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로마서 강해
성서의 ‘죽음’ 개념 타나토스(θάνατος)와 네크로스(νεκρός)
작성자:휘오스
작성시간:11:56 조회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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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죽음’ 개념
타나토스(θάνατος)와 네크로스(νεκρός)
ἐκ τοῦ θανάτου εἰς τὴν ζωήν. 사망에서 생명으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성서의 많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죽음’ 개념에 대해 오해가 많다. 죽음은 단지 생물학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죽음은 누구나 겪게 되고 또 동시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매우 단순한 개념이다.
מֹ֥ות תָּמֽוּת(모트 타무트, θανάτῳ ἀποθανεῖσθε 타나토 아포타네이스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
‘죽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타나토스’(θάνατος)의 첫 번 등장은 구약성경 창세기 2장 17절에 대한 헬라어 역본(LXX)에 처음 등장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예언이 있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다. 에덴 이야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결과 육체가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 도리어 뱀의 말대로 아담과 하와는 결코 죽지 않았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Οὐ θανάτῳ ἀποθανεῖσθε 우 타나토 아포타네이스테
에덴의 이야기를 보면 도리어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았으니 뱀의 말이 진실한 게 아닌가?
물론이다. 육체의 눈으로 보면 뱀의 말이 진실이다. 아담은 육체가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트 혹은 다나토스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언표와 뱀의 언표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이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바대로 다나토스에 대해 뱀과 야웨 하나님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서로는 소통이 되지 않는다. 뱀의 눈, 뱀의 시각에 의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육체는 결코 죽지 않는다. 야웨 하나님의 말씀은 뱀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뱀과 야웨 하나님은 서로 동문서답하고 있다.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
동문서답은 오늘도 여전히 반복된다. 다나토스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뱀은 육체의 죽음으로 이해한다.
다나토스에 대해 성서는 이 둘의 의미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 어느 곳에서는 때로 뱀의 견해대로 육체의 죽음을 뜻하는 맥락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나토스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 정신이 ‘죽음을 맛보는 삶’을 일컬어 다나토스 곧 죽음 혹은 사망(θάνατος)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물론이고 바울 서신서 곳곳에서 다나토스는 육체의 죽음이 아니다. 선악의 지식으로 인해 찾아오는 정신의 상태를 ‘사망(θάνατος) 이라고 한다. 선악의 지식 열매를 먹으면 선악 나무 중 하나가 된다. 그 의식이 선악의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된다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2:22)에서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번역은 오역 중 오역이다. 이 오역의 역사는 참으로 길다. 70인 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3인칭 남성단수 밈메누를 일인칭 복수로 번역하고 있다. 70인 역에서는 εἷς ἐξ ἡμῶν(헤이스 에크 헤몬)으로 번역하고 이후 대부분의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מִמֶּ֔נּוּ(밈메누)는 물론 문법적으로는 1인칭 공성 복수어미(of us)로 볼 수도 있다.
כְּאַחַ֣ד מִמֶּ֔נּוּ(케아하드 밈메누) 3인칭 남성 단수 어미와 어형변화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밈메누는 7차례 등장한다. 그중 다섯 차례는 of his로 번역하고 있다. 창세기 3장 22절에서 of us의 뜻으로 번역한 것은 결정적인 오류다. 사망이라는 의미는 선악의 나무 중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민은 전치사 from의 의미요 히브리어는 전치사에도 인칭대명사 접미어가 붙어서 개념을 확장한다. 여기서 남성 3인칭 접미어는 선악 나무를 일컫는다. 따라서 선악 나무 중 하나가 되었다는 뜻.
성서는 이를 일컬어 사망이라고 칭한다.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그 정신이 선악의 나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오늘의 언어로 하면 ‘죽음을 맛보는 삶’으로 뜻을 새겨볼 수 있다. 명사 다나토스(θάνατος)는 동사 ‘드네스코’(θνῄσκω)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사망이 왕노릇한다는 바울의 표현이 등장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야기가 요한복음을 비롯한 신약 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것이 다나토스와는 또 다른 죽음의 개념인 ‘네크로스(θάνατος)’다. 네크로스란 다나토스의 죽음이 곧 네크로스다. 죽음을 맛보는 삶으로부터 죽는 것을 일컬어 ‘죽은 자’라고 한다.
네크로스의 죽음은 물론 육체의 생물학적 죽음에서 가져온 개념이기도 하다. 네크로스는 네퀴스 시체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그러므로 생물학적 육체의 죽음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즉, 육체의 생물학적 죽음을 비유로 차용한 개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육체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의미하기도 하나, 다나토스와 관련해서 사용할 때 네크로스의 의미는 매우 뚜렷하다.
특히 신약 성서에서 독자들은 네크로스의 죽음 개념이 분명하지 않음으로 수많은 성서 읽기의 오해가 발생한다. 네크로스는 다나토스와 연관하면 ‘죽음을 맛보는 삶’으로부터 ‘죽은 자’를 일컫는다. 그럴 때 네크로스는 생물학적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네크로스의 사용 맥락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선악 나무 중 하나가 된 존재, 사망이 왕노릇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존재가 베임을 받고 죽어버린 것을 의미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면 선악 나무가 베임을 받고(소위 죽고, 세례 혹은 침지) 베임 받은 나무의 밑둥에서 선악의 나무가 아닌 생명나무의 싹이 다시 태어나는 것, 이를 성서는 죽은 자로부터 생명이 부활한다고 반복해서 표현된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생물학적 육체가 죽고, 죽은 다음 내세에서 생명으로 부활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생명은 죽음에서 꽃핀다. 다나토스의 죽음이 죽어야 생명이 피어난다. 이게 성서의 한결같이 반복하는 죽음에서의 부활이다. 생명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ζωή ἐκ νεκρῶν(조에 에크 네크론)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정신은 끊임없이 절기를 따라 죽고 다시 태어난다. 존재와 시간의 의미고 죽음과 존재의 의미 관계다.
선악에서 죽고 생명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이 어느 때나 인류에게 찾아오는 희망의 소식이다. 그것은 육체의 생물학적 죽음 이후의 얘기가 아니다.