에서 내리면서 멀미 정도가 아니라 토를 했다. 선생님이 리어커의 과일가게 아저씨에게 비닐봉지를 얻어 주었다.
서울대학교에는 왜 갔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친구가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그런데 교내 어느 비탈진 길을 내려오다가 굴렀다. 무릎이 크게 다쳐서 피가 났고 청바지가 찢어질 정도였다. 나를 보고 난감해하던 어른들의 표정이 기억난다. 그일은 나에게도 아주 큰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언덕을 내려가던 어느 순간 내 발을 제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을때 몸이 붕 떴고 땅에 떨어졌다. 나는 지금도 잘 넘어지니 그때도 그랬던 거였다. 그날 나의 생존을 축하하기 위해 신림동의 어느 허름한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둘러앉아 먹었었다.
그렇게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서 일어날 여러 위험한 일들이 있는데도 자꾸 잊어버리고 마음이 부푼다. 다녀오고 나면 내 힘으로 간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1학기에 뜨개 교실을 했는데 할머니, 어머니들, 학생들이 모였다. 강사 선생님이 일본인인데 한국 사람과 결혼해 삼십년 가까이 사는 분이라 얘기하는 재미가 있었다. 선생님은 여름방학 동안 친정에 가는데 어머니가 우울증에 걸렸다고 자기 얘기를 선선히 하였다. 우리는 감사 카드로 선생님을 배웅했다. 그간 뜨개 한 것은 모아서 필요한 곳에 기부할 예정이다. 모두 기부의 뜻에 적극 동참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이것이야말로 혼자 한 것이 아니다.
첫번째 집에서는 한 아이와는 옷 사러 갔다. 아이는 이번에 나의 주선으로 약간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학업으로 용도가 정해진 돈이라 옷을 살 수 없었다. 아이 할머니 말이 재난지원금 카드로는 아이가 원하는 상표의 옷을 살 수 없다고 했다. 시장이나 약국이나 가게에서 쓸 수 있지만 아이가 원하는 상표의 옷은 백화점에 가야했다. 중저가 상품인데도 백화점에만 입점해서 다른 곳에서 살 수 없었다. 그 말을 들은 부장이 아이 옷 값을 후원해주었다. 그래서 아이와 같이 쇼핑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재미없는 사람인지 내내 생각했다. 후원자의 뜻이 잘 전달되어야 하는데 아이가 그 마음을 몰라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느라 마음이 무거웠으니 그런 나와 동행하느라 아이가 고생이 많았다. 나는 어떤 그림을 예상하고 그 그림 대로 되지 않으면 당황하느라 비탈길에서 다리에 힘을 풀었던 것처럼 그렇게 포기하는 기분이 든다. 그날도 망쳤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만으로 힘이 들었다.
두번째 집은 며칠전에 물난리가 난 가정이었다.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아이 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베란다를 통해 물이 들어왔을때 다행히 부모님 모두 집에 있었다고 했다. 물이 빠진 후 청소하는 것도 힘든데 도배, 장판을 집 주인이 안해주려 한다고 아버지께서 곤란해했다. 당장은 친척집에서 지내지만 편치 않은 모양인지 아이는 배 앓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줄 간식과 학용품을 준비했고 가정에 필요한 생필품을 약간 사드렸다. 어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얼마나 마음이 복잡할텐데 대꾸해준 것만으로 고마와서 얼른 돌아왔다.
세번째 집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5학년때쯤 암 치료를 받다가 후유증으로 눈이 멀었다. 그래서 아이는 "다른 엄마들은 건강한데 엄마는 왜 아프냐"고 엄마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4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엄마의 눈이 되어서 병원과 관공서에 동행하고 엄마를 돕는다. 이제 아이의 꿈은 운전면허를 따서 엄마를 태우고 여행가는 거라고 했다. 어릴때 엄마와 여행을 못간다고 서러워했는데 마음을 바꿔서 자기가 엄마를 데리고 여행가겠다고 한다. 그 얘기를 엄마가 전해주었다.
사실 아이는 만나기 무척 힘들었다. 무엇을 약속했다가도 얼버무리고 기억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다. 나는 아이가 성의 없거나 거짓말을 하나? 싶었는데 불쑥 찾아와서 갑자기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고의가 아니고 나를 곯려먹으려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방학에 아이와 한끼 식사를 차릴 장을 함께 보자고 했었다. 아이는 전화통화도 어려웠고 기다려도 연락이 안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집 앞으로 무작정 갔는데 만날 수 있었다. 아이는 무척이나 놀라며 나오겠다고 했다.
사실 내 생각에 약속을 안한거라 만났을때 아이가 불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머뭇머뭇 하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그 순간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어깨가 오그라져서 수줍어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이 나올뻔 했다. 나는 그 아이와도 어색하게 가게에 가서 같이 장을 보고 집에 데려다 주었다.
따뜻하고 흐뭇한 장면은 영화속에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아이들이 나를 믿고 동행해준것 그것이 현실이고 그것이 전부이다. 내가 중학교때 그 선생님들이 우리를 데리고 무슨 의도로 명동성당을 가자 하고, 서울대학교에서 더벅머리 친구를 만나게 했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친구는 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해준 것 같은데 그 얘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어디를 갔던 것. 버스값만 있으면 어울릴 수 있었던 것. 그것이 지금까지 내 마음에 남아있다.
첫번째 집 아이 할머니는 내게 줄 밤식빵을 인근 가게에 맡겨 놓고 투석 받으러 가셨다. 안가져가면 빵이 뻣뻣해진다고 꼭 가져가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다. 가지러 가니 빵봉지에는 복숭아 한개도 들어있었다. 내가 그 댁에 갔을때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걸 눈여겨 보시고 보내주셨다. 아이도 후원자에게 인사하는 문자를 부탁했더니 잊지않고 보내왔다.
함께 장을 본 아이 어머니는 고맙다는 전화를 했다.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의 암은 아직 진행중이라 병원 다녀오면 며칠 동안 매우 힘들다고 하였다. 나는 문선생님을 떠올리면서 고통을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기에 얼마나 힘들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이의 얘기를 들었는지 어머니께서 그 힘든 중에 전화를 한 것이다. 그저 지나가도 될 일이었는데 말이다.
침수 피해를 당한 아이 어머니는 아이가 개학날 학교에 간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개학해도 집청소와 수리로 학교 못 갈 수도 있다고 하였는데 아이가 꼭 등교할거라고 전해달라고 했단다. 담임 선생님과도 통화 했을테고 내가 보낸 학용품과 간식도 받았다고 했다.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 학교에서 기다리고 사람이 있다는 걸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집에서는 아이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었고 선풍기로 바람을 쐬어 주셨다. 그리고 돌아나올때 당신 입은 원피스랑 똑같은 거 한장 더 샀다고 갑자기 가방에 쑥 넣어주셨다. 안된다고 할때마다 가방을 틀어쥐었는데 손아귀 힘이 무척 셌다. 촌지, 금품, 향응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안된다고 했지만 더 실갱이 할 수 없어서 받았다. 그리고는 할머니께서 부탁하신 자가진단 키트를 몇개 사드렸다. 자가진단키트가 값이 비싸서 아이들 코로나 검사를 마음껏 할 수 없을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처음 이 학교에 왔을때 학교 뒤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 북한산이 무서웠다. 산 입구가 이토록 가깝게 있다는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엄연한 현실을 거부했고 보기 싫었다. 그래서 학교를 싫어했다.
그런데 산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 마음이 넓은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때가 많이 있다. 여기서 지난 2년 반동안 만난 학부모님들은 전 학교에서 10년간 만난 분들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 코로나로 또 최근에는 폭우로 인해 많이 어려울텐데 안부인사하면 반갑게 대꾸해주신다. 아이들은 내가 부모님들과의 연락이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반짝 친근하게 굴어줄때 무척이나 고맙다.
그렇게 한 학기 잘 보내고 개학 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쓰느라 글이 길어졌다.
(여름방학 요리교실 모습이에요.)
(토요 뜨개반 활동 모습입니다.)
열매나눔 복지 재단 홍보영상에 제가 출연했어요. (두군데 입니다) 찾아보세요ㅎㅎ
: https://www.youtube.com/watch?v=6rSpmBRDloQ
첫댓글 오랫만에 듣는 복지실 이야기에 마음 따듯해집니다. 학생들과 가족들과 주고 받는 공기속에서 사람 냄새, 사는 냄새가 폴폴 느껴집니다.^^
영상에 담긴 제선샘 아주 보기 좋아요.^^
물 먹느라 들락거리는 모습, 물 먹고 난 후 한시름 놓은 맑은 얼굴, 보드 게임으로 웃고 떠들고 때로 심각한 표정, 개구장이들, 말괄량이들을 다 전하지 못했어요. 언제 또 쓸게요^^
@한제선 ㅎ 늘 기다리고 있지요~^^
선생님 글은 가끔씩... 제 맘에서 눈물을 길어올리네요. 이 글속에 슬픔만 있는게 아닌데 왜 저는 슬픈감정에 먼저 반응하는지... 저를 한번 생각해봐야겠어요...출근중입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첨부해둔 요리 사진을 봅니다.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도 올려다 봅니다.눈물콧물 범벅인데 마스크가 가려주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쓰면서 든 제 마음이 선생님의 댓글로 드러났어요. 사실 정해진건 아니지만 이곳에 올해까지만 있을지도 몰라요. 제 일은 배치 기준이 있고 학교 상황과 맞아야하는데 미흡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헤어짐을 준비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글이에요. 선생님이 참 섬세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올해까지만 있을 거라 하나요? 제선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학생들과 가족들 모두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어색해 하지 않아도 되겠는데요.
선생님의 답글을 이제 봤어요. 제가 있기에 이 학교에 저소득가정 학생 수가 많이 부족해서 다른 학교에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글과 댓글 읽으며 모두 저보다 넓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분들임을 다시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